섬걷기를 마치고 섬걷기를 마치고 귀가길에 강진군 병영읍에 들려 저녁을 먹기로 했다..

강진에서 개나리의 환영을 받는다..

개나리 필 때면 동네처녀 바람난다는데..



병영??

전라병마절도사가 이곳 성에 있어서 동네 이름이 병영이 되었다..

통영시는 삼도수군통제영이 있어서 통영이 동네 이름이 되었고, 부산의 수영구는 경상 좌수영이 있었기에 그리 이름붙었다..



 병영5일시장 옆 수인관에 가서 불고기 백반으로 저녁을 들었다..

호남이 만든 대통령들이 맛있다고 칭찬한 집이니 먹을 만하다..




5일시장 앞에서 하멜을 만났다..

효종 때 제주 앞바다에 표착한 하멜 일행은 강진에서 7년간을 산 적이 있다..





제주에는 하멜일행이 표착한 지점을 두고 두가지 설이 있다..

1) 올레 10코스  산방산 용머리 해안 부근이라는 설 - 현재 그 부근에 하멜 상선 전시관이 있다..

2) 올레 12코스 대정읍 신도2리 해변이라는 설 - 거기에는 하멜일행 난파희생자 위령비가 서 있다


하멜일행은 제주에서 서울로 압송되어간다..

거기서 북벌을 추진하던 효종이 이들을 훈련도감에 배속시켜 총포개량에 힘쓰게 했으나 별 기술이 없음이 밝혀지자, 이들을 친위대에 배속시켰다..

그러나 양반들이 놀이거리로 그들을 불러 노래와 춤을 시키곤했다..

그런데, 일행 중 몇 사람이 청나라 사신 행렬에 뛰어들어 자신들의 송환을 호소하는 일이 발생..

그 여파로 이들은 강진 병영에 수용된다..



7년의 병영 생활 끝에 가뭄이 닥치자 하멜 등 12명은 여수에 분산 수용된다..

여수에서 2년동안 양모장사 등을 하여 돈이 모이자, 배를 구입한다..

그리고 1666년 9월 4일 배를 타고 위 등대 부근에서 출발..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한다...




그리고 1년후 고국 네델란드로 돌아가서 밀린 급여 등 보상금을 받기 위한 보고서를 작성 제출한다..

그것이 하멜표류기 이름으로 출판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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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5년 주문모 신부에 의해 우리나라 최초로 천주교 미사가 올려진 곳에 가회동 성당이 있다..






주문모..중국인 신부

그는 중국 소주 출신으로 과거 응시생이었다..과거에 실패하고 결혼 3년만에 아내도 사별한뒤 홀로 지내다가 북경교구 신학교에 들어가 제1회 졸업생으로 신부가 되었다..

그리고 1794년(정조 18)에 조선으로 파견되엇다.

그는 6개월만에 신분이 탄로나 체포령 속에서 도주하면서도 명도회를 결성하여 정약종, 황사영 등을 지도하였다..

1801년(순조 1) 주문모 신부는 잡혀 효수되었다

주문모 신부는 2014년 8월 16일 시복되었다.


황사영..

1794년 주문모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세례명 알렉시오

정약현의 딸 정난주와 결혼한다..즉 다산 정약용의 조카 사위다..

1801년 충북 제천의 산중에 피신하여 토굴(현재의 배론 성지) 속에서 지냈다. ( 충주 박달재 배론 길에서 들린 적이 있다 http://blog.daum.net/servan/6350623 참조)

그는 여기서  주문모 신부의 입국 후부터 신유박해에 이르기까지 교세 및 박해의 상황 등을 적어 중국 천주교 구베아 주교 에게 전할 계획으로 황사영백서를 작성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채 황심 등과 함께 붙잡혀 모두 처형당하였다.

