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화도선착장에서 고창 병바위까지는 50분거리..

내비에 "아산초등학교"를 치고 간다.

초등학교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학교를 돌아가면 두암초당이 있는 두락암이 나온다..

 

 

암봉을 파고 지은 정자..두암초당은 신비함을 준다..

 

이길은 고창 질마재 100리길 2코스 복분자풍천장어길 도중에 있다.

 

그러나, 두암초당으로 가는 길을 찾지 못하고(물론 안내표지도 없다) 방황하다가, 

그냥 병바위부터 가기로 했다.

 

병바위로 가는 길은 짧지만 솔바람 좋은 오솔길이다..

 

여기서 보니 신선의 술병같이 보인다.

 

 

 

병바위에서 동네 탐방객을 만난 김에 두암초당 가는 길을 물었더니, 오솔길이 있다고 한다..

물론 병바위 - 소반바위 - 두락암- 두암초당으로 이어지는 등산로도 있는데, 초보자가 가기는 험하다고 한다.

내가 누구냐?

그래도 경력10년의 걷기꾼인데..ㅎ

 

병바위 건너편 특이한 봉우리가 눈에 밟힌다..

선운산 천마봉?? 아니 안장바위란다..

 

신선의 술병 옆에 주안상 격인 소반바위가 보인다..

산책로가 끝나는 지점에 가파르고 좁은 등산로가 나타난다..

 

소반바위에 올라서니 병바위는 병이 아니었다..

그냥 신선의 짱돌??  ㅎㅎ

신선이 술마실 떄 방해하면 집어던지기 딱 좋은 모습니다..ㅎ

 

고소공포증 몰려오기 전에 얼른 암릉을 따라 이동한다..

 

두락암(전좌바위)이 보인다.

두락암??

바위 모양이 쌀을 세는 말(斗)을 닮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우리말로는 말바위..

 

두락암 가는 길은 내리막에 미끄러워 조심해서 가야한다.

두락암 정상에 오르려면 줄잡고 힘좀 써야 한다.

 

정상에 서면 안장바위를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다..ㅎ

 

두암초당으로 가려면 뒤로 다시와서 삼거리에서 우측길로 하산해야 한다..

 

볼때 마다 진기한 생각이 든다.

절벽를 파고 만든듯한 느낌..

 

두암초당..

 염재 송태회(念齋 宋泰會, 1872-1942)가 썼다.

그는 고창고등보통학교 교사 시절인 1928년  병바위 실경을 "호암실경도"라는 제목으로 그린 사람이다.

 

 

두암초당 내력을 보자.

원래 조선 명종때 하서 김인후의 제자인 호암(壺巖) 변성온과 인천(仁川) 변성진 형제가 만년에 병바위(호암) 근처에 호암초당을 짓고 소요했다. 그 인연으로 근처 강이름도 주진천에서 인천강으로 바뀌었단다.   

 

<두암초당기>

 

그뒤 호암의 5대손 변동빈이 선조들을 기려 이곳으로 옮겨 두암초당을 짓고, 아래에는 영모정을 지엇다.  

영, 정조 때 사람 황윤석(1729-1791)이 지은 "두암초당기"를 보면,

 

(두락암) 정상은 방정하여 웅대하였으며 그 바닥은 곧 막히고 굽어져서 마치 자루 같았다. 이런 이유로 두락암이라 부르게 되었다! 두락암의 허리에는 큰 굴이 있었는데 집을 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
일찍이 두암에 대해 생각했는데 저울과 저울추가 있어 두 별이 옳음과 같구나! 웅대한 자루는 오히려 이 집과 격이 맞아 떨어진다고 볼 수 있겠다. 이에 바위가 저울과 저울추와 함께 평형을 이루는구나! 사물이 정말로 이치에 맞다.

마음 또한 이러할지니 오직 사물에 응하여 얻어지는 평안함이 천하의 가장 큰 안락함이다.

고로 주자는 일찍이 사람의 마음을 논하면서 말하기를 마음은 저울추의 평평함과 같다고 했다.

