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룡사를 떠나 비오재를 거쳐 청도군 운문호 곁을 지나는데 왕재 표지가 보인다..

아마 무열왕의 행차도 지나갔을 법한 코스로 길이 났으리라..운문호를 거쳐 단석산입구를 지나 건천으로 해서 경주 황룡사터에 도착했다..

노란 코스모스가 만개했다..황룡의 비늘처럼 빛난다.. 

 

 

 

 

 

 

경주 남산은 푸른 실루엣을 여럿 걸치고 여전히 매혹적인 자태로 유혹한다..

 

 

 

 

 

 

 

 

 

황룡사는 진흥왕 때 건립되어 진평왕때 금당을 조성하였고 선덕여왕때 자장율사의 건의로 90m 높이의 구층탑을 건립하였던 신라 왕실의 국찰이다.. 

원효는 여기서 648년(신라 진덕여왕 2년)부터 수행을 하였고, 오도후 만행할 당시 황룡사 백고좌에 참석할 신라 고승 100인을 선발할 때 교단의 반대로 끼지 못했다..그때는 무열왕이나 문무왕 시절이었을 것이다..

백고좌란 국태민안의 호국불교행사의 일환으로 100인의 고승를 조치하여 인왕반야경을 강독하는 의식이다..

 

하지만, 용왕이 주었다는 금강삼매경을 해설할 사람이 없기에 이를 떠맡아 주석서를 찬술하고 황룡사 법좌에 홀로 앉아 강론하면서 그의 도력이 각광을 받는다..

 

 

 

 

 

분황사..오도후 원효는 이곳에 머물며 깨친자의 안목으로 각종 경전을 읽고 요약 정리 해설하는 작업을 한다..

그가 평생 찬술한 저작은 100여부 240권이며, 현존하는 것으로는 20부 22권이다.

그의 저서는 중국, 일본, 인도에 까지 번역되엇으니 최초의 불교 한류가 아니런가?

원효는 이름 그대로 한국 불교의 새벽을 연 사람이다..

 

 

 

그가 죽은후 아들 설총이 그의 유골분으로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안치하였는데..

설총이 절할 때 고개를 돌려 보았다던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했을 아들 설총의 아버지에 대한 애끓는 정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원효가 열반하였을 당시 설총의 나이 30대 중반 이었으리...

 

 

 

 

 

 

다음날 아침 일찍 경주 월성으로 갔다..

코스모스가 안개 속에서 울고 있다..여름에게 바람맞앗나 보다..

 

 

 

 

 

월성 남쪽을 흐르는 개천은 남천 또는 문천이라고도 부른다..

안개에 쌓인 문천은 여전히 신비감이 감돈다..그러니 1500년전에는 신비한 이야기가 끝없는 강물처럼 흘렀으리...

안개속의 해는 달보다 이쁘다..

백일한강(白日閑江)이로세..

 

 

 

 

 

문천에 월정교를 복원하고 있다..경덕왕때 기존의 다리를 헐고 신축한 것인데..

원효가 건너다 떨어졌다는 다리 문천교(유교)는 부근에 월정교를 새로 지으며 없어진것이 아닐까한다..  

 

 

 

 

 원효가 저자 거리에서 '수허몰가부 위작지천주(誰許沒柯斧 爲斫支天柱: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빌려 줄 건가. 하늘 받칠 기둥을 깎으려 하네)'라는 노래를 부르고 다닌다는 말을 들은 무열왕은 원효를 전쟁미망인 요석공주에게 보내라고 한다..

궁지기가 원효를 찾으려 갔을 때 원효는 경주 남산에서 내려와 이곳 문천교에 이르러 다리에서 떨어져 물에 흠뻑 젖어

요석궁으로 안내되었고 그곳에 묵는다..

어째 "몇일 동안 몇번??"하는 불순한 생각이 들까?

좌간 그 몇일 이후 원효는 요석공주와 동침하지 않은 것 같다..

