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에서 내려와 면천읍내를 돌아보기로 했다..

면천..연조가 오랜 동네이다..

동래, 선산 처럼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잘 나가는 옆동네에 치어 각 부산, 구미의 일부가 되었듯이

면천도 당진시 일부가 되었다..

골정지는 조선시대 면천군 시절 군수로 부임한 연암 박지원이 만든 다목적 저수지다..

 

 

연암 박지원

청소년 시절 우울증 비슷한 증세를 겪으면서 과거공부와는 담을 쌓고 홍대용, 이덕무 등 백탑파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44세 되던 해, 영조 부마 3종형 박명원이 사신단 정사로 북경에 갈 때 자제군관으로 수행하면서, 기행견문록 열하일기를 저술하여 천하에 필명을 날린다..

50세(정조 10년)에 음서로 벼슬길에 올라, 61세(정조 21년)에 면천군수로 부임하여 1797년 - 1780년까지 3년간 근무한다.

이때 정조가 전국에 농서를 구하는 영을 내리자, 연암은 1799년 과농소초를 지어 올린다.

이 책으로 정조에게 인정을 받아 1800년 양양부사로 승진한다..

그 이전에 골정지를 만들고 건곤일초정을 지었다고 한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정순왕후 세력이 집권하자, 사직하고 연암협으로 돌아가 은거하다 5년뒤 사망한다.

 

열하일기..

중국 요동-북경- 열하에 이르는 도정에서 견문한 내용을 쓴 기행문인데..

요즘으로 비유하면 일종의 여행 블러그다..

그의 글은 당시 유행하던 패관소설류식 백화문체(구어체)를 사용한다.

요즘으로 비유하면 인터넷 신조어를 사용한 문학이라고 보면 되겟다.

정조가 이런 문체 유행에 철퇴를 가하는 문체반정을 시작한다. 

결국 연암도 반성문 겸해서 과농소초를 저술했다고 한다..

 

 

 

또 그가 벼슬을 하게된 사연도 재미있다.

50세까지 백수생활하다보니 집안이 가난해서 술도 제대로 마실 형편이 되지 못했다.

점잖은 손님이나 와야 겨우 술 두잔을 주안상으로 올리는 형편이다.

도연명처럼 술을 좋아하는 연암이 꾀를 내서 길에 나가 다까고짜 초면인 관리에게 인사를 하고 어거지로 자기집으로 데려간다.

그러자, 집안에서 손님이 왔다고 주안상에 술 두잔을 내오면, 상대에게 술을 권하지도 않고 본인이 두잔을 다 마셨다나??

이런 봉변아닌 봉변을 당한 입직 승지로부터 이야기를 들은 정조가 "그정도로 가난이 심한 줄 몰랐다"며 

연암에게 낮은 벼슬이나마 제수하기 시작햇단다..

하지만, 본래 능력이 있던 사람인지라 벼슬은 승진하였고 이곳 면천군수를 지낼 때에는 농서를 구하는 왕명에 부응하여 "과농소초" 14권을 저술,진상하여 양양부사로 승진하였던 것이다..

 

건곤일초정

원래 두보의 시귀에 등장하는 정자인데, 친한 선배인 홍대용이 이를 인용하여 정자를 짓고 스스로 건곤일초정 주인을 자처하고 지냈다고 한다.

아마, 연암이 이를 오마주해서 같은 이름의 정자를 지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두보의 시, 暮春題瀼西新賃草屋 모춘제양서신임초옥 >

綵雲陰復白(채운음부백) 
錦樹曉來靑(금수효래청) 
身世雙蓬鬢(신세쌍봉빈) 
乾坤一草亭(건곤일초정) 
哀歌時自惜(애가시자석) 
醉舞爲誰醒(취무위수성) 
細雨荷鋤立(세우하서립) 
江猿吟翠屛(강원음취병) 

 

<늦봄 양서의 새로 빌린 초가에서 쓰다>  

 아름다운 구름 어둡다가 다시 밝아진다
비단 같은 나무 새벽되니 푸르기도 하여라.
쑥 같은 양 귀밑머리 늘어뜨린 이내 신세
천지간 기댈 곳이라곤 이 초정(草亭) 하나뿐
슬픈 노래 부르며 무시로 스스로 불쌍히 여기나니
취하여 춤을 춘들 누굴 위해 술을 깨랴
가랑비 맞으며 호미 메고 섰는데
푸르른 강가에 원숭이 울음소리 들린다.