이는 성인과 범인의 본지(本志)이고 전체 대용(全體大用)인고로 또한 당연한 일이다.

경(敬)으로써 본성을 보존하고 살피어서 어둠에서도 잃지 않은 연후에 평안이 있다

https://blog.naver.com/bsnmp/120031012388

 

건축당시 5대손 변동빈이 읊은 원운(原韻) 시 현판..

두락암(斗洛巖)에 초당 하나 있으니
오래된 버드나무 은밀하게 차가운 언덕을 지키네

 

구름 안개는 피어나 발우리를 만들고
초목을 거슬러 오르니 지팡이와 오두막집에는 향기 피어나는구나

 

그뒤 두암초당은 여러차례 중건되면서 1954년에 현재 모습으로 재건립되엇다.

 

산고수장(山高水長) 후학(後學) 김정회 보정(普亭)

 

산처럼 높고 물처럼 유유한 사람의 인품을 표현한 글이다.

이 글씨는 구한말 이 고장의 서예가 보정 김정회가 썼다.

그는 해강 김규진으로부터 서화를 배웠다..

해강 김규진은 고종 때의 서예가이자 최초의 어전 사진사였다..

***

산고수장이라는 말로 표현한 호암 변성온은 어떤 성격의 사람일까?

전하는 일화..

어느 날 길을 가다 소나기를 만났는데, 발걸음을 오히려 더 중후하게 하여 평상시의 태도를 잃지 않았다. 

이때 사람들은 모두 변화에 대처할 줄 모른다며 나무랐다. 

이때 변성온이 말하기를 “비가 내리는데 인가(人家)까지 가려면 멀었다.

새처럼 빠르게 날아도 결국 비를 피할 수는 없었다. 

비를 피하지도 못하면서 도리어 발걸음을 흐트러뜨리는 것보다는 평상시 태도를 변함없이 지키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라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다.

 

 

두암초당 중건기..

산은 '호암'이고 물은 '인천'인데 호남의 명승지에 일찍이 양 선생이 사셧는데 형은 호암이요 동생은 인천으로 우리 동방에 은덕 군자이자 아울러 유림의 으뜸이었다

바위의 곁에 금반 모양의 땅이 있었는데 호암, 인천 양선생의 옛날 여묘살이 했던 곳이다. 

여묘가 헐어서 집이 되었는데 집의 이름은 영모였다. 이는 양 선생의 부모에 대한 효를 생각하는 집이다. 

이후 당이 철거되고 이내 무덤이 되었는데 호암선생의 옷과 신발을 묻었던 장소가 되었다.

선생의 오세 손 평암공이 말하기를 두락암으로 당을 옮기지 않음은 불가한 일이라고 하였다.

땅의 모양이나 산세는 비록 다르다고 하더라도 그곳에 제사지내고 수양하는 장소로는 옛날의 집과 같은 맥락이었다. 또 선생의 아버지 첨추공의 호가 두암인데 산과 바위 돌이 모두 함께 의탁하는 곳이었다. 

 

http://banam.invil.org/index.html?menuno=2313&lnb=30105

 

***

위 중건기 작성년이 공부자 2482년으로 서기로 환산하면 1931년이다..

그 내용을 보면, 원래 병바위와 두락암 사이 금반모양의 땅에  호암초당이 있었는데 유실되었고, 5대손 동빈이 두락암 현재 자리에 두암초당을 지었던 것이다.

 

두암초당 상량문..

1935년 3월 24일 작성..

 

스승 하서 김인후가 제자인 호암에게 준 시..

 

不覺春風入小桃 
淸晨植杖立東臯 
尊中有酒堪傳白 
紙上無詩可和陶

어느덧 봄바람이 복사꽃에 부는 시절이라
맑은 새벽 막대 짚고 동쪽 물가에 서성인다
술동이엔 이백에게 전할 술이 있으나
종이엔 도연명을 화답할 시가 없구나.

