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칸 선병국 가옥 솟을대문)

 

삼년산성을 일주하고 내려와서 보은군 외속리면에 잇는 선병국 가옥을 방문하였다.

1919년-1921년 경에 지어진 99칸 한옥이다..

그것도 연화부수형의 명당자리를 잡아 지었단다..

하지만 지금은 퇴락하여 규모도 적다..

개인이 이런 건물을 유지하려면 재산이나 수익이 많아야 할터인데..

점차 규모가 축소되어가는데, 다행히 보은군 차원에서 관광자원보존과 육성을 위한 차원에서 보조를 할 모양이다.

 

 

(사랑채 입구)

 

안채는 주인이 살림을 하고 외인출입 금지라고 써있다..

사랑채에는 전통찻집으로 운영하고 있어서 주로 이곳을 관람한다.

 

 

(사랑채)

 

사랑채는 제법 운치가 있다..

왼쪽방에서 인기척이 있는데, 한참지나 안주인이 나오신다..

나중에 들으니 파륜궁 수련중이었단다..

수련으로 병을 치료하였다고 열심히 권유한다..

 

(사랑채 오른쪽 현판)

 

사랑채 오른쪽에 무량수각이라는 추사의 글씨가 새겨있다..

"무량수" 한량없는 수명을 의미하니 곧 극락을 의미하고, 무량수각은 극략전이라는 의미이다..

불교에서 극락전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전각이다..

 

위 추사의 글씨는 추사가 제주도에 유배를 가면서 대흥사에 들러 초의선사에게 써준 글씨와 같은 자형이다.

위 글씨에는 호를 완당이라 썼다. 

하지만, 추사가 제주 유배중에 고향인 예산 화암사의 중창을 위해 써준 글씨는 이와는 약간 살집이 빠진듯한 또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낙관을 추사로 하였다.

 


  (화암사 무량수각)

 

 

(사랑채 왼쪽의 현판)

 

사랑채 왼쪽에는 주자 글씨의 "위선최락"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위선최락(爲善最樂)’의 구절은 후한서(後漢書)라는 역사책에 실린 구절인데, 일자(日者)가 동평왕에게 “집에 있으면서 무엇을 할 때가 가장 즐겁습니까?”라고 묻자, “착한 일을 행할 때가 가장 즐겁다[爲善最樂]”고 대답하였다는 내용이다.. 

파란색의 글씨는 일종의 단청으로 보인다..글씨를 새기고 그위에 바탕은 흰색, 글씨는 파란색으로 칠한 것이란다..

 

 

(사랑채의 편액)

 

사랑채에 서화담의 시를 담은 편액이 있다..

행서체로 쓴 글씨다..

 

게속리산하(憩俗離山下) 즉 "속리산 아래에서 쉬다"라는 뜻같다..

 

음장족등건 (吟杖足騰蹇)
행장담부번 (行藏淡不煩)
진중사영욕 (塵中謝榮辱)
물외점량온 (物外占凉溫)
산색개인열 (山色開人悅)
계성소세원 (溪聲訴世寃)
유유천고사 (悠悠千古事)
독립향수론 (獨立向誰論)

 

 

얼핏 해석이 쉽지 않다..대충 이렇다..

 

지팡이를 두두려 발걸음을 가벼이 하고
등짐은 단촐히 꾸려 번거러움 없앴더니
티끌 가운데 영욕이 끊어지고
사물 밖에 차고 더움이 자리하네.
산색(단풍)이 열려 사람들은 즐거워하고
개울 소리는 세상 원망을 하소연하는데,
유유한 옛적 오랜 일이야
홀로 서서 향할뿐 누가 왈가왈부하랴!



(사랑채 뒤곁)

 

사랑채 뒤곁에 각종 꽃이 아름답게 피었다..

어릴적 뒤곁에서 보던 바로 그런 모습에 더 화려하고 다채로운 꽃이 가득하다..

