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불의 전차 중 스코틀랜드 성당에 걸린 글씨

"I will never leave nor forsake thee"

나는 너를 떠나지도 않을 것이고, 버리지도 않을 것이다.

***

성경귀절이다.

모세가 죽은후 그의 후계자 여호수아를 격려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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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송가인)가 풍류대장 최종회에서 그녀의 친구 서진실과 함께 영원한 친구를 부른다.

고음으로 쏘아올리는 시시상청의 하이텐션에 필이 꽃힌다..

이거다..

내가 내년 9월 아이슬란드 걷기여행을 가면, 아이슬란드 최고의 비경에서 이 노래를 함께 부르리라..

***

여행을 즐기는 방법 중에 하나는 절경을 보면서 좋아하는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이다.

그러면, 훗날 어느 순간 그 노래를 들으면 눈앞에 절경이 저절로 떠오른다.

지금도 비욘드 더 블루 호라이즌 (Beyond the blue horizon)을 들으면 자이언캐년으로 달리던 미국 서부 평원이 떠오른다.

서울의 달을 들으면, 문득 2019년 안나푸르나 데우랄리 롯지의 추운 밤이 생각나고,

엄마아리랑을 들으면 해발 4600미터의 말디히말 베이스캠프(mbc)에서 내 인생 최고의 높이에 올랐다고 덩실 덩실 춤추던 모습이 떠오른다.

작년(2020)년 9월 아이슬란드 트레킹을 코로나 여파로 포기하고, 대타로 한라산 백록담에 올랐다.

내 생애 처음으로 백록담을 바라보고, 관음사 코스로  하산했다.

힘든 고비마다 그녀의 "난 괜찮아"를 들으며 스스로를 격려했다.

 

***

내년 (2022년) 아이슬란드 트레킹은 하늘의 결재가 떨어져야 가능하다.

현재 오미크론의 득세로 결과를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아이슬란드 절경을 바라보며 그녀의 영원한 친구를 함께 부를 것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이 뛴다.

 

오! 영원한 친구

오! 행복한 마음

오! 즐거운 인생

야!!  

 

https://youtu.be/cHT9yzRNbN8

 

 

 

지인에게 선물받은 책을 읽다보니 영화 기생충의 대사가 생각난다..

"너는 계획이 다 있구나!"

기생충만 계획이 있는게 아니고, 식물에게도 다 계획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만물이 다 계획이 있다는 입장에서보면, 진화론이 불교론과 일맥 상통하는 점이 잇는 것 같기도 하다.

 

은행나무..

암,수를 밝히지 않고 꽃필때까지 애매모호하게 노 코멘트 전략으로 살아남는 방법도 멋진 계획이고..

연꽃..

수렁도 마다하지 않는 겸손함, 환경을 탓하지 않고 꽃을 피워내는 지혜, 감당할 무게의 빗방울만 연잎에 받아들이는 지족지계(知足之戒)는 도인들의 계획과 맞아 떨어진다.

 

***

이런 식물을 키우는 것은 아이를 키우는 것과 같단다.

1. 빨리 이루려는 생각하지 말고 (無懷欲速之念  무회욕속지념)

2. 억지로 하지말고 순리대로 자라게 하고(無犯助長之戒 무범조장지계) 

3. 반드시 힘써 노력하되 미리 기대하지도 말고 잊어버리지도 말아야 한다(必有事焉而勿正勿忘 필유사언이물정물망)

 

***

"나뭇잎이

벌레먹어서 예쁘다

남을 먹여가며 살았다는 흔적은 

별처럼 아름답다"

- 이성진-

 

이책에 나오는 4자성어를 한 솥에 넣어 끊인뒤 건저내어 다시 하나의 사자성어를 만든다면, 공존상생(共存相生)으로 하겠다..

홍익인간(弘益人間)보다 실천하기 좋은 말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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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溪茅屋獨閑居  임계모옥독한거
月白風淸興有餘  월백풍청흥유여
外客不來山鳥語  외객불내산조어
移床竹塢臥看書  이상죽오와간서

개울가 초가집에 홀로 한거로이 사나니
밝은 달 맑은 바람 즐거움이 넘치네
찾아오는 사람 없어도 산새들이 속삭여주고
대나무 언덕에 평상옮기고 누워 글을 읽는다.

