분당 신년 저녁 모임 가는 길에 남한산성둘레길을 걷기로 햇다..

 

 

늦으감치 중부고속도로를 달려 남한산성 행궁앞 로타리 주차장에 1000원을 내고 주차한뒤 인근 식당에 들러 점심을 한다..

식당 창문에 붙은 글귀에 미소를 짓는다..

추운 겨울 집안에만 잇으면 추운 바람이 사방에 사무치나, 과감히 떨치고 나서면 도처에 손바닥한 햇볕도 반겨주는 법.. 

 

 

식사후 식당 벽에 걸린 안내도에 따라 동문-북문-남문 순으로 돌기로 하고..

동문으로 가다가 연무관 건물에 들럿다..

성내 군사 훈련장이다..

 

 

연무관..

글씨 좌측에 보니 숭정기원후3임오 4월이라 써있다..

명나라 마지막 황제 숭정제 이후로 3번째 임오년이라는 뜻으로 1762년이다..

 남한산성에서 병자호란을 치고 청나라에게 삼전도에서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찧는 굴욕을 당했으나 마음으로 심복하지 않고

명나라의 연호를 쓰고 잇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 말기 임오군란때 청나라 원군을 요청하여 또다시 청나라에게 농락당하고 있엇으니..

위 현판이 만들어진 1762년에는 사도세자가 죽고, 정약용이 태어난 해다..

 

 

 

남한산성 역사관에 들렀더니 패쇄하고 상황실로 운영되고 있네..

그 부근에 해공 신익희선생 동상이 서있는데, 이곳 남한산초등학교 졸업생이란다..

독립운동가..이승만의 대항마였는데 비나리는 호남선에서 운명을 달리한 분..

그의 필적..

민주위도 동등락역(民主爲到 同等樂域)

민주주의라는 것은 함께 즐거운 영역에 도달하는 것이다..

 

 

여기 동문에서 산성을 오른다..

 

 

 

 

 

원래 산성이란 봉우리와 봉우리를 연결하는 것이라 구간마다 가파른 곳이 있다..

잠시 숨을 돌리며 전인권의 신곡 "걷고, 걷고"를 듣는다..

나의 모토 "걷고 걷고 또 걷고"에 딱 맞는 노래로 나의 테마곡이 되었다.. 

 

 

잠시 암문을 나와 옹성을 둘러보고..

 

 

 

 

동장대 옆 암문을 나서면 봉암성이 전개된다..

이 곳은 병자호란 당시에는 없던 것인데..병자호란당시 저 벌봉을 청군에게 빼앗겨 성안에 포격을 당한뒤 성을 보강한 것이란다..

 

 

 

 

북문으로 가는 길은 상당히 가파르다..

 

 

 

남한산성은 원래 백제. 신라의 성이었던 요지..

인조 때 축성하여 절안에 7절을 지어 승군이 배치되엇던 실전용 산성이다..

실제 병자호란에 인조가 농성하면서 실전에 사용되어 함락당하지 않은 곳.. 

 

 

 

 

 

북문을 지난다..

 

 

 

 

 

 

 

 

 

 

서문에 도착했다..

서문을 지나면서 송파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1636년 12월6일, 청태종은 12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왔다. 임경업이 의주 백마산성에서 저항햇으나 청군은 이를 우회하여 서울로 속전속결로 진군..

대의명분은 그렇타치고 실질적 대책도 없이 말만 떠들던 조정은 제때 강화도로 피난도 못가고 허둥지둥 남성산성으로 들어와 농성을 하였으니 준비나 제데로 되었겠는가?

청나라의 선봉은 심양을 떠난 지 10여일 만에 개성을 지나서 서울 근교에 육박했다.

12.14. 인조는 세자와 함께 강화로 가려고 남대문까지 나왔으나 이미 청군이 양철평(지금의 녹번동으로 추정)이르렀다는 보고를 듣고 허둥지둥 남한산성에 이르렀다.

어째 임진왜란이나 병자호란이나 왕이 하는 짓은 어찌 이리 똑 같으냐..

청군의 선봉은 12.18 한양에 입성하고, 12.19. 산성을 포위하였다. 성안에서는 비록 큰 전투는 없었으나, 포위속에서 혹한과 싸워야 했으며 점차 식량마저 떨어져 성안의 상태가 비참해져갔다. 마침내 청군에 의해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산성을 구원하려는 근왕병이 패배하자 인조는 1월30일 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에서 청태종에게 항복햇다.

 

 

서문 밖 아파트들이 마치 그 당시 청군의 포위군 처럼 눈에 들어 온다..

산성에서 농성한 기간이 고작 45일인데 그 사이에 식량이 떨어질 지경이었다니 무슨 나라가 이꼴이냐..

아무런 대책도 없이 대의명분이나 따지고 척화파면 뭘하나..

고생은 백성이 당하는데..

결국 인조반정은 조선 역사의 후퇴라고 본다..

 

 

비분강개하여 걸으니 햇빛도 구름에 숨는다..

 

 

 

수어장대..이 곳이 산성 방어 총사령부..

당시 수어사인 이시백은 서문을, 호위대장 구굉은 남문, 도감대장 신경진은 동문, 총융청 대장 이서와 원두표는 북문을 지켰다 한다.

 

수어장대 2층 누각의 편액..무망루..

삼전도의 치욕을 잊지말자는 의미로 영조가 지었다..

