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왕산에 가고 싶엇다..오래 전부터..

조상들이 산성에서 농성하엿다는 족보를 보다가..

또 화왕산의 억새를 태운다는 신문기사를 볼 때마다

거기에 가고 싶었다..

 

여행계획은 1박 2일로 잡아 말많은 우포늪도 보고..부곡하와이에서도 자보고..

 

(우포늪)

 

창녕군 가는 길이 의외로 가깝다..

경부고속도로 김천 좀 지나서 중부내륙고속도로을 타면 성주를 거쳐 구마고속고로로 이어진다..

 

창녕IC로 나오니 우포늪 방문객을 위한 임시주차장 안내가 요란하다..

마침 람사총회가 개최되어 방문객이 넘친단다..

셔틀버스로 간다..말로 만 듣던 우포늪..

어린적 흔히 보던 방죽과 다름 없다..

철새보다 많은 관람객이 먼지를 일으키며 가득 걸어간다..

습지 보전이 아니라 습지습격같다..ㅎㅎ

물에는 큰기러기들이 유유자적..

우포늪 방문시에는 탐조망원경이 필수..

 

(우포그림)

 

때마침 행사장에 전시하는 그림 중 마음에 드는 우포그림이다..

행사가 지난뒤 다시 방문하여야 우포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곳 가게에서 기념으로 우포 가시연 문양을 넣은 작은 자기꽃병을 샀다..

 

(부곡온천의 불꽃놀이)

 

저녁에 전화로 부곡하와이에 방을 예약하였다.

가고 나서 후회했다..

부곡하와이 호텔 이용시 부대시설을 사용할 수 잇는데..

저녁 7시이후엔 모든 부대시설이 끝난다..온천도 끝..

숙박만하려면 아예 다른 호텔를 이용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

결국 다음날 아침 7시에 부랴 부랴 온천으로 달려갔다..

시설도 요즘 새로지은 찜질방보다 낡앗다..

일본 온천과 비교된다..

야간 노천 온천..조간 해돋이 온천 등등..다양한 메뉴가 우리에겐 없다..

 

하여간 짐을 풀고 밖에 나가 식사를 하고 시장을 돌다보니

온천축제를 한다..

비보이 댄스..박미경의 이브의 경고 뒤에 폭죽이 터진다..

이건 좀 괜찮다..넋을 잃고 보다가 목이 컬컬하여 주점을 기웃 거리는데..

여주인이 한마디 던진다..

고래고기 좀먹고 가이소..

 

 

(고래고기)

 

그래..관광은 새로운 시도니까..먹어보자..

2만5천원에 한접시..

모양은 삼겹살 같은데..첫 맛은 약간 당황스럽다..

석유냄새도 나는 것 같고..헌데 된장에 찍어 먹으니 먹을 만하다..

술도 한잔 들이키고..

 

(화왕산성-동문에서)

 

화왕산 등산코스는 크게 2가지..시내쪽(자하곡매표소)에서 올라가는 코스(짧다)와 반대쪽 옥천 매표소에서 올라가는 코스(길다)

옥천쪽은 임도를 따라가는 길이라 아이들과 가족동반하기 좋다..

중턱쯤 산장이 잇고 거기서 부터 질러가는 길로 몇백미터 올라가니 대장금..주몽세트장이 나온다..말만 그럴듯하지 별로 볼 건 없다..

거기서 바라보는 화왕산성..아득하다..

이 산꼭대기에 산성을 지어놓고 왜적의 칩입에 대비하며 농성하던 사람들..

 

때는 정유재란무렵..

왜군이 재차 북상하자 우리 조상들은 곽재우 휘하에 모여 화왕산성에 들어갔다..

그때 화왕산성맹약계를 맺엇다..서로 한몸이 되어 싸우다 죽기로 맹세한 것이다..

산성은 고립되고 왜군은 진주성을 향한다..진주성이 함락되엇으나 이성은 지켜냇다..

산성에 올라와 보니 감회가 새롭다..아군은 적침에 금심하며 잠을 이루지 못햇을 것이고, 왜적은 험준한 산성을 바라보고 한숨을 지었으리라..

 

(정상을 바라보며)

 

화왕산(火旺山)은 말그대로 불기운이 왕성한 산이라는 뜻이니..태초에 이곳도 분화한 곳이 아닌가 싶다..정상 가운데 분지를 둘러싼 사방의 봉우리가 그런 분위기를 자아낸다..

정상을 바라보며 억새를 감상한다..

오서산의 억새도 아름답지만..화왕산의 억새는 장쾌하고 높은 기상이 함께하는 기분이다..

