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역에서 저녁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화산을 스쳐 아침에 낙양역에 도착..

물론 침대칸에서 자면서 간다.

처음엔 이불이 더러워 가슴까지만 덮고 잤는데, 아침에 보니 얼굴까지 감싸고 있더라는..ㅎ

 

낙양역에서 버스로 소림사로 향한다.

달마를 만나로..

 

 

달마불식(達磨不識)

 

양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 “짐이 황위에 오른 이후 수많은 절을 짓고, 경을 간행하고, 중을 기른 것이 셀 수가 없소, 그리하여 내게 어떠한 공덕이 있겠소” 달마는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답한다.
“무엇이 불교의 본질이 되는 가장 성스러운 진리요?”
“텅비어서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짐과 마주한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장강을 건너 숭산에서 9년간 면벽 수도를 했다.

 

(장강을 건너는 달마)서안 비림에서 구입한 달마탁본 족자..

 

(숭산  소실봉)

 

(소림사 뒷산 달마 면벽구도의 현장)

밖으로 경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外 息 諸 緣)

안으로 애쓰거나 헐떡임이 없네 (內 心 無 喘)

 

우리나라 절에 가면 법당의 바깥벽에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는데, 대개 불교설화나 고승의 일화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왼쪽 팔이 잘려진 채 피를 흘리고 서있는 사람의 그림이 있다.
한 팔을 잘라 구도의 의지를 밝힌 제2조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장면이다.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편안케 해주소서”
“그 마음을 가져 오라, 그러면 편안케 해주리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됐다, 이제 마음이 편안한가”

 

(입설당의 편액)  

 

입설당은 위 일화의 현장이다.."설인심주" 눈위에 찍은 붉은 마음의 구슬이라는 뜻일까?

***

신광(법명을 혜가로 받기 이전의 이름)이 달마를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더니

가타부타 말이 없더라.

눈이 내리는 가운데 3일이나 서있었더니(그래서 입설당인가보다)

그제서야 하는 말이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릴때야 가르침을 주겠다"는 식으로 짐짓 구법의지를 시험한다.

무인 출신인 신광이 잠시 생각하더니, 칼로 한팔을 베고 피를 흘리며 입설당 건물을 3번 돌았더니

자연히 붉은 눈이 내릴 형국이 되는지라.

 

달마가 한쪽 가사자락을 찢어 팔을 싸메주고 제자로 맞이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림사에서는 합장이 아니고 한 손만 들고 아미타불을 염송하고(무협영화 "소림사"),

가사도 한쪽은 찢어진 모습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하더이다..

 

 

탑림
역대 고승의 부도탑

 

***소림사에는 선승의 주된 치열한 구도정신은 사라져가고, 선승의 몸단련의 방편이었던  권법이 주인행세를 하는 현장이 되었다..

 

이어 용문석굴로 향한다.

이하 강변 용문 석굴 건너편이 향산사다..

향산사는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말년을 보낸 곳이고, 그의 묘가 있는 곳이다.

백낙천은 양귀비와 당현종의 사랑를 그린 장한가를 지었다.

 

용문석굴은 북위 시대인 5c부터 당나라 9c 까지 조성되었다.

 

 

즉천무후는 당고종의 사후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주(周)라고 칭하엿는데, 

이 봉선사의 비로자나불의 모습은 즉천무후를 모델로 햇다는 설이 있다.

 

용문을 떠나 관림으로 간다.

중국에 문으로 공림이 있다면, 무로는 관림이 있다.

우리로 친다면 문으로 세종, 무로는 이순신 장군을 친다고 하나?

 

관림 벽에 새겨진 관제시죽..

 

不謝東君意 불사동군의
丹靑獨立名 단청독립명
莫嫌孤葉淡 막혐고엽담
終久不凋零 종구불조령

 

동군(조조)의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 없으니
선명하게 홀로 이름을 세우리라.
외로잎 초라하다고 싫어하지 말지라
끝끝내 시들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위양육합..

위세가 천하(육합)에 떨치네.

 

관우의 얼굴이 붉은 것은 충성심을 뜻하는 것이고,

손에 든 것은 공자가 쓴 역사책 춘추다..

그는 밤에는 춘추를 읽는 문무 겸전의 장수였다..

 

그가 한나라에서 받은 벼슬은 수정후이고, 유비에게 받은 벼슬은 전장군이었다.

그는 오군에게 잡혀 죽은뒤 목은 낙양의 조조에게 받쳐졌기에 그의 무덤이 낙양에 있는 것이다.

후대에 벼슬이 추증되어 현재는 신이 되었다..

 

 

 

서안 인근의 여산 기슭에 위치한 화청지..예로부터 온천이 나와 제왕들의 즐겨찾기 장소..
당 현종과 양귀비의 스캔들의 현장..
 
곽말약이 쓴 화청궁 현판

 

목욕하고 나오는 양귀비상당나라의 미인은 글래머라나..

 

양귀비의 욕조

 

화청궁 뒤 여산 봉우리 정상에 봉화대가 있는데..
주나라 유왕 시절  봉화대의 불이 올라 제후들이 구원차 몰려 들었다가 실수로 밝혀지자 황당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웃지않던 애첩 포사가 웃게 되었고..

