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정원에서 내려와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군위 삼존석굴로 간다.

근처 주차장은 보이지 않고, 양산서원 정문앞에 공간이 있어 차를 세운다.

 

신라 석굴암의 역사로 보면 경주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이 초기 형태이고, 그다음이 이곳 군위 삼존석굴이고, 

그 100년뒤에 만들어진 최절정의 작품이 토함산 석굴암이라고 한다. 

 

석굴앞 비로전이 한 말씀하신다..

 

彿身充滿於法界  普顯一切衆生前
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

부처님 모습이 법계에 충만하사
모든 중생 앞에 나타나시네

 

원효굴, 삼존석굴..

굴을 좋아하시나??

 

본존불은 아미타여래불이고, 좌보처 관세음보살, 우보처 대세지보살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존불의 수인이 항마촉지인이라면, 이는 석가모니의 성도시 수인인데..

그러면 본존불을 석가모니불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아쉽게 요즘은 석굴앞으로 가지 못하게 막아 놓고 있어 멀리서 보아야 한다..

멀리서 보니, 바닥 반사빛이 법안을 어지럽히고 있다는.. 

 

논란거리가 싫은 비로자나불은 지권인을 명백히 밝히고 한적한 곳에 은거하신다.

은거부하구(隱居復何求)

한적한 곳에 은거하는데, 다시 무엇을 더 구하랴..

 

아니요, 구할 게 있습니다.

은거하는 곳에도 봄빛은 필요합니다..ㅎ

 

정랑..이름이 곱다.

화장실, 해우소 보다 더 정겹다..

 

이곳에도 팔공산둘레길이 있네..

기회되면 몇구간 걸어야겠다.

 

이어서 화본역으로 간다
일단 출출해서 역 앞 꽈배기 집부터 들른다.

 

동행과 의견이 일치하는 먹거리 중 하나..

 

최근 젊은이들의 각광을 받는다는 곳..중앙선 열차가 지금도 가끔씩 선단다..

 

 

역 건너편에 급수탑이 있다.
증기기관차 시절에 물을 공급하는 장치..

 

쓸쓸한 시설을 만회해주는 "소녀와 고양이"
요즘 고양이는 대세 캐릭터다..

적당히 거리를 두면서 스킨쉽을 나누는 녀석들

 

급수탑안에는 백마가 천고뒤에 나타날 초인을 기다리고 있다.

누구나 얼신대며 사진찍을 자유는 있다.

 

고양이의 존재자체로 소녀는 위로를 받는다..

 

간이역이 건네는 덕담..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있다.

마음먹는대로 세상이 펼쳐친다.

그러니, 멋진 신나는 굳센 착한 마음을 가져라.. 

 

동백꽃이 여기도 피었다.

그런 붉은 꽃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이 동네에 살았단다.

영월 청령포에서 억울하게 죽은 단종의 사체를 거두워 무덤을 만들어주고 사라졌던 충의지사 엄흥도..

그가 이곳 화본마을에 살았더랜다.

그 음덕으로 이곳이 각광을 받는지 모른다.

 

신춘여행을 군위, 의성으로 잡았다.

전국시군 순례계획은 이제 막바지에 접어 들었다. 다음에 화천에 가면 완료된다.

차가 군위로 접어 들어 졸음쉼터에 잠시 쉬엇는데, 빨간 사과가 환영한다.

관광안내도를 보니, 오늘 군위에서 만날 장소가 한눈에 들어온다.

팔공산 하늘정원, 군위삼존석굴, 화본역..

 

팔공산 하늘정원에 가려고 맘을 먹는데, 망설렸던 부분은 길 정보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동산계곡 초입에서 부터 하늘정원 주차장까지 8km 고바위 산길을 올라가야 한다.

길이 교행이 가능할까??

결론은 가능하다. 다만 주차장이 15대 정도 규모라 늦으면 걱정인데, 길가에 세우는 차도 많이 있었다.

가급적 남보다 일찍 가는게 정답이다..

 

주차장에서 하늘정원을 거쳐 비로봉까지 갈 수 있다.

거리도 왕복 3km,  동봉까지 왕복해도 4Km..

 

주차장에서 데크길로 200미터 오르면 원효굴 삼거리가 나온다.

우측으로 가면 원효굴인데, 하산시에 들르기로 한다.

