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판글씨가 사비루인줄 았았더니 사자루란다.

원래 사자루라는 건물보다 사자수라는 말이 먼저 있었다.

사자수는 금강, 백마강의 옛이름으로서 사비강, 사비하, 백강, 백촌강 등으로도 불렸단다.

 

조선시대 임천관아 건물을 1919년에 옮겨짓고 사자루라고 명명햇단다.

글씨는 비운의 왕자, 고종의 아들, 의친왕 이강이 썼다.

조선 개국을 알리는 숭례문 현판을  풍운의 세자, 세종의 아들 양녕대군이 썼다는 설이 있는데,

백제 땅 사자루 현판은 망국 왕자 이강이 썼다는 아이러니..

 

또다른 현판 백마장강..이 일품이다.

장짜가 긴 강이 흐르는 듯하다. ㅎ

글쓴이는 해강 김규진으로, 고종 때의 서예가...최초의 어전 사진사..였다

 

半千基業作荒丘   작천기업작황구
滿木山河摠是愁   만목산하총시수
孤巖春寂寂   화락고암춘적적
龍亡大洋水悠悠   용망대양수유유
管絃當日繁華地   당현당일번화지
漁逐斜陽慘憺秋   어축사양참담추 
白髮那堪今古淚   백발나감금고루
滄浪一曲更回舟   창랑일곡경회주 

 

5백 년 터전이 황량한 언덕이 되니
눈에 가득한 산하가 모두 근심이네.
꽃 지는 외로운 바위 적적한 봄날에 
용은 죽고 큰물만 유유히 흐르는구나.

한때는 풍류가 번화하던 땅이었으나
석양에 고기 잡는 쓸쓸한 가을이 되니
백발이 된 지금 눈물견디기 어려워
창랑가 한 곡조 부르며 배를 다시 돌리네.

 

<송용재 (宋龍在)>  

 

송용재는 대전 이사동 사람으로 자는 이견(而見), 호는 용암(龍庵)으로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하여 아편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 인물이다. 그의 아들 송진백이 말미에 차운하여 시를 지었다.    

 

<부여회고>

 

백제도성총고구  百濟都城摠古
상전벽해사인수  桑田碧海使人愁
천정무형산역역  天政無形山歷曆
군창여몽수유유  軍倉如夢水悠悠
화락고암천재루  花落高巖千載淚                       
탄백마일조추  龍呑白馬一朝秋
삼충의백금래조  三忠義魄今來
홀억라강경도주  忽憶羅江競渡舟

 

백제도성은 옛언덕 되었으니
뽕밭이 바다로 바뀐듯 사람을 슬프게 하네
천정대는 형체도 없이 산만 뚜렷하고
군창터도 꿈속의 물처럼 유유히  흐르네
낙화암 높은바위는 천년동안 눈물짓고
백마 삼킨 용도 하루아침에 쓸쓸해졋네
삼충신의 의로운 혼백을 지금 조문하려니
문득 다투어 강 건너던 배가 생각나네

 

<전남 나주 반남면 금운 정순규>

정순규는 반남면장을 지낸 지역 학자란다.

 

고란사로 내려간다. 구비진 오솔길이 정겹다.

 

고란사 글씨도 해강 김규진이 썼다.

전국을 다녀보면 의외로 그의 글씨가 많다..

 

진공묘유(眞空妙有)..

비어있는 듯하나 묘하게 자리하고 있는 그것..오온의 집적체 속을 들락날락하는 그것..

불교의 공사상과 중도사상을 대변하는 한 마디..

 

18세 동자 신동호가 썼단다..

18세면 동자라고 하기엔 다 컸는데.. 겸손의 표시겠지..ㅎㅎ

그는 1946년생으로 부여출신 서예가 인전(仁田), 동호(東浩) 신덕선(申德善)이다..

그는 YS 장례때 명정 글씨를 쓰기도 했단다..

 

518년에 일본 여인 3명이 백제로 불교 구법여행을 왔다.

그때는 무령왕 18년이다.

