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무수동에 갔다..
유회당둘레길을 개척해보려는 생각이다..
무수동..무수(無愁)..근심이 없는 마을이다..
원래 무쇠골..수철리(水鐵里)라 불렀는데, 숙종 때 유회당 권이진의 백부인 권기가 정착하면서
그의 호인 무수옹을 따라 무수동이 되엇단다..
250년 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옆에
원두막인줄 알앗더니 이름 많은 정자네..
남향으로는 인풍루(引風樓)..바람을 불러오는 누각..
북향으로는 광영정(光影亭),연못의 햇빛과 구름을 보는 정자..
서향은 관난헌(觀欄軒), 외양간 바라보는 집..
동향은 수월난(受月欄), 달맞이하는 난간..
광영정 좌측 길로 오른다..
멀리 유회당이 보인다..
유회당은 조선 영조때 호조판서를 지낸 권이진(1668년∼1734년)이 1714년(숙종 40)에 지은 건물이다..
권이진은 우암 송시열의 외손자이고 명재 윤증은 그의 고모부가 된다...그는 22세까지 송시열에게 사사하고, 명재 윤증(尹拯)과도 사승(師承)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윤증과 송시열이 반목하여 노론, 소론이 갈릴 때 어찌 처신하였는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이곳 무수동은 연산의 명재(윤증)고택과 우암의 난간정사와 중간쯤 위치하고 있다..ㅎㅎ
지도상으로는 마을 좌측 끝에도 산길이 있는 것 같은데, 가보니 길이 보이지 않고 개소리만 요란하다..
부득히 유회당 옆 여경암 가는 길로 올라간다..
유회당의 근원이 된 권이진 부모의 묘소
당근 좌측 산길로 가야겠지??
호젓한 길 끝에 쌍갈래 길이 나온다..
좌측은 보문산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고, 우측은 여경암으로 간다..
일단 여경암에 들른다..
여경..이라는 이름에서 과거 합격을 위해서 공부하던 곳 같다..
조선시대는 최소 4대에 1명의 과거 합격자가 나와야 양반가문을 유지할 수 있으니, 과거공부에 매진할 밖에..
아마, 과거공부가 의미가 없어진 후로 불당으로 사용되나 보다..
유회당 권이진의 친구 주암 박순의 글씨란다..
산신각..
항주대성산왕신..보문산신의 이름인가??
여경암을 지나서 올라가는 등산로는 표식도 희미하고 길도 가파르다..
땀 깨나 흘리며 올라간다..
이 특이 나무 지점이 삼거리.. 우측이 보문산으로 이어지는 주 등산로인데 표지판이 없어, 모르는 상태에서 좌측 길로 간다..
길이 희미하다..
중간에 멀리 보문산둘레길이 보인다..
길은 계속 내리막인데, 어디로 이어지는지 자신이 없어 돌아가기로 한다..
나중에 지도로 보니, 계속 내려가면 좌측으로 유회당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듯하고, 직진하면 버들골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는 것으로 되어잇다..
산에서 내려와 유회당을 구경한다..
조선 시대는 왜 그리 충효를 중시해는가?
민족성이 원래 효성스러워서??
민족성이 원래 그런 것이라면, 지금은 왜 달라졌는가?
내 생각엔 이렇다..
유학이 공자시대는 인(仁)을 중시하였는데, 증자 시대에는 효를 점차 강조하기 시작한다..
한나라 이후 유학자들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수인 충효의 개념을 강조하여 결국 송나라 이후에는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정책적으로 충효자를 표창하고, 벼슬을 주기 시작한다..
그러니 벼슬이 집안의 성세를 좌우하는 시대에 사대부들은 충효..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효를 강조하게 된다..
효를 조기에 세뇌하고 체득하게 만든다..그리고 모든 것에 우선하게 시켰다..
그러나, 이제 효로 얻어지는게 없는 시대가 되었다..
돈이 중요가치로 상승한다..돈과 외모로 평가받는 시대에 효는 고객이 찾지 않는 재고상품이 된 것이다..
충효문 안으로 들어서면 활수담과 석교가 잇다..
활수담(活水潭)..
성리학자들은 작명도 다 어디 책이나 글귀에서 따온다..
주자의 시 " 관서유감(觀書有感)" 에 나오는 귀절..
爲有源頭活水來 (위유원두활수래)
근원에서 신선한 물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라네
위 귀절의 활수에서 따와 작명하였다..
관서유감의 시 원문은 이렇다..
半畝方塘一鑒開(반무방당일감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
爲有源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
반이랑 네모난 못이 거울과 같아서,
햇빛과 구름이 그대로 잠겨서 배회를 하네.
어떻게 그처럼 맑을 수 있느냐 물으니,
근원에서 끊임없이 활수가 나오기 때문이라네.
이 시에서 광영정, 활수담이라는 작명하게된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거주하는 곳에 광영, 활수 등의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성리학의 개조인 주자의 위 시가 그의 철학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자의 철학에 따라 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절 주변의 산봉우리 이름이 비로봉, 관음봉, 반야봉이 많은 이유와 같다..
유회(有懷).. 중국 명나라 때 학자인 전목제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이다.
"날이 밝을 때까지 잠 못 이루며 두분(부모)을 그리워하네.."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나타내는 의미다..
이것도 주암 박순의 글씨란다..
