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4시30분부터 보리암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엔 절바로 밑 주차장까지 갈수 잇다..

어둠에 올라가 관음보살 알현하고 돌아서니 동녁하늘이 붉게 불들엇다..

그런데 관음상 앞은 시야가 넓지 않아 얼른 자리를 옮겨 보광전 앞 요사채에서 바라본다..

여름에 해가 바다에서 뜨지  않고 산위에서 뜬다..

 


붉은 노을을 즐기며 햇님 등장을 기다리는데..

나와 길이 어긋난 잠벗이 나를 찾아헤메다 정상에 간 모양이다..

정상으로 오라는 전화..

허덕이며 올랏더니 해는 이미 솟아 올랏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다시 보리암으로 내려와 찬찬히 절을 구경한다..

금산 보리암은  양양의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힌다..

 

어디서나 일출은 장관이지만 이곳에서 보는 일출도 한목하는 풍광이다..

 

(선은전에서 본 풍광)

 

보광전 밑으로  이성계의 기도터 선은전 가는 표지를 따라갔다..

선은전에서 바라본 풍광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으리라..

이곳에서 기도의 덕을 보앗다고 하여 이곳의 지명을 금산으로 바꾸엇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려진터..

 

그 기도로 왕이 된후 불교국가가 아닌 유교국가로 간 것은 무슨 아이러니인지..

 


보리암에서 내려오는 길은 걷기에도 좋다..

문득 돌아보니 정상..망대가 보인다..

 

보리암에서 백일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지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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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을 지나 남해대교를 건너다.

노량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

정유재란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량 해전이 벌어진 곳..

 

남해섬 언덕에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이 다소 생소한 일제 시대에 돌아가신 추당 박호병(秋堂 朴好秉.1878~1942)이다.


 박호병은 초명을 鎬秉(호병) 이라 하고 호는 彛堂(이당)이라고도 하였으며 후명은 好秉(호병).호는 秋堂(추당)이라고 하였다.

추당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사군자로 입선을 연속 4회나 하면서 공모전에서 실력을 과시하면서 서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면서 중앙 화단에서 여러 서화가들과 교류도 많이 하였고. 주로 전북지역에서는 후진을 지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작품으로는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으며 山水畵와 行書에도 능하였다.

 

그런데..어찌 일제시대때 왜경의 시퍼런 사찰 분위기 속에서 충렬사 현판이 써졌을까 궁금했는데..

아마 유력한 설에 의하면, 충렬사 사당이 고종때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일제시대 때 개인이 사비로 새로 건립한 사당이 오늘에 이르고, 그때 박호병이라는 분이 현판을 쓴 것 같다..

 

관람료 1000원을 내고 들어간 거북선..

그 옛날 배안에서 바라보던 그 바다를 느낄수 있을까..

거북선 안에서 노량바다를 바라본다..

 


 남해도 서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니 충무공이 순국한 관음포 바다가 나온다..

그 해변에 이락사라는 사당이 있고..기념관도 있다..

불멸의 바닷가를  석양을 따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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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 섬진강길을 달려 하동으로 향한다..

원래 계획이엇다면 화개장터에서 은어튀김과 제첩국으로 식사를 햇어야 하는데..

지리산에서 점심을 때워 아쉽게 지나쳤다..


 

악앙면 평사리 들판에 들어섯다..

소설 토지가 아니라도 탐이 나는 들판이다..

얼마나 좋으면 중국의 악양 지명을 벤치마킹하였을까만..

여기는 악양루는 없는갑다..


 

소설 토지의 유명세를 타고  촬영세트장과 픽션속의 최참판댁을  구현하였다..

맨위 최참판댁으로 오르는 길은 상품가게와 세트장을 거쳐 오르게 되어 잇는데 관람객으로 북새통이다..

높은 언덕에서 평사리의 천석 들판을 바라보는 참판댁 풍광은 과연 대지주 집다운 품새를 갖춘 것 같다..


 

참판댁 뒤 대나무 오솔길이 마음에 들었다..

이길이 좀 길었다면... 


 

참판댁 사랑채에 참판모델이 방안에 앉아 한문책을 열심히 보고 잇다..

기둥에 주련이 붙었는데...

 


                  一국歸心天盡頭(일국귀심천진두)  한가닥 돌아가고 싶은 마음 하늘에 닿았는데

                  岳陽無處不淸幽(악양무처불청유)  악양은 곳곳이 맑고 깊구나.