백서 내용중에

1. 청나라 황제가 조선을 중국의 한 성으로 편입하여 감독하거나

2. 서양 열강이 배 수백척에 병력 5만명을 파병하여 신앙의 자유를 허용하게 해달라

는  내용이 들어있어 당시 집권층인 정순왕후와 노론벽파에게 탄압의 명분을 보강해주는 결과를 빚었다..


그의 장인 정약현은 흑산도로, 그의 처 정난주는 제주도로 유배간다..

제주 올레 11코스에서 정난주 (마리아)를 묘에 들른 적이 있다..( http://blog.daum.net/servan/6349931 참조)



이곳은 강화도령과의 인연도 있다..

주문모 신부가 포교중일 때 그 당시 사도세자의 아들인 은언군은 강화도에 유배 중이었는데,

의 처 군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도 신도가 되었다..


은언군..

그는 사도세자의 서자이고 정조의 동생이며 훗날 철종이 되는 강화도령의 할아버지이다..

정조 즉위 초 홍국영이 정조를 보호하고 정조의 원수를 제거하는데 앞장서면서 권력에 핵심이 되어 많은 정적이 생긴다.

홍국영은 자신의 지위를 확고히 하기 위하여 여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밀어 원빈으로 만든다..

그러나 원빈이 아들을 낳지못하자, 은언군의 장자 상계군을 원빈의 양자로 삼아 세자를 옹립하려다 실패한다.

그리고 홍국영은 실각한다..

그러자, 홍국영에게 피해를 입은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 등의 세력이 은언군을 홍국영의 일당으로 보고 집요하게 핍박한다..

그리하여 사사하라는 상소 속에서 결국 아들 상계군은 자살하고 본인은 정조의 보호로 구명되어 강화도로 귀양간다..

그러한 괴로운 시기에 은언군 부인 송씨와 죽은 아들의 부인 신씨가 주문모 신부에게 귀의하여 천주교에서 의지처를 찾는다..


그러나 정조 사후 1801년(순조 1)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시 천주교를 박해하면서 군부인 송씨가 주문모를 숨겨준 사실이 발각되어

 송씨, 신씨 등은 사약을 받는다..

은언군도 강화도를 탈출하다가 잡혀 사사된다.

훗날  은언군의 손자 강화도령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은언군, 송씨, 신씨는 복권되었다..





이 성당에서 조카의 결혼식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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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를 마치고 근대역사박물관에 들어갔다..

입장료 2000원..

5000원 이상이면 5천원짜리 상품권을 준다..주변상가에서 구매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군산도(현 선유도)와 진포(현 군산 내항), 임피 등이 지역을 대표하고,

임피 지역에는 전국 12조창 중의 하나인 진성창이 설치되어 조운의 중심역할을 하였다..

왜구들이 우왕 6년 진포에 침입하게 된다..

그때 최무선이 최초로 개발한 화포를 이용하여 왜선 500척을 불사르는 진포대첩을 거둔다..


조선 세종 때 군산도(현 선유도)의 수군부대인 군산진을 진포로 옮기고 진포를 군산으로, 선유도는 고군산도라 개칭한다..




이런 조운의 중심지였기에 일제 시대에도 만경평야 쌀을 반출하는 항구로 급성장한다..




1920년대 군산의 영화관은 다다미를 깔고 담요를 덮고 영화를 본다..




추억의 고무신...

1960대에도 고무신이 대세였다..

중학교 다니던 70년대에나 운동화를 신었으니..

80년대 들어서면 그 유명한 광고가 등장한다.."누가 나이키를 신는가?"


고무신은 1919년 우리나라에 처음 설립되었다..

1924년에는 군산에도 일본인이 운영하는 고무신 공장이 생겼다..

1932년 이를 인수하여 경성고무공업사를 설립한다..

초창기 직원 100명이었는데, 전성기에는 3000명의 직원이 일했단다..




백화 수복..70년대를 석권하던 일본 정종식 청주..

해방후 적산기업을 인수하여 설립..