 

***

이 시 귀절 중 "乾坤一草亭(건곤일초정)"을 좋아한 홍대용이 스스로 "건초일초정 주인"을 자처하면서 정자를 짓고 시도 지었다.

 

<건곤일초정주인 乾坤一草亭主人>
                                  
다툼이 없으니 온갖 비방 면하였고
재주많지 않으니 헛된 명예 있을소냐
수시로 좋은 친구 찾아 오면
산나물 안주에 술 한병
허름한 정자에서 거문고 타노니
곡조 속에 슬픈 감회 그 뉘가 알겠는가?

無競免積毁
不才絶虛譽
好友時叩門
壺酒有嘉蔬
淸琴嚮危欄
中曲且悲噓

 

이 추상화는 무슨 글씨인고??

충국효친(忠國孝親)..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 효도하라..

왕조시대에는 사람(왕)에게 충성하는 것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지만, 

민주시대에는 사람에게 충성하는 것과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 다르다.

따라서 팬덤정치 되는 순간 민주주의는 종언을 고함을 명심해야 한다..

 

서울도 벚꽃이 피었다는데, 남쪽인 이곳은 아직 벚꽃이 덜피엇다. 바닷바람이 매서운가 보다.

 

언제 연꽃필 때 다시 한번 와보고 싶다..

 

목련은 크고 탐스럽게 만개하였다..

 

군자정으로 가는 길..

동네주민들이 모델로 서있다..ㅎ

 

수선화가 반겨주는 성안 그 미술관..

 

 

우체국을 리모델링하여 미술관을 만들었다.

강경이 배워야 할 점이다..

공공기관 이사못가게 인질처럼 붙잡고 잇지말고, 시류에 맞게 변신하라..

 

비우고 버리고 쉬는 것.. 그것이 개혁이다..

 

 비우고 버리고 쉬면

얼마나 자유로운가?

얼마나 자긍스러운가?

얼마나 자적한가?

 

그 미술관 너머 꽃속에 멋진 정자는??

군자정이다..

 

고려 공민왕 때 지주사(군수)였던 곽충룡이 연못과 정자를 만들고 연꽃을 심었다.

그뒤 1719년(숙종 45년)에는 복지겸의 후손이 복지구가, 1803년(순조 3)에는 면천군수 유한재가 못을 준설하고 정자를 중건하였단다.

그리고 허물어진 것을 다시 1994년에 복원하였다..

 

낭관호(郞官湖)..

이태백이 장위 두공 왕광등과 뱃놀이를 즐겼던 호수(후뻬이성 우한시 한양구에 위치한 호수, 명나라 때 말라버림)인데, 이연못의 정취를 낭관호에 비유했나보다.

비석 글씨는 이태백 글씨라고 알려져잇는데, 아마 이태백 글씨를 집자해서 만든 것이 아닐까 한다.

 

고려말 익재 이제현이 칭송하기를 “연꽃과 열매가 동시에 맺으며, 진흙에서 나왔어도 물들지 않는 모습이 군자와 같아서 주염계에게 사랑을 받았다"하여 못을 군자지, 정자 이름을 군자(君子亭)이라고 지었다.

 

군자정 옆은 영랑 효공원이다..

면천 출신 고려 삼한벽상공신 복지겸..

그는 궁예 말년 폭정시절 왕건을 추대한 신숭겸 등 4공신 중의 한명이다.

그가 말년에 고향에 은거할 때 병이 났는데, 딸 영랑이 아미산에 올라 백일기도 하던 중 신령이 현몽하여 

"진달래꽃(두견화)을 따서 내정(內井, 화정花井)의 물로 술을 담가 백일주를 만들어 드리고 뜰에 은행나무 두그루를 심으라"하여 그대로 해서 복지겸의 병이 나았다 한다.

면천 두견주의 탄생설화인데, 이 설화를 바탕으로 내정(화정)을 복원하고, 그 일대를 영랑효공원으로 조성했다.

 

공원 옆 높은 곳에 고목이 있어 찍었더니, 이것이 영랑이 심었다는 은행나무였다는...헐

암수 두그루이고 수령 1100년으로 천연기념물 551호로 지정되었다.