주인이 내온 발그레한 오미자차를 마시며 바라다 보니 마음이 편안하다..

   



사랑채를 나와 보은 읍내을 지나다 황태탕으로 요기하고 한국비림박물관으로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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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년산성 서편 원경)

 

우연히 흘러간 역사스페셜을 보다가 삼년산성에 필이 박혔다..

어제 가려다 비가 와서 미루다가 오늘 아침 일찍 출발했다..

가는 동안 비는 그치고 대청댐의 흙탕물을 감상하며 보은에 도착..

길을 몰라 헤메다가 대충 적힌 표지판을 따라 가보니 군청은 안니오고 복지체육센터가 나온다..거기서 마음씨 착한 안내 여직원으로부터 관광지도를 증정받았다..지도를 봐도 애매하여 지나가는 분에게 물어보니 

바로 건너편 야산을 가리킨다..

과연 정상부근에 산성이 보인다..

신라가 3년에 걸쳐 축성하고 축성이후 함락된적이 없다는 성치고는 얕으막한 산에 지어졋다..

(서문지 부근 성벽)

 

서문쪽 성벽은 계곡을 가로 질러 축성되어 가까이서 보니 그 높이 보통이 아니다..

이성은 신라 일선군(현 선산) 사람 3000명을 동원하여 3년동안 축성하였다하여 삼년산성이라 부른다 한다..

 

이 산성은 그당시 최고의 공력을 들여 완성시켰고, 요새로서의 기능을 과시하려고하였는지 백제를 멸망시킨후 무열왕이 당나라 사신을 이곳에서 접견하였다고 한다..

당나라로 하여금 신라군의 위력을 인식시키려고 하였겠지만, 워낙 큰 성이 많은 당나라 사람이 이정도 성이 눈에 차기나 했을까?

 

(서쪽 들판)

 

서쪽 들판 건너편 산위에 백제의 산성이 있었단다..

그러니 이곳이 백제 신라의 최전선이었다..

이 들판에서 백제,신라의 병사들이 혈전을 치렀을 것이다..

(서문안 연못)

 

성의 제1 요건은 식수가 풍부해야 해야한는 것이다..

성안에 이런 연못이 잇고, 더구나 물이 계속 서문지 옆 수구를 통하여 계곡 쪽으로 흘러나가는 정도이니 물걱정은 없는 성 같다..

 

(동쪽 성벽)

(동쪽 전경)

 

동쪽은 속리산과 상주 방향이다. 속리산으로 이어질 줄 알앗는데, 속리산은 저 멀리 보인다..

이 산성은 묘하게 평지에 돌출한 지형이다..




(남쪽 전경)


남쪽으로는 영동과 이어지고 서쪽으론 옥천과 이어진다..

북쪽으론 청주, 괴산 방면이다..

 

백제 성왕때 태자로 하여금 3만의 군대로 옥천의 관산성을 공격하게 하던 중 성왕이 친위군 50명을 대동하고 전선시찰 나갔다가 이 성 출신으로 김무력의 비장인 도도에서 기습당하여 전사하고, 그 머리는 잘려 신라 궁전의 계단에 묻혔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몇백년 뒤 왕건은 후백제가 점령한 이성을 공격하다가 대패하였단다..

 

과연 이성은 해발 325미터의 오정산에 위치한다하여 얕잡아 볼 성이 아니다..

묘하게 평지 돌출하는 지형인데다가 중턱에 석성을 두껍게 쌓아 놓으니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답다..

또한 지리적 위치가 사방으로 통하고 특히 신라의 당항성, 한강유역과 연결하는 교통의 요지이고 방어하기는 쉽고, 유사시에는 백제의 옆구리를 노릴 수 있는 그야말로 링커형 선수라고나 할까?

 

그 옛날 사람들의 택지 안목이 절묘함에 절로 탄복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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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불교도래지 부용루 - 설산고행도)

 

영광(靈光)군에 다녀왔다..

1년전부터 갈 일이 있어 벼르다가 결국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어제 다녀왔다.