                  杜谷林塘春日遠(두곡임당춘일원)  두견새 우는 숲 언덕은 봄 기운에 멀고

                  輞川煙雨暮山浮(망천연우모산부)  섬진강 안개 속에 저문 산이 떴구나

                  雲泉歷歷編供興(운천역역편공흥)  구름은 뚜렷이 흥취를 돋우나

                  軒冕悠悠惹起愁(헌면유유야기수)  초헌의 사부(士夫)는 넌지시 수심이 이네.

                  經筵每被?三接(경연매피최삼접)  글 자리에서 자꾸만 재촉 받으니

                  睾負亭前月滿舟(고부정전월만주)  정자에 엎힌 달이 배에 가득하더라.

 

 

조선 성종때의 유호인(兪好仁)이 쓴  악양동천(岳陽洞天)이라는 시다..

이 시는 이지역의 풍광을 찬양하는 내용이니

없던 참판댁을 급조하면서도 주련의 시는 제대로 골랏다..


 

사랑채 대문밖으로  섬진강 줄기가 보인다..

아름다운 뒤태를 보이며 저멀리 사라지는 여인과 같이..


 

참판댁을 나오는 길가에 솟대형 가로등이 운치가 잇다..

멋진 아이디어..

 

디자인이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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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으로 향햇다..

성삼재에서 노고단을 걷고..

구례로 넘어갈려고..

헌데, 성삼재를 1킬로 정도 남겨놓고 정체다..

산비탈에서 밀리는 꼴은 도심에서 밀리는 것보다 참기 어렵다..

당연히 성삼재 주차장은 만원이라..노고단 걷기를 포기하고 구레로 향하다..

조금 내려가다 시암재 휴게소에 들러 뱃속에 점을 찍는다..

그때 마침 안개가 밀려와 지리산을 휘감으며 신비경을 연출한다..

 

 

 

베품의 철학으로 칭송되는 운조루 사랑채..

운조루에 당도하니 앞부분은 공사중이다..

행랑채에서 입장료 1000원을 받는 분은 좀 황송하다는 표정이다..

저 사랑채 우측 옆 문안에 유명한 쌀뒤주가 있다..

 


 

운조루의 현판은 안채에 걸려잇다..

운조루라는 택호는 도연명의 귀거래사에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오르고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오네, 雲無心以出岫 (운무심이출수) 鳥倦飛而知還 (조권비이지환) ”에서 첫머리인 운(雲)과 조(鳥)를 따서 지었다. 멋진 풍류이다.

여기에 베품의 철학에 금환낙지(금가락지 형국)란 명당의식이 가미되었으니 금상첨화..

좌간 그 베품의 적선 덕에  좌우익의 전쟁통에도 불타지 않고 고이 보전할 수 잇었다 한다.

그러나 이젠 퇴락한 모습을 감출 수 없다..

 



그 유명한 타인능해(他人能解, 누구든 열 수 잇다)의 쌀뒤주..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 와서 마개를 열고 쌀을 가져 갈수 있게 하였다니..

지금은 뒤주 속에 쌀은 없다..

거다란 울림이 들어잇다..

 

운조루를 나와 잠시 가다가 돌아서서 형국을 본다..

명당인지 나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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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량사 일주문)

 

논산 답사를 마치고 부여로 향햇다..

능산리.. 미인의 젖가슴 같은 고분을 스치고 로터리의 성왕도 돌아서

곧바로 부여 외산면에 위치한 무량사에 다다랐다..

일주문에 만수산 무량사라 써잇다..

만수(萬壽)라면 긴 수명이라는 뜻이고, 무량(無量)도 한량 없는 수명을 뜻하니 모두 극락을 뜻한다..

당연히 이절에는 아미타불을 모시는 극락전이 있다..

 

누가 말한다..

" 만수산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리.."에 나오는 그 만수산입니까?

당연히 아니다..

 

(극락전)

 

극락전 앞 탑을 보수할 때 작은 관세음 불상 등 3개가 나왓다..

그 것을 도둑맞앗다가 다시 찾았다 한다..

 

(되찾은 불상)

 

좌측 2분이 관음보살상이고 우측은 지장보살상이라한다..

탑을 해체 복원하는 과정에서 탑신 속에서 출토되어 절금고에 보관되었는데, 도둑이 들어와 훔쳐갓다가

몇년전에 우년히 도둑을 잡고 되찾았단다.. 

