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개사 입구>
추석에 원효로드 탐방에 나섰다...
한승원 소설 원효을 읽고 언젠가 원효의 길을 따라 가봐야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드디어 그런 날이 온 것이다..
우선 생가지 초개사, 출생지 제석사, 요석공주가 설총을 나아 길렀다는 반룡사가 잇는 경북 경산시를 둘러보고,
경주에 가서 수행하던 분황사, 황룡사터를 보고, 요석공주를 만나기전 물에 빠졌다는 문천의 다리 유교, 요석궁, 만년에 지냈다는 혈사로 추정되는 골굴사를 탐방한다..
그리고 그의 일생의 활동공간(오어사, 반고사터) 중 그동안 방문했던 자료도 이기회에 같이 정리해보자..
원효의 일생을 정리해본다..
1. 출생지(617년. 진평왕) - 압량주 불등마을 - 현재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226-1번지 제석사
생가터 - 초개사 : 경산시 유곡동
2. 삭발처 - 영축사(17세) :
3. 사미시절 - 반고사 (울산 울주군 두동면 천전리) : http://blog.daum.net/servan/6349464
4. 수행 - 오어사 (포항시 남구 오천읍 항사리) : http://blog.daum.net/servan/6349769
5. 기림사 중창 : 선덕여왕 12년 643년 : http://blog.daum.net/servan/6349645
6 황룡사 수행 : 진덕여왕 2년 648년
7. 월성 아래 남천(문천) - 유교
8. 요석궁 (원효 40세 - 설총 655년 출생, 무열왕 2년 무렵)
9. 반룡사 - 설총 출생지라는 설( 경산시 용성면 용전리), 생부의 고향인 유곡마을에서 태어났다는 설도 잇음
10. 팔공산 원효굴 수행
11. 당항성 무덤 - 깨달음(원효 46세), 문무왕 1년 (661년)
< 당항포(화성시 궁평항)을 향해 가던 중, 평택시 수도사 체험관, 2020. 7.3.수정>
12. 소요산 자재암, 원효굴
13. 초개사- 생가터에 절을 지어 오후 보림..
14. 분황사 집필 - 절필, 민중 속으로 : http://blog.daum.net/servan/6349646
15. 소성거사로 만행
16. 의상대, 홍련암(52세 이후), 천성산 홍룡사
17. 고선사 - 덕동호 수몰지역 - 서당화상비 발견
18. 황룡사 백고좌
19. 말년 - 혈사 : 경주 골굴사
20. 분황사- 소상안치 (신문왕 6년 686년, 70세)
<2022.3.1. 수정>
경산시 유곡동으로 접근하면서 거리 표지판에 눈이 끌린다..
"원효로"
충북 옥천에 백제 성왕의 전사지로 가는 길이 "성왕로"인 것 처럼 이곳도 역사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구나..
유곡동 초개사 입구 몇백미터 전에 내려서 슬슬 걸어간다...
코스모스가 가득하다..
유곡저수지를 지나며 포도밭에 포도가 주저리 주저리 열렸다...
탱자 가라가대..초개사는 왜 가는겨?
초개사는 원효의 고향마을이다..
불등마을은 붉은 언덕이라는 의미라는 견해가 있다..
그는 설씨...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12살에 고구려 전선에서 전사하고, 의지하던 그의 할아버지도 17살에 돌아가시자..출가를 결심한다..
어린 시절부터 인생무상 느낄만한 환경이다..
그런데, 절입구에 초개사 표시는 없고..휴심원이라는 현판만 보인다..
그래서 출입하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맞단다..참 무심한 절이다..
길가 전봇대에다는 초개사 표지를 열심히 써붙여 놓고서는..
원효와의 관련은 화쟁문에 느껴진다..
그의 화쟁사상으로 유명하여 그를 화쟁국사로도 불렸다..
주련의 한마디..
在欲行禪知見力 火中生蓮終不壞
재욕행선지견력 화중생련종불괴
욕망 속에서 참선하는 지견력이 있다면
불 속에 피어나는 연꽃 처럼 끝내 시들지 않는다..
최근에 지은 대웅전의 벽화에 원효의 일생이 벽화로 그려졌다..
조실부모하고 할아버지와 살던 소년..
요석공주와의 인연..
그런데..원효의 깨달음이 그 보다 먼저인지 궁금해졌다..
깨달음이 먼저라면, 왜 깨달음을 얻은 그가 계율을 어기면서까지 요석공주와의 인연을 만들었는지..
석존은 결혼생활도, 아들도 떨치고 떠나지 않았던가?
해골을 들고 웃는 원효..그의 깨달음의 인연을 그린 벽화이다..
그런데, 일각에서는 그가 해골물을 마신 일이 없다는 주장이 나온다..
그럼 그는 어떻게 깨달음에 이르렀는가?
이 벽화는 용왕이 보낸 금강삼매경을 해석한 사연을 그린 것 같다..
허공당..바람이 머무니 구름도 쉬어가네..
주지 스님의 글씨인가??
허공의 관점에서 보면 원효의 지나간 인연이 무슨 의미가 있을려나?
하지만, 초개사를 나오다 돌아보니 문득 깨달은 원효가 던진 말 한마디가 물 한바가지 먹은냥 모든 것을 증거한다..
心生卽 種種法生(심생즉 종종법생)마음이 생기면 갖가지 법이 생기고
心滅卽 種種法滅(심멸즉 종종법멸)마음이 없어지면 갖가지 법이 없어지나니..