무령왕도 일본에서 귀국하여 즉위하였으니 왜와 백제의 교류가 활발했던 시기이다.

한편, 일본에 정식으로 불교를 전해 준 것은 무령왕의 아들 성왕 30년인 552년이다.

성왕은  왜왕 긴메이에게 달솔 노리사치계를 통해 불상과 불경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어찌 불법도 전해지기 전에 일본 여인들이 구법여행을 온단 말은 모순이 아닐까??

 

일본 기록에 의하면, 588년(위덕왕 35년)에 선신, 선장, 혜선 등 일본 비구니 3명을 백제에 보내 유학을 시켰고 이들은 백제에서 계를 받아 정식 비구니가 되어 2년 후인 590년 돌아갔다고 하는데, 이들의 설화가 고란사 벽화 내용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고란사 벽화의 518년은 588년의 오기가 아닐까??

 

백마강 위로 돛배만 유유하다.

참고로 부소산 구경을 다하고 고란사 선착장으로 내려와 돛배를 타고 구드래 선착장으로 이동하는 방법도 있다.

 

고란사 앞마당 고양이만 관광객과 밀당을 즐기며 살만 두룩두룩쪘다.

 

낙화암으로 간다.

정상엔 백화정이 있다.

 

낙화암 전망대에 서서 금강을 바라보는데,

문득 백마강 노래 한귀절이 터져 나온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풍이 그리웁구나.

youtu.be/OZcM_5ibl5I

 

의자왕과 그 자손들은 어찌되었을까??

 

660년 음력 7월 9일 나당 연합군이 침입하였다.

1. 백강구 방어진이 무너지고, 5일만에 사비성 30리 밖에 당군이 밀려들고 백제군 1만명이 전사하는 상황에 이르자 의자왕은 왕자 부여효와 함께 웅진성(공주)으로 피신한다.

2. 사비성은 태자 부여융, 부여효 등이 방어하지만, 3남 부여효가 왕을 참칭하면서 내분, 부여융은 탈출한다.

  전설에 의하면 부여융은 계룡산 고왕암(현 신원사 암자)으로 피신햇다가 체포되었다고 함..

3. 웅진성의 의자왕은 피신 5일만(침공 10일째)인 7. 18일 성주 예식진 일행에게 감금되어 항복하게되었다는 것이 최근 유력설..

4. 의자왕, 부여융, 귀족 등이 당나라로 끌려가자 왜국에 있던 왕자 부여풍이 귀국하여 부흥운동에 참여

   부여풍은 660년부터 663년 백촌강 전투때까지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이었다.

   그러나 백촌강전투 패배후 백제는 소멸되었다.

5. 부여융은 당나라 앞잡이가 되어 임존성에 항쟁하는 흑지상지 등의 투항을 권유하여 부흥운동을 와해시키고, 당나라 웅진도독부의 웅진도독이 되어 당나라군의 얼굴마담을하다가 신라의 대당항쟁이 심해지자 676년 당나라로 복귀..

6. 당나라는 부여융 등 백제유민을 요동의 건안성으로 이주시켰는데, 후손들은 웅진도독 대방군왕() 칭호로 발해에게 멸망할 때까지 150년간 존속햇다고 한다.

7. 부여융은 낙양에서 사망하여 의자왕과 함께 북망산에 묻혔다..

8. 부여융의 아들 부여덕장의 2녀(훗날 부여태비)는  711년 당나라 황족 이옹의 두번째 부인이 되었고 5아들을 낳았는데, 그중 아들 이옹이 719년 괵왕(함곡관 부근)으로 책봉되면서 부여태비도 괵왕비로 책봉되었다.

727년 아들 이거(李巨)가 괵왕이 되면서 731년 태비(왕의 어머니)에 책봉되었다. 
7년 뒤인 738년,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9. 당에 항복한 후손들은 당의 귀족이 되었고, 일본에 남아있던 왕자 부여용, 부여선광 등은 일본의 귀족이 되었다.