-길재-

 

***

영화 모가디슈.. 화면속은 소말리아 내전으로 혼란스러운데, 

문득, 대사관에 걸린 족자 글귀에 눈길이 간다..

내용인즉, 고려말 삼은 중 하나인 야은 길재의 시다..

그는 조선 건국에 가담하지 않고, 고향인 구미 금오산 아래 초가집 짓고 은거한다.

그때의 심경을 읊은 시다..

길재가 낙향하던 고려말, 조선초 상황이 소말리아 내전 상황보다는 덜했을까?

길재 낙향후 조선이 개국하여 태종- 세종을 거치면서 평화의 시기기 도래했으나,

모가디슈의 소말리아는 현재도 내전 진행중이고, 어부들은 해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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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연산면 황산성 가는 길이 연산향교에서 시작된다는 정보를 듣고 연산향교에 차를 대고, 향교 좌측 담장을 끼고 끼고 올라갔다가 길을 찾지 못하고 내려왔다.

향교 분에게 물어보니, 홍살문 아래 혜림선원 옆길로 올라가라 한다..

 

혜림선원을 지나자, 글씨들이 눈길을 잡는다.

간자치인 내가 참새처럼 그냥 지나칠리 없다.

 

늘 비우고 즐겁게 웃고 살자..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時不再來)

 

난초는 은자의 지조를 지녔으며, 대나무는 군자의 덕을 품고 있다..

그냥웃자 전시장??

그때 주인장이 나와 커피한잔 하고 가라신다.

길초입부터 지체하기가 뭣해 주춤거리다가 워낙 은근히 권유하는 바람에 폐를 끼치러 들어갔다.

 

 

도회지 아파트에 살면서 다양한 직종을 섭렵하다가 이제 은퇴하고, 고향땅에 들어와 놀면서 봉사도 하고 지낸단다.

 

1층엔 황토방도 있고, 2층엔 몽고식 게르로 꾸며, 여름에는 천장을 열고 고기를 구워먹는단다.

 

난타 동호인들과 난타를 즐기고, 섹스폰 연주하며, 서예도 즐기는 풍류가다..

물론 틈틈히 연주 봉사도 다닌단다..

 

그리고 어린이집 아이들 체험 공간으로도 활용하고...

버려지는 접시를 가져다가 아이들 글씨 만들기 놀이도 하면서..ㅎ

 

이 공간은 행복이 스스로 연주하는 공간이란다.

누구든 그 연주를 감상하면 된다..

 

커피를 서로 나누는 동안 그가 최근에 쓴 글씨를 보여준다.

"총명한 사람은 명이 짧고, 미련한 사람은 오래산다"

머리 많이 쓰고 바쁘게 살면 스트레스가 많을테지..ㅎㅎ

 

그에게 함자를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정원에 명함이 있다..

청석 한대장...

 

언젠가 날좋은 날 돼지고기 두어근에 잎새주 한병들고 찾아가 난타나 두드리다 오면 좋겠다..

 

전시장에서 커피 잘 마시고 황산성으로 오른다...

돌아보면 황산벌이 보인다..

황산벌 초입에 자리잡은 이 동네 이름이 관동리다..

원래는 관창리였단다..

관창??

황산벌에서 죽은 관창??

 

 

임도길을 올라서면 관동리 - 표정리 구간 임도와 만난다.

길 건너 올라가면 황산성이다..

 

황산성- 깃대봉 - 함지봉 - 향적산(국사봉)으로 이어지는 9km 등산로가 있다..

청석 한대장이 나에게 말하길,

자신은 은퇴후 2년간 전국의 산 정상을 노리다가 양무릎이 나가서 요즘은 만보걷기로 만족하고 산단다.

그래서 나에게 권유하기를,  당시 연배에는 무리하게 정상을 노리지 말고 둘레길을 다니는게 좋겠단다..

