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고도 교토의 역사 탐방..

교토의 첫개척자가 신라인들이다.. 5세기 후반 궁월군(하타)이 이끄는 120현민들이 건너와 개척한 동네란다..

마치 영국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신대륙으로 건너가 개척한 것처럼..

백제 멸망을 막기 위하여 500척 함선에 4만병력을 파견할 정도로 긴밀한 사이 였던 백제-왜 왕조.. 

백제멸망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두려워한 나라의 왜왕조가 교토지역(헤이안)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일본으로 정한다. 

그이후 천년고도가 된다..

한때 당나라 장안, 신라 경주, 일본 교토(헤이안)은 평화공존의 영광의 시절을 누렸다.

그러니 교토에는 우리역사와 관련된 유적도 많다.

교토는 청수사, 금각사를 주마간산으로 다녀온 적이 있다.

이책을 읽다 보니, 두군데를 가보고 싶엇다.

1) 신안해저유물선에 적재된 물건의 발주자였던 동복사, 

2) 창건자 명혜상인이 원효, 의상을 존경해서 두분의 초상화를 그려 보관하는 고선사

https://blog.naver.com/papertigerson/221919761465

 

우리는 일본인들이 한국인을 존경한다면 당연하게 여기고, 한국인이 일본인을 존경한다면 친일파, 토착왜구로 비난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가 일본을 왜국이라고 부르고, 왜인은 키가 작다고 깔보는 경향이 있었는데,

처음 일본에 가서 놀란 것은 건물과 불상이 엄청 크다는 것이었다.

한중일 3국 중에 우리나라가 건물이나 불상의 크기가 작더라..

그러니, 함부로 크다 작다 할 것은 아닌 것같다.

 

영국인들이 주축이 되어 미국땅을 개척햇어도 미국인은 영국인이 아니다.

그러나 미국과 영국은 1차대전이후 서로 협력관계가 되었다.

백제사람들이 주축이 되어 일본 땅을 개척햇어도 그 후손인 일본인이 한국인과 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한국과 일본은 임진왜란과 일제침략으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

이웃 나라와 원수되어 살기 어렵다.

프랑스와 독일은 그 사실을 알고, 2차대전후 화해, 통합의 길로 가고 있다.

한국과 일본도 그 사실을 알고, DJ- 오부치 선언으로 새미래를 선언했으나, 문통- 아베 시절에 다시 원수가 되어간다.

문통-아베의 반동의 시대는 끝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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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로드의 마지막 코스는 골굴사..

숙소인 보문단지로 부터 추령터널을 지나 골굴사로 이르는 사이에 넓은 호수 덕동호를 지난다..

 

 

덕동호로 수몰되기전에 그곳에 고선사라는 절이 있었다..

그 절은 원효가 수행한 적이 있으며 그를 기리는 서당화상탑비가 발견된 곳이다..

삼국유사 "서복불언"이라는 설화는 원효가 고선사에 있을 때의 일어난 일이라고 밝히고 잇다..

 

골굴사에 도착했다..골굴(骨窟)이라는 말이 바위굴을 의미한다..

원효가 말년에 머물렀다는 혈사(穴寺)도 구멍뚫은 절이라니 비슷한 느낌 아닌가?

하지만 실제 방문하여 마애불이 새겨진 바위를 보면 여기가 혈사로구나하는 생각이 딱 든다..

 

 

그러나 지금은 소림사 분위기가 난다..

중국의 소림사도 달마의 선불교보다는 무술이 더 알려졌듯이 이곳도 원효의 일심, 화쟁 사상보다 선무도가 더 유명해진 곳이다..

 

 

 

달을 품은 산..함월산의 골굴사..

 

 

일주문 옆에 선 사천왕의 초콜렛 복근..여자들은 사천왕을 좋아 하겠다..ㅎ

 

 

 

 

 

대적광전에 이르는 길에 말을 타고 가는 사람이 있다..

그가 주지 적운 스님..설씨라니 설총의 후예인지도..

이곳에서 선무도, 승마, 국궁등을 수련한단다..승병의 전통을 이어가는 곳인가 보다..

 

 

 

 

포대화상 옆에 개보살이 있다..

이름이 동아라 동아보살이리고 소개되었네..웬만한 사람보다 성실히 수행하였단다..

 

 

아래 강쥐도 동아보살 후예인지 의젓하고 순하다..

 

 

 

 

 

마침 무술공연이 있어서 잠시 관람한다..선무도 동작만 시연한다..

 

 

 

 

 

관음굴과 마애불을 참관한다..

바위들은 사암이라 쉽게 부스러져 굴 만들기는 어렵지 않겠다..

 

 

 

 

원효는 한반도를 벗어난 일이 없다.

그러나 중국의 신간 서적들을 두루 섭렵하고 수행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당대의 거의 모든 경전에 주석을 달고 명쾌한 해석을 내린 그의 사상은 중국의 선종과 일본 화엄종에 영향을 미쳤다.

특히 가마쿠라(鎌倉) 시대 일본 화엄종을 중흥시킨 묘에(明惠, 1173~1231)는 원효를 흠모했다. 그는 고잔지(高山寺)를 창건하고 원효의 저술을 강의했다. 또한 화승인 조닌(成忍)에게 청하여 「화엄종조사회전」(華嚴宗祖師繪傳, 일명 『화엄연기』[華嚴緣起])을 만들었다. 일본의 국보인 이 화집은 원효와 의상의 생애를 담아낸 역작이다. 한편 원효의 사상이 집약되어 있다고 평가되는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은 인도에까지 전해져 범어로 번역된다.

 

실제 설총의 아들인 설중업(薛仲業)도 779년 신라사절단으로 일본에 갔을 때 그는 당시 일본 최고 문호인 오미노 미후네(淡海三船·722~785)로 부터 할아버지인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에 대한 찬사까지 들을 수 있었다 한다.(<삼국사기> 제46권, <신라서당화상비>, <속일본기> 권36).

 

 

그런 인연이었을게다..

지금도 이곳에선 외국인 템플스테이가 왕성하게 진행된다..

이곳에 도착했을 떼 검은 피부의 아가씨가 케리어 가방을 들고 종무소로 들어가는 장면을 보았고, 자원봉사자도 외국인이 보인다..

 

인연은 소중하게 가꾸어야 한다..

그것이 인생을 만드는 것이다..그것이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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