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에서 아침배를 타고 나와 완도를 거쳐 신지도로 간다..

완도 다리를 지날 때 장보고 장군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버스는 신지대교 휴게소에 정차했다

각자 체조로 몸풀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계단을 올라서자 치어리더급 진달래가 나타났다..

오늘의 좋은 조짐을 예고한다..




바다 건너 완도의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요즘 성형수술로 사람 얼굴이 비슷해지고

유행 묵수로 패션이 비슷해지고

전망대 등 남따라하기로 동네 풍광도 비슷해진다..

우리는 개성강한 개인주의보다 대동을 좋아하는 사회주의를 선호하는 성향이 있지 않는가?




드디어 진달래의 향연이 시작된다..

신춘에 보는 분홍은 새댁의 색이고, 출산의 색이고, 음양의 조화를 부르는 색이다..



이런 길에 진달래 노래가 어찌 없을 소냐

누구는 마야의 진달래, 누구는 이용복의 진달래(어린시절), 또 누구는 정훈의 진달래(꽃길)을 좋아하겠지만

나는 가곡 진달래를 듣고 싶다..


https://youtu.be/rlwatqoLcs8





어느 봄날에는 진달래꽃을 따라 화전을 붙여 먹은 적도 있었지..http://blog.daum.net/servan/6348314 참조

이 봄날에도 고이 진달래를 보내드릴 수가 없다..



동행더러 진달래 꽃잎을 따 모으라 했다..

점심시간..

불소주를 따르고 진달래를 띄웠다..

건배!

우리의 청춘을 위하여!!




걷기는 컴퓨터다.


컴퓨터는 1과 0로 이루어지듯

걷기는 동작과 정지로 이루어졌다.

그래서 걷기는 컴퓨터처럼 천변만화의 기능을 한다..

굳이 차이를 찾자면

동작보다는 정지 상태에서 묘용의 기운이 흐른다..

이 꽃다운 시절에 잠시 걸음 멈추고

꽃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걷기의 숨은 기능이다..




진달래와 길 그리고 바다

더불어 내가 하나되는 이길의 이순간

우리의 화양연화

우리의 벨 에포크

우리의 호시절




저멀리 명사십리가 보인다..

명사십리..

고운 모래가 아니다..우는 모래다..

누가??

수많은 유배객들의 슬픔을 함께한 모래가 운다..

신지도에 유배온 사람은 서예로 유명한 원교 이광사, 정약용의 형 정약전, 철종때 안동김씨 세도정치를 비판햇던 이세보 등이다..

그 중 원교 이광사는 국내파 서예가로 동국진체의 서체로 유명하다..

그는 소론 집안에 태어난 죄로 영조 시절 나주 괘서 사건에 연루되어 귀양가는데 총 22년간의 유배생활 중 15년을 신지도에서 지냈다..

신지도 금곡리에는 그가 유배생활하던 집과 원교목이라는 나무도 잇단다..


그와 추사 김정희와의 일화가 유명하다..

원교 이광수는 국내파로 서첩에 기초한 이룩한 동국진체를 배워 일가를 이루었다

추사 김정희는 해외파로 금석문에 입각한 청나라 첨단 유행의 옹방강을 사사하여 일가를 이루었다

정치노선이나 학문 경향도 다르다

원교 이광사는 소론 집안에 양명학을 연구햇다

추사 김정희는 노론 집안에 실사구시의 고증학을 연구햇다


요즘으로 말하면 금수저 집안에 해외 유학물을 먹고 최첨단 파리 패션감각을 가지고 건방을 떠는 추사의 눈에 국내파 원교의 글씨는 촌스럽게 보였다..

그래서 해남 대흥사에 들렀을 때 원교가 쓴 "대웅보전"의 글씨를 촌스러우니 떼라고 호통을 쳤다..

9년간의 제주 유배생활을 마치고 다시 들린 대흥사에서 추사는 원교의 글씨를 다시 붙이라고 부탁했다..

9년간의 유배생활 동안 철이 들어 다름의 가치를 깨닫고 공존을 택햇다..

아니, 정치노선의 차이로 15년의 유배생활을 하면서 붓한자루로 자신을 지켰던 원교에 대한 동병상련 때문이지도 모른다..




오빠가 빽을 사주지 않으면 미투가 된다..ㅎ



명사십리에서는 울음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솟아 오르는 열정이 잇다

그것이 봄이다..






걷기는 울몰(울모래- 우는 모래)마을에서 끝냇다..

마침 해수 스파에 들러 화장실에 가다가 마주친 오늘의 덕담


일소백우망(一咲百憂忘)

한번 웃으면 백가지 근심을 잊는다..



<오늘 걷기> 신지대교 휴게소 - 물하태 - 명사십리 - 울몰마을  약 10 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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