 

 

남한산성이 포위된 절체 절명의 상황..

1637년 1월 3일..왕을 구원하기 위해 4만 명의 경상도 군대가 북상했다.

지휘관은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이었다.

조선군의 주력은 임진왜란 당시보다 훨씬 개량된 조총을 보유한 보병이었다.. 

경기도 광주시 초월읍 대쌍령리 일대에서 이들은 청나라군과 마주쳤다.

당시 청나라군은 기병 300여 기였다. 4만 명의 조총수와 300여 기의 기병. 언뜻 보기에 승패는 뻔한 듯했다.

 

조선군은 2만씩 나누어 민영은 오른편 산등성이에, 허완은 왼편 낮은 곳에 진을 치고 목책으로 둘렀다.  조선군에 지급된 화약은 2냥이라고 되어 있다. 2냥이면 대략 10발의 탄환을 발사할 수 있다. 그러나 조총에 대한 훈련이 제대로 되지 못한 군사들이었다.

청군 선봉 33명이 목 방패를 들고 남산 상봉에서부터 아래로 공격해 왔다.

조총이 위력을 발휘하려면 50미터이내로 적들을 충분히 근접시킨 뒤에 사격을 해야 했다.

하지만 훈력부족의 군대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적을 보자마자 마구 쏘아댔다. 설상가상으로 장수들 역시 경험이 적어 화약 배분을 잘하지 못해 금방 화약이 동이 나고 말았다. 선봉 33명에 의해 조선군의 화약이 모두 떨어진 것이다. 화약이 떨어져 막대기 같은 조총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조선 병사들 머리 위로 나머지 청나라 기병들이 뛰어올랐다.

대혼란에 빠진 조선군들은 서로 도망치기 바빴다.

이 와중에 4만 병사 중 절반이 넘는 병사가 청나라 기병들의 칼에 맞아 죽은 게 아니라 먼저 도망치려는 아군에 깔리고 밟혀 죽었다. 병자남한일기(丙子南漢日記)에 보면 “도망가다 계곡에 사람이 쓰러져서 쌓이면서 깔려 죽었는데 시체가 구릉처럼 쌓였다”고 묘사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경상좌병사 허완도 깔려 죽었다.

오른편 산등성이에 있던 경상우병군은 화약을 나눠주는 과정에서 불똥이 떨어져 대폭발이 일어났는데 장수 2명이 죽고 진영이 크게 동요되었다. 호기를 만난 청나라 기병들이 덮쳤고 이 과정에서 경상우병사 민영이 전사했다.

결과적으로 청나라 기병 300 대 조선군 4만명의 전투에서 추풍낙엽처럼 대패했다..

역사에 숨겨진 쌍령전투의 내막이다..

 

그러니 남한산성을 누가 구원할 수있겠는가?

 

 

삼전도를 바라본다..

지금 우리의 국방은 그때와 달리 튼튼하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가?

 

 

남문에 도착햇다..

12.14. 추운 겨울 인조는 한양 수구문을 나와 송파나루를 거쳐 오금동을 지나 마천동을 거처 산성 남문으로 입성했다..

오는 도중 신하들이 번갈아 가면서 업었으나 막바지에 이르러 다 지쳤을 때 시골 총각이 나서서 인조를 업고 산성에 들어왓단다.. 소원을 묻자 왕의 옷(곤룡포)를 달라고 햇다던가..

그리하여 왕을 업어주었다는 공로로 정3품 가의대부 벼슬을 받앗다는 그의 무덤에 왕의 옷도 같이 묻혀서 지나는 사람이 말에서 내렸다는 전설..

왕이 말을 탈 줄도 모를 정도로 문약햇으니..

당시 전략적 요충지인 강화도로 신속히 피신하여 지구전을 취햇더라면 역사의 흐름을 바꾸엇을지도 모를 일이었는데..

 

 

남문이름이 지화문(至和門)..평화에 이르는 문..또는 화친에 이르는 문이라고 해석할 밖에..

그러니 공연히 주화파 최명길만 탓할 일이 아니다..

성을 지을 때 당시에 스스로 화친할 생각이 아니었던가?

아니라면 승리문이라고 짓던가..ㅎ

 

 

마지막으로 전에 서울시에서 치욕의 역사도 보전해야한다면서 청동판으로 삼전도 항복장면을 제작하여 전시했다는데..

이런 자들은 행주산성의 승리의 장면부터 청동판으로 제작하였는지 묻고 싶다..

우선 싸워 이긴 역사의 현장 부터 성의껏 보전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걷기> 로터리 주차장 - 연무관 - 동문 - 북문 - 서문 - 남문 - 로타리 주차장 약 8km

 

 

걷기를 마치고 오늘의 모임 장소에 갔다..

분당구 판교동 힐스테이트아파트 부근 랜드리스타워빌딩 1층 더 라운지 카페에 갔다..

최근 급성장하는 기업 솔브레인 오너가 출연한 사회공헌재단에서 운영하는 이 카페는 장식이 조선시대 책장 스타일이다..

 

 

시금치 피자도 특이하구..

 

 

곤드레나물 비빕밥도 모양과 맛이 일품이다..

 쥔장인 친구가 내는 샤르도네 와인을 들고 건배한다..

 

   "원더풀"

원 하는 그 이상으로 

더 잘

풀 리는 한해가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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