 

(김시습 영정)

 

이 절에 김시습 영정이 보물로 잘 모셔져 잇다..

자화상이라는 설이 있단다..

 

생전에 김시습은 자신의 초상화를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썼다고 전해진다..
'모습은 지극이 못생겼고 말 또한 분별이 없으니, 마땅히 구렁 속으로 너를 버릴지어다.'

그러니 그 자화상일 수 있겟다..

 

왜 김시습 영정이 여기에 있을까?

 

김시습이 생육신으로 떠돌다가  말년에 이곳에서 지냈다고 한다..

 

그래서 물었다..

"삭발하고 가사 장삼입은 영정은 없나요?"

그는 일시 설잠이란 법명으로 승려가 되었다가 다시 환속하는 등

고승으로 인정 받기 어렵다고 한다..

 

김시습이 5살 때 신동으로 소문이 나자, 당시 허조(許稠)라는 정승이 어린 김시습의 소문을 듣고 호기심이 생겨 사실 여부를 확인하고자 그의 집을 찾았다. 김시습을 만난 허조는 그에게 넌지시 말을 걸었다.
"네가 글을 아주 잘 짓는다 하던데, 이 늙은이를 위해 '늙을 노(老)'자를 넣어 시 한 구절만 지어 줄 수 있겠느냐?"
이 말을 들은 김시습은 조금도 주저하는 기색 없이 즉석에서 이렇게 시를 지었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니 마음만은 늙지 않았도다[老木開花心不老].'

그후 대궐에 불려가 재주가 입증되자, 세종은 가상히 여겨 비단 50필을 상으로 주도록 지시하였다. 그러면서 김시습이 그 많은 비단을 어떻게 가져가는지 보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힘으로 가져가야 한다고 분부했다. 이에 어린 시습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각 필의 끝을 서로 묶은 다움 그 한쪽 끝을 허리에 묶어서 끌고 나갔다고 한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신동이 났다며 감탄해 마지않았다.

(궁남지)

 

무왕의 탄생설화와 관련된 궁남지..

드라마 서동요의 주인공..선화공주의 잠벗..

善化公主主隱 / 他密只嫁良置古 / 薯童房乙 / 夜矣卯乙抱遺去如

 

 

궁남지 주변 10만평에 연을 가득 심었다..

여름에 피는 연꽃은 거의 시들고 나를 기다리는 열정적인 연꽃 몇 송이  휘늘어진 능수버들과 함께 나를 반겨준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예전에는 탑에 새겨진 글씨 때문에 대당평제탑으로 알려졌으나, 그뒤 발굴조사결과 명문이 발견돼 본래 이름을 되찾은 탑..

 

절이 불 탈 때 그을린 자국이 탑신에 그대로 남아잇다..

마치 소정방이란 불한당에 능욕을 당한 치욕을 견디고 의연하게  백제의 미를 전하는 그 모습은 "궁형의 굴욕을 참고 사기 집필의 위업을 달성하여 영원히 빛나는 사마천"의 기상을 닮앗다고 할까? 

 

넓은 터에 홀로 덩그러니 남아 외롭게 보이는데, 안개가 은은할 때 보면 가장 아릅답단다.. 

이 각도가 이 탑의 얼짱각도라고 백제문양으로 표시되어 있다..

 

(백제의 문양)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에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라는 말이 나온다..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는 그대로 백제 예술에 대한 총평이라 할만하다..


 

          (백화암)     

                  

해거름에 유람선을 타고 부여의 상징과 같은  백마강과 낙화암을 마주하였다..

실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성 함락 당시 여기서 죽었을까?

백제 멸망후 의자왕과 함께 당으로 끌려간 사람만 1만 8000명 이었다고 한다..

 

(고란사 종소리)

 

고란사에 올라 3년 젊어 진다는 샘물을 마시고 돌아서니 마침 고란사에 종소리가 울려 퍼진다..

 "고란사의 종소리가 들리어 오면~~ "

그 노래 가사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며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고란사 낙조)

 

고란사 종소리와 함께 해가 넘어간다..  

해 기울고 저녁 노을을 보는 것이 다반사안데, 이곳에서 보는 느낌이 남다른 것은 왜일까?

 


유람선에는 "가무금지"라고 써있다..