그의 말씀을 계룡산신이 대신하는 것으로 알아듣기로 했다..ㅎ

 

황산성에 오르니 황산벌이 한눈에 들어온다..

저번에 천호산 -함박산- 깃대봉 능선에서 황산벌을 조망하였다..

그러고 보니, 백제- 신라 전선은 계룡산줄기와 대둔산줄기(천호산방향)가 장성처럼 늘어서서 

직진 출입구는 금강을 통한 공주방향과 황산벌 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신라군을 막기위해서는 1차는 대전- 옥천 사이 탄현(현 식장산 마달령)에서 막고, 뚤리면 황산성과 천호산 사이 통로(황산벌 입구, 현 1번국도)에 진을 치고 막을 수 밖에 없다.

이곳이 뚤리면 평야지대로 부여까지는 무풍지대니까..

황산벌 입구를 조망하는 이 성에 백제군의 본진이 잇었다고 한다.

성아래 백제 5천결사대에 몇일간 진군이 막힌 신라군의 화랑 관창이 나선다..

김유신 이래 젊은 화랑의 돌격은 신라군의 전통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곳에서 죽는다.

그래서 성아래 지역 이름이 원래는 관창리였는데, 지금은 관동리도 바뀌엇다.

지금이라도 다시 관창리로 지명을 환원하기를 권한다..

(참고, 옥천 서화천 성왕이 전사한 부근 길 이름이 성왕로이고,  경북 경산시 원효 탄생지 부근에는 원효로가 있다..)

 

지금도 이 통로는 호남으로 가는 1번 국도과 호남선 철도가 다니는 요지이다..

과거의 요지가 현재도 요지다..

그러니, 후백제의 마지막 전투도 이곳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엇다.

이곳에서 승리한 고려 왕건은 건너편 산을 하늘이 도왔다는 의미로 천호산(天護山)이라 명명하고, 그 아래 개태사(開泰寺)를 창건하여 태평성대의 개막을 알렸다.

아들 신검의 배신에 분노하여 왕건에게 귀부한 견훤..

왕건이 자신의 청을 거절하고 신검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자, 홧병이 나서 개태사에서 죽었다던가??

태조의 후원을 받은 개태사는 한때 1000명의 승려가 수행하는 큰 절이 되엇다. 

그 증거로 1000명의 밥을 짓었다는 쇠솥(철확)이 지금도 남아잇다.

 

 

황산성 정상에서 보니 황산벌 우측으로 탑정호 일대와 계백장군묘 지역이 보인다..

관창의 분전으로 분기탱천한 신라군의 맹공으로 황산벌 입구가 뚫리자, 그때부터 파죽지세라..

백제군도 어쩔 수 없이 밀리기 시작하고, 계백장군도 전사한다..

그가 전사한 부근에 계백장군묘가 생기고, 현재는 백제군사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등산로는 계룡산으로 이어지는데, 깃대봉- 함지봉이 눈앞이다.

 

깃대봉까지 올랐으나, 조망은 별로다..

금년 최강추위라는 날, 무리하지 않고 돌아선다..

돌아오면서 보니, 황산성이 성답게 우뚝하다..

 

이 성 위치는 나제 전쟁시 부여방어에 필수적인 곳이다. 

 

성에서 내려와서 표정리 방향 임도로 걸어간다..

자료에 의하면, 이 임도는 상월면 대명2리 금강대학 입구까지 20km 정도 이어진다고 한다..

 

 

길가에 부여왕족 부여 서씨 묘소가 보인다..

자료를 찾아보니, 부여 서씨의 시조는 의자왕 아들 부여융이라고 한다.

부여융은 백제 최후의 날 계룡산 신원사 고왕암에 숨엇다가 당군에게 잡혔다는 전설이 잇다.

그는 당나라에 끌려갓다가 당나라 황제에게 서씨 성을 받고, 웅진도독으로 부임하여 당나라의 백제통치에 협력하였다고 한다. 

 

안내지도도 없이 황산성둘레길이라 해놓으니, 좀 뜬금없어 보인다..

 

 

한참 임도를 걷다가 꽃피는 봄날을 기약하며 돌아섰다.

주차장소인 연산향교로 돌아오면서 다시 황산벌을 바라본다.

