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백숲 우드랜드로 가기전 좌측에 기산마을이 있다..

그 입구에 다예원이 있다..

다예원은 정남진 로하스 녹색길 지원센터 겸 청태전 차를 마시는 까페인데..

가는 날에 주인장은 나주에 가고 없었다..






발효 녹차 청태전은 돈처럼 꿰어 달아 놓앗다..



  



이곳에 조성된 정남진 로하스 녹색길은 더운 날씨로 걷기 못하고

기산마을만 둘러본다..




전라도에 떠도는 이야기..

순천에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고

벌교에서는 주먹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서는 돈 자랑하지 말고

장흥에서는 글 자랑하지 말라..


그 장흥의 글 자랑은 이곳 기산마을 8문장에서 유래한다..

기산 마을의 서당인 봉명재(鳳鳴齋)에서 가사문학의 효시로 알려진 관서별곡의 작자인 기봉 백광홍, 동생인 옥봉 백광훈, 풍잠 백광안, 동계 백광성, 죽곡 임분, 서곡 임 회, 남계 김윤, 지천 김공희 등이 학문을 닦았고,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부급종사..

책상을 지고 스승을 쫓는다..

봉명재에서 수학하는 기산 8문장을 이른다..

그 당시 봉명재에는 유배온 신잠 (신숙주의 증손자)이 기봉 백광홍 등을 가르쳤다..




기산 8문장 중 기봉 백광홍은 당시 조선8문장으로 꼽혔다..

1553년 명종 임금이 성균관에서 문신들을 불러 모아 시회를 열었다.

이때 백광홍이 당당히 장원을 차지한다.

그 때 지은 시가 동지부인데 현재 기산마을에 그 시비가 세워져 있다.

음양의 두 기운이 자람과 스러짐에 따라 계절이 바뀌는 자연의 이치를 동지라는 절기를 주제로 노래한 작품이다.

그 때 명종이 장원한 그에게 중국시선집 선비보주 10책을 하사하였다..




세월청송로 풍상고죽소 (歲月靑松老 風霜苦竹疎)

세월 따라 청송은 늙어가고

풍상에 시달려 대나무는 성기어진다






 


기봉 백광홍은 1555년 봄에 평안도 평사의 벼슬을 제수 받아 부임하여 조선 기행가사문학의 효시인 관서별곡을 지었다.. 


 관서 명승지에 왕명으로 보내실제

 행상을 다사리니 칼하나 뿐이로다

연소문 내달아 모화고개 넘어드니

귀심이 빠르거니 고향을 사념하랴


관서별곡은 왕명을 받아 관서 지방을 향해 출발하는 것에서부터 부임지를 순시하는 것까지의 기행 노정과 서경을 시적 운치로 그려낸 가사다

이 가사 25년후 정철 송강이 관동별곡을 짓는데 큰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평안도 부임후 1년만에 병을 얻어 35세에 요절하였다..


***

 이수광(李係光, 1563∼1628)의 “지봉유설(芝峯類說)”나오는 기봉 백광홍과 고죽 최경창(崔慶昌, 1539~ 1583)과의 일화..

기봉이 쓴 “최고죽의 부채에 제함(題崔孤竹扇)”의 시에 얽힌 이야기이다.


관서 명승지에 큰 강 셋 흐르고
 곳곳마다 꽃피는 정자에 말 수레가 매어 있다네.
그대 백상루에 이르거든 물어나 보게
푸른 창에는 강남 꿈꾸는 이가 꼭 있을 것이니.


關西名勝大江三

處處花亭駐客柱
 君到百祥樓下問

碧竹應有夢江南


기봉이 평안도 평사로 있을 때 안주 땅에 있는 기녀와의 사랑에 빠졌다. 그러던 중 병이 들어서 벼슬을 내놓고 낙향하게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도중에 평안도로 가고 있는 고죽과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그는 고죽의 부채에 이 시를 써 주었고, 고죽은 후에 안주의 백상루에 찾아가서 이 부채를 그 기녀에게 전해 주었다. 기녀는 이미 부음을 받은 뒤였기에 부채를 받고 매우 슬퍼했다. 여기까지가 지봉유설에 쓰인 내용이다.
그리고 몇 년이 흐른 후에 고죽은 다시 청천강변 안주성벽에 자리하고 있는 그 백상루를 찾았다.

 이 때 고죽이 지은 시가 “평양에서 백 평사의 별곡을 듣고(箕城聞白評事別曲)”이다.


 금수산 고운 경치는 옛 모습 그대로이고
 능라도의 향기로운 풀은 지금까지 봄이건만
 님은 떠난 후 소식이 없으니
 관서별곡 한 곡조에 수건 가득 눈물이네.


錦繡烟花依舊色

綾羅芳草至今春
 仙娘去後無消息

一曲關西淚滿巾

고죽은 예전 부채를 전해 주었던 추억을 떠올리며 백상루를 다시 찾았다. 기녀는 고죽과 마주 앉아 기봉이 지은 “관서별곡”을 한 곡조 읊었다. 

기봉이 지은 “관서별곡”이 기봉이 평사로 재임하고 있을 때는 물론이요, 그 이후에도 꾸준히 전창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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