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향(墨香)    -조용헌-

 

나는 전생에도 '먹물업'에 종사했었나 보다. 전생사가 어땠는지 알고 싶으면 금생 사는 모습을 보라고 했는데, 현생에 이렇게 칼럼을 쓰며 사는 인생도 결국 먹물업 아닌가! 그래서 그런 건지 요즘에는 이상하게도 묵향(墨香)이 좋아진다.

붓글씨는 못 쓰지만 심심하면 벼루에다 먹을 갈아 놓고 묵향을 맡아보곤 하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샤넬 5' 향기보다 더 깊이가 있다. 30대 시절에는 여행하다가 비행기 안에서 풍기는 서양인들의 향수가 세련되게 느껴졌지만,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는 우리의 먹(墨)향이 그리워진다. 먹물에다가 코를 갖다 대면 마음을 안정시켜 주고, 머릿속에 콩알처럼 박혀 있는 생존의 번뇌를 녹여주는 향기가 맡아진다. 먹향을 맡다 보면 마치 천 년 전 조상님들의 서실(書室)에 들어가 그 조상님들과 반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 같다.

먹을 좋아하다 보니까 서예가를 만날 때마다 어떤 먹을 쓰고 있는지 물어본다. 작년에 광주 운암동에서 서실을 운영하고 있는 일속(一粟) 오명섭(58) 선생에게 놀러갔다가 우연히 고매원(古梅園)이라는 일본 먹을 알게 되었다. 일속은 옥동 이서, 백하 윤순, 원교 이광사로 이어지는 동국진체(東國眞體)의 서맥(書脈)을 계승한 서예가이다.

일속에 의하면 고매원은 추사 선생도 그 먹의 색을 좋아했다는 명품 먹이었다. 42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이 '고매원'은 지금도 14대 후손이 만들고 있다. 그 먹빛이 검고 투명하면서도 향기도 은은하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옛날에는 고매원을 제조할 때 사향(麝香)을 넣었다고 한다. 고매원 상품 먹 한 개는 우리 돈 30만원이 넘는다. 고급 먹은 사향뿐만 아니라 용뇌향(龍腦香)도 사용하였다. 두 향 모두 정신을 맑게 해주고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작용을 하는 향이다.

한국에는 어떤 먹이 있었는가. '연운(淵雲)'과 '만수무강(萬壽無疆)'이 있었다. 80년대 작고한 묵장(墨匠) 유석근 옹이 만들었던 먹이다. 당대의 서예가였던 여초 김응현도 '연운'을 즐겨 사용하였다고 전해진다. 맑고 은은한 먹이었기 때문이다. '한 일도 없이 세월만 보내버렸다'는 상념이 들 때마다, 벼루에다 물을 붓고 천천히 먹을 갈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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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가 조카의 결혼식을 축하하며 가로 188㎝, 세로 30㎝ 두루마리에 쓴 〈오언축시(五言祝詩)〉 

 

"은하수 수천 물줄기는 멀리 흐르고[銀潢千派遠]

 옥수의 모든 가지엔 봄이 찾아왔네[玉樹萬枝春]…"

 

 한 획 한 획 힘 있게 뻗어나간 글씨에 여장부의 기개가 녹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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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영복의 서예

 

내가 붓글씨와 인연을 맺게 된것은
어린 시절 할아버님의 문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할아버님의 사랑방에 불려가서
유지(油紙)에다 습자하였다.
할아버님께서는 친구분들이 방문하시기만 하면
나를 불러 글씨를 쓰게 하셨다.
그러면 할아버님의 친구분들은 푸짐한 칭찬과 함께
자상한 가르침을 아끼지 않으시는 것이었다.


