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시(옛날 금릉군) 어모며 능치리 도치랑 마을이 있다.

어모면은 마한시대 어모국이었고, 삼국시대 금물현이었다가 통일신라시대는 어모현이 되었다.

능치리는 능점미을과 도치량 마을의 글자를 따서 능치리가 되었다.
능점마을은 도자기를 생산하는 도공들이 모여 한마을을 이를 정도가 되어 능점(能店)마을이라 불리고

도치랑 마을은 옷나무를 채취하여 사는 동네라 해서 도칠랑(塗漆廊)이라고 부르다가 도치랑이 되었다.

 

일제시대 도치랑 마을에 절이 있었는데 나운몽이라는 청년이 양자로 들어왔다가 1940년대 기독교로 전향하여 나장로라는 이름으로 뒷산 용문산에 기도원을 만들고 1960년대 기독교 부흥회 운동의 선구자가 되었다.

 

용문산(龍門山)은  그 이름과는 달리 산세가 곰을 닮았다고 하여, 상주 공성면 쪽에서는 곰실, 웅산으로 부르르고, 상주 공성면 장동리 쪽에서 곰발바닥을 닮았고 해서 장동(掌洞)이라고 부르고, 영동 추풍령면쪽 마을에서는 곰뒷마을, 웅북(熊北)이라고 불렀단다..

용문산 정상인 국수봉에는 웅신단터가 남아 있어서, 2012년 국토지리정보원에서는 국수봉을 웅이봉(熊耳峰)으러 변경하였다 한다..

 

***

이 도치랑에 액운이 낀 적이 있었다.

1960,70년대  마을의 소가 원인 모르게 죽기 시작하고 사람도 사고 등 이유로 10여명이 죽었다.

이 마을에 교회가 들어서면서 분위기가 바뀌었다.

지금은 도치랑 마을에 교회가 3개, 능치리 전체에 10개의 교회가 들어섰다.

외국에 선교봉사도 한다.

 

**

불운의 시절, 이 동네 한처녀가 살앗다. 

10초반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3년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5녀1남의 맏이로서 소녀 가장이 되었다.

어느날 밤 계시를 받았다. 

8살 년상의 청년과 결혼했다.

청년은 4명의 처제와 4살짜리 처남을 같이 키워 훌륭하게 성장시켰다.

그 부부에게 참으로 고생했다고 말했다.

그의 말이 

"나는 동네이름을 도치랑(道治廊)으로 생각합니다.

내가 길이요 진리라고 하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동네라는 뜻입니다.

나는 거기서 그저 생활하였을 뿐입니다"  

 

그러나, 나에게는 도치랑(道致郞)이라고 풀이하고 싶다.

예수님에게 다가 가려는 사람이 사는 곳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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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성촌에서 동네 사람들이 아버지를 "굴밍이"라고 불렀다.

족보에는 군명(君明)이라는 써있어서 자가 군명이고, 이를 경상도 식으로 굴밍으로 발음하는 줄 알았다. 

원래 못살던 집안이라 집안내력과 족보에 관심이 없었고,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번 도치랑외사촌 부부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군명의 정체를 알았다..

김천시 감문면 은림리 군명마을이다..

조선 선조 때 임진왜란 전인 1590년 수원 백씨 집안에서 처음 마을을 열고 군자가 많이 나오라는 의미로 마을이름을 군명(君明)이라고 지었다.

이 말이 경상도 식으로 발음하다 보니, 굴밍>> 굴미가 되고, 현재는 굴미마을로 부르기도 한다.

또 윗마을을 상군마을, 아랫마을을 하군마을이라고 구별해 부르기도 한다.

 

***

그런데 부친은  왜 굴밍이(군명)로 불리게 되었을까?

집성촌이라 장가를 가면 처가 동네 이름을 택호처럼 부르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부모님 택호가 군명, 굴밍이가 되었던  것이다..

거꾸러 따져보니, 어머니는 도치랑에서 시집 간 것이 아니고, 군명마을에 살 때 시집을 간 것으로 보인다.

어머니가 시집을 간후 외삼촌은 도치랑으로 이사간 것으로 보인다.

당시  도치랑에는 외삼촌 큰누나(큰 이모)가 살고 잇었다..

이제야 묵은 족보가 해결되었다는..ㅎㅎ

 

우리가 자유민주주의를 신봉하는 것은

선한 의지와 자율성을 갖춘 국민의 양심을 믿으며,

민주정치는 인류가 지금까지 개척해온 최상의 정치이념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원문 :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21117/116537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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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에 대하여

 

북한은 봉건왕조다. 