 

酒以深壺醉 
詩非淺興吟 
燈花簷外雨 
與子一時心

술이란 항아리 비우면 취하기 마련이지만
시는 얕은 흥으로 읊을 수 없네
등불아래 처마 밖 빗소리 들으며
그대와 함께 이 한 때의 회포나 풀어보세

 

***

스승이 제자 호암의 아호를 술병(壺)에 비유한 위트넘치는 시를 지어 주었다..

하서 김인후는 인종 때의 성리학자로 퇴계와 교유하였고, 인종 사후 낙향하여 학문연구와 제자 교육에 전념했다.

(참고 하서 김인후 관련 글  https://blog.daum.net/servan/6349861 )

 

 

퇴계 이황이 호암에게 준 시를 적은 현판..

호암의 스승인 하서 김인후 사망후 호암은 스승과 교유하였던 퇴계선생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했다.

 

河西蓬館舊同遊
欻去修文白玉樓
今日逢君門下士
話君終夕涕橫流

하서는 성균관에서 옛날 함께 교유했던 친구인데
글을 연구하다 홀연 백옥루로 가셨네
금일 그대 문하 선비를 만나
밤새 그대 이야기 하며흐르는 눈물을 닦았다오


佳山佳水日徘徊
仁智吾猶未竭才
敢叩師門有何訣
請將餘論賁江臺

아름다운 산과 좋은 물에 매일 노닐어도
어짐과 지혜는 내 재능으로 얻기 어렵네
감히 제자 되기를 청하나 무슨 비결이 있겠는가?
바라노니 장차 못다한 논의는 강대(천연대)에서 마무리하세

***

조선 시대 전기에는 영, 호남의 선비들이 자유로이 교류하며 지냈음을 알겠다..

 

 

조선말 철종, 고종때 성리학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 1798~1876)도 두암초당에 들리고 현판과 시를 남겼다.

 

桂樹之稠山色幽 
依然招隱琴中遊 
危梯優入三層壁 
滴霤平連九曲洲

계수나무 빽빽하여 산 빛이 그윽하니

의연히 은자(隱者)를 초대해 거문고를 퉁기며 노네
위험한 사다리 건너 삼층벽에 어렵지 않게 오르니

처마의 빗방울은 구곡주(九曲洲)에 떨어지네 

 

고산경행(高山景行)

시경(詩經) 소아(小雅)에 나오는 “높은 산처럼 우러르고 큰 길처럼 따라간다. 高山仰止 景行行止”라는 귀절에서 따왔다. 고인의 큰 덕행(德行)을 흠모한다는 뜻이다

 

정자의 뒷모습..

 

만정 김소희 명창이 15세 때인 1932년경 이 곳에서 노래 연습을 하였던 모양이다.

그녀는 명창 송만갑에게 심청가와 흥보가를 배워 남원 명창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였고, 18세에는 정정열로부터 춘향가와 수궁가를 배워 소녀명창소리를 들었다. 

그의 제자는 안향련, 안숙선, 신영희 등이다.

 

두암정자에서 내려오면서 위 사진 바로 좌측에 오솔길이 있었다.

표시는 없다..

 

 

경관 관리 마인드가 있다면 적어도 전신주는 지하로 매설하기를..

 

<오늘 걷기> 고창 아산초등학교 주차장 - 병바위 - 소반바위 - 두락암 - 두암초당 - 주차장 약 2km

 

작지만 맵고, 좁지만 질 좋은  풍광을 만끽하니, 가성비 높은 경관이다..ㅎ

 

돌아오는 길에 병바위가 변한다.

사람모습이다..

이 동네 노인들은 이승만 얼굴을 닮았다고 이승만 바위라고 부른단다..

요즘 젊은이들은 이승만이 누군지 모르겠지??

이승기 형쯤으로 알려나?? ㅎㅎ

 

전체를 찍은 사진을 보니 금반옥호(金盤玉壺), 선인취와(仙人醉臥)의 명당 소리가 나올법 하다..

금 소반에 옥술병을 차려놓고 대취한 신선이 누워있는 형국..

요즘 화가의 눈에도 아래처럼 그려진다.

차제에 선운산  낙조대, 천마봉을 걷고, 질마재 2코스도 걷는 기회를 기약해봐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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