영광이란 말이 신령스런 빛이란 뜻이다..

그곳엔 백제불교의 도래지, 원불교 교주의 탄생지, 기독교도의 순교지가 있어 영적인 빛이 감돈다는 지명으로 알았는데..

어느 분 말씀은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그 지명이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는 것을 예견한 것이라고 한다.

모두 멋진 해석인 것 같다.

 

먼저 백제 불교 도래지를 들렀다.

이유는 단순히 법성포에 가서 우선 점심을 먹기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제불교도래지는 예상외로 잘 정비되는 중이었다.

법성포(法聖浦)라는 의미가  佛法이 들어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이다.

그는 마라난타..백제 침류왕 때 도착하였다.

그는 인도승려로 서북 인도 간다라 지방 - 실크로드 - 남중국 - 영광 법성포에 다다랐다.

대단한 원력의 소유자이고, 백제로서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원조 불교를 직수입한 셈이니..

흔히 교과서적으로 남방불교의 전래인 것 처럼 알고 잇었는데, 여행경로를 보니 북방 대승불교의 전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래지 안 연못의 백련)

(탑원)

 

1만 4000천 평 부지에 조성된 테마 공원엔  기념탑, 부용루, 간다라 유물관, 탑원 등이 자리잡고 잇다..

 

관람후 계획대로 법성포 식당에 갔다.

다랑가지 식당인데.. 영광굴비의 맛과 꽃게의 맛을 같이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비데가 설치된 화장실이 식당의 정결함을 대변하는 것 같다.


(백수 해안도로 - 칠산정에서)

 

백수면 해안도로가 20여킬로미터 펼쳐진다.

소문대로 경치도 좋고 한적하여 드리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날만 쾌청하였다면 금상첨화였겠는데, 연무가  가득하여 아쉬웠다.

 

칠산정이 있는 이곳 칠산 바다는 조기들이 회유하며 산란을 하던 곳이란다..

예전에 이 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법성포에서 말린 것이 유명한 원조 영광굴비다..  

지금은 조기들이 산란을 하지 않고 조기가 잡히지 않으니 이제 영광굴비는 다른 곳의 조기를 들여와 말려서 파는 것이다..

 


(마파도 촬영지 인근의 풍광)

 

 

백수해안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마파도 촬영지라는 표지가 보인다.

이곳 동백마을에서 촬영하였다니 섬인양 눈속임도 간단할 듯하다.

위 사진으로 봐도 외국의 해안 풍광 못지 않다..

 


(불갑사 대웅전)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절터..

물론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중기에 세워진 것이다.

목조건물 중 천년 이상된 건물이 우리에겐 없다..

가장 오랜 것이 수덕사의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모두 고려때 건물이다..

대웅전 꽃살무늬 문이 유명하다는데, 어째 제대로 보질 못하고 왔다.

온 가족이 법당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같이 3배를 하였다.

아들이 묻는다. "신도도 아닌데 왜 절을 합니까?"

"남의 집에 가면  윗어른께 인사도 하는데 , 절에 가면 부처님께 인사하고. 교회에 가면 예수님께 인사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문제되겠느냐?"

 

문제는 공경하는 마음이다.

서로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종교분쟁과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불갑사 사천왕문 앞  천연기념물 참식나무 군락지 그늘)

 

이 절은 최근 단장이 한창이다..군에서 적극 지원하는 탓인지 일주문도 멀찍이 근사하게 지었다..하지만 입구부분은 아직 심은 나무가 작아 그늘이 없어 땡볕이다.여름 철엔 절까지 걸어가기가 힘들다..

 

최근 우리나라 문화재, 자연개발현황을 보면 관광 마인드나 자연보호 마인드 없이 전시적 목적으로 개발만 한창이다..

예컨대 큰 수목은 없이 관상용 나무에 아스팔트 포장으로 대표되는 현상..관광 교통 표지판도 그렇고..

