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청호 오백리 8구간은 추소리 부소담악 - 이지당 - 서화천습지공원 - 보오리 - 석호리로 이어지는데, 

오늘은 옥천군 군북면 이백리 이지당 ~ 보오리 입구까지 원점회귀 코스로 약 6km를 걷는다.

이지당..우암의 글씨다.

원래 이지당은 임진왜란 때 순국한 의병장 조헌 중봉이 유람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각신서당 자리인데,

우암 송시열이 이지당의 당호를 지어주었다.

우암이 뭔가 써주었다면 그는 서인의 선배들이다.

 

입구 바위에 눈에 띄는 곳에 새겨진 이름 금달주(琴達柱)??

누구일까?

추론하건대, 금달주는 자신의 조상의 유적인 이곳 방문 기념으로 자신의 이름을 새긴 것으로 보인다.

조상은 누구일까?

우암 송시열의 제자 수경재 금봉의이다.

금달주는 금봉의의 아들로 종가에 양자간 금성구의 5세손이다.

금봉의는 이지당 부근 각신리 사람인데, 아버지가 송시열의 제자였고, 

자신은 13살때  73세의 송시열을 처음 만나 인사를 드렸고, 18살때 78세의 송시열에게 가르침을 받게 되니 우암 송시열의 말년 제자쯤 된다.

그는 집 근처인 이지당에서 주로 공부를 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과거공부대신 도학 공부에 매진하여 우암으로부터 "명성양진(明誠兩進) 경의개립(敬義皆立)"이라는 여덟글자와 수경재(水鏡齋)라는 당호를 받았다.

이지당의 실제 사용자는 금봉의였던 것이다.

그는 30세의 나이로 요절하여 세상에 이름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의 후손인 금달주 등이 그의 유고집 수경재 유고를 엮어 후세에 전함으로써 그의 행적이 알려지고 있다.

그의 묘소도 이지당 부근 산에 있다고 한다.

현재의 건물은 구한말 1901년에 금씨, 조씨등 4문중이 힘을 모아 지었단다.

수경재 금봉의의 집안도 힘을 보탰으리라.

정갈한 아궁이와 솥단지가 인상적이다.

이지당..우암 송시열의 글씨..

그의 의미는 이렇다.

"高山仰止 景行行止"

"높은 산은 우러러 보지 않을 수 없고, 큰길은 따라 걸어가지 않을수 없다."는 시경의  

8자 한문 글귀 중 2 지자를 따서 이지당이라고 한 것이다.

고산앙지란 사마천의 사당에도 붙어있는 위인에 대한 찬탄 구절이다.

 

금봉의가 20세 되던해 80세의 스승 송시열과 문답한다.

"입도(入道)의 요체가 무엇입니까?" 

"사계 김장생 선생은 사람을 가르칠 때 소학을 우선으로 했다"

"행기(行己)의 요체는 무엇입니까?

"경(敬)만한 것이 없다 "

"구체적으로 어찌합니까?"

"알기 쉽게 말하면, 무잡언(無雜言), 무잡행(無雜行), 무잡사(無雜思)니라"

 

21세 되는 해 81세의 노스승 송시열이 그에게 명성양진(明誠兩進) 경의개립(敬義皆立)"이라는 여덟글자와 수경재(水鏡齋)라는 당호를 써주었다.

<출처: 충북대 김용남 교수 논문, 수경재 금봉의의 삶과 시 참조>

 

"밝음(지혜)와 정성이 나란히 진보하고, 경과 의가 함께 확립되엇다"는 말은 불교식으로 말하면 스승이 제자의 깨달음을 인가하는 것이 아닐까?

우암대학교의 졸업증서 같아 보이기도 하다..ㅎ

 

각신서당..

중봉 조헌이 가르친 제자들은 아마 임진년 금산전투에 거반 따라가서 전사했을 것이다.