땅은 말이 없지만 역사를 증거한다..

 

 

 

<오늘 걷기> 연산향교 주차장 - 혜림정사 - 그냥웃자전시장 - 임도삼거리 - 황산성 - 깃대봉 - 임도 삼거리 - 표정리 - 원점회귀 약 7km

 

지난 몇 년간 아침 강길 걷기에 심취했다. 누가 전민동 갑천변에 사는 이유를 묻길래, “아침 강길을 오리 걸을 때마다 10만원 짜리 건강 적금을 드는 격이요”하고 농을 했는데, 실은 나에게 연하지벽(煙霞之癖)이 있기 때문이다.

하여, 아침 강길을 걸으며 노을을 기다린다.

 

하지만, 나날이 뜨는 아침마다 노을 질 수 없고, 다달이 지는 저녁마다 빛깔 고을 수 없다.

우수의 구름 비껴난 빈 공간 속에 무심히 아롱지는 노을과 마주칠 때 내 마음은 뛴다.

태양이 다시 떠오르고 짐을 어찌 저리 아름답게 찬양할 수 있을꼬?

범사에 감사하라는 단순한 가르침을 스스로 체현하는 천지 자연의 조화 속을 체구연마(體究硏磨)하는 나날은 정말 호시절(好時節)임을 깨우쳐준다.

 

일전에 용암, 현강, 화전, 송오 선생 등과 술잔을 기울이면서 덕담을 나누던 중 내가 용암의 별장 당호를 녹상재(綠象齋)로, 정자를 관수정(觀水亭)으로 지어주고 현강선생의 글씨를 받아 멋지게 마무리한 일이 거론되더니 문득 내 우거의 당호 이야기로 비화하였다.

하여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내 연하지벽을 들어 서재의 당호를 관하재(觀霞齋)라 하고자 하였더니, 일행이 모두 즐거워 하였다.

어느 덧 시일이 흘러 지난 가을에 현강선생이 흔쾌히 멋지게 글씨를 써주고 송오선생이 좋은 나무를 골라 정성껏 각을 새겨 나에게 당호 서각을 주었다.

이 아름다운 판각을 함부로 내걸기 미안하던 차 마침 도룡동 용포 인근 갑천변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는데 때맞추어 서재가 서향에 들어서고 갑하산, 우산봉, 계룡산 천왕봉, 쌀개봉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자니 이제는 편액을 걸지 않을 수 없다.

아침 갑천을 걷다가 노을 진 계족산을 바라보며 저절로 떠오른 시 한수 얻었다.

 

희디 흰 백로라도 태양을 가로질러 날면 검게 보이고

검디 검은 삼족오도 달빛 부서질 땐 하얗게 보인다네.

저 산은 묵연하여 스스로 말을 잊었나니

아침 노을 등에 지면 보라빛 석산이라 불리고

저녁 노을 이마에 비치면 청산이라 불린다네.

 

이 월강도 반백의 머리카락을 노을에 물들이며 강길 걸어온 날이 반백이 넘은 지라 이제 지난 날 돌아보지 않거니와 앞으로를 묻는다면 조석 노을을  벗삼아 운무 데리고 갑천(甲川)에 살겠노라!

 

2011. 2. 3. 신묘년 설날에 월강(月江)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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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경주걷기의 메인이 단석산인데, 단석산 설화의 주인공은 김유신이다..

우연히, 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가는 둘레길을 알게 되었으니, 이번 걷기의 테마는 김유신이 되겠다.

김유신에게 명활산성은 김춘추와 함께 정권을 잡게된 터닝포인트가 되는 곳이니까..

***

일단 진평왕릉으로 간다..

숙소 경지당에서 가깝다. 경지당에서 읽은 신라왕릉 책에 의하면, 조선 18C경에 경주김씨 종중에서 조상묘 찾기 할때 진평왕릉으로 비정했단다.

그 이유는 진평왕을 한지에 장사지냈다는 기록이 있고, 이 들판이 한지로 불리기 때문이란다..

