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걷기는 우금치 고개로 간다..
우금치에는 동학혁명군 위령탑이 있다..
그런데, 위령탑이 깨지고 허접하다..
위령탑은 1973년 당시 천도교 교령 최덕신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건의하여 글씨와 비용을 받아 건립한 모양이다..
그뒤 민주화 세월을 거치며 박대통령의 글씨와 비문 중 이름, 혁명, 유신 등의 글자가 훼손되면서 흉물스런 모습이 되었다..
동학혁명도, 그뒤의 위령탑의 역사도 파란의 길을 걸었다..
웃기는 것은 위령탑 건립을 건의한 최덕신의 행적이다..
그는 광복군 출신으로 해방 이후에는 국군 장성이 되서 6.25.동란시 거창 양민 학살사건에 관여하였고, 6.25.막바지에는 휴전회담 한국측 대표를 역임하였다.
육군 중장으로 전역 후에 박정희 정권하에서 외무부 장관을 역임하고 서독(독일)주재 대사 당시에는 동백림 사건에 관여하엿다..
공직에서 은퇴한 뒤에는 천도교 교령(회장)을 지냈는데..이때 위령탑 건립을 건의하고 설립을 주도했다..
그뒤 박정희 정권과 갈등을 빚다가 1986년 북한으로 망명하여 혁명열사릉에 묻혔다..
그런데, 더 웃기는 것은 박정희의 이름은 지워지는데, 최덕신의 이름은 그대로 있다는 것..그것이 지금의 의식구조라는 것인가?
위령탑 옆길로 우금치고개로 올라간다..
고개 우측 위로 급경사를 올라간다...
그 산말랭이가 견준봉으로 일본군 지휘부가 있던곳이다..
당시 일본군 200명과 조선 관군 약 1800명 2개 대대 병력 우금치 고개를 중심으로 좌우 1km 포진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그 당시 최고 무기인 캐틀링 기관포를 배치해 놓고 기다고 잇었다..
1894. 12.5. 동학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적의 화력이 집중되는 불구덩이 속으로 빈약한 화승총이나 죽창으로 무장한 수만의 동학군은 불섶으로 뛰어드는 불나방같이 스러져갔다..
그런데 어떻게 일본군이 여기까지 내려와 동학군을 기다리고 있었을까?
동학군의 봉기는 1894년 4월 15일 전봉준의 지휘아래 전북 고창군 무장에서 시작되었다..
5.11. 황토현에서 토벌군을 격파하고, 5.31. 전주성을 점령한다..그리고 6. 10. 전주화약을 맺고 일단 동학군은 해산한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청에게 원병을 요청하고, 청이 출병하자, 일본도 잽싸게 개입한다..
7. 23. 일본군은 조선 궁궐을 침탈하여 조선 통치권을 장악한다.. 일본군은 고종을 연금한 상태에서 친일 김홍집 내각을 내세워 갑오경장을 추진하게 하고 청일전쟁을 벌인다..
(기억하라!! 이 때 궁궐 침탈을 주도한 일본군 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는 아베의 모계 증조부라는 사실..)
9. 15~17에 평양에서 청병을 격파하고, 9. 17. 서해에서 청 해군을 격파한다..
그러자, 전봉준은 10월 삼례에서 2차 거병을 하였다. 11.9. 직할군 1만명을 이끌고 북상한다..
"가보세(甲午歲) 가보세, 을미(乙未)적 을미적 거리다, 병신(丙申)이 되면 못 가리"
이때 충청, 강원의 동학 북접군이 가세하여 논산 초포(노성산성부근)에 집결..총병력 5~10만이 모였다..
11월 20일부터 공주 주변에서 관군과 동학군들의 격돌이 여러 차례 있었다.
그러나 공주 경천부근에서 며칠 지체하는 사이 일본군이 공주로 내려와 정탐끝에 우금치에 포진하기에 이른 것이다..
만일 동학군이 신속히 진군하여 일본군 보다 먼저 공주를 점령하고 공산성에 포진하여 일본군과 대진하였다면 운명이 어찌되었을까?