 

 

부근에 3.10 학생독립만세운동 기념비가 서있다.

면천보통학교(초등학교) 4학년생 원용은이 고종장례를 참관하러 서울에 갔다가 3.1만세운동을 목격하고 

귀향한뒤, 3.10 전교생 90명이 만세운동을 전개..주동자 원용은 등은 구금되었다가 퇴학.. 

지금은 초등학생이라면 애기로 볼텐데, 저때는 참 대단한 기개를 가졌다. 

요즘은 세월이 흐를수록 정신연령은 더 어려지는 느낌인데..ㅎ

 

일제가 면천 관아 객사를 헐고 그 자리에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지었다.

이제 다시 초등학교를 이전하고 객사를 복원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면천읍성..

낙안읍성, 해미읍성처럼 번듯한 석성이다..거기다 옹성까지 갖추고 있다..

건너편 몽산토성과 함께 기각지세를 이룬다..

 

면천..

백제시절에는 혜군, 통일신라 때는 혜성군, 고려 때 운주의 속현이 되었고, 고려 충렬왕 때 복지겸 후손 복규가 합단적 방어에 공을 세우자, 면주로 승격되고, 조선 태종 때 면천군이 된다.

세종 때 왜구를 막기 위해 읍성을 쌓고, 몽산성도 수축한다..

이 지역 출신으로 고려초 공신 복지겸, 박술희 장군 등이 있고, 조선 시대에도 정승, 판서가 많이 배출된 유서깊은 동네다.

 

 

남문 이름은 원기루..

일제의 강요가 아니라 우리 스스로 개국, 개혁을 했다면, 이런 읍성들과 관아들은 그대로 보전되었을까??

 

준비와 기회가 만나면 기적이 된다.

대지를 적시는 단비가 내려도 뒤집어진 그릇에는 물을 담을 수 없다..

 

이 고장 전설의 총화 두견주를 만나러 간다..

복지겸장군의 딸 영랑의 정성이 빚은 진달래술..두견주..

왜 두견주인가?

진달래을 두견화라고 하고, 진달래와 찹쌀로 만든 술이라 해서 두견주라고한다.

왜 진달래를 두견화라고 하는가??

전설에 옛 촉나라에 두우라는 왕이 있었다. 

홍수를 잘 다스리는 신하 벌령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서산에 은거한다.

그런데, 벌령이 두우의 아내를 차지하자, 두우는 홧병으로 울다가 죽게되었다.

죽기전에 두견새에게 유언했다.

"두견새야, 내 대신 울어서 나의 심정을 사람들에게 알려다오"

명을 받은 두견새는 피를 토할정도로 구슬피 울었는데, 그 피가 묻어 붉게 물든 꽃이 진달래란다..

그래서 두견새 울 때 붉게 피는 꽃을 두견화라고 불렀다.

두견새는 자규, 귀촉도, 소쩍새, 접동새, 휘파람새로 불리는데, 우리나라 시 문학에 다양한 이름으로 등장한다.

 

두견주 공장은 일요일 휴무인데, 진달래만 부산하게 바쁘다..

할 수없이 근처 하나로마트에 가서 두견주 한병을 2만원에 샀다.

 

집에 돌아와 두견주에 진달래 띄워 한잔 마신다.

한잔 먹세 그려, 또 한잔 먹세 그려

꽃꺽어 산놓고 무진무진 먹세그려

 

얼큰하니, 귀에 각종 두견새 소리가 들려온다.

 

귀촉도 울음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 하리, 꽃이 지는데..

....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 보다

....

접동 접동 아우래비 접동 

진두강 가람가에 살던 누나는

진두강 앞마을에 와서 웁니다.

...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다정도 병인양하여 잠 못이뤄 하노라

 

 

대지를 적시는 단비도

뒤집어진 그릇에는 물을 채울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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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작나무쉼터를 지나 임도길에 들어서자

역색(易色)혁명이 벌어졌다.

분홍색 깃발은 사라지고 황건적의 세상이다..

 

남녁에서 호시절을 다 보내는 줄 알았는데, 아미산에 숨어 산적질 하고 있구나..ㅎ

그 기세에 눌려 벚꽃은 아직도 명함도 못내밀고 있다.

하긴, 오늘 바람도 거세고..먹구름이 오락 가락하니..벚꽃은 눈치를 보고 있다..