 

(억새밭에 누워 )

 

서문 쪽 분지 억새밭에서 부추전과 맥주를 시켜 요기를 하고..

그대로 억새 밭에 누웠다..

 

하늘에서 하늘 거리는 억새 이파리 한올 한올이 선명하다..

가을 속에 제대로 잠겼다..

 

***

내려와서 이곳 명물 옥천송이백숙으로 점심을 했다..

물론 백숙이되는 30분동안 오수도 즐기면서..

관광은 새로운 경치..새로운 음식..새로운 노래와 풍물.. 새로운 정보..그리고 새로운 마음과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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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봉공원 입구)

 

추석 지난 첫주말에 하는 모임이 있다..
좀 한가하고 여유를 즐기기 좋은 때다..

낮엔 운동도 하고 저녁에 식음가무도하고 양지콘도에서 1박한후 이천 설봉공원에 들럿다..

 

세계 도자기 축제가 열린다는 이곳에 있는 도자기전시관에 들럿다..

출입문 손잡이도 청자다..

 

(다구)

 

진열된 각종 도지기 중에 다구세트가 눈에 탁 들어온다..
가격을 물어보니 27만원이란다..
역시 내 눈도 한몫하는구나!

 

여직원이 친절하게 다구 고르는 요령을 설명해준다..
1. 잔 밑받침이 긴 것을 골르라 - 입술 닿는 부분을 만지지 않고 밑받침을 잡고 잔을 닦을 수 있단다..
2. 다관(주전자) 뚜껑 중 다관에 삽입되는 부분과 그와 물리는 다관의 입구는 유액을 바르지 않은 것이 좋단다..
3. 실제 다관에서 물이 잘 따라지는 것.. 

 

(8800만원짜리 청자)

 

말 나온 김에 내가 이 전시관에서 제일 비싼 자기는 무었이냐고 물었다..

"8800만원짜리 청자"

왜 비싸냐고 물았더니 청자표면이 무균열이란다..
구현하기 어려운 고급 기술이라서..

 

 


 

청자철사매화문호라고 해야하나..

위 청자의 제작자는 혁산..

 

동국요(東國窯)의 혁산(赫山) 방철주(方徹柱)는  오로지 고려청자의 비색(翡色) 재현을 위해 혼신을 바쳐 온 우리시대의 소중한 작가이다.
1990년이래 청자 중에서도 특히 독특한 디자인과 색상을 지닌 무균열 순수청자 재현에 전념하여왔다.

그의 작품 ‘지구무늬 항아리(Global Jar)’가 미국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영구 전시(등록번호 2043527)된다.

1998년 제작된 ‘지구무늬 항아리’ 표면에는 물방울 모양이 점점 확대되거나 축소되면서 착시현상을 일으키는 듯한 현대적인 문양이 그려져 있다. 스미소니언 측은 고려청자의 고전적인 아름다운 비색을 바탕으로 현대적인 디자인을 표현한 최고의 작품이라고 극찬한 것으로 전해진다.

(달항아리 백자)

 

잠벗에게 맘에 드는 것을 골르라니 문양이 없는 청자를 고르는데..

난 달같은 백자가 좋더라..가격 50만원..







이 전시관엔 다양한 자기가 많았다..

자기 삼겹살판도 있었고..부엉이 자기 촛대도 잇고..

문양도 다양하다..

연꽃..잉어..대나무..
 

 




일요작가회가 이곳에서 그림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천막형 공연장 공간에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따라주는 차를 들고 그리는 그림을 구경하노라니 파리의 몽마르뜨가 따로 없네...


 

(시비-구상)

 

워낙 넓은 공간이라 시간도 부족하여 내년 모임 때 다시 와서 호수도 돌고 산림욕장도 걷고..국궁도 쏘기로 하고.. 돌아서서 인근에 다도체험장 표지를 보고 갓더니 관리요원은 없고 화가들만 처마밑에 앉아 도시락 먹느라 바쁘다..

 

입구로 나오는데 시비가 서잇어 감상하며 내려온다..

그중 구상의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잇다.

 

그래서 나는 죽고나서 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심수관의 방명록)

 

점심을 먹으러 쌀밥집에 갔다..

송월..

이천의 트레이드 마크인 쌀밥을 이천의 도자기에 담아 먹는다..

멋진 매치..

더구나, 반찬이 전주인심 못지 않으니 이천에 오래 살면 살찌겟다..

 

이 가게 입구에 유명인의 방문 기념 서명이 붙어 잇는데, 그중 심수관의 싸인이 인상적이다..

 

 뭇 산 하

넘어지며 달려온

400년

조선도공 손 14대 심수관

 

그는 정유재란때 일본으로 끌려간 조선도공 심당길의 14세손이란다..

