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걷기..이사동으로 간다..

내비에 이사동마을회관을 치고가다가 동네 버스정류장 공터에 차를 세운다..

내리고 보니 여기가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의 생가터이고..오도산 격전지라는 비석이 보인다..

신위도근원(信爲道根源)..믿음이 도의 근원이다..

김옥균의 필적이다..그는 외가인 이곳 이사동에 세웠다..현 집주인의 거부로 정확한 생가터에는 세우지 못했단다..

여기서 좀 떨어진 옥천군 군북면 청풍정 정자 부근에는 갑신정변 실패후 기생 명월과 김옥균이 피신하여 지냈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일단 이사동의 유명한 은진 송씨들의 분묘와 제실을  둘러보기로 한다..

 

 

 

 

이 곳에는 조선초기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는데, 1000여기의 분묘와 재실 16채가 산재하는 유교 유산이 가득한 동네다..

 

 

 

 

 

사산..모래산..이사동...모래 사(沙)가 등장하는 유래는 무엇일까?

윗사라니(상사) 뒤산에는 모래가 많고 깨끗하여 예전에 사산이라고도 불렸다.

사산 아래 동춘당 송준길이 부친이 돌아가시자 시묘살이 하기위해 지은 재실이 우락(憂樂)재다..

 

퇴계는 자찬묘갈명에서 말했다..

우중유락 낙중유우(憂中有樂 樂中有憂)..

근심 가운데 즐거움이 있고, 즐거움 가운데 근심이 있다..

 

사산 아래 샘이 있는데 물이 차서 한천(寒泉)이라 불러서 동네이름도 사한리로 불리다가 사라니로 발음되고, 웃사라니, 아래사라니가 되었다..

동네이름도 상사, 하사를 합쳐부를 때는 이사동이 된다..

이 우락재가 있는 마을이 양지뜸이다..

 

 

 

 

 

첨사공 재실 옆으로 올라가서 용바위를 거쳐 다시 돌아오는 이사동 유교민속마을 누리길이 개설되어 있다..

오늘은 개인적으로 계획한 코스를 돌아본다..

즉, 이사동 마을- 혜림정사 - 구완동 고개 - 구완동 - 옴사를 둘러보고 다시 돌아와 유교민속마을 누리길로 마무리할 예정이다..

 

 

이 동네는 보문산을 배경으로 남동쪽으로 식장산을 바라보는 분지라 참으로 아득한 터전이다..

회덕 계족산 아래 자리잡은 송촌동과 쌍벽을 이루는 송씨 집성촌이다..

 

 

승리기업 앞에 글씨에 눈이 간다..

 

 

어머니 시를 보며 영화 신과함께를 생각한다..

아직 안 본 사람은 가서 영화를 보시라..

 

 

 

혜림정사를 스쳐 왼쪽길로 가라..

또 마을 끝자락에서 왼편으로 올라가면 묘하게 산길이 이어진다..

길이나 우정이나 오래 다니지 않으면 잡초만 무성해지고 길은 사라진다..

 

 

 

이 비탈길에서 비틀하며 넘어졌다..

고개를 드니 길 자국의 끝에 표지판이 보인다..

 

 

 

이 구완동 고개에서 대전둘레산길 1코스와 만난다..

계획대로 구완동으로 가는데, 산길이 고급스런 양탄자깐 길 같다..

 

 

 

이 지점에서 잠시 망설이는데, 네이버 위성지도로 옴사가는 길을 검색하니 직진하면 바로 이어질듯하다..

 

 

 

숲사이로 옴사의 불상이 보인다..

 

 

숲길은 임도를 만나는데, 우측으로 가면 보문사지를 거쳐 보문산둘레길로 이어진다.

전방에는 옴사가 보인다..

 

 

옴..

고대 인도에서 종교의식 전후에 암송하던 신성한 음이다..

기독교의 아멘과 비슷한 의미..

불교에서는 태초의 소리, 우주의 모든 진동을 응축한 기본음으로 보고 부처에게 귀의하는 자세를 상징한다

 

 

 

무량수전 앞에 사천왕상이 인상적이다..

 

 

 

 

무량수전..무량수..헤아릴 수없는 시간을 사는 곳이니 극락이고 아미타불이 계시는 곳이다..

 

 

지장보살..

웹튠 신과함께에서는 지장보살이 지옥 중생이 너무 많아지자,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지장로스쿨을 세운다..

거기 우등생인 진기한 변호사가 김자홍을 변호하는 장면이 재미있었다는..ㅎ

 

 

옴사를 돌아나와 대전둘레산길로 회귀하여 오도산으로 향한다...

 

 

 

 

오도산(吾道山)..

유학자들이 유학을 오도(吾道) 즉 우리 도라고 한다..