주 유왕이 애첩 포사을 웃기려고 여러번 봉화대 불을 올리는 장난을 하다가 결국 "늑대와 소년"처럼 견융족에 희생되었다는 설화를 지닌 현장..

  저 여산의 좌측 기슭 중턱에 암자가 있는데..

장개석이 공산군의 토벌 독려차 왔다가 장학량에서 체포되어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현장..

 

모택동이 쓴 장한가.."위대하신"이란 수식어도 없고, 그 흔한 "주석동지"라는 말도 없다..다만 "모택동이 쓴" 이라는 간결한 표현이 오늘의 중국이다..

화청지에 있는 백거이의 장한가  마지막 귀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서안성 장락문

당나라의 수도 장안..지금은 그당시의 1/6 정도로 축소하여 명나라때 건축되었다지만, 그래도 위풍이 당당하다..

두보가 읊었던 그 장안..

  

春望 /두보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나라는깨어져도 산하는 그대로인데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장안성에 봄이 오니 초목만이 무성하구나.
感時花천淚 (감시화천루)  시국을 생각하노라니 꽃을 보아도 눈물이 흐르고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이별을 한탄하노라니 새소리에도 심장이 멎는듯,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전쟁을 아리는 봉화가 석달동안 이어지고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집안소식 전해줄 편지 만금보다 귀하다.
白頭搔更短 (백두소갱단)    흰 머리 긁을수록 또 짧아지고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이젠 비녀조차 꽂지 못하겠구나.

 

장락문(남문)

성벽위 - 만리장성의 폭보다 더 넓다고 한다..

 

장락문에서 바라본 성의 해자..

이성을 어찌 공격할 것인가..

 

 

 

(백두산 호랑이)

산문 밖 호림호텔에 묵엇다..호림이라는 이름답게 백두산 호랑이 사파리를 운영한단다..

그 호텔 로비에 호골주를 파는 가게가 잇는데..그안에 호랑이가 통채로 소주 속에 들어 잇다..

 

(백두산 가는 길)

아침 산보 길엔 망설임이 없이 백두산 쪽으로 향했다..
길 양옆으로 흰줄기의 나무(백양나무인지, 자작나무인지 모르겟다)들이 줄지어 서있다..
 
예전엔 백두산에 원시림이 가득햇고, 구한말에는 그 벌채권을 둘러싸고 열강이 각축하였다는데..
지금은 원시림이 남아잇기나 하는지..
아직도 벌채목재를 실어나르는 열차가 운행하고는 있다..

 

(일송정 푸른 솔)

 

아침 일찍 백두산을 떠났다..가이드가 오늘은 쇼핑옵션을 채워야하니 양해하란다..

 

용정에 다와갈 무렵 가이드가 외친다..우측 차장에 멀리 보이는 것이 일송정 푸른 솔입니다..

그리고 지나쳤다..허망..

 

용두레 우물가는 용정에  최초로 사람들이 살던 터이고..

일송정은 그 때이후 주민들이 치성을 드리던 곳이란다..

 

차는 묘향산이라는 북한 상점에 도착..무슨 교육하듯..우황청심환 선전을 하는데..

각지에서 모인 일행 중에 아무도 물건 사는 사람이 없다..썰렁하게 모두 나간다..

일행중 어느 분 왈..금강산 피살 사건 이후엔 북한 당국에 흘러들어가는 돈이 되는 물건을 살 생각이 없단다..

 

이어 차는 곰 사육장과 웅담판매 가게에 들렀다..

연변조선족 자치정부가 품질을 보증하는 곳이라며 한참 선전하니..여러 사람이 사고,, 잠벗도 사겟단다..

반드시 먹겟다는 다짐을 받고 사기로 햇다..

잠벗은 가는 곳마다 못사서 안달이다..싸니까 일단 사놓으면 나중에 다 보탬이 된단다..

난 반대다..당장 필요없는 것을 사는 것은 아무리 싸도 낭비다..

 

 

 

시인 윤동주의 모교 대성중학교..

거기서 놈3 영화의 모티브가되는 사건이라는 15만원 탈취의거를 보다..

 

 

 

(함북 종성군 부근의 두만강)

 

차는 도문을 향해 달린다..시골길을 한참 달리는데, 가이드가 우측 산들이 북한이란다..

두만강은 어디하는데.. 두만강은 동네 냇가로 나에게 다가왓다..

 

6살때 처음본 영화가 "두만강아! 잘잇거라"였다..

마지막 장면..독립군들이 스키를 타고 내려오면서 일본군을 전멸시키는 감동적인(?) 영화 ..

나중에 커서 그영화의 감독이 임권택이었고..임권택의 최초 작품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렇게 맺어진 두만강이 이렇게 시골스럽게 다가올 줄 몰랐다..스펙터클하게 다가 올줄 알앗는데..

그러니 첫사랑은 다시 만나는 것이 아니라지 않는가..

 

(두만강 누런 물에)

 

두만강~ 푸른 물에~ 노젓는 뱃사공~

 

도문에는 없다..