하지만 유람선 확성기는 홀로 목청을 돋워 배호의 "꿈꾸는 백마강"과 허민의 "백마강"을 불러댄다..

 

문득 고개를 드니 서산에 해는 기울고

망국의 고지에 선 나그네의 마음엔 긴 그림자가 드리우는데,

강물의 훌쩍이는 소리만 배전에 아련하다..




어스름 강변을 걸어 구드래 식당에 앉았다..

누군가 술병을 꺼내 따르는데, 먹을 만하다..

주흥에 젖어 그동안 보고들은 인간사 희노애락을 모두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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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재고택의 사랑채)

 

논산시 노성면 교촌리에 이르니, 집앞 연못 배롱나무 붉은 꽃에 가려진 이쁜 한옥이 나타난다..

배롱나무는 어느 정도 자라면 껍질이 없어진단다..그래서 겉과 속이 같다고 여겨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나무로 삼는다..

그런 이유로 선비의 집에 배롱나무를 심는 모양이다.

 

흔히 윤증고택이라 불리는 이 집은 명재 윤증이 눌러 살던 집은 아니란다..

본인은 원래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단촐한 집에서 살앗는데, 제자들이 주선하여 이 집을 지었으나, 정작 본인은 분에 넘친다고 생각한 듯 이곳에서 살기를 싫어하여 아들이 살았고, 가끔와서 묵기는 하였단다.

 

명재 윤증은 개성과 소신이 뚜렷하다.

그는 무실과 실심을 강조한 실용주의자 같다고나 할까?

특히 허례허식을 싫어하여,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꺼리가 많은 유밀과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한 유언할 정도였단다.

그의 집안 제사상에는 조기도 한마리가 아니라 토막으로 올린단다..

음식은 종이를 입에 물고 남자들이 장만한다..

추석 제사상의 경우 앞줄에 과일, 2번째 줄에 김치, 3째줄에  백설기..

이렇게만 딱 차린다..

송편 대신 백설기를 올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던가?

설날에는 백설기 대신 떡국를 올린다..

그뒤 후손들은 이 정신을 계승하여 기제사도 한밤중이 아닌 저녁에 지내고, 구한말에는 이미 양력으로 제사날을 정했다고 한다..  

이런 실용, 간이의 정신은 정통파 내지는 교조주의적 성리학자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안채 뒤편 언덕에 있는 전통의 장독대)

 

명재 집안의 장맛은 몇백년의 전통이 있단다..

전에 350년전통의 보성선씨 종가의 간장이 1리터에 500만원씩 팔렸다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이 집의 간장도 백화점에 출시되는 간장은 위 장독대 것이란다..

찾는사람이 많아 사랑채 옆 빈터에 많은 장독을 두고 간장의 생산을 늘렸단다.. 

(사랑채 옆 장독대)


(안채 대청에 있는 글씨)

 

대청마루에 "청백전가"라 쓰여진 편액이 있다..

"청백의 기상이 전해오는 집안" 쯤으로 번역될까?

 

명재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고, 그 아버지 윤선거는 송시열과는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다.. 

명재는 벼슬을 한 적이 없고, 임금이 벼슬을 내리고 불렀어도 나가지 않았단다..

10차례 벼슬이 내려지다가 우의정 벼슬까지 내리며 불러도 사양하였으니 백의정승이라 할 만하다.

 

왜 그는 그의 스승 송시열과 반목하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까?

 

우선 우암 송시열은 교조주의적이고 보수적 성리학자 같다. 주자전서의 1자 1획도 고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백호 윤휴가 "중용"에 집주를 달면서 독창적인 견해를 내자,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단자)으로 몰아 부쳤다..

이때 윤선거가 윤휴를 긍정적으로 보아주자, 송시열은 윤선거의 과거사(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고, 동지인 김익겸이나 자신의 처 등이 순절하였는데, 본인은 탈출한 사건)을 들먹이며 힐난하면서 이른바, 회니논쟁이 벌어졌다.

그뒤, 윤선거가 죽자 아들인 윤증이 아버지의 친구이며 스승인 송시열에게 비문 작성을 부탁하자 성의없게 작성해주었고, 재차 요청하는데도 거절하면서 스승과 제자는 갈라섰다.

 

이 두사람의 관계를 보면서, 이황과 기대승의 관계가 떠오른다..