 

중봉 조헌이 이지당에서 지은 시

 

水麗山明地

風高葉落秋

徜徉提督趙

邂逅廣文周

幸値仙翁集

 因携童子遊

悠然成一醉

乘月步長洲”


물빛 곱고 산 밝은 땅

바람 높고 잎 떨어지는 가을
배회하는 조제독 

주광문을 해후했네
다행히 신선들 모인 때에

어린 사람 데리고 같이 노닐며
한가로이 모두 다 한껏 취하고서

달빛타고 긴 모래톱 걷는다네

 

 

후날 송시열이 위 시에 차운하여 시를 지엇다

 

<공경하며 중봉 선생의 이지당(二止堂) 운을 따라 김 사군(金使君) 정평(正平) 만균(萬均) 에게 보내다>

 新構臨淸泚
 山頹問幾秋 
 天衢箕尾遠 
 人世歲星周 
 事業朱書裏 
 淵源德水遊
 欲陳明酌薦 
 蘋藻採芳洲

새로 지은 집 맑은 물가에 임했으니  
임 가신 지 묻노라 몇 해던가 
하늘 거리에 기성 미성이 멀고 
인간 세상에는 세월이 흘렀구려 
사업은 주자의 글 속에 있고
연원은 율곡에게 받았어라 
맑은 술잔 올리고자 
마름을 물가에 캐었노라 

 

이지당교를 건너 대청호 오백리 8구간을 걷는다.

서화천 건너의 이지당이 멋지다.

우리 산하에는 역시 우리 한옥이 어울린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풍광에 어울리는 고인의 시가 있다.

수경재 금봉의의 한시를 읽어보자

 

두 분 현인 함께 이미 멀리 가시고
대 앞의 버들 몇 번이나 봄가을 맞았던고.
도덕은 子思와 孟子를 근원으로 삼고
연원은 孔子와 周公을 조종으로 삼았네.
처량하게 산수마저 목 메이고
학과 원숭이 노니는 적막한 곳.
슬프다, 사람들 어디로 갔나
물가에 흰 갈매기만 변함없구나.


兩賢俱已遠, 臺柳幾春秋.
道德宗思孟, 淵源祖孔周.
凄?山水咽, 寂寞鶴猿遊.
惻愴人何去, 依然白鷗洲.

<二止堂. 敬次重峯尤菴兩先生韻>

 

가을 달이 차가운 물에 비치니
예전에 노닐던 일 어떠한가.
끊긴 다리엔 풀이 한량없으니
차마 홀로 누각에 오르랴.


秋月照寒水, 何如昔日遊.
斷橋無限草, 可忍獨登樓.
<二止堂次諸友韻>

삭막한 산 주변에 학은 짝지어 공중에 날고
어렴풋이 그 기상 노둔함을 채찍질하는 가운데 보았네.
꾀꼬리 울음소리 당년의 일을 하소연하는 듯한데
비온 뒤 바람은 천상의 소리 보내오네.


索寞山邊鶴侶空, 依?氣像策駑中.
流鶯若訴當年事, 爲送天聲雨後風.
<二止堂述懷>

 

(동춘당 대문)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자리한 동춘당은  송준길이 살던 집이다..송준길은  인조와 효종 현종 3대를 걸친 사부(師傅)의 역할을 하여 ‘삼조의 빈우’라고 불린다..그의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 김은휘(金殷輝)의 따님인데, 그는 황강 김계휘의 아우다. 황강의 아들이 사계 김장생인 점을 고려하면 동춘당은 외손으로 그 학통을 이었다. 동춘당의 사승관계는 사계와 신독재 외에도 청음 김상헌이 있다.그는 퇴계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의 사위가 되어 충청과 영남의 예론을 교류 소통시키는 사람이 된다..