 

하늘정원 가는 길에 주변 군부대 시설을 찍지마라고 방송이 나온다.

 

군위의 명소 그림이 그려져있다..

화본역 급수탑도 보이고..

 

넌 충분히 괜찮은 사람이야..

음..알고 잇어..

 

하늘정원에 일연의 삼국유사가 펼쳐져잇다..

 

하늘정원 전망대에 서니 원효굴이 보인다.

청운대 아래 걸린 원효굴..

원효가 수도를 했단다..

 

원효굴 앞에 한사람이 앉을 정도의 좌선대도 있고...

졸면 천길 낭떨어지다..

언제 이곳에서 수행했을까?

원효 인생의 팩트 중 역사적으로 확인된 것이 몇가지있다.

1. 요석공주와 사이에 설총의 탄생 - 무열왕 2년(655년)

2. 당항성에서의 깨달음 - 문무왕 1년 (661년) 의상과 함께 당나라 유학가려고 당항성까지 갓다가 무덤 속에서 오도한다.

이 2사실은 역사적 팩트인데, 팔공산 원효굴에서 수행한 것은 이 기간 사이에 있었던 일일까?

 

참 절묘한 공간이다..

구도에의 의지가 이 정도는 되어야 오도한다면 불교는 참 어려운 종교다..

 

하늘정에 바람이 거세게 분다.

 

하늘정에서 데크길과 포장도로를 따라 비로봉으로 간다.

 

 

그때 건너편 봉우리에 사람들이 가득하다..

나중에 알아 보니 동봉인것 같다..

 

 

비로봉 가는 길에 버들강아지가 이쁘다..

 

응달에는 아직도 눈길이다..

 

돌아보면 하늘정원 전망대와 청운대가 우뚝하다..

 

청운대 좌측아래로 보이는 절이 오도암인가??

 

비로봉 가는 길에 절묘한 수행처 원효굴에서 눈에 떠나질 않는다..

 

비로봉 정상은 통신탑에 밀려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엇다

한때는 하늘에 제사지내는 천제단이 잇었건만...

 

정상석도 바위에 뺑끼칠해놨네..

1191m..

 

바로봉에서 동봉, 서봉이 가깝고 고저차도 별로 없다.

동행은 다녀오자고 아우성인데..갈길이 멀어서 다음을 기약한다..

 

돌아오면서 보는 하늘정원과 팔공산 능선이 아름답다..

 

군위에는 김수환 추기경의 생가도 잇다.

 

잘 될거야, 늘 그랬던 것처럼..

 

군위 삼존석굴도 얼릉 가보고 싶다..

 

원효굴 삼거리에 와서 원효굴로 내려간다..

 

714계단을 내려가면 오도암이다.

거꾸러 올라올려면 힘좀 들겟다.

하지만, 이곳에서는 100계단만 가면 된다.

 

 

중국에서 보는 듯한 아찔한 잔도를 넘어가는데..

이때는 몰랐다..

천애절벽에 수행자가 있었다는 것을..

 

다시 아찔한 계단을 내려가야 원효굴이 있다.

 

정말 한사람이 앉을 정도의 공간의 굴이 있다..

 

원효굴에서 바라보니 비로봉이 들어온다.

비로봉..비로자나불이다..

 

돌아나오는 길에 보았다.

중생의 방문 편의를 위해 수행자는 잠시 자리를 피해 천애절벽에서 기도드리고 있다는..ㅎ

 

찬바람 속에서 주차장 푸드트럭에서 오뎅을 먹는다..

뜨뜻한 국물이 저절로 설법을 한다. 

" 뜨신 국물 반기는 이 놈은 무엇인고??"

 

 

이 길 이름을 일연테마로드(효행의 길)이라고 한다..

효행의 길이라??

일연은 9살에 출가했다..

고려 시대에 동진출가(어린 미성년 출가)는 어떤 의미였을까?

9살에 구도의 의지로 자발적으로 출가하였을 것 같지는 않다.. 

그렇다면, 자식 부양하기 어려울 정도로 가난했던지, 아니면 자질이 잇어 고승 대덕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기 유학 시키는 뜻으로 출가시켰던지..

둘 중 하나이리라..

 

 

위천 둑방으로 이어지는 길은 걷기꾼들의 발길이 뜸하여 다시 잡초의 세상으로 복귀중이다..

 

 

 

 

일연..