이때의 붓글씨란 한낱 습작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지만
돌이켜보면 어린 시절의 정서는 훗날까지도 매우 친숙한 것으로
나의 내부에 깊이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0여 년 후 내가 옥중에서 할어버님의 묘비명을 쓰게 되었을 때,
나의 정서 속에 깊숙이 들어와있는 당시의 기억을
다시 한번 상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4.19혁명 직후 대학을 중심으로 우리 것에 대한 자각이 싹텄던 시절이 있었다.
나의 가까운 친구들 중에는 국악, 탈춤,굿 등을 배우기 시작하여
그쪽으로 심취해간 이들이 상당수 있다.
당시 대학 2학년이던 나는
그때까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붓글씨를 상기하고
붓과 벼루를 다시 꺼내놓았다.
학교 게시판의 공고문을 써붙이기도 하고
행사 때는 아치의 글씨를 맡아서 썼다.


다른 대학교의 아치를 쓴 기억도 있다.
당시 설립되었던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부설 한국경제연구소의 목각현판이
나의 글씨로 씌어졌다고 기억된다.


그때까지 남들 앞에 별로 꺼내놓고 싶지 않았던 붓글씨가
적어도 나의 경우 당시 젊은이들 사이에 만연했던
민족적 패배의식과 좌절감을 극복하는 작은 계기로
나의 삶 속에 복원되게 된다.


내가 서도에 상당히 많은 시간을 쏟게 되는 것은
역시 20여 년의 옥중생활에서이다.
재소자 준수사항, 동상 예방수칙 등의 공장 부착물들을
붓글씨로 써붙이는 일이 계기가 되어
교도소내에 불교방·기독교방·카톨릭방 등에 추가하여
동양화방·서도방이 신설되면서 상당한 시간을 기울일 수 있게 되었다.
온종일 글씨를 썼던 기간도 7,8년은 되었다.


나는 당시 주로 동양고전을 읽고 있었는데
그것은 교도소 규정이 사전·경전을 제외하고
3권 이상 책을 소지할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
내가 동양고전에 많은 시간을 할애한 것은
나도 모르게 내 속에 들어와 앉은
서구적 사고방식을 반성하기 위해서였다.
시경·주역에서부터 섭렵하기 시작한 동양고전 공부는
무엇보다 나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어느 정도의 비판적 관점을 갖추고 있었다고 생각되던 나의 사고내용이
매우 취약한 것임을 깊이 반성하게 하였다.


특히 이 기간을 회상하면서 가장 먼저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노촌(老村) 이구영(李九榮) 선생님과의 생활이다.
노촌 선생님과 한 감방에서 함께 지낼 수 있었던 것은
바깥에 있었더라면 도저히 얻을 수 없는 행운이었다.
노촌 선생님은 우리나라 4대 문장가의 한분인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선생의 후손으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선생과 벽초(碧初)홍명희(洪命喜)선생께 사사를 받으신 분으로
드물게 보는 한학의 대가였다.
뿐만아니라 그러한 출신과 성분, 그러한 연배에서는 뵙기 어려울 정도로
진보적인 사상을 체득하고 계신 분이었다.
진보적인사상이 그냥 진보적인 것으로 드러나지 않고
우리의 전통과 정서가 그 속에 무르녹아 있는
중후한 인격을 표현되는 그런 분이었다.
선생님의 술회와 같이 나는 선생님의 평생에
가장 오랫동안 한방에서 함께 지낸 사람이다.
하루 24시간 내내 무릎을 맞대고 살아야 하는 징역살이였기 때문이다.
당시 노촌 선생님께서는 가전되어 오던 의병문헌을 들여와 번역하셨는데,
그때 번역하신 초고가 93년 10월에 호서의병사적《湖西義兵事蹟》으로 햇빛을 보게 되었다.
나는 선생님의 청을 따르지 않을 수 없어 그 책의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필자는 그 시절 노촌선생님과 한방에서 그 번역 일의 일단을 도와드렸다기보다
그것을 통하여 오히려 선생님의 과분 하신 훈도와 애정을 입을 수 있었음을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다.
노촌 선생님은 많은 분들께서 한결같이 말씀하시는 바와 같이 깊은 한학의 온축위에
조금도 흐트러짐이 없는 선비의 기개로 확고한 사관을 토대에 굳건히 서서 해방 전후의
격동기를 온몸으로 겪어오신 분이다.
이를테면 조선 봉건사회, 일제하 식민지사회, 6.25전쟁, 사회주의사회,
20여 년의 감옥사회, 그리고 1980년대의 자본주의사회를 두루 겪어오신 분이다.>


