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추사의 글씨를 좋아하여  추사관련 책을 많이 사 읽고, 추사 유배길도 걸었다..

그런데 이 책 처럼 충격적인 내용은 없었다..

 

기존 평론가들이 부작난화(不作蘭花)로 해독하는 것을 저자는 부정난화(不正蘭花)라고 해독하면서 완전히 다른 해석을 시작한다..

부정난화라고 해독하려면 정난화가 있다는 것인데,

정난화는 남송 말기  사초思肖 정소남鄭所南이 노근란露根蘭을 그리며 남송에 대한 충정과 반원 정신을 표현함으로서 시작된 난화를 말한다.

이런 충절을 강조하는 난화는 성리학이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군림하던 조선에 들어오면서 선비문예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정난화 대접을 받게 었단다

 

그런데, 정소남 이전의 난화 즉 굴원의 이소 등에 나타난 난의 상징은 "백성의 소리"였단다..

추사가 추구한 부정난화란 이런 전통적인 상징으로서 난화를 그림으로써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공평한 인재등용 등으로 개혁을 바라는 동지를 규합"할 목적으로 난화를 그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추사는 고증학적인 입장에서 성리학의 공리공론적 경향을 배격하고 공자가 원래 추구했던 현실 직시하는 실사구시의 유학을 난화를 통해서 표방했다 한다.  

 

난엽이 오른 쪽으로 꺽인 그림은 서풍이 부는 것인데, 서풍은 가을 바람이고 역경, 고난을 뜻하고, 왼쪽으로 꺽인 그림은 동풍이 부는 것인데, 동풍은 봄바람이고 순경, 미래상을 표현한다

 

문자향, 서권기란 "그림과 글씨의 조형에서 풍기는 느낌"이 아니라 "난화의 제화시나 문장 숨겨진 사의(寫意)를 읽어 내야" 가능하다..

기존의 학자들은 그런 학문적 깊이가 없어서 추사의 글씨를 오독한 부분이 많다고 주장한다..

이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고전 공부의 깊이가 느껴지고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말한다.

다산이 귀양지에서 500권의 책을 저술할 때, 지적 학문적 수준에서 그와 필적할만한 추사가 그저 난을 환쟁이 수준으로 희롱이나 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아들 상우에게 한 말이 의미가 있다..

아들 상우가 제주도에 종이를 가득 보내자, 추사는 서너 장이면 될 것을 많이 보냈다며, 

“넌 아직 난경취미를 터득지 못했다(汝尙不解蘭境趣味)”며 “문자향서권기를 가슴에 담아 그리면 많이 그릴 필요가 없으니 종이는 더 이상 보내지 말라”고 질책했다.

 

이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라.

단순한 난 그림이라면 많이 반복해서 그려야 발전할터이지만, 추사처럼 글자 속에 의미를 담으려면 난화를  많이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문자향, 서권기란 고전에 달통하고 자유자재로 변용할 수있어야 깊이 있는 제화시를 쓸 수 있고, 그런 연후에야 추사스타일의 난화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요즘 사군자 그림에 깊이 없는 제화시를 쓰고, 문인화라고 칭하며 "문자향, 서권기를 풍긴다"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의 결과라는 결론이 나온다..

 

 

 

 

 

 

다음날 ..다대포 걷기에 나섰다..

지하철 괴정역에서 내려 15번 마을버스를 타고 몰운대 성당에서 내리면 그앞이 아미산 전망대..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낙동강 하구..안개 속에서 더 크게 보인다..

모래섬..이름도 정겨운 맹금머리..백합등..

 

 

우측으로 눈을 돌리면 사하구의 공장들이 강변에 즐비..저멀리 을숙도는 안개 속에 잠자고 있다..

 

 

아미산 전망대..아미산 봉수대로 가려다 아파트 숲을 보고 포기한다..

 

 

숲길을 따라 다대포로 내려간다..

 

 

공사중인 다대포..해변으로 접근하니 황야다..

 

 

아니 사막 같다..

 

 

낙동강을 따라 거슬러 걸어간다..시간의 흐름을 뛰어 넘는 것 처럼..

 

 

노을정 못미처 다시 돌아온다..오늘의 목표는 몰운대..저멀리 몰운대가 보인다..

 

 

이것은 정월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 준비..

정월 대보름..부럼까기..귀밝기 술..쥐불놀이..이런 풍속은 집안 행사로는 나에게서 끝난다..

 

 

개울하나 건너뛰면 몰운대..

조선시대엔 섬이었는데..모래가 퇴적되어 육지와 이어졌단다..

해안에 데크가 설치되어 걷다가 해변을 지나 군부대 경계부근에서 산으로 오른다...

 

 

숲속에 다대포객사가 보인다..

조선시대에는 수군 부대인 다대포진이 설치되어 있었다..

부산진보다 2배의 병력이 주둔했었단다..

420년전 임진년..700척의 왜수군이 나타났다..이곳 다대포진..부산진..동래부에서 왜군과 싸웠으나 중과부족..

당시 부산권역에 거주하던 1만여 군민이 몰사..

거족무곡자야(擧族無哭者也)..

가족을 통털어도 곡해줄 사람이 없었다..

 

 

회원관(懷遠館)..

멀리 임금을 그린다는 말이기도 하고. .멀리 임진년을 추모한다는 말일 수도 있을 터..

나라가 무력하면 백성이 괴롭다는 것은 고금동서과 같을테지..

 

 

숲길을 따라 전망대로 내려간다..

 

 

갯바위에서 수선놀이 세월가는 줄 모른다..

 

 

몰운대(沒雲臺)..안개와 구름에 싸인 곳이라는 지명 답게 눈길 가는 곳마다 아름답다...

 

 

화손대로 가다가 샛길로 빠졌는데..이곳이 제일 맘에 드는 오솔길이다..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이  제해권을 장악한뒤 드디어 1592년 9월 1일 166척의 함대를 이끌고 부산포 공격에 나섰다..

이곳 다대포..절영도를 지나 부산포 내항에 돌진.. 100척의 왜선을 불태운다..

그 전투 와중에 녹도만호 정운이 몰운대 부근에서 전사..이 섬 끝에 그를 기리는 비가 서있다..

위 전투가 벌어진 음력 1592년 9월 1일을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5일인데..이날을 부산시민의 날로 정하였다는 사실..

거족무곡자(擧族無哭者)의 원통함을 반이라도 풀어준 날을 잊지 않겟다는 의미...

 

 

오늘 걷기 - 아미산 전망대- 다대포 해수욕장 -노을정- 몰운대 해안데크 - 회원관(객사)- 전망대-화손대- 입구..약 7km

 

 

피곤하여 좀 일찍 끝내고 자갈치역 부산극장 맞은편 18번완당집에 간다..

열차 잡지에 소개된 부산의 맛집..전에 살던 동네 완탕이 생각나서

국물이 시원하다..

 

 

그런데 마음이 쉽게 변한다..몰운대처럼..노상 안개와 구름 속이니..

항상 화창한 햇살이 가득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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