그는 고려 무신정권 시절 22세 때 승과에 수석합격한다.

그는 54세에 대선사가 되고, 78세에 국사에 책봉되었으나, 충렬왕의 재가를 받아 95세의 노모를 모시기 위해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인각사에 머물며 노모를 봉양한다..

 

 

9살에 출가할 때..그의 어머니는 28살쯤 되었을터..

부자, 모자의 관계를 보면..

어려서 부모와 헤어지면 그 사모의 정이 깊을 수 밖에 없다..

공자는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었기에 3년상을 주장했듯이..

요즘처럼 부모가 80이 넘도록 살며 치매로 간병까지 하면 사모의 정은 얉어질 밖에..

 

 

호남의 전설적인 진묵선사는 모친을 지극정성으로 모시고, 모친의 묘소에 향화가 그칠 것을 염려하여 묘터를 잡았는데

지금은 성모암이 위치하여 묘소를 돌보는 곳이 되었다.

 

 

 

 

9살에 광주 무량사로 출가한 소년은 양양의 진전사를 거쳐  대구 달성 비슬산 대견사 ( http://blog.daum.net/servan/6351234 )에서 22년간 수도하면서

삼국유사를 구상하고 자료를 수집하였고, 말년에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집필하게 된다..

 

 

그의 삼국유사에는 효도에 관한 설화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개인적인 정서에 기인하는 바가 컸으리라..

 

삼국유사 진정사 효선쌍미 이야기는 일연의 마음을 대변하는 내용 같다..

http://www.jikjimuseum.org/wind/content.asp?pWID=06&pID=17

 

 

 

엉겅퀴에 나비..

까칠해도 친구는 있다..ㅎ

 

 

이제 막 모내기를 끝내 논은 군기가 잡힌 신병들의 행진처럼 당당하다..

 

 

절앞 위천 건너 학소대는 천고의 학을 품고 있음직하다..

한암이 말햇지

"삼춘에 말 잘하는 앵무새가 되기 보다는 천고에 자취를 감춘 학이 되리라"

일연이 삼국유사를 남긴 뜻은 말 잘하는 앵무새를 벗어나려 함이라.. 

 

 

 

 

오라..화산 기슭 인각사로 오라..

하늘 아래 두갈래 세갈래로 찢긴 겨례가 아니라 한겨례임을, 옛 조선의 단군으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한나라엿음을

우리 자손 만대에 소식 전한 그이 보각국사 일연선사를 만나뵈로 인각사로 오라..

 

 

시대에 따라 표현하는 그의 모습 달라도 그의 정신이야 변함이 있으랴..

 

 

 

기념관에 글씨 한폭...

삼국유사 혜통강룡(惠通降龍)에 나오는 찬시다..

 

山桃溪杏映籬斜(산도계행영리사) : 산도(山桃)와 계곡의 살구가 울타리에 비쳤는데
一經春深兩岸花(일경춘심양안화) : 한 줄기 길에 봄은 깊어 두 언덕에 꽃이 피었도다
賴得郞君閑捕獺(뢰득랑군한포달) : 다행히도 낭군의 힘으로 한가히 수달을 잡아
盡敎魔外遠京華(진교마외원경화) : 마귀와 외도(外道)를 모두 서울에서 멀리했도다

 

 

 

 

 

 

일연의 삼국유사를 들고 경주에 가면, 지금도 그시절의 지명과 설화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로 인해 신라의 기이한 향가를 알게 되엇으니 그의 은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그는 왜 삼국유사를 썼는가??

늙은 70대 후반 인생의 말미에 이 책을 쓴 이유가 무엇인가?

그가 태어낫을 때 무인정권 시대였다..정변과 내란이 그치지 않았다...

그러다가 몽고의 30년 침략이 이어졌고, 무신정권을 몰아내고 다시 개경으로 천도하였으나 나라는 몽고의 부마국이 된 시절이었다..

그 때 그는 나라와 민족이란 무엇인가 생각햇을 것이다..

한겨례, 한 나라 시절의 종교적 기적과 미풍양속을 생각했던 것이다..

 

 

 

<오늘 걷기> 인각사 - 전망대 - 정상 - 일연공원 - 위천둑방길 - 학소대 - 인각사 약 7KM 



군위 걷기에 나섰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의 마지막 거처..

그는 왜 이 곳을 열반지로 삼았는가??