 

마인드 가진 사람이 최종 소비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 모르면 최종소비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계획을 세우고 수정하고 다시 정비하는 정성이 필요하다..

 

굴뚝산업이 없어진 마당에 외국처럼 관광산업을 진흥시켜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비장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류가 뜨고 있는 요즘 관광 마인드가 차세대 우리나라의 활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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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방 안의 하회탈 장식)

 

아! 빠진 것이 있었네요.

저녁을 들고 토방에 20여명이 죽 둘러앉았다. 좌장은 60에 가깝고, 5살 어린이를 대동한 젊은 부부 등 남녀노소가 덕담과 술을 나누다 술이 얼큰하자 한 양반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키니 어색한 기분에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그때 좌장이 한마디 하신다.

낮에 차를 타고 오다가 들은 농담 좀 하겠다.

“복상사의 주지스님 이름 아는 사람?.......절정스님

 그럼, 그 옆에 있는 허탈사의 주지스님은? ......조루스님“

 그러자, 킥킥거리더니 누가 이어 받는다.

“으악새가 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

또, 복상사가 절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하니

웃음소리가 더 커진다.

이때 누가 또 거든다.

“복상사는 애인 위에서 돌아가시는 거고..

 본부인 위에서 돌아가시는 것은 뭔지 아시나요?

...

순직이요!!”

모두 뒤집어진다.. 이후는 분위기 풀업..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서편; 멀리 하얀 건물 왼편이 서애라고 불리고, 그 뒷산이 원지산이다.)

 

하여간, 뜻뜻한 토방에 잠을 푹 자고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났다.

화천의 백사장를 거닐다 서애(西厓) 앞까지 다다랐다. 고목나무 옆 벤취에 앉아 서애를 바라보는데 귓가에 모래시계의 테마음악 “백학”이 흐른다.

문득 시상이 떠오른다.


서애(西厓)를 바라보며


화산(花山)을 등지고

부용대(扶蓉臺) 옆에 끼고

하얀 백사장을 강 따라 걸었네


새날이 뒤따라와 같이 걸어서

물 감도는 꼭지에 다다라

세 그루 고목 곁에 앉아

서애(西厓)를 바라보며

늙은 신하의 한스런 눈물을 생각하네


귓가에는 모래시계의 백학이 흐르고

왜병에 도륙당하고 명군에 시달리던

백성의 아픔 위로하듯 들리니


삼동의 이른 아침

추운 줄도 모르겠네.  

 

서애 류성룡은 21세 때 형과 함께 이황 선생을 찾아가 공부를 배웠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31세 일시 고향에 내려와 하회마을 서쪽에 서당을 짓고 자신에 호를 서애(서쪽 언덕)라고 지었다 한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로 천거하였으며,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고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전군지휘관)가 되어 승전으로 이끌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하회 마을에 기거하며 옥연정에서 “징비록”을 집필하여 자신의 반성과 후세의 불망(不忘, 잊지 않음)을 바라는 심정을 남기고 있다.

 

아침은 “안동 간고등어”를 반찬으로 들었다.

그리곤 하회마을을 돌았다.

동네를 돌다보니 겸암파(형 류은룡의 후손) 후손인 탈랜트 류시원의 문패도 보인다.

동네의 구조는 삼신할미를 모시는 삼신당을 기준으로 대종가인 겸암 류운룡의 종택인 양진당이 남향으로 감투봉(문필봉)을 바라보고 있고, 그 옆으로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이 서향으로 서애와 원지산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서애파의 후손 중에 남촌댁과 북촌댁이라는 소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겸암의 서재인 빈연정사, 서애의 서재인 원지정사 등이 주요 관람지이다..

(삼신당 신목 : 소원을 비는 쪽지가 가득 걸렸다. 나도 아이들 성취를 기원하는 글을 써서 줄에 묶었다) 

삼신당의 신목 옆에 선 남근..불끈.. 이런 정기와 삼신할미의 정성이 결합하여  잘난 후손들이 계속 이어지나 보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있고 마음 가는데가 다른 것 처럼 나는 주로 옛시나 현판의 글씨 등에 주로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병이다.

