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남사 둘레길을 걷고 시간 여유가 있어 길목에 있는 배티성지로 간다...

여기에 순례길과 둘레길이 잇다..

순례길은 3.5km, 둘레길은 7.5km






쉼터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로  잠시 쉬고 출발..







도포 차림의 이분이 최양업 신부..

최초의 신학생이고, 두번째 신부..

열심히 포교하다가 과로로 선종..





그저 고요하라..

온전히 홀로 머물러라...







순교자의 묘로 가는 길은 상처받은 몸처럼 나무등걸이 드러났다..



몇백미터 올라 가쁜 숨을 정돈하면 평탄한 그늘길이 이어진다..

그때 왼편으로 보이는 길..

저 길이 둘레길인가 보다..





오늘은 체력을 위해 순례길, 둘레길 완주를 사양하고, 돌아선다..

언젠가 가을 쯤 선선할 때 다시와 완주해보리라..





돌아오는 길에 최양업 신부 박물관에 들렀다..







박해의 시대..신앙은 오히려 굳어져갔다..

자유의 시대..사람들은 돈에 집착해 간다.




그는 1821년 철종 년간 홍주 다락골 (현 청양군 화성군 농암리)에서 태어났다..

모방 신부에게 김대건(金大建)·최방제(崔方濟)와 함께 조선인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7년 6월 마카오에 도착하였다.

그뒤 최초의 조선인 신부인 김대건은 입국에 성공하여 활약하다가 1846년에 순교하였다.

이 무렵 최양업은 고군산도, 백령도 등에서 수차례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실패..

1849년 4월 상해의 마레스카(Maresca) 주교에 의하여 사제품을 받고, 두번째 조선인 신부가 되어 그 해 12월 조선입국에 성공하였다.

유일한 조선인 신부였던 그는 천주교가 다소 묵인되던 철종연간에 매우 적극적으로 전교활동을 전개하였다.

1861년 그는 과로로 쓰러졌고 1861년 6월에 사망하였다.

그의 장례식은 충주 박달재 부근  배론신학교에서 거행되었다.




어화 우리 벗님네야 우리본향(本鄕) 찾아가세

동서남북 사해팔방 어느곳이 본향인고

복지(福地)로나 가자하니 모세성인(聖人) 못들었고

지당(地堂)으로 가자하니 아담원조(原祖) 내쳤구나

부귀영화 얻었은들 몇해까지 즐기오며

빈궁재화(貧窮災禍) 많다한들 몇해까지 근심하랴

이렇듯한 풍진(風塵)세계 안거(安居)할곳 아니로세

인간영복(榮福) 다얻어도 죽어지면 허사되고

세상고난 다받아도 죽어지면 그만이라

우주간에 비껴서서 조화묘리(造化妙理) 살펴보니

체읍지곡(涕泣之谷) 그아니며 찬류지소(竄流之所) 이아니냐

아마도 우리낙토(樂土) 천당밖에 다시없네

복락(福樂)이 순전(純全)하고 길경(吉慶)이 충만하다

무궁세를 지내도록 영원상생(常生) 이곳이라

우리인생 바랄것이 이곳밖에 다시없네

세상만복 다받은들 천당복에 비길소냐


***

경허 선사의 참선곡과 비슷한 곡조다..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를 살았으니 귀에 익은 곡조는 비슷하겟지..

우리 세대가 비틀즈, 아바 곡조에 익숙하고

요즘 세대는 BTS, GOT7 곡조에 열광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피, 땀, 눈물 없이 얻어지는 것은 귀한 것이 아니다..

김대건 신부는 피의 순교자, 최양업신부는 땀의 순교자로 추앙받는다..



어느 목사님이 말했다..

"여러분 천국에 가고 싶습니까?"

모두 "예!!"

"그럼, 지금 즉시 갈 사람은요?"

....


사무여한(死無餘恨)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인생,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는 인생..

그런 인생을 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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