노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당신은 글씨를 모른다고 하시지만
나는 지금껏 많은 글씨를 보아오면서도
항상 노촌선생님의 글씨를 잊지 못하고 있다.
학문과 인격과 서예에 대한 높은 안목이 하나로 어루러져 이루어내는경지는
이른바 글씨 이상의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노촌 선생님과 함께 하였던 시절
선생님의 번역을 도우며 한문공부도 하였지만
그와 아울러 서도의 정신과 필법, 그리고 우리의 전통과 정서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배울수 있었음을 진심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서도반이 만들어진 후 처음 한동안은
아버님께서 들여주시는 법첩을 임서하고 서론집을 읽었다.
지금도 다른 것에 마음을 두고있기는 마찬가지이지만
그때는 글씨보다는 고전의 탐독에 마음이 더 기울어 있었다.


나는 나의 붓글씨와 함께 잊을 수 없는 두 분의 선생님을
역설적이게도 옥중에서 모시게 된다.
처음 서도 선생님으로 교도소 당국에서 초빙한 선생님은
만당(晩堂) 성주균(成周均)선생님이다.
해서(諧書)와 행서(行書), 특히 대자(大子) 현판(縣板) 글씨로 유명하신 분이었다.
속리산 법주사, 동래 범어사 등 전국의 사찰에 많은 편액이 걸려있고
당시에는 임경업 장군 사당의 현판을 쓰시기도 하였다.
만당 선생님은 특히 성친왕(成親王) 해서(諧書) 법첩과
왕희지(王羲之), 안진경(顔眞卿) 행서첩으로 임서하게 하였고
현판 글씨를 서도의 최고 형식으로 꼽았다.
회심작을 얻으면 그 기쁨을 이기지 못해 당장 붓을 놓고 거리로 나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시며 무슨 낙으로 사는가를 속으로 묻는 분이셨다.
도와 풍류를 함께 갖추신 분으로 기억된다.


또 한분의 선생님은 정향(靜香) 조병호(趙柄鎬) 선생님이다.
정향 선생님은 우하(又荷) 민형식(閔衡植),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선생께 사사를 받으셨으며
원당(阮堂) 김정희(金正喜), 소당(小棠) 김석준(金奭準) 백당(白堂) 현채(玄采)의
정통을 이은 분으로 일컬어진다.
일찍이 1933년에 시서화사(詩書畵社)에 입문하시고
1939년 제1회 선전에 입선하자
일본인들이 벌인 전시회에 참여하였다는 지인들의 비판을 받고
이후 서도계와 인연을 멀리하신 분이다.
우하 선생은 이완용 암살의 배후로 나중에 사면되기는 하였지만
사형을 받으셨던 분이고
위창 선생 역시 33인의 한분이어서 그 제자인 정향 선생님 역시
일제하에서부터 은거하시게 된다.
현재 생존하고 있는 분 가운데 중국 고궁박물관과 역사박물관에
글씨가 소장된 유일한 분이지만
당신은 막상 서예가라는 말은 매우 싫어하시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서(篆書)의 권위자로
특히 와전(瓦篆)에는 독보적인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교도소 당국이 정향 선생님을 교도소로 모셔와
우리들의 글씨를 선생님께 보여드린 것이 인연이 되었다.
교도소에는 일반사범들만 있는 줄로 알았던 선생님으로서는
이들이 사상범임을 알게 되고 상당한 충격을 받으신 것으로 안다.
그 후 선생님은 우리를 귀양온 사람으로 여기게 된다.
평양감사를 조부로 두셨던 선생님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교도소 당국이 선생님을 모셔오기에 그렇게 적극적이지 않을 때에도
매주 하루를 할애하여 우리들을 지도하셨다.