****

사계는 영남학파의 예학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와 교류가 깊었다. 사계는 영남에서 자신과 더불어 예학을 논할 만한 인물은 오직 우복뿐이라고 여겼다.
이런 관계에서 우복이 사계에게 사윗감을 천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우복에게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신랑감을 영남에서 구하지 않고 기호학파의 사계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 부탁을 받은 사계는 “자네가 직접 충청도 연산에 와서 내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면 어떻겠느냐?” 하는 제의를 했다. 사계 문하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들이 득실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우복이 연산에 와서 청년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당의 문을 열었다. 이때 방 안에는 세 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세 청년이 편한 자세로 쉬고 있던 참이었다. 예고도 없이 나이 많은 사람이 불쑥 찾아와 방문을 들여다보니까 세 청년이 취한 태도는 각기 달랐다고 전해진다.
이유태는 바닥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문 밖에까지 쫓아 나와 우복에게 큰절을 올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이든 어른이니까 큰절부터 올리고 본 것이다. 송준길은 일어나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방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이 3인의 각기 다른 대응을 목격한 우복은 사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유태는 너무 급하다. 송시열은 너무 과하다. 어른이 왔으면 일단 일어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송준길은 중용지도가 있다.”
결국 사윗감으로 송준길을 택하였다. 그렇지만 송시열과 이유태도 후일 ‘충청오현’에 포함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물론이다. ‘중용지도’가 있다고 해서 영남학파 정경세의 사위가 된 송준길은 스승과 장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기호의 예학과 영남의 예학을 소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송시열과 이유태 같은 노선도 있어야 하지만, 요즘에는 송준길의 노선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조용헌 살롱에서)
***위 일화에서 동춘당과 우암의 성격도 드러난다..

 

 

 동춘(同春)이란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는 뜻으로 선생은 이곳에서 독서와 교육을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회덕향약(懷德鄕約)을 만들었다. “동춘당(同春堂)” 현판은 우암의 글씨다..그 당시 우암은 괴산 화양동계곡에 살아던듯 "화양동주"이란 명칭을 사용하고잇다.. 동춘당은 우암과 평생을 함께 공부하고 행동한 사이다. 그가 9살 때 우암이 송촌으로 와서 기거하며 함께 글을 읽었고 25세 때도 함께 공부했다. 우암이 송촌으로 와 공부한 것은 우암의 부친 수옹 송갑조가 아들을 데리고 와 동춘당의 부친인 청좌와 송이창에게 배우게 한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두 사람은 일찍부터 ‘도학지교(道學之交)’를 맺어 평생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비문을 세울 때에도 우암 글, 동춘당 글씨의 구도인데, 화순에 있는 정암 조광조 유허비와 남해에 있는 이순신장군의 사당인 충렬사 비가 대표적인 예이다. ‘양송’이란 찬사가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춘당의 필적)

 

그의 학문은 송시열과 경향을 같이 하여 주자서와 심경, 근사록 등에 치력하였으나, 그의 가장 득의처는 예학이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서 곳곳에 많은 글씨를 남기고 있는데, 돈암서원 묘정비·숭현서원비·박팽년 유허비 등  많은 유품을 남겼다.. 

 




(송용억 가)

 

이곳 송촌동에는 동춘당과 종가, 송병억 가옥 주변에 동춘당 공원을 조성하였으며, 그 인근의 땅은 아파트 단지(위 사진 뒷편)로 개발되었다..그 아파트 이름이 "선비마을"이다..

 

송용억 가는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살기 시작하여 현재 11대손 까지 살아오고 있는 집이다.