두 사람도 "사단칠정론"으로 논쟁이 붙었으나 서로 존중하였고, 안동사람인 이황이 죽으면서 자신의 비문작성을 호남의 기대승에게 부탁하였고, 기대승은 흔쾌히 성의껏 작성해주었다..

 

그러니 스승과 제자로서 반목하는 두사람이 해동 18현으로 불리는 것은 좀 뭐한 느낌이다..


(안채 대청에 있는 제사상)

 

논산의 3명문가에 대한 "삼치례" 이야기가 잇다..

 

광산 김씨는 먹치레

파평 윤씨는 묘치레

은진 송씨는 집치레 

 

연산의 광산 김씨는 제사를 모시는데 성의를 다하고 제수를 푸짐하게 장만하고 제물을 1자씩 괴고 각종 음식도 많이 만들어 밤중에 제사가 끝나면 나누어 먹고 아침엔 각자 봉게도 싸주어 보낸단다..

노성 파평 윤씨는 조그만 제사상에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지만, 묘을 단장하고 석물을 잘 꾸미는 전통이 있단다..

은진 송씨는 좋은 집을 짓고 단장하는데 관심이 많단다..  


 (사랑채에서 보는 배롱나무 연못)

 

해설하시는 분이 16:9 비율의 화면은 이 집 사랑방에서 나온 것같다고 농담한다..

정말 그럴 듯하다..


(종학당)

사진 속 저수지 건너편 언덕에 묘치레한다는 노성의 파평 윤씨의 묘소가 잇다..

 

 

명재가 벼슬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세가지..

첫째, 서인들이 남인들의 쌓인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외척의 세도를 막지 못하면 안 된다.

셋째, 당론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풍토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전제들이 해소되지 않는한 정계에 진출해보아야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 날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함께 하며 명재를 지지했던 박세채는 훗날 영조 때 탕평책을 뒷받침하였던 것을 보면 명재가 탕평책의 선구였음을 알겟다.. 

 

결국 조용히 은거하며 집안에서 세운 사립학교격인 종학당에서 후진을 양성한다..

그 결과 집안의 후손중 42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일단 과거에 급제해야 사람행세를 하니..


(종학당의 정수루)

 


종학원의 정자 정수루.. 일종의 휴식공간..

여기서 공부하여 과거 급제한 사람들의 시가 기둥에 써잇엇는데, 보수과정에서 다 지워졌단다..

 

안동의 하회마을의 병산사원과 비교해보면,

병산서원은 그 곳 풍광처럼 속이 깊은 사람을 키워낼 것 같고,

이곳은 툭터진 풍광이어서 가슴이 넓은 인재를 배출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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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암서원)

 

어려서 우리나라 제일의 양반은 광산 김씨라는 말을 들었다..

임금 앞에서도 자랑했다는..

왜 제일의 양반인가? 그 당시 듣기로는 대제학(요즘 서울대 총장쯤 될까?)을 제일 많이 배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그렇다면 대제학을 임명한 왕 앞에서 자랑햇다는 것은 과장된 말인 것 같다..

 

광산 김씨가 정녕 제일 양반이라면  그 소리를 듣게 한 단초를 제공한 사람은 사계 김장생이다..성리학 그중에서도 예학의 대가..

어릴적엔 송익필로 부터 배우고, 커서는 이이 율곡의 상수제자가 되었다..

나이 들어 고향인 연산면 임리에 양성당을 세우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그의 아들 신독재 김집은 물론 제자인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 명재 윤중의 아버지인 윤선거 등 서인의 굵직한 사람을 키워냇다..

그러니 흔히 기호학파라 불리는 학맥의 태두격이다..

논산시 연산면 임리에 위치한 돈암서원은 그에게 내려진 사액서원(왕이 인증하는 서원)으로 대원군의 서원철폐시에도 에외로 인정받은 정통서원이다..

 

임진왜란후 전쟁의 당사자 3국 중 중국 명나라는 청에게 망하였고, 일본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후계정권이 붕괴되고 도쿠카와 이에야스의 막부가 새로 성립되었다..

그러나 가장 혹독한 피해를 입은 우리나라는 왜 왕조의 교체가 없었을까?

이는 사대부들이 예학을 통하여 사회기강을 바로 잡고 가부장질서을 강화하는등 기반사회의 장악력을 높임으로써 사회의동요를 막았기 떄문이 아닐까싶다..

그 기초이론이 예학(특히 상례)이다..