내가 전주교도소로 이송되기 전까지 6년여를 한번도 거르지 않고 오셨다.
심지어는 교도소의 허락을 받아 선생님의 자택으로 우리를 데리고 가서
당신이 소장하고 계신 명필들의 진적을
일일이 짚어가며 일러주시기까지 하셨다.
당신 글씨는 배우지 말고 옛 명필들의 글씨를 배우라고 하셨다.
나는 예서와 전서 외에 특히 많은 시간을 미비(米비)임서에 바쳤다.


특히 나는 선생님으로부터 과분한 애정과 엄한 지도를 받았다.
언젠가 교도소 당국이 독지가에게 사례할 넉 자 현판 글씨를
내가 쓰게 되었는데
나로서는 그 글씨를 표구하여 보내기 전에
정향 선생님의 제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한 주일 동안 습자하여 선생님께 보여드리면
아무말 없이 그 글씨 위에다 교정을 해버리시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기를 무려 일곱 번
그러니까 약 2개월을 넉 자만 쓴 셈이 되었다.


정향 선생님께서는 서예가란 호칭을 매우 싫어하셨다.
까닭은 중국이나 우리나라에 고래로 직업적인 서예가란
있지 않다는 것 때문이다.
원당(阮堂)·원교(圓嶠)만 보더라도 서예가이기 이전에
모두가 먼저 뛰어난 학자였다.

뿐만 아니라 퇴계(退溪) 이황(李滉), 율곡(栗谷) 이이(李珥),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고산(孤山) 황기노(黃耆老)
우리나라의 명필은 어김없이 학자이고 처사였다.


글씨를 글씨로만 쓰는 것은 사자관에 지나지 않으며
더구나 상품화된 서예란 아예서도가 아니라는 생각을 굳게 가지신 분이었다.
인격과 학문의 온축이 그 바닥에 깔리지 않는 글씨란
글씨일 수가 없다는 생각에서 였다.
서예는 예부터 6예의 하나로 기본적으로 '인간학'이라는 것이었다.


정향 선생님은 물론 한글 서예를 하시지는 않았다.
그러나 서예의 정신은 한글이나 한문이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된다.
나는 한문을 쓰면서도 한편으로 혼자서 한글을 썼다.
한글은 물론 궁체와 고체를 썼다.
그러나 궁체나 고체를 쓰는 동안 나는 차츰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조나 별곡, 성경귀절 등을 쓸 때에는 느끼지 못하던 것을
특히 민요·저항시·민중시를 궁체나 고체로 쓸 때에는
아무래도 어색함을 금할 수 없었다.
유리그릇에 된장을 담은 느낌이었다.
형식과 내용이 맞지 않았다.
쓰기는 민중시를 쓰고 싶고 글씨는 궁체라는 모순 때문에
매우 오랫동안 고민하였다.
그때 작은 계기를 마련해준 것이 어머님의 모필체의 서한이었다.
당시 칠순의 할머니였던 어머님의 붓글씨는 물론 궁체가 아니다.
칠순의 노모가 옥중의 아들에게 보내는 서한은
설령 그 사연의 절절함이 아니더라도 유다른 감개가 없을 수 없지만,
나는 그 내용의 절절함이 아닌 그것의 형식,
즉 글씨의 모양에서 매우 중요한 느낌을 받게 된다.
어머님의 서한을 임서하면서
나는 고아하고 품위있는 귀족적 형식이 아닌
서민들의 정서가 담긴 소박하고 어수룩한 글씨체에 주목하게 되고
그런 형식을 지향하게 된다.