경부 - 당포 - 중앙 고속도로를 타고 동군위 IC로 나가서 도착한 곳...인각사..

인각..기린의 뿔...

절 부근 화산의 형상이 기린을 닮았고, 절터가 기린 뿔의 위치란다..

이 절의 기린 같은 존재가 일연이다..




신라시대 부터 뿌릴 두고 있는 이 절은 고려시대 그 위상은 구산 선문의 앞자리에 위치했다..

극락전 주련 시..


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재하방)

着得心頭切莫忘 (착득심두절막망)

念到念窮無念處 (염도염궁무념처)

六門常放紫金光 (육문상방자금광)


아미타불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마음 머리에 붙여(화두삼아) 간절하게 잊지마라.

생각이  다하고 다하여 무념처에 이르면

육문에서 항상 금빛 광채가 나리라..


일연..

그는 삼국사기와 쌍벽을 이루는 삼국유사를 써서 고조선의 단군과 신라의 향가를 우리에게 전해준 고마운 분이다.



국사전의 주련시..


청백가풍직사형  淸白家風直似衡   청백 가풍은 저울과 같으니

기수고하낙인정  豈隨高下落人情   어찌 높고 낮음을 따라 인정에 떨어지겠는가?

칭두불허창승좌  秤頭不許蒼蠅坐   저울엔 날파리가 앉는 것도 허락치 않으니

사자경시실정평  些子傾時失正平   조금만 기울어도 평정함을 잃는다네


0.001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자세로 수행해야 도를 깨닫는다는 말일테지..



일연국사의 부도탑은 원래 자리에서 이 곳으로 옮겨졌다..




보각국사 정조지탑이라는 글씨가 보인다..




비각은 파편만 남았다...

원래는 서성이라고 불리는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하여 새긴 귀한 것이라, 중국의 사신도 탁본을 얻어 가곤 했는데,

임진왜란 때 왜군이 비석을 자빠뜨려 탁본을 떠가면서 파괴되기 시작해서 현재는 이런 몰골이 되었다..



둘레길의 입구는 이 비각 뒤편에서 시작된다..



산길을 800미터 쯤 올라가야한다..



초반을 제법 잘 단장된 길이 전망대  정자까지 이어진다..




정자에 앉아 난자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고..ㅎ

잠시 쉬면서 군위호바라본다..

위천을 막아 만든 댐..

댐 아래는 일연공원이다..




위 마을이 우리가 지나갈 곳이다..



전망대에서 한숨 돌리고 정상으로 향한다..

계단세례가 시작된다..



별 볼일을 없는 정상을 위해 이런 계단을 만들었을까 싶지만

이 계단이 없으면 길을 내기 어려웟겠지..

정상 지나서 시작되는 내리막을 보면 안다..



연결 고리로서의 내리막을 참고 가면 원 부도탑지에 도착한다..

원래 여기 있던 부도탑을 현재 자리로 옮겨놓고 여기는 복사품을 세웠다..





전망대에서 내려다 보던 그 마을을 지나간다..

외양간 소들이 신기한듯 바라본다..




위천을 건너면 일연공원과 효행길 2코스(묘소길)가 이어진다..

위천 다리 밑에는 평상을 설치해놓고 대여하는 곳이 있어 사람들이 몰려든다..

위천 점용허가는 받고 사업을 하시는지?? ㅎ






일연 국사의 모친 묘소 가는 길 입구에는 "효"자가 크게 써있다..

그는 국사로 책봉된 78세에 95세의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고향인 이곳으로 돌아온다..

봉양기간은 1년 남짓 모친은 96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일연공원이라는 한자 중 앞 3자는 왕희지의 글씨로, 마지막 원 자는 왕희지 글씨를 구하지 못해 송나라 명필 황진경의 글씨로 집자해서 만들었단다..





올갱이 잡는 모녀의 뒷모습이 정겹다..



5월의 열정 장미터널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작동않는 인공폭포와 에스로드..




그네 다리로 건너보고..

더위를 피하려고 정자로 갔으나 지저분하던지, 지붕이 플라스틱이라 열 차단이 안되어 그냥 지나오려니 6월의 더위가 어깨를 누른다..

위천 다리 밑 유료 평상이 유혹한다..




이제 위천의 둑방길을 따라가면 인각사가 나온다...<계속>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