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평창동에서 만나잔다..
다른 사람에게 평창동에 간다고 했더니...
드라마에서 거기 사람들은 전화 받을 때 "예, 누구입니다."하지 않고, 꼭 "예, 평창동입니다"하고 대답하는 고상한 동네라고 귀뜀한다..
평창이란 이름은 이 곳에 선혜청의 평창이라는 큰 창고가 있어서 동네 이름이 되었단다..
그런데 앞으로 북악산, 뒤로는 북한산이 있어 풍광이 시원하고 전국의 물류가 모이는 곳이니 생활풍수로서도 부촌의 여건을 갖춘 곳이다..
과연 친구의 집에서 앞으로 북악산의 뒤통수를 보고, 뒤로는 북한산 형제봉이 보이네..
1.21. 청와대 습격사건 이후 평창동이 개발되기 시작했는데, 5공때 장성들에게 대량 분양했다던가..
하여간 길이 2차로라 골목이 시원하게 뚤린 부촌이다..
구름에 달가듯이..
하지만, 이 그림의 주인장의 심중엔 "술익는 마을 마다 타는 저녁놀"이 새겨져 있으렸다..
난초 그림의 시가 의미심장하다..
此是幽貞一種花 차시유정일종화
不求聞達只烟霞 불구문달지연하
采焦或恐通來徑 채초혹공통래경
更寫高山一片遮 갱사고산일편차
이 유정한 일종의 꽃이여
출세를 구하지 않고 다만 자연과 함께 할 뿐이네
나무꾼이 지나가다가 밟을까 두려워서
다시 고산을 그려 한쪽을 막아 보았네.
한포기 난초를 그려놓고 보니 행여 지나가는 나무꾼이 밟을까 걱정되어
고산(高山)을 그려넣어 한쪽을 막아 보았다는 표현이다.
추사에게 영향을 미친 청나라 유명 서예가 정섭이 그린 진품인지 몰라도 한시는 정섭의 지은 것이다..
정섭은 공직에서 청렴하고 백성을 위한 목민관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글씨 "난득호도(難得糊塗, 바보처럼 처신하기도 어렵다)"로 유명하다..(http://blog.daum.net/servan/6348267 참조)
죽장에 삿갓쓰고 괴나리 봇짐을 맨 그림 속의 사나이가 주인장을 닮았다고 기증하였다니..
주인장의 풍류는 짐작이 가겠지만, 그의 방에 북이 있길래, 술상머리에서 사철가 중 "불여생전 일배주" 귀절을 청하였다..
어화 세상(世上) 벗님네들 이내 한말 들어보오
인생(人生)이 모두가 백년(百年)을 산다고 해도
병(病)든 날과 잠든 날 걱정 근심 단사십(旦 四十)도 못 살 인생
아차 한번 죽어지면 북망산천(北邙山川)의 흙이로구나
사후(死後)에 만반진수(萬飯珍羞)는 불여생전(不如生前)에
일배주(一杯酒)만도 못하느니라
세월(歲月)아 가지 말아라
아까운 청춘(靑春)들이 다 늙는다
.....
.. 나머지 벗님네들 서로 모여 앉아
한잔 더 먹소 그만 먹게 하면서 거드렁 거리고 놀아보세
죽은 뒤에 진수성찬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낸들, 생전에 먹는 술 한잔만 하겠느냐는 대목이
우리의 젊은 시절 열정을 뽑아올렸다..
백수광부(白首狂夫)들의 왕년 18번을 한순배 한뒤에야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친구들과 헤어져 갤러리, 카페가 즐비한 평창동 거리를 슬슬 걸어 화정박물관으로 향한다..
매화문양의 병이 아름답다..
중국 청나라 양주팔괴 중 1인 금농(金農,1687 ~ 1764)의 매화 그림과 제시..
老梅愈老愈精神 (노매유로유정신) 늙은 매화나무 늙을수록 정신이 또렷하고,
水店山樓若有人 (수점산루약유인) 물 좋은 술집이나 산 위에 누각이나 사람 사는 것은 같다네.