한글은 한문과는 달리 그림이 아니다.
기호일 뿐이다.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서의 각박한 한글체를
궁체가 그 고아한 형식으로 어느정도 누그러뜨려주는 면은 충분히 인정된다.
그러나 궁체는 노봉·편필이라는 단순한 필법, 그리고 정형화된 결구로 말미암아
글의 내용에 상응하는 변화를 담기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것에
항상 부족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점에서 어머님의 모필 서한은
나에게 어떤 방향을 예시해주었다고 생각된다.
어머님의 글씨에서 느껴지는 서민들의 체취와 정서는
궁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새로운 미학으로 이해되었다.


그림과 글씨의 결정적인 차이를 한 가지만 들라고 말한다면 나는
그림은 '구체적 형식에 추상적 내용'인 반면
글씨는 '추상적 형식에 구체적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한자의 경우는 그 형식이 원래 상형·지사 등
그림인 경우도 많아서
서(書)는 서(敍) 또는 여야(如也)라 하였다.


그러나 한글의 경우는
모든 글자가 그 형식이 극도로 추상화된 기호로 이루어져 있을 뿐이다.
그림에서 그 내용을 어떻게 형상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글에서는 그 형식을 어떻게 구상화해야 하는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선 기존의 한문서법의 5체, 즉 전예해행초(篆隸楷行草)의 다양한 획을
한글에 도입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한편 글자 한 자로써 불가능하거나 불충분한 경우는
여러 글자를 연결하여 표현하는 새로운 구성도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나의 시도에 대하여 서예의 정통성의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궁체를 한글서예의 정통으로 계승하여야 한다는 주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도의 정통은 어디까지나 서법이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서법은 집필, 묵법, 용필, 필세 등 그 법이 넓고 깊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기본은 한자이든 한글이든 결국 필법으로 요약된다.
중봉(中鋒) 관직(管直) 희봉(藏鋒) 현완(懸腕) 현비(懸臂) 등 용필(用筆)의 요체를 의미한다.
붓이라는 매우 불편한 필기도구를 효과적으로 운필할 수 있는
이른바 '방법에 관한 법'이다.
바둑에 정석이 있고 각종의 운동에 기본적인 틀(form)이 있듯이
붓의 운필(handing)에 있어서도 예부터 많은 사람들이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이룩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있다.
그것이 이른바 용필로서의 필법이다.


그리고 이 필법은 현재 거의 최고수준으로 완성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앞으로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그에 상응하는 새로운 필법이 개발될 수도 있지만
전통·정통의 계승은 이 필법의 계승으로서의 의미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고 정통서의 또 하나의 문제는
법첩의 임서와 같이 과거의 명필들이 도달한 미학의 계승문제이다.
명필들의 글씨에서 그 필법·사상·인격 그리고 미학을 읽을 수 있고
나아가 그의 사상과 미학을 통하여
당대의 문화와 사회상, 그리고 시대미학을 읽을 수 있다.
위당대(魏晋代)의주진한대(周秦漢代)의 전예(篆隸)에서 부터
조선 중기의 동국진체(東國眞體)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문화적 완성체로서의 서체가 갖는 의미 역시
전통·정통의 문제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명필들의 임서는 상기 두 가지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서예란 그것을 글씨로써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인격과 사상, 그리고 당대 사회의 미학을
오늘의 과제와 정서로 지양해내는 작업이어야 하며
더구나 이 모든 것을
우리시대의 것으로 형상화하는 동시에
나의 것으로 이룩해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어쩌면 서도의 차원을 넘는 것이다.
명필들의 인격·사상·미학을 과제로 하여야 할 뿐 아니라
그 시대를 이해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다른 모든 예술장르와 마찬가지로
서예도 현재의 사회·역사적 과제와 관련되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서도의 전통·정통의 문제 역시
계승과 발전의 일반적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일제치하에서의 한글서예는
그것이 설령 당시의 민중적 시대미학에 못 미치는 것이라 하더라도
한글 그 자체만으로서도 충분히 민족적 과제를 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의 토대와 상부구조가 변화된 상황에서는
한문서예든 한글서예든 어떠한 사상과 미학이 유의미한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계승과 발전의 개념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태도라고 생각한다.