 

1598년 정유재란 때 조명연합군의 방어하던 남원성이 왜군에게 무너진다..일만명이 몰살당하여 남원에 "만인의총"이 생기는 사건.. 

그 때 남원의 도공 심당길이 왜병에 잡혀 일본 가고시마로 끌려간다.

그는 끌려가면서 가져간 조선의 백토와 유약으로 조선의 백자를 재현하여 사쓰마 도예의 창시자가 되었다.


그는 심씨의 성을 고집하였고, 조선에서 불씨를 가져오지 못한 것을 항시 애석해하며 후손들에게 고향의 불씨를 가져오라는 유언을 남겼다한다.

그는 끌려갈 당시에도 배 밑창에 언문책을 숨겨와 자손을 가르쳤고, 그 이후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 한글 교본으로 대대손손 한글을 익혀왔단다.
그 자손이 이어져 12대손인 심수관은 187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만국박람회에 2m에 달하는 대형 도자기 ‘금수대화병’을 출품해 유럽인들의 찬사를 받으면서 이후 가문의 세습명으로 삼게 되었다 한다..

 

그들의 이야기는 시바 료타로의 "고향을 어찌 잊으리’ 라는 역사소설로 널리 알려진다.


 

그의 이름을 도자기 고장인 여기 이천에서 본다..

선조의 고향 남원의 도자기는 쇠퇴하였으나  이천에서 다소 위안을 받았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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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읍성 입구)

 

선운사를 출발하여 고창읍성으로 향했다..

고창읍내의 중심가를 지나 산을 등지고 성이 있다..

성의 입구는 서울의 동대문처럼 옹성으로 되어있다..

 

고창읍성하면 떠오르는 것은 돌을 머리에 인 부녀자들이 성벽을 밟는 행사인 "모양성 답성놀이"다..

돌을 이고 성벽 주위 1.6km를 3번 돌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당연하지..그 정도 체력이면 성를 돌지 않아도 건강할테니..

 

이성을 모양성으로 부르는 이유는 백제 시대의 지명 "모량부리"와 연관이 있을 것 같단다..   

 

(성벽)

 

주차장에서 성벽을 바라보자니 

영국에서 본 요크셔의 성을 연상시킨다고할까?

 

이 성안은  산을 등지고 평지를 향하고, 그안에 동헌, 객사, 관아 등이 들어 있으며, 비상시에만 백성이 성안으로 피난들어 온단다..규모나, 위치  등이 진주성과 같은 요새의 형국이다..

이 성이 실전에서 위력을 발휘한 적이 잇는지 궁금해진다..

이성을 둘러싼 공방전은 역사상 없었던 것 같다..

  

(풍화루 현판)

 

성 한복판에 작은 연못이 잇고, 부근에 약수터도 있다..

연못은 유사시 식수역할을 하였을 것이니, 물걱정은 없었던 성이었으리라..  
연못 지나 누각이 있는데, 이름이 풍화루다.

 

풍년과 평화를 기원한다는 이름..

악필(握筆)의 대가 석전 황욱이 92세에 쓴 글씨란다..

 

석전 황욱 (1898~1993)은  고창 출신으로 호는 石田, 金剛山人, 白蓮山房, 太平老人, 平和老人, 七峰居士, 母岳山人, 20여가지의 호를 사용 하였으며 한국서단을 대표하는 서예가이다. 

 70세전까지는 해서,행서,초서를 즐겨썼으나 수전증이오면서 악필로 전환하게된다.

송곳을 쥐듯이 붓을 쥐는 악필법은 일체의 기교가 배재된,마음과 손이 서로 호응하지않으면 안되는 [심법]의글씨이다. 

 다른 서예가들과는 달리 석전은 90세 이후에 특히많은 작품을남기고 있다..

 

(동헌)

 

이곳의 건물은 1988년경에 원래 자리에 복원을 하였단다..

동헌은 고을 원님이 집무하는 곳이다..

고을 원님의 권한은 5가지..행정,치안,징세, 군사,사법..

동헌에서 외치는 소리가 들리듯하다..

"네죄는 네가 알렸다! 이실직고하라.."

 

(동헌 현판)

 

동헌의 현판은 복원하면서 석전 황욱이 쓴 글씨이다..

 

"평근당(平近堂)"

백성들과 가까이 지내면서 평안하게 다스린다는 뜻이란다..

 


(내아)

 

동헌 바로 옆에  원님의 숙소인 내아가 잇다..

친구들을 초대하여 풍류를 즐기는 모습이 부러울 정도..