70년대까지 고급술로 술맛을 주도하다가 80년대 생맥주, 양주, 90년대 폭탄주 열풍으로 입맛이 변하자 이제는 제수용품이 되었다..




사업가의 한 마디..참을 인...

**

지금 군산은 1930년대를 세일한다..

현재 경제는 불황이다..어찌 군산 뿐이겠는가?

이런 불황국면에 코스트 올리는 정책을 쓰고 있으니 "열병환자에게 부자 처방하는 꼴"이라 불안 불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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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길을 걸은 후 곽재우 생가에 갔다..

의령에는 돈을 번 부자 이야기만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돈을 멋지게 쓴 사람의 이야기도 있다



망우당 곽재우의 아버지 곽월은 진주 강씨에게 장가를 들어 처가인 의령 세간리로 이주한다.

강씨는 무남독녀 외동딸이라 처가의 재산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더구나 강씨 사후 재혼한 허씨 부인도 외동딸이라 아버지의 재산은 더 불어났다

 곽재우는 외가동네인 이곳에서 1552년 태어났다.

어머니는 3살에 돌아가시고 계모인 허씨 밑에서 자란다.

10대에 산청에 가서 남명 조식의 제자가 되고 그의 외손녀 김씨와 결혼한다..



그의 스승 남명 조식은 방울과 경의검을 지니고 잇었는데

방울은 성성자라 하여 마음을 밝히는 경(敬)을 닦고, 경의검으로는 결단의 용기(義)를 강조하엿다

그래서인지 조식의 제자 중에 의병장이 많이 배출되었다.

곽재우는 문무를 같이 닦았다..

그는 과거에 떨어지자 물려받은 재산관리 차원에서 농업에 힘써 재산을 많이 보유하고 잇었다.



임진왜란이 터지자, 관군은 도망가기 바쁘고 왜군이 파죽지세로 의령까지 쳐들어 오는 상황에 이르자,

4월 22일 의병을 일으킨다.

최초의 병력은 지인 10명과 노비 50명의 소규모 병력이었다.

자신의 재산 내놓고 인근 텅빈 관아를 뒤져 무기와 군량을 확보했다.. 

그리고 낙동강과 남강 합류지점 부근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한다.


그가 재산이 많은들 왜군에게 나라가 망하면 그의 재산을 어찌 보존하겟는가?

재산을 다 풀어서라도 나라를 지키는 것이 떳떳한 일이다.

단지 용기의 문제이다.

그의 용기는 스승 남명 조식으로부터 배워 내공으로 쌓였던 것이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초기에 곽재우 의병을 도적질로 오인하고 처벌하려고 햇다

다행히 학봉 김성일이 나서서 의병으로 인정해준다.


5월 26일 정암진에서 왜군과 접전, 매복작전으로 승리를 거둔다.

이 승리로 "우리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주었다.

이때 붉은 옷을 입은 천강홍의장군의 전설이 생기기 시작한다.



정암진 전투 이후 왜군은 남강을 도하하여 경상우도로 진군하려하였으나 번번히 곽재우 의병에게 격퇴되어 결국 왜군은 금산과 웅치를  통하여 전라도 진출을 시도하다가 유명한 금산 전투, 배티고개 전투 등에서  타격을 입고 퇴각한다..

이후 곽재우는 의령과 삼가에 주둔하며 왜적에 대비하고, 현풍, 창녕, 영산 탈환전에 참여한다.

그리고 10월 1차 진주성 전투시 외각에서 군세를 과장하며 심리전을 펴서 왜군을 교란한다..

선조도 공을 인정하여 형조정랑의 벼슬을 내린다..

한때 곽재우의 의병은 2000명에 육박했다.

그러나 1595년 돌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1596년에 경상좌도방어사가 되어 정유재란 때에는 창녕의 화왕산성에서 수비하였다..

이때 나의 조상들도 화왕산성맹약계를 맺고 화왕산성 수성에 동참하였다..