이 집안 안동 권씨의 자랑이 광고문안보다 더 세련되었다..
1. 조선 최초의 기로소에 들어간 동고 권중화..
기로소.. 퇴임한 나이많은 원로 대신을 예우하는 기구에 권중화가 처음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는 태종때 영의정부사(즉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고, 향약간이방이라는 한의약 관련 서적을 저술하기고 하였다..
2. 조선 최초 문형 권근..
문형이란 대제학을 말하는데,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 삼관을 겸직하여 문관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3. 최초 호당에 들어간 권채..
湖堂(호당)..조선조 세종-숙종 간에 인재양성제도의 하나로 글재주와 덕이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초급관리 중에서 대제학이 엄히 선발하여
장기 휴가를 주어서 공부 즉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를 독서당(讀書堂) 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도 불렀다.
호당에 선발된 사람은 조선조 관리 중의 엘리트로 인정 받는 것이기 때문에 호당에 선발된 사실은 당연히 족보에 기록된다.
호당은 ‘호수가의 집’인데 두모포 즉 지금의 옥수동 한강 가(동호대교 부근)에 독서당을 지어놓고 호당이라 한 것이다.
유화당 마루에 앉아 먼산을 바라본다...
고인도 이런 풍광을 바라보았겟지..
유회당 마루에서 보니 좌측은 배롱나무가 있다..
배롱나무는 양반집이나 절에서 키우는 나무다..
배롱나무는 어느 정도 자라면 껍질이 없어진단다..그래서 겉과 속이 같다고 여겨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나무로 삼는다.
또 여름 백일동안 계속 붉은 꽃을 피우니 그와 같이 수양하려는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까?
그런데 우측엔 탱자나무가 있다..가시로 가득한..
보통 탱자나무는 귀양간 중죄인들 집을 탱자 가시나무로 막는 위리안치에 쓰는데, 왜 이곳 정원에 심었을까?
유회당 권이진의 집안 내력을 보자
그의 증조부 권득기는 양명학자로 꼽히는 장유, 최명길 등과 학문적 교류가 가장 밀접한 조익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탄옹 炭翁 권시(1604년~1672년)이다.
그는 차남 권유를 송시열의 맏딸에게 장가 보내고, 명재 윤증에게 딸을 시집보내 사위로 삼앗다..
1660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예송논쟁)로 논쟁이 붙었을 때 서인임에도 남인(윤선도, 윤휴)의 주장이 맞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돈인 송시열과 송준길과 대립하여 서인의 공격으로 파직되었다.
권시는 지금의 대전 서구 탄방동으로 낙향했다. 도산서원을 짓고 13년 동안 도학과 예학에 정진했다. 그의 호인 탄옹은 탄방동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충청 오현이라고 할 때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권시를 말한다.
(참조 http://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64 )
그의 백부는 무수옹 권기<1623(인조원년)~~1695(숙종21)>이다..
그는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80년 3월 경신출척으로 서인 집권시 옥사가 크게 벌어지는 것을 보고, 벼슬을 그만둔 다음 본가 탄방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철리 산골인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하면서 마을이름을 무수동이라 이름을 바꾸고 스스로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는 딸을 백호 윤휴의 며느리로 시집보냇고, 윤휴가 송시열 등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힐 때에도 서로 의기상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의 아버지 권유는 무수옹 권기의 동생이고, 송시열의 사위이다..
유회당 권이진이 이곳에 아버지와 어머니 송씨의 묘를 모시고..시묘사 삼근정사를 세우고, 유회당을 지었다..
어머니는 우암 송시열의 맏딸이다..
송시열은 시집가는 딸에게 계녀서(戒女書)라는 글을 써준다..
"일속에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사람이 되지 마라."는 내용..
유회당 권이진은 우암 송시열의 외손자이고 명재 윤증은 그의 고모부가 된다...
그는 22세까지 송시열에게 사사하고, 그후에는 명재 윤증(尹拯)에게 수학 하엿다..
그는 양명학적 경향에 관대한 가학 전통에, 우암 송시열의 교조적 성리학, 명재 윤증의 무실성향을 섭렵한뒤
현실적인 실학의 경세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집에 붙여논 현판을 보면 그가 성리학 주류를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의 묘소는 인근 어남동에 있는데, 묘갈명은 약산 오광운이 찬하고 체제공이 쓴 것으로 봐서 그의 정치적 노선은 남인 탕평론자 청남쪽 사람과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그의 주변 환경, 특히 외가인 우암 송시열의 노론과 고모부인 명재 윤증의 소론의 당쟁 와중에 참으로 처신하기 어려었으리라..
그러한 그의 심정을 탱자나무의 가시가 대변해주고 잇지 않을까?
찔리지 않도록 조심 조심하며 살자하고...
마치 정양용이 양수리 마재 집에 여유당이란 당호를 쓰고 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하며 살려고 하였듯이..ㅎ
유회당 옆 재실인 기궁재의 대문에 붙은 입춘방..
화기자생군자댁.. 따스한 기운이 저절로 생기는 군자의 집..
춘광선도길인가..봄볕이 먼저 도달하는 재수좋은 집..
으르렁 거리는 거대한 두 소 사이에서 절묘한 삶을 살았던 인간극장의 현장이랄까?
<오늘 걷기> 무수동 무수천하마을 광영정 - 유회당 - 여경암 - 등산로 - 원점회귀 약 5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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