주방이 없어 궁금하였는데, 성 중앙부에 "관청"이라는 주방건물이 따로 있어 거기서 음식을 조리하여 운반해오는 것 같다..



(작청)

 

작청은 이방 등 육방관속의 집무실이다..

명칭도 특이하다..

작청(作廳)이면 일을 만드는 곳이라는 의미인지..

 


(현판)

 

조선시대 아전들은 공식 급여가 없었단다..

그러니 작청에 앉아서 공무 수행보다는 자신들의 월급 만드는 일에 더 골몰하였는지 모르겟다..



(옥)

 

성문 가까이 감옥이 있다..

들여다보니 나무 창살, 칼이 잇고, 좁고 창문도 없다..

그 곳에 칼을 목에 쓰고 쭈구리고 앉아 잇으면 답답하여 저절로 죽을 것 같다..


 

성안에 s라인 소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홍송..

이런 나무가 커서 낙락장송이 되고 경복궁의 대들보가 된다..

일제시대 왜놈들이 이런 소나무 다 베어쓰고 산에다 왜송(리끼다 소나무)만 심엇다..

이젠 그마저 재선충에 시달리고 잇으니..

애국가에 나오는 "철갑을 두른듯한 소나무의 기상"은 어디에서 보려나 했는데..이곳에서 그 편린을 보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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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 입구에 위치한 비석)

 

추석 다음날..고창 선운사를 향해 달린다..

해미 i.c에서 군산까지 상행선은 차가 나래비 선다..

하행선을 씽씽 달리며 쾌감마저 느낀다..

 

선운사에 도착하여 좀 걸으니 입구 공원에 비석이 보인다..

선운산가..

백제 때 장사(長沙) 사람이 정역을 나가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선운산에 올라가 못내 그리운 심정을 읊은  노래라한다.  가사는 전하지 않고 제목과 유래만 《고려사(高麗史)》 <악지(樂志)> 등에 전한다.

 

이 비는 시의 내용을 전하지 못하니 노래 비라기 보다는 이곳이 오랜 터전이라는 것을 알리는 표지판 같다..

 

 

(꽃무릇)

 

9월에 선운사는 꽃무릇이 한창이다..

상사화라고 하는데, 꽃이 지고 잎이 피어나므로 서로 만나지 못함을 그리워한다하여 상사화(相思花)라고 한다던가..

멋진 작명이다..그러면 목련도 상사화라 불러야 할껀데..

 

선운사 입구부터 도솔암에 이르는 길에 붉은 꽃무릇이 절정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잇다..

 

(대웅전)

 

대웅전 앞에 만세루라는 강당이 잇는데..

강당의 마루에 다구를 진설하고 녹차공양을 한다..

고옥에 반가부좌를 하고 발효녹차를 들면서 대웅전을 바라본다..

조주 고불(古佛)이 "끽다거"(차나 드시게)라고 하는 말이 들리는듯..

집에서 가져온 송편을 곁들여 즐기는 녹차로 마음의 평온을 얻는다..

차를 마시고 다구를 깨끗이 닦아 놓고 잔돈으로 보시하고,

모처럼 법당에 들어가 온가족이 3배를 올린다..

 

(도솔암 미륵마애불)

도솔암까지 2km 남짓..

나무그늘과 계곡 물소리가  어우러진 환상의 산책길이다..

 

 도솔암 뒷편에 13미터 높이의 미륵 마애불이 있다..

고려시대 양식이다..

미륵불은 도솔천에 계시니 도솔암이라 명명한 이유가 분명하다..

 

마애불 중상부에 흰네모 표지가 있는데..

동학교도인 손화중과 그 일행이 그 부분을 부수고 그 안에 들어잇던 비결을 가져갔던 흔적이란다..  

 

(내원궁)

 

 

마애불 옆에 난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도솔천 내원궁이 있다..

여기에 고려후기 양식의 지장보살좌상이 모셔져 잇다..

지장보살은 다른 불상들과 달리 머리에 두건을 쓰고 있으며, 지옥에서 고통받는 중생을 구제한다고 한다.

 

도솔천의 의미는 지족(知足), 희락(喜樂)을 의미하는데, 그 도솔천 내원궁에는 장차 부처가 될 보살이 살고, 흔히 미륵보살이 머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 지옥에서 중생제도를 하리라 서원한 지장보살을 모신 것은 어인 이유인지..




(사자암과 투구바위)

 

내원궁에서 사자암과 투구바위를 바라보는 풍경이 가히 선경이다..

이런 선경을 대하니 여기가 기쁨과 즐거움, 만족감을 주는 도솔천이라는 말이 실감난다..