현종년간에 벌어진 서인과 남인의 "예송논쟁"은 목숨과 권력을 건 일대 사투였다..그 중심에 사계의 제자 송시열이 있었다..

하지만, 영,정조 이후에는 교조주의, 형식주의, 허례허식에 빠지고, 세도정치와 결합함으로써 새로운 변화에 대응할 수없는 불치병 환자꼴이 되었다..

(숭례사)

 

숭례사는 사계 김장생을 모시고  아들 신독재 김집, 제자인 우암 송시열, 동춘당 송준길을 배향한 사당이다..

 

이들은 모두 이른바 해동18현(海東18賢)에 추앙되어 공자를 모신 사당인 문묘(文廟)에 배향되는 영예를 얻었다.

 

해동 18현이란 신라, 고려, 조선조에 걸쳐 뛰어난 유학자 상위 랭커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이름을 보면,  설총, 최치원, 안유(안향), 정몽주(포은), 김굉필(사옹), 정여창(일두), 조광조(정암), 이언적(회재), 김인후(하서), 이이(율곡), 이황(퇴계), 성혼(우계), 김장생(사계), 조헌(중봉), 김집(신독재), 송시열(우암), 송준길(동춘당), 박세채(남계)이다.

성혼까지는 별 논란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하지만, 그이후의 6명은 모두 서인 측 사람이다..

동인 쪽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등과 비교해 보면 혹 인조반정으로 서인 집권후에 정하여진 결과가 아닌가 하는 논란의 여지도 있을 것 같다..

 

어쩃거나, 사계의 자손들은 아들 김집은 대학자로 추앙받앗고  손자 김익겸은 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자 순절하였고, 김익겸의 큰아들  김만기는 숙종의 장인이 되고, 둘째 서포 김만중은 한글소설 "구운몽", "사씨남정기"로 유명해지는 등 명문가로 성장하였다..

더구나, 김만기, 김만중 형제는 물론  김만기 아들과 손자 등 3대 걸쳐 대제학을 배출하였다. 

그러니 제일 양반이라는 소리가 나올 법도 하다..

 

(양성당과 원정비)

 

양성당은 사계가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원정비는 돈암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서원의 구조, 김장생의 행적 등에 관해 기록해 놓았는데, 제자인 비문은 송시열이 짓고 글씨는 송준길이 섰다 한다..

2사람은 그런 콤비로 서인 그중에서 노론의 지도자로 평생을 살앗다 한다.. 

 

원래는 돈암서원 이곳에서 떨어진 돼지바위(돈암)에 위치했다가 수해를 피해 고종연간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한다..

 

(응도당 편액)

 

지(地) 부(負) 해(海) 함(涵)

땅이 온갖 것을 다 실어주고, 바다가 모든 물을 다 받아 주듯이 모든것을 포용하라는 뜻 ..

(사당 담장)

 

사당 담장에 전서체로 우측으로부터 지부해함의 글씨를 새겼다..

 

하지만, 이곳 학풍이 예학이라 그런지..

시비(詩碑)는 보이지 않는다..

영남학파인 서애 유성룡의 터전 하회 마을에서 느꼈던 시비들..형제간의 우애가 느껴지는 시가들은 이곳에 없다..

좀 근엄한 충청도 양반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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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철확)

논산, 부여 문화답사에 나섰다..

논산하면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당연히 황산벌..계백장군..견훤..

백제의 5천 결사가 장렬히 산화한 그 지역에서 몇백년후 후백제의 신검군이 다시 왕건에 항복하여 고려는 통일을 완수한다..

어째서 통일 전쟁의 최후 승부는 2번이나 황산벌에서 이루어졋는가?

그 지역이 그만큼 전략적 요충지역이라는 말이겠지..

지금도 논산 연무대에는 논산훈련소가 있는 것을 보면 여전히 그러한가 보다..

황산벌 전투의 결과 계백은 분사하여 인근에 묻혔다..

견훤은 자신을 배신한 맏아들 신검을 패퇴시킨후 왕건이 신검을 살려주자, 분통이 터지고  등창이 악화되어 개태사에서 눈을 감았다고 한다..

그의 묘도 인근에 잇다..

2사람의 묘는 지나쳤다..그리고 개태사로 향했다.

 

개태사는 통일을 완수한 왕건이 불보살의 가피에 감사드리고 전몰자를 위령하는 차원에서 건립한 국찰이었다 한다.

