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뭄에 오는 단비..

도리깨장 약속이 취소돼도 아무런 불만이 없다..

창밖을 내려다 보니 아파트에도 단풍이 내려왔다..

우(雨)요일에 계룡산 신원사에서 모임이 있었다..

 

 

 

가는 길에 은행나무 단풍길이 아름다웠다..

 

 

 

 

 

신원사 입구에서 단풍이 홍조를 띄고 사람을 맞는다..

모두들 줄을 서서 스마트폰 들고 인사하느라 바쁘다.

 

 

 

 

 

 

계룡산신님은  비오는 날에는 중악단에서 실내 근무하실라나?

 

 

 

촉촉한 빗물에 젖은 단풍은 샤워를 마친 방년 19세 처럼 싱그럽다..

 

 

 

 

예년 11월 한달의 강수량을 2일 동안 하사받여 계곡은 신났다..

 

비를 피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비비안 리처럼 다리 밑으로 내려가 준비한 김밥으로 점심을 한다..

그리고 약간의 오르막을 올라 고왕암에 도착..

 

 

 

 

 

 

당나라 10만대군이 660년 7월 9일 금강하구에 상륙했다..

5일만에(7월13일) 사비성(부여)으로 나당 연합군이 들이닥쳤다..

의자왕은 태자 효를 데리고 웅진성(공주)로 피신했다..

사비성 내에서 내부 분열이 일어낫다..태자 태가 왕위를 참칭하자 태자 부여융은 태자 효의 아들 문사와 자신의 측근을 데리고 사비성을 탈출한다..

웅진성으로 피신한 의자왕은 5일만에(7월 18일) 웅진성 방령 예식의 배신으로 억류되었다가 결국 항복하게 된다..(참 빠르죠잉? )

 

그 과정에서 부여융은 사비성을 탈출하였으나 웅진성에 합류하지 못하고 이곳 계룡산 고왕암 부근 굴로 피신하였던 것이 아닐까?

결국 부여융은 신라군에 잡혀가 술을 따르는 치욕을 당하고..

그해 8월 의자왕과 부여융 기타 왕자들과 대신 88명을 포함하여 백성 1만 2천 명은 당나라로 압송된다( 이들 행렬을 눈물로 바라보던 백성들의 한은  부여 양화면 암수리 유왕산 설화 유적이 말해준다  http://blog.daum.net/servan/6348383)

그해 11월 1일 의자왕은 당 고종 앞에서 문책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그뒤 부여융은 당나라 앞잡이가 되어 임존성에 항쟁하는 흑지상지 등의 투항을 권유하여 부흥운동을 와해시키고, 당나라 웅진도독부의 웅진도독이 되어 당나라군의 얼굴마담을하다가 신라의 대당항쟁이 심해지자 676년 당나라로 복귀..낙양에서 사망하여 의자왕과 함께 북망산에 묻혔다..

부여융이 당에서 받은 벼슬은 웅진도독 대방군왕()이었다..

 

 

 

 

슬슬 연천봉으로 올라간다..

비오는 날 낙엽이 떠어지는 바위 길 등산 무리하지 말라..

 

 

 

 

물 준비도 없이 트레킹화를 신고는 연천봉까지는 무리여서 도중에 돌아선다..

내려오다가 2차례 미끄러진다..젖은 낙엽에 덮힌 나무 뿌리는 기름 바른 미끄럼틀이다..

조심하시라..

 

 

<오늘 걷기> 신원사- 금용암 - 고왕암 - 연천봉 도중 회귀 약 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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