   나라는 거덜내놓고 백성은 고통받았는데, 그들은 잘살았다는 이야기..

 

 

낙화암을 나와 부소산을 한바퀴 돌아나가로 한다.

 

삼충사에 도착했다.

벡제 말기의 충신,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신 사당이다.

 

성충..

656년 (의자왕 16년) 3월 왕의 정치에 대해 간언을 하다가 미운 털이 박혀 투옥된다.

28일 단식하면서 상소를 올린다.

국제정세를 보건대, 전쟁이 일어날 것이 예견됩니다.

그럴 경우 백강입구 기벌포을 막고, 탄현을 지켜십시오.

 

그가 죽고 4년뒤 나당연합군이 침입했다.

그 당시 고위관리들은 나당연합을 감지했고, 그에 대한 대비책도 논의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전쟁후의 상황을 보면, 의자왕은 대비 못한 것으로 보인다.

 

흥수..

전쟁발발당시 고마지지현(전남 장흥)에 유배중이었으나, 의자왕에게 성충과 같은 계책을 건의하였다.

전쟁 와중에 그의 생사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앗다.

 

계백장군..

워낙 유명해서 재론하지 않는다.

자세한 사연은 blog.daum.net/servan/6349927 참조

 

그런데, 세분이 형제같은 느낌이 든다. 한 화가가 그려서 그런가??

 

의자왕은 왜 충신들을 멀리했을까?

의자왕은 40세에 태자가 되고, 641년 50세에 즉위한다.

의자왕 즉위 초기 성충, 윤충 등 명장의 보좌를 받아 신라에게 뺏앗겼던 40여성을 공취하고, 특히 신라의 관문격인 대야성(합천)까지 함락시키고, 김춘추의 딸과 사위까지 죽인다.

(이때 차라리 인질로 잡아두지..아마 성왕의 복수심이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재위 15년이 지나자, 나이도 들고 총명함이 사라져 방탕과 독단에 빠져 충신을 멀리한다.

백제가 10일만에 항복한 것도 귀족들과 사이 나빠서 귀족들의 초기 협조가 없었기에 벌어진 것이고, 그뒤 의자왕 일족이 당으로 압송되자 그제서야 귀족들이 궐기하여 3년간 부흥운동이 이어진 것으로 보인다. 

 

태자골을 걸어가니 경주 삼릉처럼 멋진 소나무 숲길이 나온다.

영고성쇠, 성주괴공..

백제의 최후나 신라의 몰락이나 멸망의 순간은 비슷하다.

선후만 다를뿐..

 

 

 

다시 돌아온 백마강길..

경비행기가 날고 보트는 달린다.

백제문만 묵묵히 관조할뿐..

 

친구들 모시고 부소산둘레길 걷고 수륙양용버스 타고 ATV 달리고 맛있는 식사하면 멋진 여행이 될 곳이다..

 

 

봄이 오건만 코로나는 기세등등하니 

불보살은 힘들다..중생이 힘드니..

 

 

<오늘 걷기> 부여 금강문화관 주차장 - 백마강길 - 부소산 - 고란사- 낙화암 - 백마강길 - 금강문화관 약 7KM

 

 

금강 걷기에 나섰다..일단 공주 정지산에서 곰나루을 들러 공주보까지..

정지산에서 금강을 바라본다..웅진강이라 불리는..

 

 

백제의 상징탑..금동향로..금관식..무령왕릉..

 

 

곰나루 공원에는 소나무 각선미가 경주 남산 못지 않다..

 

 

나무꾼을 사랑한 곰의 슬픈 전설..

신을 사랑한 곰은 단군의 어머니가 되었는데..

인간을 사랑한 곰은 슬픈 전설을 낳았다..

 

 

솔숲의 끝에 웅신당이 있다..

 

 

사당안을 들여다 보니 오래된 곰의 조각이 최첨단 상징주의 조형물처럼 앉아있다..

 

 

곰나루 강변 수신단 건너편 연미산 중턱에 곰이 살았단다..