 

쇠학골 삼거리에 도착했다..

 

 

점묘파 쉐라가 어제 저녁 다녀간 모양이다..

춘정에 못이기어 길 허리는 베베꼬이는데..파스텔톤으로 화사하게 치장한 봄처녀가 제 가시네..ㅎ

 

푸른 솔이 어린 산수유 손잡고 봄소풍나왔다..

 

돌아보니 아미산 눈썹이 참으로 곱구나..ㅎ

 

장승쉼터에서는 장승들이 꽃을 끼고 잔치를 벌리고 있다. 

아니, 꽃잔치에 장승들이 구경왔나??

 

장승쉼터에서 몽산으로 올라가는 도중에 몽산성 망루가 나타난다..ㅎ

 

백제부흥운동할 때는 몽산 정상부만 테뫼식 산성이었고, 

조선 세종때 5km 길이의 포곡식 토석혼축산성을 지었다는 것이다..

 

몽산 정상을 앞두고 일진 광풍과 음습한 구름이 몰려와 분위기가 숭숭해진다..

뉴스에는 인근 서산 운산면에 산불이 발생했단다.

하늘엔 헬기들이 물주머니를 달고 연락부절이다..

 

하늘 눈치보며 몽산 정산에 오르니, 꽃대궐이다.

산수유와 진달래가 한 부르스 하는 중이다..

 

정상에서 산길을 따라 자작나무쉼터로 간다..이것이 백제부흥길 8코스다..

아미산쉼터 방향으로 임도를 따라 4.8km를 가는 길은 9코스다..

 

아미산 정상 아미정은 새손님 맞느라 바쁘다..

 

이 길은 서해랑길 타이틀도 달고 있다..

좀 정리 좀 해보자..

충청서부지역은 크게 "내포문화숲길"을 조성했는데, 그 아래 1) 내포역사인물길, 2) 백제부흥군길, 3) 원효깨달음의 길, 4) 매포천주교순례길, 5) 내포동학길 등이 있다.

서해랑길은 서해안을 도는 길인데, 슬쩍 이곳 코스도 끼워넣고 장사하는 중이다..

결국, 이길을 한번 걸으면, 백제부흥군길 8,9코스, 몽산성마루길, 내포동학길 1코스, 서해랑길 64-5코스 등 1타 5피를 할 수 있다..ㅎ

 

위 사진 좌측 임도가 9코스, 우측 산길이 8코스..뭐 이렇다..ㅎ

광풍 요운(狂風搖雲)이 난리를 치자 하늘도 안색을 바꾸고 긴장한다..

 

 

그래도 무탈하게 쇠학골쉼터 송학정에 도착한다..

점심도 먹고..숨도 돌리고..

 

1부에서 나를 유혹했던 몽산 입구로 올라간다.

자목련이 섹시한 란제리 패션으로 나오고..진달래는 더 붉게 치장하고 다가선다..

그러나, 나도 일편단심이다..

서로 붉은 마음을 확인하고 돌아선다..

 

자작나무쉼터에서는 "내포문화숲길 당진센타" 방향이라고 안내하고서는 이곳 표지판에서는 입을 싹 딱고, 다불산 등 표시만 달아 잠시 헷갈린다..

당황하지말고 다불산 표시로 가면 된다..

표지판에 일관성과 친절성이 더 요구된다..

 

도중에 다불산 갈림길이 나온다..

 

자작나무 숲길이도 나오고...

 

벚꽃은 언제 피나??

서울도 핀다는데..당진 지역이 바닷가라 추운가??

 

드디어 주차장이 보인다..

 

<오늘 걷기> 당진센타 주차장 - 아미산쉼터- 아미산 정상 - 자작나무쉼터- 쇠학골삼거리 - 장승쉼터 - 몽산-쇠학골삼거리 - 자작나무쉼터 - 자작나무숲길 - 주차장 약 8KM

시작은 백제부흥군길 8코스를 걸을까하고 찝적댄 것이었다.

그러다가 아미산, 몽산 둘레를 도는 9코스를 알게 되고..

그래서 8코스,9코스를 믹스해서 걷기로 했다..

<내비> 내포문화숲길 당진방문자센터..

주차장에 도착하기 30분전 부터 바람이 불고 비가 내려서 일기 앱을 보니 헉..