한지란 북천의 범람이 잦아  홍수발생시 물을 가두는 유수지 역할을 하는 들판이라 붙여진 이름이란다.

그런데, 근대의 조사에 의하면, 왕릉의 구조가 통일신라 시대 양식으로 드러나 신문왕이나 효소왕릉으로 보기도 한다.

실제 진평왕릉은 북천의 홍수 때 유실되었을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이 왕릉에서 보면 딸인 선덕여왕릉이 있는 낭산이 보인다..

선덕여왕은 죽을 때 도리천에 묻어달라고 했다.

도리천이 어디냐고 했더니 낭산 남쪽이라고 했다.

낭산일대는 신유림(神遊林)이라 해서 천경림 등과 함께 신라초부터 소도처럼 신성시하던 숲이 있는 곳이었다.

낭산에 여왕릉을 설치하고도 신하들은 그곳이 도리천이라는 의미를 몰랏다.

그런데, 문무왕 때 대당전쟁을 하면서 승리를 기원하기 위한 사천왕사를  낭산 여왕릉 아래 신유림에 짓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사람들은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는 불교적 천문관을 깨닫고 여왕의 예지에 탄복했다고 한다.

 

용비늘 갑옷으로 무장한 소나무가 왕릉을 호위하고 잇다.

진평왕의 딸 중에 선화공주 설화..

서동요 설화의 주인공이고, 익산 쌍릉과 미륵사지 설화의 주인공 여부로 논란이 많다.

그러나, 진평왕- 선덕여왕 시절 신라는 성왕의 복수를 다짐하던 백제와 피어린 전투를 벌인 것을 보면, 그 진실여부가 아리송하다.

 

각설하고, 진평왕릉에서 명활산성으로 가는 길 표지가 보이지 않는다.

헤메다가 큰길로 나가 북쪽으로 가다가 발견했는데, 나중에 보니 이길을 따라 수로를 쫓아 가는 코스가 둘레길이다..

 

이렇게 한참 떨어진 큰길가에 겨우 표지판 한개가 보인다..

 

 

길가가 모두 벚꽃이다..

벚꽃 만개한 날 다시와서 걸어야 겠다..

 

수로를 따라가는 길은 공사구간에서 일부 우회하는데..

거기서 명활산 등산로 표지를 만났다.

 

등산로 몇백미터 숨차게 오르니 명활산성 탐방로와 만났다.

북문과 남문의 중간지점..

 

일단 남문지로 가서 성안길로 북문으로 갈까 생각하고, 남문지로 간다.

 

하지만, 시간이나 정확한 정보가 없어 회군하여 북문지로 향한다..

 

북문지로 가는 길에 성안 연못을 만난다..

성의 필수 조건을 갖추고 있는 곳이다. 

 

도중 고지에서 보문호와 북천을 조망한다.

명활산성은 신라 왕경을 방어하는 4대산성 중 하나로 동쪽, 울산 등지에 칩입하는 적을 방어한다.

 북천 양안으로 명활산과 소금강산이 자리한 협곡같은 지역이라 군사적 요지이다.

실제 신라초기 왜구들의 침략을 막앗던 역사도 있다.

북천은 경주 동쪽 함월산 등 고지대에서 발원하여 왕경이 있는 서쪽으로 흐르다가 형산강에 합류한다.

그런데, 경주가 태풍경로상에 위치하기도 하여 북천 홍수 피해가 잦은 곳이기도 하다.

역사적으로도 북천(알천)의 범람으로 건너지 못해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명주군왕으로 밀린 김주원의 이야기가 유명하다. 또한 북천 홍수로 북천변에 위치한 헌덕왕릉 등이 유실되기도 했단다.  

 

북천 상류에 덕동댐과 보문호가 건설되면서 이제는 수량이 부족한 하천이 되었다..

하천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ㅎ

 

명활산성 북문지..

이쪽은 남문지와 연결되는 길 같은데, 지금 개통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선덕여왕 말기 상대등 비담이 반란을 일으켰다.

상대등이면 귀족 화백회의 의장격이다. 

선덕여왕이 병이 나자(50대 중반 추정)  후계구도를 둘러싸고 친왕파 김춘추, 김유신 등을 제거하고 정권을 잡을 생각이었다 

반란군은 명활산성에 집결했다.