 

***

풍천장어와 복분자

 

선운사를 나오면서 길가 노점에서 고창의 명물 복분자쥬스를 한잔 사 마셨다..

풍천장어와 복분자 술이 제격이라는데, 운전 때문에 술은 먹지 못할테니 미리 쥬스라도 마셔둔다..

 

장어를 먹기 위해 입구에서 가까운 식당에 갔더니  너무 불친절하여

건너편 식당으로 자리를 옮겼다..

 

평소에 인터넷으로 원조식당을 검색하고 오는데, 이번엔 깜박하였다..

 

하여간 그 식당은 자연산은 1인분 25,000원, 양식은 15,000원을 받는데..

반씩 시켜놓고 먹으며 검증하여보니.."자연산"이 더 굵고 맛이 있더라..

헌데, 문득 의심이 간다..자연산이라면 좀 맛은 있겠지만 더 굵지는 않을 것 같기 때문에...

 

돌아와 검색을 하여보니 원조격으로 추천된 "신덕식당"의 경우 15,000원에 팔고 있더라..

 

하여간, 풍천장어라고 불리는 이유는 고창 선운사 앞 인천강에 하루 2번 바닷물이 들어오는데 자연산 장어가 바닷물과 함께 바람을 몰고 들어온다고 해서 "바람風" "내川"이란 글자를 써서 풍천장어라고 한다. 이곳이 유명한 것은 바다 부근에 염도가 높고 고기가 오염되지 않아 육질이 뛰어나서 고창에서 나는 풍천장어를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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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대문)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자리한 동춘당은  송준길이 살던 집이다..송준길은  인조와 효종 현종 3대를 걸친 사부(師傅)의 역할을 하여 ‘삼조의 빈우’라고 불린다..그의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 김은휘(金殷輝)의 따님인데, 그는 황강 김계휘의 아우다. 황강의 아들이 사계 김장생인 점을 고려하면 동춘당은 외손으로 그 학통을 이었다. 동춘당의 사승관계는 사계와 신독재 외에도 청음 김상헌이 있다.그는 퇴계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의 사위가 되어 충청과 영남의 예론을 교류 소통시키는 사람이 된다..

****

사계는 영남학파의 예학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와 교류가 깊었다. 사계는 영남에서 자신과 더불어 예학을 논할 만한 인물은 오직 우복뿐이라고 여겼다.
이런 관계에서 우복이 사계에게 사윗감을 천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우복에게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신랑감을 영남에서 구하지 않고 기호학파의 사계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 부탁을 받은 사계는 “자네가 직접 충청도 연산에 와서 내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면 어떻겠느냐?” 하는 제의를 했다. 사계 문하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들이 득실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우복이 연산에 와서 청년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당의 문을 열었다. 이때 방 안에는 세 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세 청년이 편한 자세로 쉬고 있던 참이었다. 예고도 없이 나이 많은 사람이 불쑥 찾아와 방문을 들여다보니까 세 청년이 취한 태도는 각기 달랐다고 전해진다.
이유태는 바닥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문 밖에까지 쫓아 나와 우복에게 큰절을 올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이든 어른이니까 큰절부터 올리고 본 것이다. 송준길은 일어나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방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이 3인의 각기 다른 대응을 목격한 우복은 사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유태는 너무 급하다. 송시열은 너무 과하다. 어른이 왔으면 일단 일어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송준길은 중용지도가 있다.”
결국 사윗감으로 송준길을 택하였다. 그렇지만 송시열과 이유태도 후일 ‘충청오현’에 포함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물론이다. ‘중용지도’가 있다고 해서 영남학파 정경세의 사위가 된 송준길은 스승과 장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기호의 예학과 영남의 예학을 소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송시열과 이유태 같은 노선도 있어야 하지만, 요즘에는 송준길의 노선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조용헌 살롱에서)
***위 일화에서 동춘당과 우암의 성격도 드러난다..

 

 

 동춘(同春)이란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는 뜻으로 선생은 이곳에서 독서와 교육을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회덕향약(懷德鄕約)을 만들었다. “동춘당(同春堂)” 현판은 우암의 글씨다..그 당시 우암은 괴산 화양동계곡에 살아던듯 "화양동주"이란 명칭을 사용하고잇다.. 동춘당은 우암과 평생을 함께 공부하고 행동한 사이다. 그가 9살 때 우암이 송촌으로 와서 기거하며 함께 글을 읽었고 25세 때도 함께 공부했다. 우암이 송촌으로 와 공부한 것은 우암의 부친 수옹 송갑조가 아들을 데리고 와 동춘당의 부친인 청좌와 송이창에게 배우게 한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두 사람은 일찍부터 ‘도학지교(道學之交)’를 맺어 평생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비문을 세울 때에도 우암 글, 동춘당 글씨의 구도인데, 화순에 있는 정암 조광조 유허비와 남해에 있는 이순신장군의 사당인 충렬사 비가 대표적인 예이다. ‘양송’이란 찬사가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춘당의 필적)

 

그의 학문은 송시열과 경향을 같이 하여 주자서와 심경, 근사록 등에 치력하였으나, 그의 가장 득의처는 예학이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서 곳곳에 많은 글씨를 남기고 있는데, 돈암서원 묘정비·숭현서원비·박팽년 유허비 등  많은 유품을 남겼다.. 

