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재직하고 있는 의과대학의 한 학생을 상담한 적이 있다. 게임에 빠져 예과 과정에서 이미 학사경고를 두 번이나 받은 학생이었다. 지도교수가 안타까운 마음에서 필자에게 상담을 의뢰했다. 학생은 당시 유행하던 리니지를 고3 때 대학입시를 준비하면서 스트레스를 풀려고 우연히 시작했다가 대학 입학 후 본격적으로 하게 되어 최고수급에 오르게 됐고, 학업을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대인공포증까지 갖고 있었던 그 학생은 게임을 줄이고 학업에 충실하여 좋은 의사가 되겠다며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중간고사까지 잘 치르고 열심히 학업을 해나가던 그는 기말고사가 가까워지면서 다시 게임에 몰입하게 됐고, 결국 세 번째 학사경고를 받아 학교를 떠나야 했다.

그 학생이 퇴학당한 후 필자는 교수로서, 의사로서 심한 자괴감에 빠졌다. 인터넷중독 청소년을 위한 치료와 재활 연구를 한다면서 정작 자기 제자 한 명을 돌보지 못한 자책에서였다. 그 후로도 "잃어버린 내 가족과 내 인생을 찾고 싶다"던 30대 여성, 부모와 갈등 끝에 주먹을 휘두르는 등의 폭력으로 강제 입원을 해야만 했던 고등학생, "게임은 사업이고 돈벌이"라고 했던 전국 랭킹 안에 들던 게임 고수 중학생, 경상남도 지방도시에서 천릿길을 일주일에 한 번씩 상담을 하러 왔던 여고생을 비롯한 수많은 게임 중독 학생과 성인을 만나고 치료해왔다. 그러면서 게임 중독은 병(病)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십수 년 전 청소년들의 본드 흡입이 사회 문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런데 2000년대 들어 청소년들의 본드 흡입 문제는 자취를 감추었다. 이유는 명확지 않지만 전문가 중엔 컴퓨터 게임이 본드 흡입을 대신하는 것 아니냐는 추정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일부 청소년에겐 컴퓨터 게임이 본드에 의한 쾌락이나 환각과 비슷한 효과를 가져오는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문제는 인터넷 게임이 본드보다 훨씬 접촉이 쉽고 잠재 중독 대상이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최근 한국을 비롯한 중국·대만 등의 학자들이 인터넷 게임에 중독된 청소년들의 뇌영상 연구를 시작했다. 그 결과 게임 중독 청소년의 뇌가 약물 중독 환자에게서 관찰되는 것과 유사한 신경회로의 이상(異常)이 나타난 것으로 확인됐다. 한 국내 연구자는 최근 금연보조제로 쓰이는 약을 이들에게 투여하여 신경회로의 이상을 호전시켰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이런 연구를 기반으로 인터넷 게임 중독을 약물 중독의 기준에 맞추어 진단하는 기준이 제시되고 있으며, 아울러 정신질환 진단 기준의 개정 작업에서 게임 중독을 하나의 독립된 정신질환 항목으로 추가하려는 시도도 있다.

요즘의 청소년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은 마치 공기나 물과 같이 일상적인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져 밀착돼 있다. 그런가 하면 IT와 게임이 중요한 성장산업으로 정책적 지원을 받으며 급성장하는 추세다. 이런 급성장의 그늘에서 100만명의 청소년이 중독자로 전락하여 마치 술과 도박에 영혼과 육체가 망가지듯 사이버 세계의 좀비로 전락하고 있다.

이런 폐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 너무 미흡하다. 더 강력하고 적극적이며 효과적인 정책이 있어야 한다. 일례로 청소년에 대한 심야 시간의 인터넷 게임 공급을 제한하는 셧다운제 같은 정책이 조속히 도입되어야 한다.

 

안동현 한양대 의대 정신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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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언론사에 다니는 선배의 부인이 암환자였습니다. 암 진단 당시 유방암 3기에 갑상선에도 아주 작은 암세포가 있었답니다. 유방암 수술을 하고 항암치료와 방사선 치료를 몇 차례 받은 뒤, 가톨릭 신앙의 힘에 의지하며 투병 중인 분이었습니다.