이는 공자가 '우리 도는 한 가지 이치로 만가지 일을 꿰뚫고 있다'(吾道 一以貫之)고 말한데서 유래한 것이 아닐까?

그러니 오도산 아래 송씨유교민속 마을이 존재하는 이유다..

 

 

 

 

여기는 오도산 봉화터로 알려진 곳이다..

이곳이 오도산 격전지라고 손으로 쓴 안내문이 있다..

 

 

이규홍??

그는 익산 사람이다..

1905년 을사늑약에 반대하여 최익현 의병에 가담..

1907년 9월 의병장이 되어 의병을 이끌고 11월 완주군 고산에서 첫 전투..

1908년 4월 대전 식장산에서 의병 해산

1916년 오도산 아래 이사동 친구 송덕재 집에 은거

1917년 10월 왜경에 체포하려고 급습하자, 오도산에 올라 왜경과 격전 끝에 부상입고 탈출..

상해임시정부로 갓다가 만주에서 김좌진 장군을 도움

1924년 서울에서 체포 

 

 

구완터널을 지나 대전- 통영간 고속도로가 달린다..

 

 

저멀리 보문산성의 장대루가 보인다..

 

 

 

 

 

오도산에서 바라보니 보문산과 계족산, 식장산 등 대전의 큰 산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사한정..사산과 한천..

 

 

고모재에서 소화동천으로 내려간다..

길이 좋아 벤취에 앉아 따뜻한 차도 마신다..

마치 산길을 혼자 전세낸 기분이다..

 

 

 

 

소화동천..이름이 너무 거창하다..

우암 송시열의 화양동을 본받아 작은 화양이란 뜻으로 소화라고 하엿단다..

각자를 새긴 송창재는 송덕재와 함께 오도산 격전 직전까지 이규홍의병자을 숨겨준 사람이다..

 

 

 

 

 

광영지..

빛과 구름의 그림자가 비치는 연못..

다른 지역에도 광영지 이름이 잇는데, 이는 성리학자들의 우상인 주자의 시 觀書有感(관서유감) 의 귀절에서 따온 것이다..

 

半畝方塘一鑑開(반무방당일감개) 조그마한 연못은 거울 같아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하늘빛과 구름이 함께 노닌다

 

봉강정사..

고종때 유학자 난곡 송병화의 강학당이다..

 

 

영귀대..노래를 부르며 돌아온다..

 

 

 

한천..사산 아래 나온다는 시원한 물..

 

 

 

한천명판을 보니..이 동네 이름을 사란(沙蘭)리라고도 불렀던 모양이다..

한천(寒泉)은 시원한 샘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성리학의 시조인 주자의 한천고사(寒泉故事: 주자가 어머니 묘소 곁에 한천정사를 세워 학자들과 담론함)에서 따왔를 가능성이 크다..

 

 

 

사우당의 사우(四友) 즉 4친구란 매, 연, 송, 국을 말한다..

 

 

사우당은 인조때 문신 송국택의 별장으로 원래 회덕 송촌동에 세웠진 것인데, 멸실된후 300년후 후손들이 이곳에 새로 지은 것이다..

송국택..그는 동춘당 송준길, 우암 송시열 보다 10년 년상으로 사계 김장생에게 배웠다..

 

병자호란 때 그는 강화도에 있었다..

그 당시 강화도에는 대전 부근의 양반 중 사계 김장생의 손자 김익겸, 윤증고택의 윤증의 부친 윤선거, 그리고 사우당 송국택이 잇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처신에 따라 향후 역사적 대접이 달라졌다..

김익겸은 23살의 나이로 강화도 함락시 강화 남문에서 강화유도대장 김상용(감상헌의 형)과 함께 순절하였다..

그의 처는 임신(후에 서포 김만중)한채 어린 아들 김만기(후에 숙종의 장인이 됨)를 데리고 강화도를 탈출하였다..

윤증의 부친 유선거는 그의 처는 자결하고, 본인은 강화를 탈출하였는데, 이를 윤증의 스승 송시열이 비난함으로써 윤증과 갈라서게되고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우당 송국택은  강화도가 함락시 인조의 원손을 탈출시켜 그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랐다.

 

남한산성에서 김상헌과 최명길이 입으로 옥신각신할 때 강화도에서는 목숨을 걸고 진로를 결정해야 했다..

그리고 그 처신에 따라 역사적 대접이 달라졌다..

 

 

사우당이 있는 마을을 음지뜸이라고 한다..뒤로 오도산의 사한정이 보인다..

 

 

 

 

 

<오늘 걷기> 이사동 버스정류장 - 이사교 - 승리기업사 -  혜림정사 - 구완동 고개 - 옴사 - 구완동 고개 - 절고개 - 오도산 - 사한정 - 고모재 - 소화동천- 광영지- 사우당-  약 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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