 




(송용억 가)

 

이곳 송촌동에는 동춘당과 종가, 송병억 가옥 주변에 동춘당 공원을 조성하였으며, 그 인근의 땅은 아파트 단지(위 사진 뒷편)로 개발되었다..그 아파트 이름이 "선비마을"이다..

 

송용억 가는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살기 시작하여 현재 11대손 까지 살아오고 있는 집이다.

 

(오숙재 현판)

 

송용억가는 안채와 큰사랑채·작은사랑채, 가묘로 구성되어 있다.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사랑채인 소대헌이 있고 오른쪽에 작은사랑채인 오숙재가 있다. 큰사랑채에는 넓은 대청과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달았다. 안채 앞에 위치한 작은사랑채는 오른쪽 끝에 툇마루를 한단 높게 두어 운치를 살렸다.안채는 작은사랑채의 왼쪽에 나있는 중문을 지나서 출입할 수 있다

 

(호연재 김씨 시비)

 

송용억 가는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여류문학사의 공백을 메꾸어 줄만한 여류 문인인 호연재 김씨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송병하의 며느리(즉 동춘당의 증손부)인 호연재 김씨는 여성 특유의 감성을 담은 많은 시를 남겼다. 호연재 김씨는  안동 김씨로 군수를 지낸 김성달의 딸이다. 19세에 동춘의 증손인 소대헌 송요화와 결혼하여 28세에 아들 송익흠(보은현감,  : 오숙재)를 낳고, 딸을 낳았으며,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호연재는 그녀가 살던 안채의 당호, 소대헌은 남편이 머물던 큰사랑채의 당호, 오숙재는 아들이 머물던 작은 사랑채의 당호이다..문인 가족다운 명칭이다..이들 부부의 인생이야기는 "소대헌 . 호연재 부부의 사대부 한평생 "(김성철 저)의 제목으로 책으로도 나왔다..그녀의 또다른 시 한편..

 

醉後乾坤潤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開心萬事平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情然臥席上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唯樂暫忘情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

 

(서포 김만중의 소설비)

 

동춘당이 위치한 송촌동은 계족산을 등지고 남쪽 산록에 위치하고 갑천이 우측으로 흐르는 평안한 자리에 위치하고 잇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갑천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들판이 아주 넓고 사방 산이 맑고 화려하다.
세가닥 큰 냇물이 들 복판에서 합류하여 관개할 수가 있다.
땅은 모두 1묘에 소출이 1종이나 되며, 목화를 가꾸기에도 알맞다.
또한 강경이 멀지 않고, 앞에 큰 시장이 있어 해협의 이로운 점이 잇으니 영원히 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다."

 

이런 좋은 자리에 회덕 송씨만 거주할리가 없다..회덕에서 갑천을 거슬러 건너 대전 엑스포 개최지 뒷편(연구단지 중앙부)  우성이산 서쪽 기슭(유성구 도룡동)에 여흥 민씨의 세거지가 있고..하긴..유성(儒城)이란 말 자체가 "선비의 고장"이란 의미이고 더구나 연구단지 등이 있으니 명실싱부한 선비 마을이다..

 

그 우성이산 북동 쪽 기슭의 갑천변(회덕 쪽에서 갑천 건너편) 즉 유성구 전민동에는 사계 김장생의 아들 김반의 묘역이 있고, 그런 연고로 그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독재 김집(金集)의 아우다.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10여 년 간 은거하며 학문에만 매달렸다. 인조반정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인조가 공주로 피난오자 호종하엿고, 왕이 공주에 있을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곳 묘소에는 아들인 김익겸의 묘가, 아버지 김반의 묘보다 위에 조성되어 소위 역장(逆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예학의 잡안에서 어찌 그런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아들 김익겸이병자호란 때  23세의 어린 나이로 강화에서 장렬하게 순직하자, 아들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김반 자신이 아들의 묘를 위로 쓰도록 배려한 연유이다. 서포 김만중은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낫다..이런 연고로 전민동에 서포의 소설비가 서잇다..시비는 흔히 보았어도 소설비는 처음 보았다..