언젠가 화왕산성에 걸으러 갔을 때 보니, 험준한 산세에 왜적들이 공격을 포기하였음직하더라..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체찰사의 구원명령을 거부하였다.

1597년 8월 계모 허씨가 사망하자 사직한다. 

왜란 후 진주목사, 경상좌병사로 복귀하였다가 군제개혁의 상소를 올리고 사직한다.

그로 인해 유배되엇다가 1602년 풀려낫다

그뒤 현풍에 망우정을 짓고 벽곡(곡식을 끊는 도가적 수행)하며 지냈다.

정치적으로는 동문수학한 대북파(당시 집권당)와는 다른 노선을 걸어 남인과 가깝게 지냇다..

그와 비슷한 노선을 걸은 사람이 동계 정온 <거창 수승대 둘레길편 참조>이다.

그는 1613년 영창대군 사사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린다..

1617년 망우정에서 세상을 떠낫다.

그에게 남은 재산은 옷한벌, 거문고, 낚시배가 전부였다.



그의 생가 앞에는 사대부집 후예 답게 은행너무가 냄새를 풍기며 서잇다..



생가 앞 동상은 왜 손에 칼을 들지 않고  대나무 같은 것을 들고 있을까??

그래서 해설사에게 물었다

등채 란다..

무관의 말채찍으로 주로 굵은 등나무로 만들고 막대기 형태란다..

무관은 철릭을 입고, 전립을 쓰고 목화를 신는다. 환도와 동개(마상용 화살)를 메고 등채를 든다..






1) 그는 기만술과 심리전에 능하여 게릴라전의 명장이다..

전국시대를 거친 일본은 정규전, 전면전에 능했지만, 곽재우가 시작한 게릴라전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게릴라라는 말은 나폴레옹이 1808년 스페인을 침공햇을 때 스페인 민중의 항쟁에서 나온 말인데,

우리의 의병은 200년전에 선구적 역할을 한 셈이다..


2) 그는 지는 싸움을 하려 하지 않았다.

1차 진주성 전투에는 출전하여 크게 기여하였지만, 2차 진주성 전투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3) 또한 그는 명분론에 입각한 주전파는 아니었다. 정당하고 당당한 강화를 주장했다.



의병의 깃발을 들었던 그는 오늘도 의령의 가로등을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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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생가..

그는 양반집 자손이다..거기다 할아버지 대에 천석꾼이 된 부자집 손자로 태어낫다..

금수저 출신이다..



생가는 10시부터 개방인데, 우리 일행 웅성거리니 일찍 문을 열어준다..




부자 양반집 주련은 무엇을 썼나 보자



得句會應緣竹鶴(득구회응연죽학)

시 구절을 얻으려면 대나무와 학()을 만나는 인연이 있어야 하고



著書不復窺園葵 搜羅金石卑歐趙

저서불부규원규 수라금석비구조


책을 쓰노라면 정원의 해바라기조차 쳐다 볼 여가가 없고

금석문(金石文)을 찾으니 구양순과 조맹부의 글씨를 수준 낮게 본다



看領風騷벽杜韓(간령풍소벽두한)

시경(詩經)과 이소(離騷)의 글을 보면서 두보(杜甫)와 한유(韓愈)의 글을 피한다


秋水爲神玉爲骨(추수위신옥위골)

가을 물처럼 맑은 정신과 옥처럼 고귀한 뼈대를 가졌다.

(이는 두보시 서경이자가(徐卿二子歌)의 한귀절이다..)


주련은 일련의 시귀절이 아니고 여기 저기서 따온 글이다..

그런데 일관성이나 연관성도 별로 없어 보이는 글귀를 걸어논 이유는?

글 좀 아는 양반집이라는 시늉을 내기 위해서인가?




이 집이 명당이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는가?

집 안내문은 노적봉 형상의 배산과 임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의령사람들은 남강 정암(솥바위) 때문에 이병철 같은 부자가 나왔다고 생각한다..