대학 다닐 때부터 우리(PD·민중민주계열)는 정통을 지향했다. 자본론도 읽었다. 

그러나 저쪽(NL·민족해방계열)은 김일성이 솔방울로 수류탄을 만들었다고 이야기했는데, 이게 우민화다. 

그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다.

 

***

- 조국과 관계

 

1989년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에서 .. 조국과 함께 '주체사상 비판'이라는 책도 냈다.

당시 나는 PD(민중민주)였고 조국은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동맹) 소속이었다.

사노맹은 북한에 대해 비판은 하는데,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친구이긴 한데, 함께 술을 마시는 사이는 아니다..

 

***

- 조국 사태에 관하여

 

진보가 어떻게 부정부패한 사람을 옹호할 수 있나.

우리가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진영을 만들었는데, 진영을 위해 정의를 희생할 수는 없는 것 아닌가.

그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다. 

 

***

- 진영논리에 빠지는 이유

 

권력을 잡게 되면 그 아래 시민단체들이 사업권을 따내고 그 밑의 출판사, 인쇄소 같은 업소들이 이익을 본다.

학계도 프로젝트 자문위원들로 연결되고 대학 자리도 자기들끼리 주고받는다.

변호사 업계도 마찬가지다. 특정 법무법인에 소송을 몰아주기도 한다.

이렇게 해서 공고한 기득권층이 형성되는 것이다.

물질적 혜택이 없는데도 진영논리에 휩쓸린다면 지력(지적능력)이 모자라는 것으로 봐야 한다.

 

***

- 역대 대통령 평가

 

박정희 전 대통령은 산업화에 성공했다.

독재를 했지만 그 체제가 18년간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민중들의 암묵적인 동의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평적 정권 교체를 이뤘고, 산업사회를 정보화 사회로 바꿨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국을 수직적 구조에서 수평적 네트워크로 전환했다.

두 군사정권(전두환·노태우 정부)은 경제를 시장주도로 바꾸는 역할을 했다.

과거의 보수정권과 진보정권은 자기들에게 맡겨진 역사적 과제를 수행했다.

산업화와 민주화의 두 가지를 성공적으로 수행한 나라는 전 세계에서 한국밖에 없다.

 

원문 :http:// https://www.yna.co.kr/view/AKR20221111111400501?input=1195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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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치랑(또는 굴미)에서 거배미로 시집갔던 엄마가 쓰던 단어들

 

 

아그바리 :  몸이 심하게 망가진 상태,   예) 아그바리처럼 걷는다.

으짓잖다:  체구가 작고 초라함, 의젓하지 않다. 

하랑산    ; 넓고 큰    예) 하랑산 같은 바지

이말모지 ; 헛일 하는 셈치고,  에멜무지   예) 이말모지로 얘기 하는데

야지리기 : 빠짐없이, 야지리    예) 야지리기 다 해라

허바리 : 아무거나 덥석 좋아하는, 허발이

벤댕이속아지 : 아주 속 좁은 

짬단이 : 뚱단지 같은 소리하는 사람

이지가지 : 여러 가지

겉닥다리 : 겉도는 

옹중이 : 작고 이쁜 사람

꼴꼴나다 : 형편없다

조선 강금  : 온갖일에 간섭하는 거.. 예) 조선 강금 다하네

한 파내기 : 한 판덩어리, 아주 큰 덩어리, 예) 한파내기 싸봤네

천왕봉 바라보며  도리깨질을 한다.

장군봉 - 신선봉- 천왕봉의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연골 부상이후 거리가 준 드라이버, 방향성은 여전히 나쁘지 않다..

동행들이 드리이버를 칭찬한다..

이에 대한 내 대답..

"원금은 보장되지만 수익은 적어요.."

그러고 보니, 투자성향대로 드라이버를 친다..

 

 

계룡대 골프장의 정감,이심 송덕비...

정감과 이심이 왕조의 흥망성쇠에 관한 대화를 기록한 책이 정감록인데, 그 책에서 새로운 왕조의 길지로 꼽은 곳이

계룡산하 신도안이다.

그리고 환란시에 피난 가기 좋은 10승지도 거론된다..

정감록은 투자와 안전 양면을 고려한 책이다..

골프도 그렇다. 공격적으로 즐기느냐, 안정적으로 치느냐..

선택은 성향대로 간다.. 

 

 

 

 

얼마전 단골 카페에 갔다..