오전 내내 비가 내린다는 예보로 바뀌엇다.

어제까지 해가 쨍쨍한 예보였는데.. 오또카나..망설이다..화장실에 가서 숙고를 한다.

면천 읍성 주변 구경부터 하고 올까??

그리고 다시 일기앱을 확인하니?? 개는 날씨로 바뀌었다???

날씨앱이 사기치는지, 날씨자체가 변덕스러운 건지??

 

오늘 코스는 주차장에서 아미산쉼터로 가서 백제부흥군 8코스대로 아미산 갔다가 9코스로 몽산을 올라가고

복귀시에는 8코스-9코스로 내려온다..<사진 표시 참조> 

 

초입 저수지에 개나리 처녀가 나와 꽃을 내민다..

토끼부부도 나와 환영한다..

 

국민학교는 졸업 인생 아프터 서비스하는 행복학교로 바뀌었나 보다..

 

이 표지판에서 잠시 햇갈렸는데, 구름다리에 현혹되지 말고..소신껏 가시라..

 

개나리 우물가에 사랑찾는 개나리 처녀
종달새가 울어울어 이팔청춘 봄이 가네
어허야 얼시구 타는 가슴 요놈의 봄바람아

 

개나리가 길에 불을 밝힌듯하다..

 

 

백제부흥길 8코스는 당진시내 어름수변공원에서 출발하여 이곳 아미산 쉼터까지 이어진다..

여기서는 산길을 타고 아미산 1봉 2봉 정상을 넘어간다..

 

드디어 진달래가 등장하는데..

초록잎이 나온 것으로 보아, 이곳 진달래는 일부는 지고, 일부는 피는 상황이다..ㅎ

 

햇살이 비끼선 진달래 

긴 봄날 내내 연분홍치마를 휘달리겠다는 기세가 역력하다..ㅎ

 

문림의향(文林義鄕)..

아미산의 모토가 멋지다..

 

 

아미산 정상 계단에 오르기 전..벤취에 앉아 진달래의 힘을 빌린다

오늘도 꽃과 하나되는 남자..ㅎ

 

정상에 오르니 하얀 목련이 환영인사를 건네다.

참 환한 미소다..

 

아미산을 가려면 비행기를 타고 중국 사천성 성도로 가서 버스를 갈아타고..절차가 복잡한다..

국산 아미산으로 오니 가깝고 힘도 덜들고 참 좋다..ㅎㅎ

 

건너편 몽산은 아직도 꿈속이다..

 

하얀 목련이 필 때면 생각나는 사람..

어제 자전거 타다가 무릎 부상이 있어 정양중이다..ㅎ

 

정상에서 내려가는 길..좌우로 진달래가 나래비한다..

자세히 보니, 길가의 일진은 업무 마치고 퇴근하고 2진이 근무중이다..ㅎ

 

산에 들에 진달래 피면 마음도 같이 핀다는 시인..

그 마음은 붉겠지??

 

자작나무 쉼터에 도착했다.

이제 몽산구역으로 들어간다..

 

산길이 황홀하게 유혹하지만..

 

백제부흥군길 9코스 임도를 따라 몽산으로 간다..

거기서 반전 득템을 만난다는거..ㅎ

 

<2부에서 계속>

누가 쓴 글에 세종시 3대 벚꽃을

1) 조천 제방길, 2) 고복저수지 둘레길, 3) 금남 금락정 주변 금강벚꽃길을 꼽더라..

안 그래도 전에 꾀꼬리봉 등산하면서 벚꽃피는 날 오마 꽃기약을 했었는데..

때가 딱 맞아떨어진 날이다..

내비에는 <부용산>, 안되면 <세종시 금남면 부용리 42>를 쳐라..

 

벚꽃길은 짧지만 굵다..ㅎ

 

벚꽃이 흐트러지게 만개하여 조금만 바람이 건들면 그대로 눈처럼 날린다.

벚꽃엔딩의 노래가 딱 어울리는 날이다..

 

오늘은 정말 이름처럼 금락(錦樂)..금강이 즐거운 날이다..

벚꽃 십리길..

꾀꼬리봉에서 부용산까지 강변이 벚꽃세상이다..

 

아기와 벚꽃 중에 누가 더 순백인가?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봄빛이 좋은 날 피지 않는 꽃이 어디 있으랴.. 