왕성인 월성에는 여왕파인 김춘추, 김유신등이 포진했다.

보문들을 두고 쌍방이 대치하던 밤..

유성이 월성으로 떨어졌다. 이를 보고, 반군의 사기가 충천했다.

김유신은 밤중에 연에 불을 달아 하늘로 날려 올렸다.

"별이 다시 하늘로 돌아갔다" 

분위기는 반전되어 김유신은 비담의 반란을 진압했다

여왕은 그 소동 속에 승하하고 최규하같은 진덕여왕이 즉위했다..

****

김유신..그는 심리전, 선전술의 귀재이고, 합리주의자, 과학자였다..

"길흉은 정해진 것이 아니며 사람이 부르는대로 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봉황이 날았들었어도 은나라 주왕은 망했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어도 쇠퇴하였으며,

당 고종은 꿩새가 울었어도 흥하였고, 정공은 용과 싸우고도 흥성했다고 합니다" 

 

 

단석산에 수련하여 화랑으로 입신한 김유신은 대 백제전투에서 승승장구..

신진무장세력으로 전통 귀족들의 대표인 상대등 세력과 이곳 명활산성 대결에서 승리하여 진골 무열왕의 시대를 열었다.

그리고 삼국통일의 길로 매진한다.

우리 역사에 신하로서 왕으로 추존된 유일한 인물이다.

 

북문지에서는 진평왕릉 가는 길을 크게 써놓으니 좋다..

 

길가의 저 부처님은 왕년에 벚꽃 방창할 때 알현한 적이 있다.

모로코의 페스를 연상시키는 석물들..

 

진평왕릉가는 길에 벚나무가 즐비하다.

벚꽃 피는 날 오시라고 기약한다..

 

우측으로 북천 건너 소금강산 능선이 보인다.

다음에 저기를 걷자고 드림빌더가 속삭인다..

 

이길의 정식이름은 선덕여왕길이다..

진평왕릉를 지나 선덕여왕릉으로 이어지는가보다..

 

다시 등산로 입구로 돌아왔다.

오늘은 바람불고 날이 추운데, 그동안 엄청 따뜻한 날씨였나 보다.

철모르는 개나리가 바람에 떨고 있다..

 

그때 단석산 상공으로 오색찬란한 상운이 나타났다.

삼국통일을 기원한 단석(斷石)의 에너지가 남북통일로 이어지는 조짐이 아닐까?

 

<오늘 걷기> 

경주 경지당(敬止堂)을 방문했다.

집 입구 편액 글씨를 보고 주인장 남촌선생에게 뜻을 물엇다.

대학에 이르기를, 敬止言其無不敬而安所止也 (경지언 기무불경이 안소지야)

경지(敬止)란 공경하지 않음이 없고 그칠줄 앎으로써 편안함을 말한다.

 

내 좁은 소견으로 몇마디 덧붙이자면, 

성리학에서 경(敬)이란 주일무적(主一 無適), 즉 마음을 한 군데로 집중하여 이리 저리 헛갈리지 않도록 하는 공부방법이며, 심心이 비록 비어있으나 동시에 가득차게 되는 그런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텅빈 충만"의 마음을 유지하는 공부를 경이라고 하겠다.

또한 지지불태(知止不殆)란 말이 있으니, 그칠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 따라서 오랫동안 평안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지당은 명활산과 보문호를 배후로 두고, 앞으로 남산 금오봉을 바라보며, 도리천이라는 낭산과 신들이 노닐던 신유림 터전을 가까이 하고 있으니, 가히 거경(居敬) 지지(知止)의 반석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격이다.

 

 

하늘에는 신들의 전령 삼족오가 노닐고, 땅에는 지령(地靈)들이 노래하는 곳이니 둔세(遁世)의 시절에 딱들어 맞는 절묘한 안심입명처(安心立命處)라, 이런 복지(福地)에 사는 인연은 주인들의 홍복이라..

텅빈 충만의 마음으로 하루 저녁 보시받은 마음을 기문에 실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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