주인장이 가방을 이쁘게 만들고 있길래, 

"금손이네요, 우리 강아쥐도 금손이라 비녀를 잘 만드는데.." 했더니

"아직도 그 가수를 좋아하세요"하고 반문한다..

"아니, 강아지도 한번 입양하면 죽을 때까지 키우는데, 하물며 반려가수를 어찌 버립니까?"

하고 반문했다..

 

**

그런데, 최근 뉴스보니, 개 파양을 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나보다..

하긴, 그양반이 예전에 정인이 입양취소니 파양이니 해서 구설수에 오른 적도 있었다.

그래선지 파양을 쉽게 실천하는가 보다..

 

개는 그렇다 치고..사람 파양 쉬운 것 아닌가 보다 

그 양반, 전에 북에서 "삶은 소대가리 같은 소리"라는 핀잔을 받아도 

일편단심 파양소리를 한번 벙긋하지 않아서 부처님 가운데 토막인 줄 알았더니

이번 사태를 보니 홍모씨 말대로 쑈통이 맞는가 보다..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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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도치랑 처녀가  17살 거배미 총각에게 시집갔다..

아마, 가난한 집에서  입하나 줄일려고 얼릉 시집보낸 의심이 간다..

거배미에서 지지리 고생하다 대처로 나가 아들만 5형제를 내리 낳고 무탈하게 키웠으니 일단 자식농사는 성공한 셈이다..

도치랑 여인은 아침 이불 속에서 어린 아들에게 꼭 가르치는 것이 있다..

본적은?  " 00군 00면 00리 529번지"

주소는? 할아버지 함자는??

그 문답속의 동네가 거배미이다..

거배미?? 

상석에는 한자로 거야촌(巨夜村)라고 표시했는데, 배미를 밤 야자로 이두식 표기를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배미는 논배미의 배미가 아닐까??

처음 이 동네를 방문했을 때 반달지기 논배미가 다락논처럼 언덕을 따라 이어진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그래서 아마 다락논배미가 많다는 의미로 거배미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 동네를 방문한 목적은 성묘를 하기 위해서이다..

문중 재실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면 ..

할아버지 묘소가 있다..

할아버지 돌아가신후 해방직후 가족들이 대처로 떠났기에 여기에 계신 것이다..

 

인사올리고..

 

고조할아버지께도 인사올리고..

 

장손에게 남겨진 몇백평의 밭뙈기들..

이제는 대신 농사 질 사람이 없단다..

 

성묘를 마치고..도치랑으로 간다..

55년전에 구경갔던 용문산기도원부터 들린다..

 

1960년대 나장로의 용문산 부흥회는 유명했다..

그때 외가집에 왔다가 용문산기도원 구경을 간 적이 잇엇다.

사택의 최신 설비가 인상적이었던 기억이 난다..

 

 

은행잎을 밟으며 걸어가 이곳 저곳을 살피지만, 55년전 장소는 찾지 못하겠다.

 

나장로..그의 이름이 나운몽이고 목사가 되엇다는 사실은 이제서야 알았다..

혹시 기념관이라도 문을 열었으면, 추억의 장소를 찾을 수 잇을터인데..오늘은 닫혔다..

 

오랜 세월동안 이 기도원은 엄청 발전했나보다..

하나의 마을이 되었다..

 

그 출발은 이렇게 초라한 초가집에서 시작되었다는..

구한말, 일제 시대 암담한 시절에는 동학의 최제우, 원불교의 소태산, 증산도의 강증산, 불교계의 경허, 만공, 한암 등 고승 도인이 은하수처럼 즐비하게 나타났는데..

이제 먹고 살만한 시절이 되니, 도인이 나타낫다는 말을 듣기 어렵다..

 

지나가는 사람 몇에게

"혹시 50년전에 ..."하고 물으니 모두 손을 내젓고 사라진다..ㅎ

하긴 그 사람들 나이가 50이 안되었는지도 모르지..ㅎㅎ

 

도치랑 마을로 돌아와 추억에 잠기며 돌아보는데, 사과가 붉게 주렁 주렁 익어간다..

그 예전엔 척박하던 느낌이었는데, 이제는 과수, 특수작물 농사로 농촌도 살만해진 느낌이 난다..

 

우리의 방문을 축하하듯 핑크 장미도 피었다..

 

골목을 돌며 수소문하다가 연락이 끊겼던 사촌과 연락되었다..

 

도치랑 사과를 한상자 사면서 맛을 보니, 시원하고 달콤하다..

추억을 복원하는 것이 고인을 추모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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