2008년 9월 제가 암 수술을 받을 당시 그분은 3년차였는데, 갑상선에 여전히 암세포가 남아 있는데도 별 두려움 없이 즐겁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분은 저를 위로하며 이런 말을 해줬습니다. "좀 심한 감기에 걸렸다고 생각하세요. 푹 쉬고 나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낫게 될 거니까요." 자칫하다간 죽을 수도 있는 암에 걸렸는데 감기라고 생각하라니! 그분은 지금 '암이란 감기'에서 완쾌돼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습니다.

어떻게 투병해야 할지, 방법을 찾기 위해 이것저것 정보를 구하던 중 '월간 암'이라는 책자에 나온 어느 환자 투병기의 한 대목이 눈에 확 들어왔습니다. '암아, 고맙다.' 암에 고마움을 느끼다니요? 그때까지의 제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암은 저주, 절망, 고통일 뿐 고마움의 대상은 될 수 없었습니다.

휴직 후 '아빠 주부'로 집안 살림을 도맡아 하기 시작한 지 6개월쯤 지나자 몸도 마음도 가벼워졌습니다. 아침에 눈뜰 때부터 자정 넘어 잠들 때까지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시간이 매일 되풀이되는 신문기자의 스트레스에서 벗어난 덕분입니다. 좋은 먹을거리를 챙기고 적절한 운동을 하고, 명상과 기도에 의지해 제 몸만을 위할 수 있게 된 것은 큰 은혜입니다.

'아빠 주부'로 두 딸과 부대끼며 보낸 2년6개월의 시간은 그 이전에도 없었고 제 남은 인생에서도 다시 얻기 어려운 소중한 순간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을 깨워 정성 들여 지은 밥을 챙겨 먹이고, 저녁 잠자리를 돌봐줄 때까지 하루 24시간의 3분의 2를 두 딸과 함께 보냈습니다. 직장에 출근한 아내 대신 둘째 딸이 다니던 유치원 행사에 참석, 다른 일본인 엄마들과 어울린 것도 흥미로운 경험이었습니다. 한두 달에 한 번씩 가족여행을 떠날 때마다, '이쯤 해서 네 몸과 가족을 한 번 돌보렴' 하고 암이 내게 선물을 줬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전업주부로서 스트레스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살림살이가 서투르다고 아내에게 구박받고, 두 딸의 사소한 투정에 속이 상했던 일도 꽤 있었습니다.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단순하게 반복되는 집안일, 가족 누구도 아픈 나를 챙겨주지 않는다는 생각에서 비롯된 서운함으로 혼자 속앓이를 했던 기억도 납니다. 그럴 때마다 끊임없이 저 자신을 비우려 애썼습니다.

일본의 어느 의학자가 쓴 책에 따르면 암 환자 중에서 완벽주의자, 마음이 착한 사람, 자기주장이 강한 사람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고 합니다. 그런 성격 탓에 스트레스의 강도가 높은 데다 잘못된 생활습관까지 겹쳐 암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가 제시한 해결책은 법정 스님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음을 비우는 것'이었습니다. 당초 목표가 100이었다면 70 정도로 줄이고, 눈높이를 낮추고, 현재 순간에 만족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뒤지기 싫어했고, 늘 좋은 평판에 목말라했고, 한 치의 빈틈도 없이 일을 처리해야 직성이 풀렸던 제 성격이 금방 바뀔 리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살기 위해 뜯어고치는 훈련을 쉴새 없이 했습니다. 아내가 퉁명스럽게 대하면 '오늘 일 때문에 스트레스가 많은가 보군' 하며 비위를 슬쩍 맞춰줬습니다. 언어가 불편해 일본 친구들과 자유롭게 어울리지 못하는 둘째 딸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팠지만, 신나게 숙제하는 모습에서 기쁨을 찾았습니다. 정성 들여 만든 음식이 맛없다고 큰딸이 외면하면 "건강에 좋은 음식을 아빠에게 양보하는구나" 하고 한마디 한 뒤 제가 즐겁게 먹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마음 비우기'에 차츰 익숙해졌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암을 꺾고 빨리 복직하겠다는 생각, 회사에서의 내 존재가 희미해질 것이라는 걱정도 사라졌습니다. 한참만에 돌아온 직장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입니다. 여전히 건강에 신경을 써야 하는 입장에선 다소 부담스럽습니다. 하지만 저는 바뀌었습니다. 일은 즐겁고 능률적으로 하되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 않으려 애씁니다. 제 생각을 고집하거나 앞세우기보다는, 먼저 저를 비우려고 마음먹습니다. 제가 스트레스받는 일, 남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일이 이전보다 훨씬 줄었습니다. 암이 없었다면 이런 제 모습은 생각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암이 고맙습니다.