 

입김이라도 스치면 비가 되어 날린다.

앵화우(櫻花雨)..벚꽃비가 내린다..

 

차를 돌려 꾀꼬리봉 아래로 간다..

내비에 <부용주차장>을 친다.

좁은 길을 따라가야 한다.

 

금강이 먹여살리는 생명이 많다.

낚시꾼은 그 생명을 훔쳐가고, 백로는 배급을 받는다..ㅎ

 

길은 좁고, 벚꽃도 그리 화려하지 않다.

그저 궁금증을 해소하는 정도..

 

금락정 주변이 제일 멋지다..

이리 보아도 멋지고, 저리보아도 멋지다..

 

대청댐- 신탄진- 매포- 부강을 지난 금강은 조금더 가면 미호천과 만나고 세종시를 지난다..

 

좋은 기운이 좋은 인연을 부른다.

문득 부강에 은거하는 친구가 생각났다

 

내비가 절묘한 길로 안내를 한다..

 

거기서 만나는 금락정은 벚꽃에 둘러싸인 극락세상처럼 보인다..

 

달빛아래서는 달나라 누각이라해도 믿겠다.

 

인덕헌 주인을 만나 차담을 나눈다..

시집도 두권 선물 받고..

시를 쓰면서 행복한 은퇴생활을 즐기는 모습이 벚꽃처럼 멋지다..

 

이 봄날 

진달래 피는 언덕 오동나무 아래에서

벚꽃 편지에 내마음 그리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흰여우 꼬리를 흔들고 돌아다니는 것은 

그때는 흰눈이지만, 지금은 벚꽃인가 보오..

 

벚꽃이 만개한 더운 날..25도나 열기가 치솟는 날 갈증을 달래려고 들어간 막국수집..

거기서 벚꽃 덕담을 만났다..

공회형제 동기연지 (孔懷兄弟 同氣連枝)

형제가 서로 깊이 생각해주는 것은 물려받은 기운이 같고 한 가지처럼 이어졌기 때문이다. 

 

자연이 벚꽃을 내민다..앵화시중(櫻花示衆)

웃기만 하거나  인증샷을 찍는 것은 답이 아니다..

같은 기운으로 가지마다 이어져 하얗게 피는 벚꽃을 사람들에게 보이는 이유는

만물이 형제와 같음을 깊이 생각하라는 이유인가??

아침부터 떨어지는 빗방울이 꽃으로 이끈다.

 

한껏 부풀은 꽃시절은 흩날리는 시간이 찾아 올테지..

목력처럼 추레해지지 말자, 다짐하고 다짐한다..

 

꽃피고 새울면 두고 두고 그리운 사람이 생각난댔지..

 

맥도날드 다리는 가운데 거시기한 것이 생겨서 이젠 거시기 다리로 불려야 하나??

 

아~꽃시절 지난다..

https://youtu.be/YBWeeD_OGCg

 

계족산에 최고의 예우를 다해 경례를 올리며 

벚꽃은 떠나간다..

 

벚꽃엔딩은 비에 젖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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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락당에서 계곡 따라 상류로 조금 올라가면 정혜사지가 나온다.

회재 이언적이 젊엇을 때 공부햇던 절이고, 낙향하여 독락정에 은거할 때는 절의 고승들과 교유하엿다고 한다.

 

지금은 절은 멸실되고 13층석탑만 남아있다.

원래 정혜사 자리는 신라 선덕왕 원년(780년)에 당나라 사람 백우경이 망명와서 살던 장소였다.

백우경은 중국 소주지방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이부상서까지 지냇으나 모함에 걸려 신라로 망명하였다는 것이다.

그는 이 터에 영월당 만세암을 짓고 살았는데, 수원 백씨의 비조가 된다.

9세기 쯤에 이 터에 절이 세워지고, 독특한 모양의 13층석탑이 세워진다.

 

우리 석탑의 모델은 불국사 석가탑으로 친다.

이와 비교하면 이곳 13층 석탑은 이색적인 모습이다.

 

 

석탑에 다가가자 갑자기 확성기에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소리가 나와,화들짝 놀랏다는..ㅎㅎ

 

돌아서는 발길을 잡는 끽다거..차 한잔 하고가라는 말씀..

