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 걷기에 나섰다..

내비는 금오랜드로 치고 갔지만, 주차는 더 아래 금오지 저수지 아래 공영주차장에 했다..

주차장 화장실 옆에 갤러리가 있다..

 

 

 

오늘 삶의 주인공을 잘 보필하자..

이곳에 주차한 이유는 금오지 올레길을 거쳐 금오산 대혜폭포를 구경할 계획이기 때문이다..

 

 

 

저수지 주변에 부교와 데크를 설치해놓았다..

900미터급 금오산의 위용이 탁터진 호수와 어울려 시원한다..

 

 

데크옆 흙길을 걸어 환경연수원으로 간다..

 

 

원래 계획은 환경연구원을 지나 취영정을 거쳐 칼다봉 등산로를 타다가 금오호텔로 빠질려고 했는데..

 

 

 

취영정부터는 겨울철 입산금지 표지가 붙어서 되돌아 나왔다..

금오지 산책로를 걷는다..

 

 

 

 

 

금오지에서 금오산으로 방향을 잡으면 곧바로 채미정과 마주한다..

채미..고사리를 캔다는 뜻이다..

왜??

백이, 숙제가 주나라의 녹을 먹지 않으려고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했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그럼..여기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야은 길재 선생이다..

 

 

고려말에 3은이 있었다..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야은 길재..

이색의 제자들은 정몽주, 길재 등 우파와 정도전, 하륜 등 좌파가 잇었다..

이색은 우파의 길 즉 고려왕조와의 신의를 지키려 했다..

 

백설이 잦아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서서 갈곳 몰라 하노라..

 

그의 심정을 대변한 시다..

 

하지만, 포은 정몽주는 강경 우파의 길을 걸어 이성계를 제거하려다 이방원에게 죽는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그의 강경한 결기가 보인다..

 

 

채미정..

 

길재는 이렇게 읊었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이곳에 돌아와 제자를 양성한다..

그의 학맥은 김숙자 - 김종직 - 김굉필 - 조광조에게 이어져 조선 사림을 형성한다..

 

 

중류지주(中流砥柱)

황하 중류에 있는 기둥모양의 돌산인데, 황하의 도도한 흐름에도 제자리를 지키는 늠늠한 모습을 가리킨다..

 

 

 

 

엄자릉..

그는 후한 광무제 유수의 친구다..

광무제가 왕망의 신나라에 대항하여 거병하자, 그를 도왔고 그가 황제가 되자 부춘산에 은거하였다..

그런데, 그를 길재와 비유하는 건 맞지않는다..

길재는엄자릉처럼 건국에 기여한바가 없으니 굳이 비교하자면 백이, 숙제와 비슷하지 엄자릉과는 다르다..

더구나, 그는 온건 우파 정도로 자신은 조선에서 벼슬하지 않겟다는 것이지, 자신의 자손들이 벼슬하는 것은 막지 않았다..

 

 

 

 

금오산에 케이블카가 있다..800미터정도..일단 무시하고 걸어간다..

 

 

 

금오동학..이 글씨를 쓴 고산 황기로의 사위 이우는 이율곡의 동생이다..

이우는 처가인 선산에 살면서 장인의 정자 매학정의 주인이 되었다..

금(거문고),서,시, 화의 사절(絶)이라 불렸다..

형 이이는 해주 석담(石潭)에 집을 짓고 틈만 있으면 술상을 차려 아우 이우를 시켜 거문고를 타게 하고 시도 짓고 즐기면서

 ‘나를 진정 아는 사람은 내 아우 이우뿐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금오산성이 보인다..

금오산()..금까마귀산??

여수와 경주의 금오산은 금자라를 뜻한다..

왜 금 까마귀가 되엇을가?

신라에 불교를 처음 전한 고구려의 아도화상이 눌지왕때 선산(현 구미시) 해평면에 한 바위위에서 좌선을 하다가 모례장자의 기부를 받아 도리사를 창건하였다..

그런데, 아도화상이 이 산부근을 지나다가 저녁 노을에 까마귀가 황금빛을 띄고 날아가는 것을 보고 금오산이라 명명했단다..

 

 

금오산성은 임진왜란 당시 사명당 유정이 수축하엿다고 한다..

여기서 왜적과 직접 싸웠는지는 불분명하다...

**

선산부사 정경달은 임진란 초기 잠시 도피하였다가 돌아와 관민을 모아 금오산에 진을 치고, 왜적에 대항하엿다.

또한 그는 도선굴에 식량을 비축하였다가 명나라 군사의 군량미로 제공하기도 하였다.

1594년 그는 통제사 이순신의 종사관이 되어 둔전 등으로 식량 확보, 병선 제작 등 병참참모로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문과 급제자이고 나이도 연상이었으나 무과 출신 이순신 장군 밑에서 성실하게 업무를 보좌하엿다.

특히 이순신이 하옥되어 고문을 받을 때 선조의 면전에서 이순신의 방면을 강력히 주청하였다. <2022. 10.19. 추가>

 

 

 

 

 

조금 더 가니 해운사가 나온다..

원래는 고려말 도선국사가 절벽 중턱 도선굴에서 수도하면서 그 아래 대혈사를 창건하였다는데, 그후 페사지가 되었다가 1925년 복구되면서 해운사가 되었다..

 

 

 

 

 

금오지의 수원이 되는 대혜폭포..요즘 같은 겨울 가뭄에도 금오지 물이 출렁거리는 것은 다 이 폭포의 큰 은혜 덕분이다..

그래서 대혜폭포라고 불릴만하다..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 했는데,

흐르는 폭포는 겨울을 이기지 못하는구나..

 

 

 

그 때 폭포 저쪽 절벽위를 넘어가는 사람들??

도선굴 가는 길이다..

 

 

 

 

도선굴 가는 길이 중국 화산의 절벽 길처럼 위태롭기 그지없다..

 

 

 

 

 

조마 조마 걸어가면 큰 굴이 나온다..

도선국사가 수행하였다는 곳이다..

임진왜란때 왜군 제1군 고니시군이 대구를 거쳐 선산으로 쳐들어 올 때 주민 100여명이 이 굴에 피신하였단다..

그 당시는 절벽에 쇠못을 박고 칡넝쿨로 줄사다리를 만들어 올라가서 칡넝쿨을 걷어 올렸다고 한다..

 

 

굴에 붙은 금오산굴통로기를 보면, 이 굴에 이르는 통로는 1937년 당시 면장 김승동이 주도하여 개설한 것이고 한다..

 

 

굴에 잠시 앉아 도선의 마음을 느껴본다..

저 멀리 낙동강은 알려나...

 

 

 

 

 

 

도선굴을 나와 다시 내려가는 길이 더 떨린다..

 

 

하산길은 케이블카를 이용..편도 5000원..

 

 

다시 금오지 반대편을 걸어 주차장으로 간다..

 

 

겨울의 망중한을 즐기는 오리들..

 

 

 

 

 

<오늘 걷기> 금오산도립공원 금오지 아래 주차장 - 우측 부교 - 환경연수원 - 채미정- 금오산성 대혜문 - 해운사 - 대혜폭포 - 도선굴 - 케이불카- 금오지 좌측 데크 - 주차장 약 12k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