 

홍헌표 디지털뉴스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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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용기

 

 

취향이 좀 유치해서 그런지 영화라면 뻔한 내용의 로맨틱코미디를 즐겨 보는 편인데, 이번엔 진지한 걸 한 편 보려고 점찍어 둔 게 있다. 얼마 전 열린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작품상 등 4개 부문을 휩쓴 ‘킹스 스피치’다. 말 더듬는 콤플렉스 때문에 마이크 앞에서 연설하기를 끔찍이 두려워했으나 마침내 이를 극복한 영국 왕의 실화를 담은 영화다.

자신의 한계 인정해야 도움 청해

심프슨 부인과의 세기의 스캔들로 왕위를 포기한 형 대신 국왕에 오른 조지 6세는 지금 엘리자베스 여왕의 아버지다. 예고편을 보니 그는 혼자 힘이 아니라 괴짜 언어치료사의 도움을 받아 언어장애를 이겨낸다. 국왕의 드높은 자존심을 접고 누군가로부터 도움의 손길을 받아들인 행동이 용감한 선택으로 느껴진다. 남에게 도움을 청한다는 것은 자신의 부족과 한계를 인정할 때 가능한 일이므로.

왕이든 평민이든 살다 보면 인생이 친절하지 않은 순간이 찾아온다. ‘살다가 보면/넘어지지 않을 곳에서/넘어질 때가 있다/사랑을 말하지 않을 곳에서 사랑을 말할 때가 있다/눈물을 보이지 않을 곳에서 눈물을 보일 때가 있다’(이근배의 ‘살다가 보면’)

도저히 내 힘으로 오르기 힘들 것 같은 가파른 오르막길 앞에 섰을 때가 있다. 그땐 부끄러워 말고 도움을 청하는 법도 익혀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사람이 조직에서 성공한다는 게 우리의 신조다. 도움을 청하는 것은 약점이 아니라 자신감의 표시라는 점을 믿어주는 조직을 만드는 일은 간단해 보이지만 매우 중요하다.” 세계적 경영컨설팅 회사인 액센추어의 CEO 윌리엄 그린의 말이다.

인간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도움을 청하고 수용하는 것은 자기 문제와 현실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격다짐으로 ‘할 수 있다’만 너도나도 외치다가 내 안의 고민도, 조직의 문제도 더 곪게 만드는 헛똑똑이놀음과는 대조적이다.

적절한 도움을 받는 것은 처세의 면에서도 지혜로울 수 있다.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자 근대 미국인의 생활 기초 구축에 기여한 벤저민 프랭클린이 주 의회 서기로 공직에 처음 나설 때 일이다. 의회에서 그를 사사건건 반대하는 한 의원이 있었다. 프랭클린은 그에게 잘 보이려 하는 대신 의원이 소장 중인 희귀한 책을 빌려달라고 청했다. 그리고 책을 돌려줄 때 감사 메모를 보냈다. 프랭클린을 외면하던 의원은 다음번 마주쳤을 때 먼저 말을 건넸고 둘은 평생 우정을 맺었다. “당신이 친절하게 대해준 사람보다, 당신에게 한 번이라도 친절을 베푼 사람이 다시 친절을 베풀 것이다.” 인간의 심리를 제대로 꿰뚫은 프랭클린의 ‘생활의 달인’다운 통찰이다.

벽이 가로막으면, 상황이 절망적이라면, 주저앉기보다 누군가의 손을 붙잡고라도 일어설 방도를 찾도록 애써야 할 이유다. 내게 간절한 꿈과 열정이 있다면, 열린 마음이 있다면 나를 도와줄 사람은 꼭 존재한다는 믿음과 함께.

마음 열면 도와줄 사람 다가와

‘저것은 벽/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그때/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도종환의 ‘담쟁이’)

삶의 밑바닥에서 허우적대는 듯한 때가 누구에게나 있다. 그때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겸손한 용기다. 단, 내 몫을 다 하고 나서. 한 여성의 자아발견 여정을 그린 책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에 오래된 유머가 등장한다. 날마다 성인(聖人) 조각상 앞에서 기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제발, 제발, 제발, 복권에 당첨되게 해주세요.” 참다못한 성인이 어느 날 나타나 외친다. “제발, 제발, 제발, 복권을 사라.”

고미석 전문기자 mskoh11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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