길 잃은 나무꾼과 미저리처럼 시작된 사랑..자식을 둘을 낳고 안심하고 굴문을 열어놓았더니 나무꾼이 도망갔다..

바로 이 강물을 건너서..

 

 

저 멀리 공주보가 보인다..

 

 

버스로 청양-부여 백제보에 도착..

저 보를 건너 좌측으로 강변을 걸어 천정대로 향한다..

 

 

어도 옆를 걸어간다..

 

 

길은 생태계가 어우러져야 멋지다..

 

 

억새 갈대 무성한 길도 걷고..

 

 

저멀리 천정대가 보이고..

여기서 청양에서 내려오는 지천과 합류한다..

大河不讓小流(대하불양소류)

큰 강은 작은 물줄기도 사양하지 않는다..

 

지천은 아름다운 시골색시 같다..

 

 

이다리를 건너면 부여..천정대로 오른다..

 

 

천정대에서 바라본 금강..

 

 

백제 시절..재상 후보를 명단을 함에 넣어 이 곳에 놓아 낙점을 받았다하여 정사암으로도 불린다.. 

 

 

점심을 부여시내애서 된장찌개로 먹고..

오후 일정은 변경하여 오늘 최종 목적지인 수북정에서 출발 거꾸러 백제보까지 간다..

 

 

부산..홍수에 상류에서 떠내려왔다는 귀여운 이름..오르는 길은 귀엽지 않네..

하여  중턱에서 대재각으로 내려가 공사중인 계단을 통해 강변으로 내려선다..

 

 

대재각에는 효종때 송시열의 글씨가 새겨져있다..

병자호란 때 척화파 백강 이경여가 현직에서 물러나 백마강변의 백강마을로 낙향하면서 후일을 우암 송시열에게 부탁한다.

이후 백강 이경여가 효종에게 북벌계획 추진에 관한 상소를 올리자, 효종임금이 필생의 뜻을 이루지 못하는 아쉬움을 답한 내용,

“至痛在心 日暮途遠”(지통재심 일모도원)

비통함이 그대로 마음에 남았는데 해는 지고 갈 길은 멀구나..

훗날 우암 송시열이 쓰고 이이명이 백마강변 대재각내 바위에 새겨 놓았다

 

 

강변에 성같은 저 건물은 알고 보니 하수도관련 시설...강변시설은 한옥으로 지어 외관을 관리한다..

 

 

이제 낙화암이 보인다..낙화암 건너편 강길을 걷는다..

 

 

강변에 백마강..낙화암을 읊은 시비가 즐비하다..

 

 

나라는 망해도 산하는 그대로라는 두보와는 다른 시각도 보이고..

 

 

낙화암에 지던 꽃은 갈대로 환생했나..

말없이 고개를 흔들며 낙화암만 바라보네..

 

 

낙화암 아래 유람선에는 배호의 꿈꾸는 백마강도 같이 타고 가겠지..

낙화암 그늘 아래 울어나 보자던... 

 

 

 

해 기울자 강바람이 차갑다..동동 걸음으로 길을 재촉하나 다리는 진흙으로 무겁다..

 

 

허위 허위 강변을 에둘러 간다..언제 다시 오리오..

진하게 스킨쉽을 나누어 보자..

 

 

인간보다 더 진하게 스킨쉽은 나누는 것이 있다..

왼쪽은 백로나 왜가리 같고..오른쪽은 오리가 분명하렸다..

강변에 오리발 내미는 넘이 너무 많네..

 

 

하루 해도 지고 한 해도 저물어 간다..길은 우리에게 공간 뿐 아니라 시간도 가르쳐 준다..

 

 

백마강이 황혼 빛에 물들어 가고..

종착지에 다와서 강변의 마지막 시비를 보다가 일행이 모두 따라 부른다..

 

백마강에 고요한 달밤아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오면
구곡간장 찢어지는 백제꿈이 그립구나
아 달빛어린 낙화암의 그늘속에서
불러보자 삼천 궁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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