솥바위는 강물 속으로 세발 모양으로 되어 잇어 정(鼎)암이라고 하는데, 사방 20리(8KM) 안에서 부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삼성의 이병철, 럭키(현 LG)의 구인회, GS의 허정회, 효성의 조홍제가 그들이다..

솥바위는 화수분 처럼 의령 부자들의 원천이라는 것이다..



솥이란 가솔을 먹여살리는 도구다.

솥바위를 보고 큰 사람들은 자연스레 남을 먹여 살리는 기업과 경영의 마인드를 가지게 될 것같다.

흐르는 물을 보면 순리를 생각하고, 아울러 정세나 경제의 흐름에 눈뜨지 않을 수 없다




여기 안채의 부억 옆방에서 그는 태어났다..

천석꾼 양반의 2남이었다..

그는 할아버지 서당에서 한문을 익히고, 일본 와세다 대학으로 진학했으나 중퇴하고 고향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3년동안 빈둥거리고 도박에 빠져 지내다가 26세의 어느날 갑자기 개심하여 사업에 투신한다..




안채에 걸린 주련..


孝悌根其本性  효제근기본성

효성과 우애가 본성의 뿌리이고


仁義成於束修 의성어속수

인의는 속수(마음을 닦고 몸을 단속하여 행실을 삼감)에서 이루어진다..



부자집 광에 쌀가마가 그득하다..


그는 1930년대 26살에 집안 300석 땅을 증여받아 마산에서 정미소, 운수업을 시작한다..그리고 대구에서 삼성상회를 열었다..

제법 재미를 보았다가 부동산 투자로 쪽박을 찬다.

그러나 6.25때 도약의 발판을 잡는다.

1951년 부산에서 삼성물산을 설립하고, 전쟁통에 흔해빠진 고철을 수집하여 팔아 거액을 번다.

그리고 이후 제일제당(설탕), 제일모직을 설립한다.

50년대 자유당 정부와 밀월 관계로 승승장구하다가 5.16후 부정축재자로 구속되었다 풀려난다.

60년대에는 사카린 밀수 사건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고 사업일선에서 물러난다.

하지만 그 무렵까지 설탕이 선물로 불티나게 팔리던 때니 돈은 엄청벌었다.

그는 68년도에 사업에 복귀하고 69년 아들 장남,차남의 반란을 진압한다..

70년대에 들어오면 아직 정주영은 비교가 안될 정도로 제일 갑부가 되었다.

그때 우리는 그를 '돈병철'이라고 불렀다.



그무렵 그는 소위 문어발식 경영을 하여 지탄을 받았다..

조미료 사업에도 뛰어들어 미풍을 만들어 미원에 도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사돈지간인 구인회의 업종인 가전분야에 진출함으로써 사돈간에 척을 지었다

나는 금성전자(LG 전신)의 오랜 사용자였으나 90년대부터 삼성전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결국 삼성전자는 승승장구했다.

80년대에 70대의 나이임에도 그는 후계자로 정한 삼남 이건희가 처음 시도하였던 반도체 사업에 전격 진출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드디어 1984년 세계 최초로 256KD램  개발에 성공하고, 86년에는 1메가D램을 출시함으로써 성공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지금은 글러벌 기업이 되었다..



생가 맞은편 멋진 한옥이 그가 결혼 후 분가하여 살던 집이다.

대구로 이사 가기 전까지 살았단다..



굳이 풍수론적으로, 결과론으로 말하자면, 엄청 부자가 되지만, 아들의 말년과 손자의 중년에 고생하는 터라고 평해야 되는 거 아닐까?


천하의 큰 부는 창출하기는 쉬워도 유지하기가 어렵다

시기질투가 강한 분위기에서는 더욱 그렇다

삼성은 그 재산을 상속시켜 유지하려는 과정에서 무리수와 심한 견제로 지금도 고통 받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전통의 부자들은 항상 베풀라고 가르쳐왔다.

경주의 최부자 집안이나 하동의 운조루 부자도 그랬다..