(남촌댁 벽에 붙은 계오덕도) 

 

머리에 쓰고잇는 큰 관은 文이요

발에 난 날카로운 며느리발톱은 武요
적을 맞아 용감히 싸우는 것은 勇이요

농사를 위해  새벽에 때를 알리는 것은 信이요

 먹이를 보면 동료들을 불러 함께 먹는 것은 義라!!

 

(북촌댁에 걸린 현판 : 화경당 - 한석봉의 글씨를 모아 판각한것 같다)


(북촌댁에 걸린 현판 : 북촌유거)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다.

고종 때의 문관으로 서예에 뛰어났으며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였다.

<미남궁체란?>

북송(北宋)의 서예가·화가인 미불의 글씨체를 말한다.

미불은 자 원장(元章). 호 남궁(南宮)·해악(海岳).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신. 관직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고 궁정의 서화박사(書畵博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수묵화뿐만 아니라 문장·서(書)·시(詩)·고미술 일반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고, 소동파(蘇東坡)·황정견(黃庭堅) 등과 친교가 있었다.

글씨에 있어서는 채양(蔡襄)·소동파·황정견 등과 더불어 송4대가로 불리며,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이었다.

(대종가인 양진당)

(충효당내 현판)

미수 허목이 전서로 쓴 "충효당"

허목은 이원익()의 손녀사위이다. 경기도 연천의 향리이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지만 이황의 학통을 이은 남인의 거두 정구()에게 학문을 배웠다. 남인의 거두로 노론의 송시열과 정적관계였다.

전서()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인의 뿌리격인 류성룡의 후손의 거택에 그의 글씨가 붙어있는 내력을 알겠다.

 

(원지정사 안에 있는 연좌루의 현판)

 

연좌루(燕坐樓)의 연(燕)은 예기에서 '기쁘다, 편안하다'라는 뜻의 안(安), 혹은 희(喜)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연좌는 '편안하게 앉아있다. 고요히 앉아 마음을 존하다'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예기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문에 따르면 서애가 이곳에 머무를 당시 이 연좌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제연좌루(題燕坐樓)라는 시도 남아있다. 현재의 기록에는 정조 5년(1781)에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판의 글씨는 일성(一聲) 권응룡(權應龍)이 썼다.

(원지정사의 현판)

 

서애가 지은 원지정(遠志亭)  시는 이러하다.


門掩蒼苔竹映堂  문에는 푸른 이끼 덮였고 대나무 그림자 마루에 비치는데 

栗花香動午風凉  밤꽃 향기 한낮의 서늘한 바람에 움직이네,

人間至樂無他事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 별 것 없으니

靜坐看書一味長  고요히 앉아 책 읽는 재미 가장 유장하네.


서애가 직접 남긴 원지정사 기문에 나오는 작명의 내력은 이렇다.

"정사를 북림(北林)에 지으니 무릇 오칸 집이다. 동쪽은 당(堂)이라 하고 서쪽은 재(齋)라고 하였으며 재로 말미암아 북으로 나가다가 한번 꺾어 서쪽 높은 곳에 누(樓)를 지어 강물을 굽어볼 수 있게 하였다.

 편액의 이름을 원지(遠志)라 하니 객들이 내게 그 뜻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원지는 본래 약초이름으로 일명 소초(小草)라고도 한다. 옛날 진나라 사람이 사안(謝安)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하나의 물건인데 어찌 두 가지 이름인가' 하니, 어떤 이가 답하기를 '산중에 처해 있을 땐(은거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을 닦을 때) 원지라고 하고 세상에 나오면(벼슬을 할 때) 소초라고 한다' 고 하니 (대답을 못한)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나타냈다.