견준봉에서 두리봉으로 가는 길은 평탄한 숲길이다..
두리봉 앞두고 오르막에서 돌아보니 우금치 건너로 첩첩 산이 이어진다..
그러고 보니 우금치를 중심으로 좌우의 산을 장악하고 기관포로 무장하고 잇으면, 검각처럼 난공불락의 고지가 되겠다..
두리봉에 올라 공주 쪽을 바라보니 공주는 연꽃 속 연밥처럼, 까다만 양파처럼 산속에 숨은 작은 분지다..
12. 5. 개시된 동학군의 우금치 공격은 50여회의 파상공격에도 불구하고 시산혈하를 이룬채 패퇴하였다..
그 와중에 일부 병력이 우회하여 이곳 두리봉 쪽을 공격하여 두리봉을 점령하기도 하였으나 우금치의 주력이 붕괴되면서 두리봉 공격부대는 고립되어 격파되고 죽어갔다..
두리봉 아래에 송장배미라는 동학군 전몰유적지가 있다..
두리봉에서 잠시 뜨거운 차를 마시고 마음을 진정시키고 돌아간다..
그러다가 일락산 갈림길에서 일락산으로 간다..
얼마나 분했으면 일본놈 망하라고 일락(日落)산이라고 했을까?
산이름이 그래서 인지 일락산은 정체가 없다..
그 끝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선다..갈림길에서 우금치 터널 쪽으로 간다..
역사는 흐른다..
동학혁명의 원인을 제공한 조병갑..
그는 정읍천에 이중의 만석보를 만들게 하고 과도하게 수세를 걷고, 제 아비(전 태인현감) 선정비를 세운다고 강제 모금을 하다가 농민 봉기를 야기했다..
일시 유배갔다가 기사회생하여 판사가 되어 동학교주 최시형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고, 의병들을 재판하였다..그의 후손은 노무현 정권에서 홍보수석비서관을 지냈다..
전봉준..
봉기 8개월전 아버지 전창혁이 조병갑에게 항의하다 장살당한 뒤, 농민 봉기에 앞장선다..
그의 후손 2남 2녀 중 딸들만 살아남았다고 하나 공식적으로 후손으로 공인받지 못했다..
박성빈
20대에 성주에서 동학운동에 가담하였다가 체포되었다가 겨우 목숨을 건졌다..
그후 5 남2녀를 낳았다..그중 막내 아들이 박정희다..
그는 어머니로부터 "이때 너희 아버지가 죽었더라면 너는 태어나지 못하였을 것이다"고 들은 이야기를 주변에 수시로 언급하였단다.
그러니, 최덕신이 1973년에 우금치 동학혁명위령탑 건립을 건의하자 글씨와 비용을 선뜻 지원하였을 것이다..
2000년 1월 5일..김대중 정권은 동학의 기폭제가 되었던 "수세(水稅)"를 페지한다..
2012년 2월.. 경복궁을 침탈한 일본군의 후손 아베는 일본 총리가 되엇다..
다시 돌아온 우금치..
죽인(竹人)이 그날의 아픔을 생각나게 하는데..
터널위 개틀링기관포가 있었을 법한 위치에서 우금치 아래을 바라본다..
고개 위에 그날에는 닿지 못한 동학군의 한을 달래는듯 죽인(竹人)이 누워있다..
120년후..
그 때처럼 우리는 분열되어 잇는데..
일본은 소녀상 철거하라고 생떼를 쓰고..
중국은 싸드를 치우라고, 땡깡을 피우고 있다..
다시 이 땅에서 중일전쟁이 벌어지고..우리가 외군의 총에 쓰러져 가는 일은 더이상 없어야 한다..
우리는 어찌하면 공화(共和)를 이루고 단결하여 선진국 대열로 향한 마지막 한걸음을 옮길 수 있을까?
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오늘 걷기> 우금치 동학혁명위령탑 주차장 - 우금치 - 견준봉 - 두리봉 - 일락산 - 임도 삼거리 - 위령탑 주차장 약 6km
<참고 걷기> 공주대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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