무릇 모든 예술활동은 그 개인에 봉사하고
그 사회에 봉사하고
나아가 그 역사창조에 참여하여야 한다.
서예는 이런 점에서 다른 예술장르에 비하여 매우 특이한 전통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서예는 다른 분야에 비하여
전통이 완고하게 고수되고 있는 반면
그 사람과 그 작품의 통일성이
그 어떤 예술작품의 경우보다
강하게 나타나고 강하게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법이 교조화하는 매우 부정적인 측면이 있음에 비하여
반대로 글씨에서 인격을 읽으려 하는 긍정적인 면이 있다.
이 '사람과 작품의 통일'은 매우 귀중한 전통이다.
예술작품과 예술활동이 당자의 인격을 높이는 일과 함께 추구된다는 것은
예술 본연의 임무에 충실하다는 의미로 나는 받아들인다.
훌륭한 글씨를 쓰기 위하여
훌륭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훌륭한 사람이란 당대 사회의 과제를 비켜가지 않고
그의 삶으로 끌어안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서예는 그림과 달라서 구체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메시지를 직접 전하는 것이다.
그 사회성과 역사성이 직접으로 표현된다.
이 점이 서예가 다른 장르에 비하여 사회적 성격을 강하게 띠는 이유가 된다.
따라서
서예가 어떠한 전통 위에서
어떠한 내용을
어떠한 형식으로 표현하여야 하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많지는 않지만 나는
가능하면 우리시대의 고민을 함께 나누는 글들을 쓰고
민중의 역량과 정서를 형상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 내용은 물론 그 형식에 있어서도
아직 답보를 거듭하고 있을 뿐이다.
특히 형식문제에 있어서의 고민은
그것이 내용과 조화되어야 한다는 일차적 과제 이외에
보는 사람들이 친근감을 느낄 수 있어야 된다는 나의 생각 때문에
한층 더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람들로부터 경탄을 자아냄으로써 멀어지기보다는
친근감과 자신감을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함으로써 가까이 다가가서
민중적 역량에 대한 믿음을 확인하고 공감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서예에 대한 이러한 생각이 곧 나의 사회학이며
나의 인간학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마음에 드는 글씨는 계속 마음속에만 들어있고
좀체로 종이 위에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씨를 쓰거나 남들 앞에 내어보이는 까닭은
그러한 고민을 함께 나눔으로써
서로 도움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일이란 언제나 여럿이 더불어 달성하는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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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恤以明法秋肅春溫以國典公平而布信靑天白日見人心
흠휼이명법추숙춘온이국전공평이포신청천백일현인심

 

"흠휼이란, 밝은 법으로 때론 가을 처럼 엄하게, 때론 봄처럼 따스하게 베풀고
  나라의 법으로 공평하게 대하여 믿음을 널리 펼쳐서,
  푸른 하늘 환한 태양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작가에 대하여

 

위 글씨는 정향(靜香) 조병호(1914-2005) 선생의 전서체의 글씨이다..
정향은 청양 출신으로 우하 민형식과 위창 오세창에게서 사사 받아 추사 김정희, 소당 김석준, 백당 현채의 정통을 이어 받았으며 전서와 와전의 독보적인 권위자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작가 신영복씨의 스승이기도 하다..
신영복씨가 대전교도소에 수감중일 때 서도반이 생기면서 정향 선생에게서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교도소란 살인범·도둑놈이나 가는 곳으로만 알던 정향 선생이 신영복 등 사상범들이 옥중에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며 “아,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하고 생각하고는 7년간 매주 교도소에 와 글씨를 지도해주었다고 한다
(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6/06/021075000200606220615026.html)