 나는 산중에 있을 때도 진실로 원대한 뜻(遠志)이 없었고 세상에 나와서는 소초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와 서로 닮은꼴이다.……이러한 것을 유추하여 그 뜻을 당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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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에서 보는 하회마을)

(하회마을 빈연정사에서 바라본 부용대)


구비 구비 길을 따라 오후에 하회마을 어귀에 도착하여 화천(花川, 안동 하회지역을 흐르는 낙동강 중류 부분) 건너 부용대 절벽 위에 서서 눈발을 맞으며 하회마을을 조망한다.

강변에 늘리리 기와집과 초가가 빼곡하고 주변 산이 연꽃처럼 둘러싸고 강물이 감도는 형상이 이른바 “연화부수형” 즉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형상의 명당이라는 호칭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고, 마치 김홍도가 그린 한 폭의 실경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류성룡 시비)

부용대 양 옆에 자리 잡은 류성룡, 류운룡 형제의 공부방 겸암정(형)와 옥연정(동생)을 둘러보았는데, 형제의 우애를 기리는 시비(詩碑)를 읽다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 형님 정자지어

겸암이라 이름 붙였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 가득 피어있구나


발끝에 향그런 풀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 되어 소리 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 내어 밤새 흐르네.

 

(류운룡의 서당인 겸암정 앞에 있는 시비, 선생의 시와 글씨)

(시비의 해설이 옆에 판각되어 있었다..좋은 아이디어..

이황선생을 모시고 청량산에 갔다가 이황선생이 운을 떼자 시를 지었다는 내력)

***

(경암정 현판 : 이황선생의 친필)

겸암은 성품이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며, 좋고 싫음의 구분이 너무 분명했다. 감정을 드러냄에도 항상 솔직하여 동지 간들이 공경하면서도 멀리할 만큼 모난 데가 있었다. 그러나 겸암은 퇴계선생에게 겸암이란 이름을 받고 이 정자에서 5년여 각고의 수행 끝에 모나고 별난 성품을 다스려 너그럽고 원만한 덕성을 길러, 도량이 너그럽고 혼후(渾厚)한 인품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인품은 훗날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모두에게 존중받았다. 택당(澤堂) 이식이 지은 겸암묘갈명에는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여(謙謙君子), 내면의 본체는 굳세고 외면의 마음 씀은 온유하셨도다(體剛用柔)'라고 적고 있다.


空齋獨臥雨淋淋  빈 집 홀로 누웠는데 비가 내리니

窓外梅花太損心  창밖 매화에 너무 마음 쓰이네

不是天寒春意薄  날씨 추워 봄이 엷어질까 염려함이 아니라

却愁桃杏苦相侵  도리어 복숭아 살구꽃 괴로이 서로 침해할까 시름함이네.

(겸암 작시)

 

(옥연정 안에 판각 : 광풍제월)

<해설>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다..

송서()》〈주돈이전편()〉에, 북송()의 시인이자 서가()인 황정견()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쓴 글이 있다.

'정견칭 기인품신고 흉회쇄락 여광풍제월( ;정견이 일컫기를 그의 인품이 심히 고명하며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도다.)'

주돈이는 고인(:옛사람)의 풍모()가 있으며 정사()를 베풀음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북송의 유학자로, 송학()의 개조()로 불리며, 태극()을 우주의 본체라 하고《태극도설()》과《통서()》를 저술하여, 종래의 인생관에 우주관을 통합하고 거기에 일관된 원리를 수립하였으며, 성리학()으로 발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광풍제월이라는 말은 훌륭한 인품을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잘 다스려진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또 '제월광풍()', 줄여서 '광제()'라고도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소나무를 심고서" 서애의 시비)

63세에 소나무 묘목를 심는 심정을 그리고 잇다..

비록 자신은 보지 못하더라도 천년이 지나 하늘높이 솟아 봉황의 보금자리가 되라는 축원을 담고 잇다..


(부용대 아래 옥연정에 서잇는 소나무.. 

서애가 소나무 심은지 400여년 지났는데..그 후손인듯한 저 소나무도 기상이 범상치 않다..)