 

차를 찾아 들어간 곳에 차향보다는 꽃향이 사로잡는다.

유채꽃과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다화구망(茶花具忘)..

차도 잊고 꽃도 잊고 충만한 마음으로 돌아간다..

 

돌아가는 길에 멀리 스투파 모양의 탑이 보인다..

알아보니 대흥사 사리보탑이란다..

안강읍에는 개성만점의 탑들이 많구나..

 

경주로 오는 길에 만난 형산강가의 금장대.. 

서천과 북천이 합류하는 예기청소.. 경주 출신 소설가 김동리작 무녀도의 배경이 되는 장소다..

https://blog.daum.net/servan/6350520

 

***

1박 2일의 경주 꽃길 여행의 막을 내린다..

하지만, 고속도로 진입차량 행렬을 피해 건천ic로 진입해야한다..

북천하상도로를 이용하여 현곡프로지오 아파트를 스치고 건천으로 가니 기름칠한듯 막히지 않고 쭉쭉 빠진다..

행복하고 만족한 걷기여행이었다.

옥산서원에서 700미터 쯤 자계천을 따라 올라가면 독락정이 있다.

회재 이언적이 명종때 당시 권신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좌천되고, 이후 고향으로 귀향한다.

그의 나이 40세..

고향인 경주 양동마을 무첨당에서 지내면서 이 자옥산 계곡에 독락당을 짓고 수양과 공부를 한다.

그러다가 6년뒤 1537년 김안로가 실각하자 복귀하여 요직에 기용된다.

1545년 을사사화가 터진후 55세나이로 의금부판사직에 물러나 귀향하였으나

양재역 벽서사건에 연루되어 강계로 귀양간다. 

유배생활 속에서도 제자를 가르치고 저술에 매진하다가 1553년 63세 나이로 강계유배지에서 사망한다.

퇴계 이황이 회재의 행장을 지었다.

 

원래 이곳에는 아버지 이번이 세운 정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계정이라 고쳐 지었다.

그는 젊어서 근처 정혜사에서 공부한 적도 있었다..

그는 외가집인 경주 손씨 종가 양동마을 서백당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자, 외삼촌인 손중돈(성종 때 문신)에게 학문을 배운다.

손중돈은 길재의 학맥을 이은 점필재 김종직의 제자였으니, 회재는 영남 학맥의 적통을 이은 셈이다..

24세에 문과에 급제한 수제였다..

 

자옥산 아래 벚꽃 핀 한옥마을이 그림같다..

 

독락계정의 글씨가 우아하다..

 

손자들이 독락당 수호를 위해 토지를 출연하고 후손들이 토지를 처분하지 못하게 합의문을 만들었다.

요즘보다 더 법치주의에 밝은 사람들이다..

 

 

독락당은 옥산정사라고도 불린다. 

현판도 2개..

옥산정사의 글씨는 퇴계 이황의 글씨다..

 

전국에 독락당이라는 당호가 많다..

대부분 맹자 진심장구 상에서 나온 '古之賢士何獨不然. 樂其道而忘人之勢'라는 구절을 신조로 삼았다.

"(옛날 어진 왕은 선을 좋아하고 권세를 잊었으니) 옛날 어진 선비들이 어찌 그들만 그렇지 않았겟는가? 도를 즐기고 다른 사람의 권세를 잊었다."

 

이 현판글씨는 아계 이산해의 글씨다..

이산해는 토정 이지함의 조카이고, 동인에서 분파된 북인의 영수로 영의정을 지냈다..

***

회재의 시 독락(獨樂)을 보자

 

무리 떠나 홀로 사니 누구와 함께 시를 읊나

산새와 물고기가 내 얼굴을 잘 안다오

그 가운데 특별히 아름다운 정경은

두견새 울음 속에 달이 산을 엿볼 때지

離群誰與共吟壇

巖鳥溪魚慣我顔

欲識箇中奇絶處

子規聲裏月窺山

 

서애 유성룡이 을해년(1575년) 추석에 지은 시가 걸려있다.

 

양진암.. 

퇴계 이황의 글씨다..

회재 이언적의 은퇴생활은 퇴계에게 모델이 되었다..

회재는 젊어서 인근 정혜사에서 공부한 적이 있거니와 이곳에 은거할 때도 정혜사 승려들과 교유를 했단다.