 

특히 정향선생의 단군숭모정신은 유명한데, 1958년 논산군 두마면 석가골(신도안)에 단국사당을 처음 건립하였고, 1984년 대전 정림동 52번지 매봉산 아래로 옮겼는데, 1993년 단군사당을 대전대학교에 기증하였단다. 매년 음력 3월 15딜에 어천제, 10월15일에 개천제가 봉행된단고한다..(http://blog.paran.com/hanshinb/23930670)

 

 

***

추상화 해독하기

 

위 전서를 보고 해석하려니, 꼭 무슨 암호를 해독하는 것 같다..

서예사부에게 이메일을 보내니, 전화가 왓다..

위 글씨 우측 위에 해서로 써있다고 한다..

 

하지만, 또 그 해독이 만만치 않다..

인터넷 써핑중 우연히 그 해석자료를 발견하엿다..

대단한 한문 고수라 아니할 수 없다..

 

****

(원문보기)


내가 해본 해석은 이렇다.

  "흠휼이란, 밝은 법으로 가을의 엄함과 봄의 따스함을 베풀고
  나라의 법으로 공평하게 하여 믿음을 널리 펼쳐서,
  푸른 하늘 환한 태양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어디를 어떻게 끊어서 읽느냐에 따라 다른 해석이 나올 수도 있겠지만
대충 흠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글이라고 보여진다.
 
흠휼이란 우리 나라 과거 형법 정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개념이다.
흠휼지전(欽恤之典); 죄수를 신중히 심의하라는 은전(恩典)인데, 흠휼이란
죄인을 처벌할 때 죄는 미워할지라도 그 사람은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건의 전말을 신중히 다루어 억울한 형벌을 받도록 하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기준을 어긴 형구(刑具)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한다거나 형벌을 남용한 관리를 처벌하는 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산 정약용이 특히 흠휼을 강조했는데, 그는 부득이 형률로 다스릴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그 일을 삼가고 그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단옥(斷獄)의
근본인 흠휼(欽恤)에 입각해야 한다고 했다." (『목민심서』, 형전, 단옥;
http://www.jontong.co.kr/00spr/11s_1.htm )

"조선시대 휼형 사례를 보면 죄지은 사람은 법에 따라 엄중하게 처벌하되
용서해 줄 여지가 있으면 이를 적극적으로 용서해 온 것이 조선
형정(刑政)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조선의 형벌제도는 백성을
중히 여기는 민본사상(民本思想)과 인정(仁政)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
http://my.dreamwiz.com/okundo/docs/crm01.html )

 

출전 : http://kenji.cnu.ac.kr/hanmoon/court-jonseo.htm (류주환, 2001. 6.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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法不阿貴(법불아귀) 繩不撓曲(승불요곡)

법이란 귀한자라고 아첨 하지 않고 먹줄은 굽은 것에도 휘어지지 않는다. 

 

 - 한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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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소동파에 빠져 적벽부를 썼다..

그를 다룬 책 "소동파, 선을 말하다"를 읽다가 무릎을 탁쳤다..

"덕은 아무리 지나쳐도 나쁘지 않지만,  정의는 너무 지나치나면 잔인해진다.."

이 문장을 읽고 당대의 시인 구양수가 자신의 시대가 지났음을 선언하였다던가..

 

그는 시, 서, 화, 문장에 두루 능해 천년에 한명  나올 천재란 소리를 들었다..

시인으로는 도연명을 사모하여 도연명이 살았다는 "동파"를 따서 자신이 사는 곳을 동파라도 명명하고 호로 삼있다..

정치적으로는 왕안석의 개혁파에 반대하는 보수파로 귀양살이에 시달렸다..

정신적으로는 선불교에 귀의하여 심오한 정신적 경지을 읊는다..