한편 우리의 풍토를 보면,

기아자동차에서 보듯이 오너가 없으면 회사가 성장하지 못한다.

또한 정권이나 교회까지도 핏줄에게 물려주려는 세습의식이 강하다.

따라서 오너 가족의 회사 상속을 용이하게 하는 법제도상의 편의는 봐주되, 상속세는 상당부분 무의결 주식으로 납부하게 하는 타협안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독일 등 선진국도 가족기업의 상속을 비교적 용이하게하는 법적 장치를 두는 것으로 타협하고 개선해왔다..



돈은 무엇일까?

왜 돈을 벌려고 안달들일까?


1) 카네기와 록펠로는 개같이 벌어서 정승처럼 돈을 썻다.

그들의 경영 수법은 독과점을 이용하는 등 더티한 방법도 불사하여 돈을 벌엇지만, 그 거부를 상당부분 자선사업에 기부함으로써 찬사를 받았다.


2) 빌 게이츠는 원숭이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돈을 쓴다.

   기묘한 기술(도스 프로그램)과 절묘한 계약(IBM으로부터 로얄티 받는 계약)으로 떼부자가 되더니, 당대에 물러나 재단을 만들어 기부활동을 하니 누군들 칭송하지 않으리


3) 스웨덴의 발렌베리 기업은 세상의 변화에 맞추어 변신하여 5대에 걸쳐 기업을 승계하고 있다.

이제는 오너를 매 세대마다 2명씩 선발하여 지주회사와 금융계열사 대표를 분담시키기 때문에 독단경영을 하지 못하게 하고,

오너라 하더라도 지주회사를 통해 비전,경영전략,투자 등 거시적인 부분만 결정하고, 세세한 결정은 전문경영인이 하도록한다.

그리고 자선 사업을 엄청 많이 하여 인심을 잃지 않도록 한다.


4) 삼성도 이제 기로에 섰다.

정권의 비위를 맞추어 성장하던 기술은 구 시대적이다.

이병철은 자유당 때 성장으로 5.16때 부정축재자로 몰렸고, 손자 이재용은 박근혜와의 독대로 1심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대북 투자에 협조하라는 문정권의 요청받고 있으니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나름 많은 기부와 봉사를 하고 있다고 하지만, 매우 적대적인 사람들도 엄청 많다..


5) 돈은 써야 한다..

많으면 좋은 일에 많이 써야 한다.

특히 장래성있고 가난한 젊은이에게 많이 써야한다.

그래야 원망듣지 않고 오래간다..

원망듣지 않는 것이 바로 공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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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성산 둘레길을 걷고 나서 가까운 육영수 생가를 방문했다..

구미의 남편 생가도 가봤으니 부부의 생가를 다 방문하는 것이다..

대문을 들어서면 바로 원님이 집무하는 동헌 같은 사랑채가 딱 서있다..



이집은 대대로 내려오는 집이 아니라 아버지 육종관이 돈을 벌어 산 것이다..

아버지는 무슨 일을 해서 당대에 거부가 되었을까?

지주의 막내아들인 그는 미곡상, 정미소, 금광업, 인삼가공업을 해서 거부가 되어 정승들이 살던 집을 샀다..



그의 어머니가 태몽을 꾸었는데, 이 연못에서 큰 자라가 기어나와 품에 안기는 꿈이었다.

1남 3녀 중 차녀로 태어낫다..




안채, 어머니 살던 방 옆 작은 방에 기거했다..






방안 박정희 글씨가 있다..

덕불고필유린..

덕있는 자는 외롭지 않다. 반드시 따르는 이웃이 잇으니..



그녀의 단정한 글씨 "중용지덕"

그의 일생에 어울리는 글같다..



영부인이 된후 고향에 방문했을 때 동네 여자들에게 월남치마 해 입으라고 원단을 선물했나보다..



부잣집 쌀뒤주는 크기도 하다..