그 부지가 10만평 정도 되었다하는데..임진왜란 때 불탔다고 한다..

지금의 개태사는 원래 유적지에서 다소 떨어진 곳에 1930년대에 개인이 지었단다.

그러나, 그 절에는 개설 당시부터 있었다는 쇠솥(철확)이 보관되어잇다.

이 쇠솥은 1000명의 승려가 먹을 음식을 조리했다고 하는데..

해설자 말로는 밥은 설기 때문에 불가능했을 것이고, 국은 끓이는 것이 가능했을것 같지만,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고 신물로서 보관하던 것 아닐까 추측하였다..

쇠솥은 거푸집을 짜서 쇠를 부어 한번에 만들어 내는데 최근에도 이정도 크기의 쇠솥을 만들기는 쉽지 않다고 한다..

이 쇠솥은 일제시대 조선물산공진회 박람회 때 쌍계사의 꽃살무늬 창살문과 함께 기차에 실려 서울 나들이도 하였으나 귀가길에 방치되었다가 우여곡절 끝에 이절에 안치되었다고 한다..

 

 

이 솥의 가장자리가 깨진 것은 일제 말기 태평양전쟁 통에 일제가 쇠붙이 공출을 강제하자 견디다 못한 사람들이 쇠솥 가장자리를 떼어내어 바쳤기 떄문이란다..

 

 

 

(개태사 뒤 천호산)

 

개태사는 천호산 아래에 자리잡고 잇다..

천호산은 황산벌이 위치하여 황산이라 불렸단다..

황산의 내력도 원래 산이 연이져 잇다는 있다는 "느러뫼"가 "누르뫼"로 변이하여 누렇다는 뜻의 황산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곳은 면 이름은 연산(連山)인 것을 보면 그럴듯하다..

하여간 그런 황산인데, 왕건이 "하늘의 보호를 받아 대업을 이루었다"하여  천호산(天護山)이라 개칭하였고, 절이름은 "태평시대를 연다"는 뜻으로 개태사라 정하였다 한다.. 

 

 

(쌍계사)

 

양촌면 중산리 불명산에 있는 쌍계사에 갔다..

지리산에만 쌍계사가  있는 것이 아니다..이 절도 양쪽으로 계곡이 있다..

이절은 고려 광종 때 은진미륵을 건립한 혜명이 세운 절이라 한다..

혜명은 은진미륵을 세울 때 거대한 상체를 들어올리는 방법을 궁리하는라 고민 고민하다가 아이들이 모래밭에서 노는 모습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모래를 쌓아 상체를  안치하였다고 하는 그 사람이다..

물론 현재 절은 조선 때 중건한 것이다..

이절에 대웅전 꽃무늬 창살이 유명하다..

일찍이 철확과 함께 서울 구경도 다녀온 전력도 잇고..

 


(분합꽃창살)

 

모란, 연꽃, 국화 등으로 조각하고 채색..그러나 안에서 보면 그냥 창호지 바른 문처럼 보인다.

 


(내소사 대웅전 창살-국화문양,채색없음)

 

그러나, 무엇보다 대웅전 추녀 끝에 매달렸음에도 푸른 연못 속에 노니는듯한  물고기 풍경이 한가롭고 여여하다..

(논산시 채운면 소재 미내다리)

 

논산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염라대왕이 묻는단다..

"생전에 은진 미륵, 개태사 철확, 강경 미내다리 보앗느냐?"

그래서 여러 차례 본 은진미륵은 사양하고 미내다리를 보러갓다..

 

영조 7년에 세워진 민간이 세운 홍예교..

지금은 물길도 바뀌고 다리로서의 기능을 상실하였지만 참 아름다운 돌다리다..

민간사람이 돌다리를 세웟다는 것은 이 곳의 경제력이 상당하였음을 의미한다..

인근 강경은 조선 말에 평양, 대구와 함께 조선말 전국 3대 시장으로 이미 명성을 떨쳤단다.. 

그뒤에도 우체국은 충남에서 제1호로, 민간은행의 지점은 전국최초로 개설되었다는 경제력..

연무대에 논산훈련소가 생긴 1950-60년대에는 면회객이 쓰고가는 돈이넘쳐나  "돈산"이라고 불렸다나 어쩌나.. 

 


 

(다리 아치위의 용머리..전설에 다르면 구렁이..혹은 디워..)






(전설은 눈이 좋은 사람만 읽어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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