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백의총 기념관 입구에 걸린 글씨
고경명의 좌우명 세독충정이다..
임진왜란시 금산전투는 위와 같이 진행되었다..
고바야카와의 군대는 6.23. 금산 제원면 천내리 부근에서 첫 전투를 치르고 입성..
이어 부대를 둘로 나누어 전라도로 진군한다. 1대는 웅치로 진군하여 7.7. 승리하여 전주성 인근 까지 진군했으나
다른 1대는 대둔산 배티고개로 향했으나 7. 8. 권율장군에게 대패..
그런 사이 근왕병으로 북상했던 고경명의 호남연합의병이 금산으로 진군하여 적의 배후를 친다..
조헌과의 연합작전은 조율이 되지않아 단독으로 7.10. 눈벌에서 전투..고경명, 유팽로 등 800여명 전사..
그러자 웅치를 거쳐 전주성까지 진군한 왜군부대와 배티고개에서 패배한 왜군들은 모두 금산성으로 회군..
조헌,영규대사의 의병 8.1. 청주성을 함락..
여세를 몰아 8.18. 금산 연곤평에서 왜적을 공격.. 조헌의 700의병, 영규대사의 800 승병 전사..
조헌과 사전에 협공을 논의하엿던 변응정이 뒤늦게 8.27. 횡당촌에서 수십의 병력으로 왜군에게 돌진 전사
이런 수차례의 전투 끝에 왜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금산에서 철수..결국 호남,충청을 방어하게 되엇다..
중봉 조헌..
영정그림도 무인처럼 그렸다..
하지만, 그는 문과에 급제한 선비다..
지당에 비 뿌리고 양류에 내 끼인제
사공은 어디가고 빈배만 매었는고
석양에 짝 잃은 갈매기는 오락가락 하노매.
이런 멋진 시조도 읊을줄 안다...
그러나 불의에는 분연히 궐기하는 사람이었다..
기축년 여름에 도끼를 가지고 상소를 올리고 대궐 앞에 엎드려 간신이 나라를 그르친다고 꺼림없이 극단으로 말하였다가
길주(吉州)로 귀양보내니, 도보로 재를 넘어 무릇 2천여 리를 걸어갔으나 기운과 얼굴빛이 조금도 꺾이지 않았다.
신묘년에 현소(玄蘇)가 또 와서 서쪽으로 명 나라를 침범하려고 길을 빌려 줄 것을 청하니
조헌이 대궐에 나아가서 그 사자의 목을 베고 명 나라에 보고할 것을 청하였다.
승정원(承政院) 문밖에서 3일 동안 명령을 기다렸으나 회답이 없으므로 드디어 머리를 주춧돌에 부딪쳐 피가 흘러 낯을 덮으니 사람들이 담처럼 둘러서서 보았다.
어떤 이는 그의 스스로 괴롭히는 것을 비웃기도 하였다. 헌이 말하기를, “명년에 산골짜기로 도망해 숨을 때는 반드시 내 말을 생각하리라.” 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켜 영규대사의 승병과 함께 8.1. 청주성을 탕환하였다..
관군의 방해로 의병의 수가 700명으로 격감하엿음에도 금산의 왜군을 치러 출정한다..
당초 권율장군과 연합작전을 펴기로 하였으나 권율장군의 시간을 늦추자는 연락을 미쳐 받지 못하고 8.18. 금산성 십리밖까지 진군하여 권율장군 부대를 기다렸다..
적은 후속부대가 없음을 탐지하고 총공격을 개시하자 치열한 전투 끝에 전원 전사..
칠백의총의 정문은 취의문이다..의를 모으는 문..
윤봉구(尹鳳九·1683~1768)가 조헌의 절의를 이렇게 기렸다.
"중봉은 아득히 드높으시니, 배운 바가 바르고 곧았었네.
사문(斯文)의 시비가 크게 일 적에 조금도 굽히는 법이 없었지.
강개하여 시절 근심 얘기했지만, 요망한 말이라며 배척받았네.
의리로 똘똘 뭉친 7백의 의사(義士), 세운 자취 마침내 우뚝하였지.
참으로 호피(虎皮)의 시와 같으니, 죽은 뒤에 그제야 혀를 차누나"
"호피의 시"란 남명 조식의 "우음"이란 시를 가리킨다..
"사람들이 바른 선비를 아끼는 것이 마치 호피를 좋아하는 것과 같구나
살았을 제는 못 죽여서 안달하다가
죽은 뒤에야 비로소 칭찬하네.."
- 정민의 세설신어 중 -
세상 인심이란 그런 것이어서 세한도 그림이 국보가 되지 않앗던가?
그해 여름 금산의 치열한 공방이 우리나라의 명운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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