淸到十分寒滿把 (청도십분한만파) 청렴한 삶만을 이루게 되면 추위가 극심할 것은 십상일 테니,
如知明月是前身 (여지명월시전신) 달이 차면 기우는 것을 안다면 지난번처럼 적당한 처신이 옳겠지?
석주실 주인 월전 장우성의 매화 그림인데..제시 해독이 않되어 안타갑다..
누구 글씨 보시좀 해주실라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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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보시하는 분이 나타났다..
夭桃能紫杏能紅 어린 자주 빛 복숭아꽃 붉은 빛 살구꽃이
滿面塵埃層晚風 얼굴 가득 먼지 뒤집어쓴 채 저녁 바람에 떨고 있네
爭似羅浮山磵底 어찌 나부산 계곡 아래에
一枝清冷月明中 달빛 아래 맑은 향기 풍기는 매화만 같으리오
명나라 유기(劉基)의 시..
* 수(隋) 나라 개황(開皇) 연간에 조사웅(趙師雄)이란 사람이 일찍이 나부산 송림(松林) 사이의 술집에 들렀다가, 단장한 소복(素服) 차림의 한 여인에게 영접(迎接)을 받았는데, 때는 이미 황혼(黃昏)인 데다 아직 남은 눈이 달빛을 마주하여 약간 밝은 빛을 띠는지라, 조사웅이 매우 기뻐하여 그녀와 더불어 얘기를 나누어 보니, 꽃다운 향기가 사람을 엄습하고 말씨 또한 매우 맑고 고우므로, 마침내 그녀와 함께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는 그대로 쓰러져 자고 새벽에 일어나 보니, 그곳이 바로 큰 매화나무 밑이었더라는 전설이 있다.
***
해설과 함께 보니 달빛아래 매화의 운치가 도도하고 급거 술이 땡기네..ㅎ
박물관을 나와 홍제천변을 걸어 세검정으로 간다..
바위 밑에 살던 가재와 개천에 나던 용은 사라졌지만
도심 개천에 아직 오리는 산다..
길옆 탕춘대는 절벽만 남아 접근하기 어렵고...
인조반정 때 이귀, 김자점등이 이곳에 모여 거사를 모의하고, 거사 성공후에는 이곳에 칼을 씻었다하여 "칼을 씻은 정자"세검정이 탄생하였다..
아비와의 불화로 자신의 정통성을 지켜려는 몸부림의 광해왕..
대외 외교는 성공적으로 이끌었으나 대내외교에서는 실패하여 물러나니..
대의명분에 찌든 위정자들로 인해 백성들만 도륙되었지..
입만 살은 존명주의자들로 인해 어육이 되고 만주로 끌려간 백성들의 한서린 칼은 어디서 씻어야되나..
칼을 씻는 이곳을 풍류의 마당으로 승화시키려는 몸짓은 진정한 "칼의 노래"를 부를 줄 알 때 완성되리라..
세검정 삼거리에서 홍제천을 따라 가면 홍지문이 나온다..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여 도성방위의 의지를 관철하기 위해 만든 탕춘대성의 성문이다..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한다..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이성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았다.
그러나, 이성은 왜적이 아니라 1921년 대홍수로 파괴되었다..
1977년에 복원되었는데, 현판의 글씨는 박정희대통령이 썼다고 한다..
인왕산이 보이는 곳에서 돌아선다..
세검정 교차로에서 대원군의 사랑채를 옮겨지었다는 음식점 석파랑을 들럿으나 분위기가 썰렁하여 그냥 나왔고..
원래 계획은 부암동까지 가서 대원군이 안동 김씨로 부터 상납받은 석파정을 구경하면서 종결하려던 계획은 시간 부족으로 여기서 멈추고 후일을 기약한다..
다시 상경하는 날 부암동 백사실계곡과 석파정 등을 둘러 볼 생각이다..
<오늘 걷기> 평창동 - 화정박물관 - 탕춘대터 - 세검정 - 탕춘대성과 홍지문- 석파랑 약 4km
<참고 걷기> 북한산 둘레길 중 평창마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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