 


 

(김익겸의 정려문 일부)

 

(심산 김태원의 시비)

 

이런 터전에 후학들도 보고 배우는 것이 남다른 모양이다..송촌동에는 심산 김태원의 시비가 서잇다..

그는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황보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1922년에 평안북도 삭주에 잠입하여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하였다. 그해 8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신임 아래 양승우 등과 ‘벽창의용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과 일본 경찰 및 밀정의 사살 등 많은 일을 하였다. 1926년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복역 중 평양감옥에서 탈옥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피는 죽음을 낳고죽음은 의기를 낳고의기는 충정을 낳는다..충정은 절의를 낳고 절의는 대나무로 살아나머금은 피 천년세월 일관되니대나무 빛 언제나 봄빛처럼 푸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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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정사)

 

논산, 부여를 다녀온 다음날 대전 가양동의 우암사적공원에 갔다..

논산의 돈암서원에서 이어진 인연을 마무리할 참이다..

사계의 제자 우암과 동춘당..조선 후기 성리학의 핵심 코드를 형성한 인물들..


우암 송시열은 소제(동구 소제동)에 살면서 흥농촌(興農村)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能仁庵)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 남간정사를 지었다.
우암이 노년(1683)에 세운 강학당이다.


샘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의 양쪽 축대 위에 방을 들이고 그 사이로 대청마루를 연결하여 공중에 뜬 누각처럼 만들었다.
집 앞에는 고봉산 계곡의 물길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고 왕버들을 심어 운치를 더했다.

역시 직접 심었다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여기서도 빛난다..


 

남간정사의 현판은 곡운  김수증(金壽增)의 글씨다..

그는 3학사 김상헌의 손자로 김수항의 형이다..그 형제는 우암과 같은 노론으로 정치적 부침을 같이한 사람이다.  

그는 강원도 화천에 은거하면서 조세걸로 하여금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한 것을 보면 풍류를 좋아하는 인물 같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은 숙종시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5대손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유명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열었으니 과연 노론의 핵심들이다.. 

 

조세걸은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으로부터 그림을 배운사람이다..



(유물전시관-효종의 밀찰)


(효종이 하사한 초구)

 

효종이 즉위한후 재야세력인 사계 김장생의 문인들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기용하여 정국의 돌파를 시도한다..

중종이 조광조를 기용하듯..

효종은 대군시절 우암과 사제관계로 맺어져 잇어 그에게 큰 기대를 건다..

그리하여 그에게 자신의 북벌의사를 밝히는 밀찰을 보내고, 또 북벌시 만주벌판의 추운 날씨에 입으라고 담비 가죽옷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효종과 우암의 생각이 일치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우암이 효종만큼 북벌에 적극적이었느냐에 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암이 명나라의 은혜에 대한 의리를 강조한 것은 분명하지만, 효종처럼 실질적으로 북벌을 단행하려는데에 대하여는 소극적이었다는 견해가 최근에 강력히 대두된다..

이러한 견해의 책들이 이덕일 저 "송시열, 그들만의 나라", 박성순 저 "선비의 배반"등이다.. 

  

 


(우암의 글씨)

 

 

그는 주자가 남송의 효종에게 말한 것 처럼 왕과 사대부들의 성리학에 터잡은 심성수양을 통한 내치를 완성하여야 북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효종의 실용적 경세 개혁을 통한 군비의 확충과 군사조련 등 우선정책을  천박하게 생각 하였다는 것이다..

효종 사후에 벌어진 예송논쟁이나 남인과의 투쟁에서 보여준 그의 역정은  그가 유비 사후 북벌의 대업을 짊어진 제갈량과는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암사적공원 내 정자)

 

우암은 대전의 보문산을 지날 때는 산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부채로 가리고 지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보문산은 그 모양이 다양하여 보는 시각에 따라 각기 산의 형태를 달리 해석하여 왔던 것이다. 즉 보문산은 젊은 여인이 머리를 풀고 통곡을 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인의 나체로 누워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지니고 있어 이 산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에서도 우암의 성격이 드러나는듯하다.

즉 그는 학문적인 정통성,엄격성을 유지하는데는 철저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강경, 과격하게 발현되어 적이 많았고, 결국 당쟁의 표적이 되어 83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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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나와 산청군 시천면으로 향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에 갔다..

산천재 앞에서 서니 이름 그대로 산과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곁에 덕천강이 흐르고 강건너엔 구곡산이 서잇다..그 북쪽 어께너머로 지리산 천왕봉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頭流山(두류산) 兩端水(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桃花(도화) 뜬 맑은 물에 山影(산경)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武陵(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여기를 무릉도원으로 여겼던 남명 조식..