석빙고도 떡하니 자리잡았다..




아버지는 소실을 5명이나 두어서 배다른 형제까지 따지면 12남 10녀 였다

서울에서 배화여고 다닐 때 서울의 아버지 작은 부인 집에서  살았다..

이런 경험이 나중에 5.16 후에 혁명사업으로 축첩공무원 1385명을 해임하는 토대가 되었는지 모른다..



처녀시절에 한반도에 무궁화 자수를 놓은 것은 미래의 데자뷰라고 해야하나..



6.25. 전쟁통에 피난간 부산에서 지인의 소개로 그녀와 그는 만났다...

약혼한 날짜는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한 날이다..

그무렵 그는 육본 작전정보국에 근무하던 중령이었으며 돌싱이었다..

그녀는 자기보다 키 작은 남자에게 끌려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그와 결혼한다.

그 과정에서 딸을 지지햇던 어머니는 아버지와 갈라선다..



 한창 승승장구 북진중이던 12월에 34살의 남자와 26살의 여자는 대구에서 결혼한다..

그녀의 결혼을 반대한 아버지는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고, 평생 사위를 인정하지 않았으나 임종시에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는 말이 있다..

결혼식에서 주례가 "신랑 육영수와 신부 박정희"라고 실수해서 웃겼다는 말이 있다..



그녀는 2녀 1남을 두엇다..

어느 개그맨이 "대통령부부가 싸우는 걸 3글자로 줄이면?", "육박전" 하는 개그를 햇다가 출연정지를 먹엇다는 일화가 있다..

그런데 정작 본인들은 전용기 안에서 스튜어디스에게 이 유머를 듣고 크게 웃었다고 한다..




우량아 선발대회...

그때는 출산율이 높았다..그녀도 아이를 셋이나 낳았으니..



그녀는 후덕했다..

각종 고아원, 보육원에 봉사활동을 하였고, 어린이회관, 어린이 대공원, 육영재단을 설립하고, 여성회관을 건립하는데 기여했으며, 

불우 청소년을 위한 정수직업훈련원을 세웠다.

특히 한센인들을 위한 소록도 지원에 관심을 쏟고 그들의 인권, 복지를 위해 노력했다..



1974년 8.13. 그녀는 마지막으로 이 글씨를 쓰고, 이틀후인 8.15.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문세광의 저격을 받아 사망한다..



생가 후원에는 정자도 잇다..

죽림옆 정자에 앉아 인생을 생각한다..

그들 부부의 사후 자녀들의 인생은 파란만장하다..





차를 4대나 세울 수 있는 차고와 5명의 소실을 둔 가부장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자신이 선택한 남자, 그것도 돌싱 남자와 당당히 결혼한 여자..

영부인에 되어 소외되고 약한 사람, 고아, 불우 청소년, 한센인들을 위해 봉사했던 사람..

그녀 사후 남편이 그녀를 추모하는 시가 그녀 인생의 성적표아니겟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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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출과 은하수 사진으로 인기 얻고 있는 옥천의 상춘정..

청성면 보정천에 우뚝한 독산이 마치 호수의 고성처럼 인상적이다..

지난 번 일출을 보려고 왔으나 안개 속에서 자취도 찾지 못하고 돌아갔다...

아예 늦으감치와서 대면한다..

일출이 없으면 어떠랴..

물과 어우러진 우뚝함은 그대로인 걸


<내비> 옥천군 청성면 산계리 11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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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하늘정원에서 바라본 풍경..

거대한 경쟁자 롯데타워가 한눈에 들어온다..

경쟁의 바다..서울에 살려면 하얀 거품이 일도록 치열하게 살아야 한다..



처조카 결혼식 때문에 올라온 서울..

얼릉 내려가고 싶다..

20년전 서울을 떠나기로 한 결정은 내 인생 최고의 결정 중 하나다..



지금도 서울에 오면 이 유리창의 풍경처럼 비현실적이고  신기루같은 느낌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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