 

후에 송설체로 유명한 조맹부가 그를 추모하고 추종하엿단다..

우리나라 조선 전기의 관용서체가 송설체인데..

송설체는 소동파의 글씨를  추종하엿고 소동파가 촉 출신이라 송설체를 촉체라고도 한다.

그 소동파는 왕희지를 추종하였다..

 

내가 서예를 배우면서 우연히 왕희지의 난정서를 쓰고, 조맹부가 쓴 "조식의 낙신부"를 쓰다가

소동파의 적벽부를 쓰는데..

이들의 관계가 이렇게 맺어진 것을 알고는 묘한 인연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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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과학연구소..

한국은행법과 더불어 법에 의해 설립된 연구소..

한국은행은 발권(發券)을 부여 받았고, 연구소는 일권(일하는 권리?)부여받았다던가!!


(대신기전)

 

고려말에 최무선이 화약을 제조하였고..

화포를 이용하여 금강하구 진포에서 왜선을 불태운다..

조선 시대 문종 때 신개념의 무기 신기전이 발명된다..

요즘의 미사일처럼 날아가는 불화살이라 할까..

성종 때만해도 일본 사신이 오면 야간에 한강에서 신기전 발사장면을 참관 시켰다한다..

왜인들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고..백여년간 도발할 생각을 못하게 만들었으리라..

임진왜란 때는 변이중이 만든 화차로 100발의 신기전을 한꺼번에 발사하는 화력으로 행주대첩에서 왜군을 대파한다..

한산대첩에선..

이순신 장군이 화포와 학익진으로 함포의 연속사격 개념을 창출하여

세계전사에 빛나는 대승을 거둔다..


그 이후 국방과학기술의 발전은 없었다..

프랑스 함대가 강화도로 쳐들어온 병인양요 때  우리는 종전의 총통과 화승총인 조총(鳥銃)을 가지고 있었고, 프랑스군은  뇌관식(雷管式) 소총과 유탄포(榴彈砲)를 개량한 함포를 갖추고 있었다.

또한 5년뒤인 1871년 신미양요 때 미국군은 레밍턴(Remington) 소총 등 근대적인 소총과 후장식 강선포(腔線砲)를 갖추고 있었다.

무기의 상대적 열세를 보인 조선군은 패하여 강화도가 크게 유린당하였다.

 

6.25 때 탱크에게 무참히 유린당한 역사를 잊은 사람 많겠지..

 

1976. 10. 1. 국방의 초석이란 글씨를 쓴 사람은 패배의 역사를 반복하기 싫었을 것이다..

 

지금 세계 제일의 탱크 흑표를 만들었다고 자랑이지만, 파이터에게 남들 다아는 기술은 의미가 없다..

필살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핵주먹 마이크 타이슨을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것이다..

 



지도자들의 관심이 줄어든 그곳에..

밀리터리 동호회 사람들이 방문하여 애정어린 마음을 선물하고 갔단다..

"우리는 여러분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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흘휴시복(吃虧是福)..

손해 보는 것이 바로 복..

 

청나라 정판교의 글씨로 유명해진 글귀...

그 해설을 보면,,

가득 차면 덜어지게 되어 있고(滿者損之機), 비어 있으면 점점 차게 되어 있다(虧者盈之漸). 내가 손해를 보면 다른 사람이 이익을 본다(損於己則盈於彼). 그러면 각자 심정의 절반씩을 얻는 것이다(各得心情之半). 나는 마음이 편안해 지는 것을 얻게 되니(而得我心安卽平), 이 어찌 바로 복 받을 때가 아니겠는가(且安福卽在時矣).”

 

정판교의 "난득호도(難得糊塗)"의 대귀처럼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글귀..

 

무엇이 길흉화복인가? 

내가 남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화(禍)이고, 남이 나에게 손해를 끼치는 것이 복(福)이라한 말도 같은 맥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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