원래 성리학은 불교 교리에서 자극받아 시작한 심학(心學)으로서, 마음공부가 선불교의 선수행과 비슷한 측면이 있다..

 

 

수장고에는 회재의 친필저서가 보관 중이고, 

희귀본로 김생, 최치원 등 역대 명필의 석각본 탁본 글씨를 모아 놓은 "해동명적"이 있다.
이는 현재 남아 있는 간인본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여주 이씨 옥산문중본이다.

또한 옥산서원에는 국보로 지정된 1573년판 삼국사기 완질본이 보관되어 있다.

 

수천권의 책을 보관해놓고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산과 계곡을 걸으며 숙고를 하고, 그 자득한 결과를 저술하는 생활..

내가 꿈꾸는 생활이다.

 

계정...

이 글씨는 한석봉이 쓴 글씨다..

***

회재가 계정에 관해 지은 시

 

숲속에 우는 새 듣기에도 즐겁구나

시냇가 경치 따라 집 한채 지엇네

밝은 달 벗을 삼아 술 한잔 기울이니

한칸 옆에는 흰구름이 머무는구나.

喜聞유鳥傍林啼

新構茅첨壓小溪 

獨酌只요明月伴 

一間聊共白雲棲

 

누마루에 앉아 침을 튀겨가며 한참 역사를 논한다..

 

위 편액에는 재미있는 사연이 적혀있다.

동악 이안눌이 1613년 경주부윤으로 부임하였는데, 1614년 옥산서원을 방문하여 회재의 후손 구암 이준을 만낫다.

동악은 자신의 증조부 이기가 회재와 얽힌 잘못을 상기하고, 앞으로 우의를 돈독히 할 것을 다짐하고

<동악의 증조부 이기는 회재의 추천으로 형조, 병조판서를 지냈으나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키고 회재를 강계로 귀양보내 죽게한 사람이다>

구암이 지은 정자의 이름을 적벽부의 귀절에서 따 무금정(無禁亭)이라 지어 준다.

그리고 "제무금정(題無禁亭)" 시를 한수 지어 준다.

 

우거진 숲 성밖엔 시내가 휘감아 흐르고

띠로 엮은 소쇄한 정자는 세속과 단절된듯

시내와 바람과 달은 원래 주인이 없으니

온 들판 구름과 산은 모두 그대 것이라 

맑은 물 곧장 내달려 바다로 흘러가고

좌우의 푸른 무지개는 보랏빛 노을과 구별되네

해질녁 피리소리에 고기잡는 아이들 돌아가고

홀로 앉은 물가의 백로떼가 비상함을 바라보네

넓은 들과 곧은 산에 시내가 돌아 흐르고

이곳 높은 대는 고도의 형승이라

몇곡조 긴 피리소리에 술 한통이 제격인데

안개비가 가득한 하늘에 물새가 날아가네

 

다시 세월이 흘러 1768년 동악 이안눌의 5대손 이은이 경상관찰사가 되어 옥산서원에 들렀다가 무금정 정자는 사라진후 동악의 시 편액만 보관된 것을 보고 감회에 젖어 사연을 추가한 편액을 다시 판각하여 건다.

 

계정이 참 절묘하게 자리잡고 잇다.

풍류를 아는 남자로 보인다..

 

독락당을 돌아나오며 회재의 조춘(早春)을 읊어본다.

 

구름과 숲에 천지에 드니 풍경이 새로운데 

물오른 복숭아와 살구꽃이 내 마음을 끄네

짚신과 대지팡이로 이제 나서서

물 건너고 산에 오르니 다시한번 참되도다.

春入雲林景物新

澗邊桃杏總精神

芒鞋竹杖從今始

臨水登山與更眞

***

오늘 도리화가 아니라 벚꽃이 피었을뿐 "여경진(與更眞)은 고금동(古今同)"이라.. 

 

옥산마을에 여강이씨 후손들 공부방으로 귀후재가 있다.

논산 윤증의 집안에 파평윤씨 후손들 공부방인 종학당과 비교된다.

조선시대에는 자손이 잘되고, 4대안에 과거급제자가 이어져야 양반지위가 유지되기 때문에 

자식에 대한 투자가 벤처사업이나 다를바 없다.

지금도 DNA처럼 이어져 조기유학으로 이어지고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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