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를 골라 번역한 책..
그의 평이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중에 연암 박지원이 쓴 누나의 묘지명을 읽다가
이덕무처럼 나도 눈물이 났다..
***
유인(孺人) 휘(諱) 모(某)는 반남 박씨인데, 그 동생 지원(趾源) 중미(仲美)가 다음과 같이 묘지명을 쓴다.
유인은 열여섯에 덕수 이씨 택모(宅模) 백규(佰揆)에게 시집가 딸 하나와 아들 둘을 두었으며 신묘년 9월1일에 세상을 뜨니 나이 마흔셋의 나이를 얻었다. 지아비의 선산이 아곡이라장차 그곳의 서향 언덕 묏자리에 장사 지내려한다.
(자형) 백규가 어진 아내를 잃고 가난하여 살아갈 도리가 막막해 어린 자식들과 계집종 하나를 이끌고 솥단지 옷가지상자 따위 짐 궤짝을 끌고 배를 타고 산골짝으로 들어가 살겠다고 상여와 함께 출발하였다.
나는 새벽에 두뭇개 나루(斗浦)에서 전송하고 통곡하다 돌아왔다.
아아! 누님이 시집가던 날 새벽 얼굴을 단장하시던 일이 어제 일만 같구나.
나는 그때 막 여덟 살이었는데 (누나가 시집가는 것이 서운하고 분해서) 벌랑 드러누워 발버둥을 치면서 새신랑의 말투를 흉내내 말을 더듬거리고 점잖을 빼니, 누님은 부끄러워하다 그만 빗을 내 이마에 맞추었다.
나는 성이나 울면서 먹을 분통에 붓고 침을 거울에 뱉었다. 그러자 누님은 옥오리 금별 따위의 노리개를 꺼내주면서 나를 달래 울음을 멈추게 했다.
지금으로부터 스물여덟 해 전의 일이다.
말을 세우고 멀리 강위를 바라보니, 붉은 명정이 펄럭이고 배 그림자는 아득히 흘러가는데, 강굽이에 이르자 그만 나무에 가려 다시는 보이지 않았다.
그 때 문득 강 너머 멀리 보이는 산은 검푸른 빛이 마치 누님이 시집가던 날 쪽진 머리 같고, 강물 빛은 당시의 화장거울 같았으며, 새벽달은 누님의 눈썹 같았다.
울면서 그 옛날 누님이 빗을 떨어뜨리던 걸 생각하니, 유독 어릴 적 일이 생생하게 떠올라 기쁨과 즐거움이 많았으며 세월도 느릿느릿 흘렀었다.
그 뒤 나이 든 긴 세월을 이별과 슬픔에 괴로워하고 가난과 곤궁을 근심하다 훌쩍 시간이 지나갔거늘 덧없기가 마치 꿈결만 같구나.
형제로 지낸 날들이 어찌 이다지도 짧았더란 말이더냐.
떠나는 이 정녕코 뒷 기약을 남기지만 (去者丁寧留後期)
오히려 보내는 자 눈물로 옷깃을 적시거늘 (猶令送者淚沾衣)
저 조각배 이제가면 언제나 돌아올꼬 (片舟從此何時返)
보내는 자 하릴없이 언덕 위로 돌아오네 (送者徒然岸上歸)
***
위 묘지명을 처음 지을 때는 제목이 "백자 유인 박씨 묘지명"이었다.
위 글에서 보듯이 남편은 벼슬을 못하고 가난하게 살아다가 누나가 죽었다.
벼슬없는 사람의 부인은 유인(孺人)이러고 표시한다..
그러나, 누나 사후 남편이 벼슬을 하게되어 그 벼슬에 맞춰 누나는 정부인으로 추증된다..
그래서 다시 고쳐쓰고 제목이 "백자 증정부인 박씨 묘지명"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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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시대 향가 제망매가와 쌍벽을 이루는 명문이다..
스님과 선비의라도 혈육의 정은 다를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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