(하회 마을 초입의 병산서원의 편액..철종때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때 내린 편액인지 모른다.. 철종은 나뭇꾼 출신이라 직접 쓰진 않았겠지..)

 

***

여행이란 그 고장의 경관을  보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설화를 듣고, 토속음식을 맛보고, 전래노래를 들어야 제격이라..

저녁엔 추위에 떨며 기다리다 “안동찜닭”을 맛있게 먹고,

밤새워 옛 단가 “사랑가”을 열심히 배우다 목이 쉰 채로 잠이 들었다.


 

사,사랑을 할려면

요,요렇게 한단다

요 내 사랑 변치 말~자

굳게 굳게 다진 사랑

어화 둥둥 내 사랑

둥당가아 둥당가~아

덩기 둥당기 내 사랑

꽃과 나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우리네, 사,사랑은 아이가이가

두~둥실 좋을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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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문화답사 팀에 끼어 안동 하회마을을 1박 2일로 다녀왔다.
며칠전 부터 주말 대설주의보가 예고되어 마음이 심란하였는데, 정말 당일 아침부터 눈발이 심상치 않앗다.
그런데 차가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로 들어가니 전혀 낯선 나라에 온 것처럼 날씨가 밝아지고 공연한 걱정을 한 꼴이 되었다.


(고려 문하주서 야은 길재선생지묘)

첫날은 구미 오태동에 있는 야은 길재 선생의 묘소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길재선생은 정몽주의 성리학풍을 이어 후세에 전해 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으로 이어지고, 그뒤 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출발점이 되는 분이다.
그는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하였고 조선에서 벼슬살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자식의 출사는 막지 않았으니, 강경파는 아닌 것 같다.

 

유명한 그의 시..


오백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하회마을의 대표적 인물인 류운룡, 류성룡 형제는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그 중 형인 류운룡이 인동현에 현감으로 부임하자, 그 학맥인 뿌리인 길재선생을 기려 “지주중류”비를 세웠다.
그 비문에서 길재를 백이,숙제에 비견하였는데, 그 비문은 동생 류성룡이 형의 뜻을 받들어 썼다 한다.

(비문 앞쪽 "자주중류"라 쓰여 있다)

 

지주중류(砥柱中流)의 의미는 이렇다.
지주(砥柱)는 황허강 중류에 있는 산 이름이다.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우(禹) 임금이 치수(治水)를 할 때 산언덕이 물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산의 좌우를 파냈다. 이렇게 해서 강물은 산의 양쪽으로 갈려 흘러가게 되었는데, 그 산의 모습이 물 속에 기둥처럼 솟아 있었으므로 지주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경공(景公)의 수하에 공손접(公孫接)과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라는 3명의 용사가 있었다. 이들은 경공의 충복이었으나 조정의 기강에 해를 끼칠 정도로 오만무례하게 행동하였다. 그래서 재상인 안영은 이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2개의 복숭아를 놓고 3명 가운데 공을 더 많이 세운 사람에게 상으로 준다고 하였다.

이때 고야자는 예전에 경공을 모시고 황허강을 건널 때 괴물 같은 자라가 나타나 수레를 끄는 말을 물고 지주산이 있는 중류로 도망친(以入砥柱之中流) 일을 거론하면서, 자신이 쫓아가 괴물을 죽이고 말을 되찾아 왔노라고 공을 내세웠다.

 이 고사는 《안자춘추》에 실려 있으며,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2개의 복숭아로 3명의 용사를 죽이다)라는 고사성어의 전거(典據)가 된다.

여기서 유래하여 중류지주는 황허강의 격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뚝 솟아 있는 지주산처럼 난세나 역경 속에서도 지조와 절개를 잃지 않는 의연한 인물 또는 그러한 행동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우리나라 고려 말기의 충신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을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라고 하는데, 이 고사성어에서 따온 명칭이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비 후면, 류성룡이 지은 비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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