 

요석공주의 설화가 전하는 이야기는 당시 원효가 머무는 초개사와 가까운 경산 반룡사에 가서 설총을 낳고 키웟다는 반룡사 설화가 있고, 양산 천성산 반고굴에 머무는 원효를 찾아가 설총을 보여주고 이름을 지어받았다는 이야기가 양산 천성산 반고굴과 산막마을 전설로 전해지고, 경기 동두천시 소요산에 머무는 원효를 찾아갔으나 원효는 "속세로 내려가는 발이 없어져 내려가지 못한다"고 했다는 설화를 보면 요석공주의 일편단심은 여전했으나 원효의 구도정신을 돌리지는 못한 것 같다..

둘 사이에 설총의 동생이 태어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무열왕이 일방적으로 원효를 요석궁으로 들인 것 처럼 전하는 위 설화를 자세히 음미하면 전쟁미망인 요석공주의 원효에 대한 사랑을 안타깝게 여긴 무열왕의 부정(父情)이 느껴지지 않는가?

 

 

 

문천교(유교)는 없어졌어도 요즘 교촌교에 요석궁을 안내하는 간판이 걸렸있다..

지금은 음식점이지만..예전 그 장소는 맞는단다..

 

 

 

문천의 개울에서는 그날의 열정처럼 뜨거운 김이 무럭 무럭 오른다..

 

 

 

둘이 하나 되는 사랑의 길은 긴 봄(長春)은 아니었다.. 

 

인연이라는 만남도 있지만
숙명이라는 이별도 있지
우리의 만남이 인연이었다면
그 인연 또한번 너였음 좋겠어
어쩌면 우리 언젠가 또다시
우연을 핑계로 만날지 몰라
내삶의 전부 눈물로 채워도
널 기다리면서 살른지 몰라
아마난 평생을 못잊을것같아

너를..

 

 

 

그 몽환적 이야기에 취한 눈에 타임머신을 탄듯 어슴프레 신라적 문천교가 보이는 것 같다..

 

 

 

 

 

아..아름다운 월정교는 실루엣으로 1000년을 뛰어 넘는다..

 

 

 

 

 

요석궁의 팔자도 요석공주처럼 파란만장하다..

김흠운을 신랑으로 맞았으나 백제와의 영동 조천성 전투에서 사망하여 청상과부가 되었고,

사모하던 원효와는 봄날의 꿈같은 사랑을 맺었으나 긴 그리움과 함께한 세월이었다..

그 그리움을 달래주던 아들..설총이 있었기에 그나마 행복했으리라..

 

이 요석궁도 한때는 경주 최부자집 터전에 되었다가 이제는 정갈한 한정식집이 되엇다..  

 

 

 

 

 

요석궁은 바로 월성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주야로 부모님 문안하며 살았을 터인데, 전쟁과부된 딸을 보는 아버지 무열왕의 심정도 이해되리라..

무열왕의 첫딸은 고타소..

신랑은 대야성 성주 품석인데, 의자왕 초기 백제의 대반격시기 대야성(합천) 함락시 항복하엿다가 처형되면서 고타소도 죽었다..하여 첫딸의 상실로 상처입은 무열왕의 마음 속에 홀로된 요석공주의 처지는 더 안타까웠으리라..  

 

 

 

 

 

 

 

월성에 올라 베일 속 소나무의 S라인을 감상하며 솔나무 길을 걷는다.. 

 

 

 

 

 

 

 

 

 

 

 

 

 

길을 가다가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었다...월성에서 남천(문천)으로 내려가는 오솔길을 아느냐고..

그 양반, 경주에서 40년을 살앗어도 그런 길은 못봤단다..

전에 올라온 기억이 분명이 있는데..

계속 가며 살피다가 과연 전에 올라오던 오솔길과 재회를 하였다..

요석이 원효를 만났을 때도 이리 기뻤겠쥐..

 

 

 

이번에는 내려가면서 남천을 만끽한다..

 

 

 

 

 

 

 

 

 

다시 들린 분황사..당간지주가 그날의 영화를 대변하고..

 

 

 

 

 

황룡사지 간판에 매달린 거미줄엔 세월의 무상함이 걸려있으니

제행무상 성주괴공의 진리는 만고에 빛나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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