 

(오숙재 현판)

 

송용억가는 안채와 큰사랑채·작은사랑채, 가묘로 구성되어 있다.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사랑채인 소대헌이 있고 오른쪽에 작은사랑채인 오숙재가 있다. 큰사랑채에는 넓은 대청과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달았다. 안채 앞에 위치한 작은사랑채는 오른쪽 끝에 툇마루를 한단 높게 두어 운치를 살렸다.안채는 작은사랑채의 왼쪽에 나있는 중문을 지나서 출입할 수 있다

 

(호연재 김씨 시비)

 

송용억 가는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여류문학사의 공백을 메꾸어 줄만한 여류 문인인 호연재 김씨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송병하의 며느리(즉 동춘당의 증손부)인 호연재 김씨는 여성 특유의 감성을 담은 많은 시를 남겼다. 호연재 김씨는  안동 김씨로 군수를 지낸 김성달의 딸이다. 19세에 동춘의 증손인 소대헌 송요화와 결혼하여 28세에 아들 송익흠(보은현감,  : 오숙재)를 낳고, 딸을 낳았으며,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호연재는 그녀가 살던 안채의 당호, 소대헌은 남편이 머물던 큰사랑채의 당호, 오숙재는 아들이 머물던 작은 사랑채의 당호이다..문인 가족다운 명칭이다..이들 부부의 인생이야기는 "소대헌 . 호연재 부부의 사대부 한평생 "(김성철 저)의 제목으로 책으로도 나왔다..그녀의 또다른 시 한편..

 

醉後乾坤潤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開心萬事平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情然臥席上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唯樂暫忘情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

 

(서포 김만중의 소설비)

 

동춘당이 위치한 송촌동은 계족산을 등지고 남쪽 산록에 위치하고 갑천이 우측으로 흐르는 평안한 자리에 위치하고 잇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갑천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들판이 아주 넓고 사방 산이 맑고 화려하다.
세가닥 큰 냇물이 들 복판에서 합류하여 관개할 수가 있다.
땅은 모두 1묘에 소출이 1종이나 되며, 목화를 가꾸기에도 알맞다.
또한 강경이 멀지 않고, 앞에 큰 시장이 있어 해협의 이로운 점이 잇으니 영원히 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다."

 

이런 좋은 자리에 회덕 송씨만 거주할리가 없다..회덕에서 갑천을 거슬러 건너 대전 엑스포 개최지 뒷편(연구단지 중앙부)  우성이산 서쪽 기슭(유성구 도룡동)에 여흥 민씨의 세거지가 있고..하긴..유성(儒城)이란 말 자체가 "선비의 고장"이란 의미이고 더구나 연구단지 등이 있으니 명실싱부한 선비 마을이다..

 

그 우성이산 북동 쪽 기슭의 갑천변(회덕 쪽에서 갑천 건너편) 즉 유성구 전민동에는 사계 김장생의 아들 김반의 묘역이 있고, 그런 연고로 그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독재 김집(金集)의 아우다.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10여 년 간 은거하며 학문에만 매달렸다. 인조반정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인조가 공주로 피난오자 호종하엿고, 왕이 공주에 있을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곳 묘소에는 아들인 김익겸의 묘가, 아버지 김반의 묘보다 위에 조성되어 소위 역장(逆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예학의 잡안에서 어찌 그런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아들 김익겸이병자호란 때  23세의 어린 나이로 강화에서 장렬하게 순직하자, 아들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김반 자신이 아들의 묘를 위로 쓰도록 배려한 연유이다. 서포 김만중은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낫다..이런 연고로 전민동에 서포의 소설비가 서잇다..시비는 흔히 보았어도 소설비는 처음 보았다..

 


 

(김익겸의 정려문 일부)

 

(심산 김태원의 시비)

 

이런 터전에 후학들도 보고 배우는 것이 남다른 모양이다..송촌동에는 심산 김태원의 시비가 서잇다..

그는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황보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1922년에 평안북도 삭주에 잠입하여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하였다. 그해 8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신임 아래 양승우 등과 ‘벽창의용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과 일본 경찰 및 밀정의 사살 등 많은 일을 하였다. 1926년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복역 중 평양감옥에서 탈옥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피는 죽음을 낳고죽음은 의기를 낳고의기는 충정을 낳는다..충정은 절의를 낳고 절의는 대나무로 살아나머금은 피 천년세월 일관되니대나무 빛 언제나 봄빛처럼 푸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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