 

그는 평생 처사로서 벼슬을 마다하고 성리학을 닦으며 실천을 중시하는 교육을 강조하여 후일 임진왜란 때  그 제자들 중에서 정인홍,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을 제일 많이 배출하였다..

 

항상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는 패검을 차고 다녔다.  

성성자라는 방울이 울릴 때 마다 '경'의 마음 자세를 되새긴다는 것이다.  

경의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다). 

 이 검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것은 의로운 행동이 필요할 때는 이를 단칼에 베듯 결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명종 때 그에게 단성현감 벼슬을 내려자 사직 상소을 올려 조정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명종을 좌지우지 하는 문정왕후를 빗대어  "깊은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그런 그도 명종이 승하하자 애도하는 시조를 지을 정도로 인간미가 잇었다..

그시조는 교과서에 실려잇다..

 

엄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별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진다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산천재에서 보는 천왕봉)

 

 

그의 배포를 보자..

 

천섬들어가는 큰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어떻게 해야 두류산 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산천재의 기둥에 붙은 주련은

이곳에 들어올 때의 심경을 쓴 것이다..

 

 

봄 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마는

다만 천왕봉 하늘나라와 가까와 사랑한다네.

맨손으로 들어와 무얼 먹고 살겠나?

은하수 같은 맑은 물  십 리니  먹고도 남겠네. 


 -덕산에 살 곳을 잡으며-


 

德山卜居


春山底處无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猶餘

산천재 길건너 남명 기념관에 들러 "남명의 한시선"을 샀다..
덕천가 지리산 언저리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며 살앗던 남명선생..

갑천가에서 계룡산 바라보며 사는 이 사람이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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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도 금산에서 가까운 벽련포구로 갓다..

노도가 보인다..

서포 김만중이 귀양을 살던 섬..

그곳에서 구운몽,사씨남정기 등 소설을 쓰다가 결국은 생을 마감한 섬..

 

 

1인당 15,000원원에 낚시배를 빌려타고 가는데..

늙은 선장이 말하기를, 선착장에서 걸어가면 시간이 오래 걸리리 갯바위에 상륙하여 기어오르면 바로 다다를 수 있다고 권유한다..

혹시나 갯바위에서 오도가도 못할까 걱정이 슬며시 드는데..잠벗이 선듯 수락하잔다..

하여 저 바위에 뱃머리를 대고 상륙하엿다..

 

 

선장은 즉시 배를 빼고 선착장에서 기다린다며 잠시 우리를 관망하더니

죽지는 않겠다 싶었는지 훌쩍 가버린다..

 

퍼즐을 풀듯이 제법 가파른 벼랑을 이리저리 헤메다가 어째든 기어올랐다..

 


 저 위로 서포의 귀양지 초옥이 눈에 들어온다.

섬중의 섬..

예전 한양의 높은 분은 어찌 이런곳을 알고 귀양처로 잡앗을까..

 

섬중의 섬에서 다시 위리안치까지 햇다..

즉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제한하엿다니 참으로 지독하다..

어차피 작은 섬에 갈 곳도 없는데..

 


귀양처 초옥의 툇마루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가 아니라 호수처럼 보인다..

이 외로운 섬에 귀양와서 할 것은

분노하다 미치든지..자기의 세계에 몰입해야 살 것 같다..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대흥사 대웅전 글씨를 쓴 원교 이광사는 23년간의 절해고도의 귀양살이에서 동국진체를 완성하엿고,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하면서 수많은 저서를 저술하엿고

정약전은 흑산도의 귀양지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하고 결국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니 서포도 이 귀양지에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리.. 

 

 

초옥에서 나와 선착장으로 향하다가 돌아다 본다..

그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아버지와 할어버지 김반의 묘소는 내가 사는 동네에 잇다..

그 곳에 가면 김익겸의 정려비가 서잇고 그아래 서포 김만중의 소설비가 서잇다..

 

내가 그의 부자를 간접적으로 연결하는 안테나가 된듯하다..

 

청상과부로 어린 2아들을 키우신 서포의 어머니..

자식 덕을 볼만한 나이에 아들은 당쟁으로 귀양살이하게되자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 어머니를 위로하기위하여 썼다는 구운몽..

그야말로 인생은 일장춘몽이요, 남가일몽이라..

그 소설을 쓰고 그는 이곳에서 초탈한 심정으로 귀천하였을까?

 

 


선착장으로 가는 길..

아주 아담하고 소담한 오솔길이다..

이런 길을 좋아한다..

서포의 오솔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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