궁금증를 품고 제석사로 간다..
경산시 유곡동에서 경산시 자인면 북사리 제석사까지는 7km 남짓..
617년 원효의 어머니는 해산을 위해 친정으로 가던 도중 사라밤나무가 많은 율곡에서 갑자기 산기를 느껴 치마로 주위를 가리고 원효를 낳았다..
마치 석존의 탄생설화와 비슷한 면이 있다..마야 부인처럼 원효의 모친도 귀천한다..
생각밖으로 주택가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다..
삼국유사에는 사라사라고 나오지만, 제석사 유적의 발굴을 통해 이곳이 사라사와 같은 곳이라고 알려지고 잇다..
창문의 그림이 어색한 대웅전에선 세월호 영가 천도재를 올린 모양이다..
탄생지임을 증거하는 비석이 서있고..
기념전각엔 일대기를 그림으로 장식했다..
친정으로 가는 도중 사라밤나무 밑에서 태어나자, 어머니는 돌아가시고, 12살에 아버지는 전사하시고, 17살 무렵 할아버지 마저 돌아가시자, 양산 영취사에 출가하여 머리를 깍는다..
황룡사에서 수행하고, 울산 반고사에서 낭지스님에게 배우고, 포항 오어사에서 해공 스님에게 참문하면서 열심히 수행한다..
그러다가, 8살 아래 후배인 의상과 2차례나 당나라 유학을 시도한다..
2번째에는 당항성 부근 무덤에서 자다가 깨달음을 얻게되어 유학을 포기한다..
그 시기가 의상이 중국으로 간 661년 문무왕 1년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그렇다면 요석 공주와의 인연은 그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원효가 깨달은 후 저자거리에서 무애행을 하면서 요석공주와 인연이 만들어진 것으로 보면, 아마 무열왕 제세 또는 그 이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보여진다..
의상은 그 이후 독자적으로 661년(문문왕 1년)에 당나라 사신이 귀국하는 배로 건너 간 것으로 보인다..
깨달음의 기연에 대하여도 견해가 갈린다..
1) 해골에 담긴 물을 먹고 깨달았다는 견해가 통설이나
2) 그저 분묘인 줄 모르고 잘 자고 나서, 다음날 다시 어쩔수 없이 분묘인 줄 알고 자게 되었더니..꿈에 귀신이 나타나 고생하고 나서 깨우쳤다는 견해이다..송고승전에 등장하고 삼국유사의 일연도 부인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유력한 견해이다..
물론 1)번 견해가 더 극적이긴 하다..
하지만, 어느 선사는 대나무에 기와 부딪치는 소리를 듣고, 무학대사는 바다위에 뜬 달을 보고, 서산대사는 낮닭 우는 소리를 듣고, 어느 선사는 복사꽃 향기를 맡다가 깨우쳤다는 오도 기연을 보면, 원효의 오도 기연도 어느 쪽이든 이상할 것이 없다..
오도후 그는 먼저 고향집을 절로 개설하여 초개사(初開寺)로 명명하였다..
말 그대로 "첫 문을 열었다"
고승들이 오도후에는 일정기간 오후 보림을 하는데, 원효도 초개사에서 오후 보림을 하였으리라 보인다..
깨닫지 못할까 걱정을 하지, 깨달은 이후 설법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오도이후엔 샘물이 넘쳐흐르듯 말문이 트인단다..
그런데, 원효는 필력도 만개하였다..분황사 등지에서 집필에 몰두하였다..
각종 경전을 읽고 깨달은 자의 눈으로 요약하고 정리하고 해석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붓을 던지고 무애행에 나선다..
때는 삼국전쟁으로 조세와 군역으로 백성이 지쳐갈 무렵..
일자 무식의 백성들에게 한문으로 쓰여진 불교 경전과 교리는 사치와 같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원효는 전쟁 미망인, 하층 백성들에게 다가가 복잡한 교리를 그만두고 단순히 "나무아미타불"만 일심으로 외워도 부처가 되거나 극락에 갈 수 있다고 설파하면서 그들의 지친 마음을 위무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스스로
"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일체무애인 일도출생사
모든 것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도다..하고 무애가를 부르고 다녔다..
그리곤 요석공주와 인연을 맺고 스스로 소성거사라 칭하며 비승비속의 경계인으로 살아간다..
그런 그를 기존 교단에서 좋아 할 리 없다..
황룡사 백고좌 행사을 위하여 100명의 고승을 선발할 때 원효를 배척한다..
그러나 그의 도력을 부정할 수 없다..
용왕이 보냈다는 금강삼매경을 해설할 사람이 없어 그에게 의존해야 했다는 사실..
그로인해 원효는 다시 각광을 받는다..
무열왕의 딸..아유다 요석공주..
전쟁미망인으로 승려를 사랑하여 그의 씨를 받아 나라의 동량으로 키워낸 의지의 여인도 전각에 모셔져 잇다..
파계승의 아들, 사생아라는 말없는 시선속에 상처 받고 자랐을 설총..굿굿하게 자라 해동 유학의 비조로 추앙을 받는다는 인생역정도 대단하다..
일연은 말한다..
"옹기장이도 부처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치게 한 것은 원효의 교화가 컷다"
원효는 왕으로 부터 시작된 신라불교를 하층민까지 파고들게 만들었다고..그것만으로도 위대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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