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을 만나러 가는 길"(약칭 이순신 승전의 길)은 원래 옥포항 - 옥포대첩기념관 - 김영삼 생가 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시간과 체력 안배상..차로 김영삼 생가를 방문한다..

거제시 장목면 외포리 대계마을..

 

 

뒷산 대금산의 정기와 거제 동녁의 새벽을 알리는 닭의 정기를 타고 났다..

유신시대에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고 외친 그의 말은 어릴 적 체험으로 나온 말이라 하겠다.. 

 

 

 

 

그동안 여러 대통령의 생가를 방문했지만, 그의 생가가 제일 당당하다..

아버지가 멸치어장과 어선 10여척을 소유한 갑부였기 때문이다..

 

 

 

호연지기..

호연이란 강물이 말이 달리는 듯 거세게 흐르는 기세를 말한다..

그는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25세에 자유당 후보로 거제군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그는 1969년 11월 40대 기수론을 주장하면서 1971년 대통령출마를 선언하며 급부상한다..

김대중, 이철승이 40대 기수론에 동조하여 대선 경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엇으나, 결선투표에서 김대중에게 역전당한다..

 

 

그의 인생 역정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유신시대 말기를 장식한 1978년의 YH여공 사건과 1979년 신민당 총재직 정지 가처분 사건이다..

79년 9월 법원에서 그에 대한 총재직 가처분 결정이 내려지고, 얼마후 그의 지지 지역에서 부마항쟁이 발생한다..

그해 10. 26. 사건이 발생하면서 유신시대는 막을 내린다..

그는 주변의 반대를 물리치고 그의 정적이었던 박정희 빈소에 조문할 정도로 담대했다. 

그의 삶의 절정은 민주화 투쟁과정에 화려하게 꽃피웠다..

 

 

 

그의 집안은 사육신과 운명을 같이한 김문기의 후손이다..

그의 할아버지 대에 어업을 하여 부자되기 시작하여 그의 아버지는 멸치어장과 어선을 보유한 갑부였다..

그는 외아들로써 물질적인 지원을 충분히 받아 정치적 기반을 착실히 쌓을 수 있었다..

 

 

 

그의 어머니는 1960년 거제도에 칩입한 무장공비의 총에 살해당한다..

생가에는 그당시 총탄자국이 있다..

과연 총탄자국을 지금까지 보존하고 있었을까 의문이 생기긴 하지만..

 

 

79년 10.26. 이후 80년 서울의 봄에 3김이 정치 전면에 나섰을 때 미국에서 보는 3김 평가가 언론에 회자되엇다..

YS는 어리고, DJ는 의심스럽고, JP는 때가 묻었다...

5.18로 80년 서울의 봄은 저물었다..

1985년 국회의원 선거유세의 바람을 목격하였다.. 열기와 바람이 가득한 유세현장이었다..

그 결과 그가 주도하는 신한민주당이 제1야당이 되었고, 정치투쟁 끝에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으로 이어진다..

 

 

그가 좋아하는 대도무문(大道無門)

큰 도는 문이 없다..열린 마음으로 접근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그 단어 뒤에 千差有路(천차유로)..천 갈래의 길이 있다는 말을 알았을까?

 

87년 직선제 쟁취후 1노 3김의 대선경쟁시 YS와 DJ의 단일화 열망을 두사람은 외면한다..

결국 노태우의 당선..

선거 발표 직후 그의 표정을 기억한다..

선거 무효를 주장하며 국민 저항을 주장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햇다..

얼마후, 그는 표변하여 노태우,JP와 3당 합당을 선언한다..

그리고 여당 후보가 되어 대통령이 된다..

그의 집권초기의 행보는 하나회 해체, 금융실명제, 부동산거래실명제, 공직자 재산공개, 조선충독부 건물해체 등 마치 바둑황제 조훈현의 포석처럼 매끄럽고 빠르게 진행되어 인기가 높았다..

그 당시 총독부 건물 해체를 둘러싸고 건물 존치를 주장하던 후배와 논쟁하다가 서로 감정이 상해 한동안 말도 안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러나 세계화를 주제로 시작된 경제정책은 나라를 수렁으로 몰고 가기 시작햇다..

우선 로스쿨을 도입하려다 반대여론에 몰려 포기한 것은 결과적으로 잘되었다..

하지만, 성급하게 OECD에 가입하고 경제운용에 실책이 겹쳐 제2의 국치라고 불리는 IMF 사태를 초래했다..

마치 백제 의자왕이 초기에 신라의 40여성을 빼앗고 우쭐하여 흥청망청 지내다가 나당연합군에게 패망한 것과 같은 형국이 되었다..

그의 치세 말기 그의 아들의 빽을 빙자한 사기꾼들이 횡행하여 내 주변사람도 사기당한 적이 있었다

 

 

그의 생가 글씨대로 젊어서 호연지기를 가지고 민주주의를 위해 투쟁하여 대권을 장악했으나

정작 그 대권으로 민생을 그르치고 말았으니..큰 길(대도)의 문을 잘못 열어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그의 초기 인기는 80%였으나 그의 말기 인기는 8%도 되지 않았다..

그가 좋아하던 칼국수를 나는 한동안 먹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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