 

두만강 누런 물에 운전하는 뱃사공은 잇다..

저멀리 보이는 산 너머 중,소 국경부근에서 두만강이 해란강과 부루허통하와 합류하면서 큰강으로 변모하여 동류하고 동해에 이른단다..

 

여기가 종성,경원,경흥으로 이어지는 세종때 김종서가 개척한 육진 중 하나이다..그야말로 변방..

 

뱃사공 말이 작년에..여기서 대나무 뗏배를 타고 유람하던 한국학생이 배가 파손되며 북한쪽으로 표착..

3시간 동안 억류되었다가 1000만원을 주고 풀려났단다..

 

그런말로 통통배를 타고 유람하는 나를 안심시키고 경쟁자를 제압하는 노련한 뱃사공..

배를 북한 땅 가까이 대는데..북한 군인이 보인다..

걱정말란다..돈달라..과자달라 한단다..

 

두만강은 양쪽이 공동으로 사용한단다..서로 땅만 침범않으면..

하긴 우리동네 강보다 폭이 작은 60미터 정도 되니 가르면 이용가치가 없겠다..

 

선착장 제방에  천막가게에 노래방이 잇고, 금영노래방책이 잇다..한번 눈물젖은 두만강이나 불러봐!!근데..영..분우그가 아니다..

 

 

마지막 쇼핑장소에 갔더니 연변박물관 2층에 잇다..그것도 한국사람이 세내어 라텍스 장사를 한다..

잠벗 혼자 현혹되어 천연고무 베게를 2개 산다..내 눈총은 아랑곳 없이...

 

거기서 등소평이 쓴 장백산을 보앗다..

 

중국으로 온 백두산..천지는 여전히 황홀한데..

산이름은 장백산으로 빼앗기고..호랑이는 술 재료로 전락하고..반달곰은 사육당하며 웅담을 헌납하고 잇다..

 

 

인천에 도착하여 내려오는 고속버스안..

박태환이 금메달을 딴다..이것이야..

우리가 잘해야 남이 알아준다..

(대련에서 발해를 바라보다)

 

휴가에 백두산을 보러 갔다..전부터 가고 싶었다..우여골절 끝에 날자를 정하고..코스를 정하다..

대련-연길-백두산-용정-도문-두만강으로 이어지는 코스를 택햇다..

요즘 불황이라 해외여행도 줄고 하여.. 확실한 출발을 최우선 순위로 꼽았다..

 

대련 공항에 도착하여 연길로 가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기 위해 노호탄..성애광장에 잠시 들럿다..

성애광장 끝 바닷가에 서서 발해를 바라본다..

 

1500년전에 고구려의 비사성이 잇었고..

1200년전에 발해의 바다였으며 근세사에 러일전쟁의 분수령이 되었던 곳..

 

그곳에서 까르프를 보았다..한국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퇴출되었던 프랑스계 할인매장이 그곳에서 장사하고 잇었다..  

 

(부르허통하가 무슨 한강 같다..)

 

길림성 연변자치주 연길시 공항에 저녁 늦게 도착했다..

북경올림픽 보안강화되고..비행기도 연착하여..지루하게 시간을 보넷다..백산호텔에 짐을 풀고..

 

다음날 새벽..나만의 외출이 시작되엇다..

호텔부근이 부르허통하가 흐르는데..무슨 한강처럼 넓다..

나중에 확인해보니..보를 설치하여 물을 가두어 놓아 큰 강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강을 따라 걷는 나의 일상이 여기서도 이어진다..

  

 

산책길에 흥미를 끄는 것은 그곳 사람들이 공원에 나와 댄스를 배우는 모습이다..

반주곡은 "홍도야 우지마라.."등 우리 옛뽕작..

연변 지역이 조선족 자지주라 핏줄을 속일 수는 없나 보다..

음주가무는 사기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내력이 아니던가.. 

 

(백두산 북파 산문)

 

아침 7시에 연길을 출발..용정-이도백하-송강을 거쳐 4시간에 걸쳐 백두산 북쪽 등정로 산문에 도착햇다..

백두산 등정로는 3군데..북파..서파..남파..그중 북파는 찝찰로 천문봉에 올라 천지를 조망하는 코스다..

연길에서 출발하는 버스는 콘크리트 포장도로를 달리는데 마치 말을 타고 달리는 기분이다..

중간에 요금징수소가 여러차례나오는데.. 모두 합치면 통행료가 6-7만원쯤 된단다..

하여..백두산 도로는 우리나라 관광객이 건설하고 완성시키는 형국이란다..

 

지루한 차안에서 가이드에게 재미잇는 얘기 좀 하랫더니..문맹부부 아야기를 한다..

글을 모르는 여자가 매파가 학식이 높은 사람이라고 소개한 남자와 결혼하여 길을 가게 되었다..

길가 전봇대에 "불조심"이라는 글씨가 붙어잇었는데..

남편에게 무슨 글자냐고 물었다..그러자 남편이 대답햇다..

"전봇대"

남편도 일자 무식인데..3글자에 맞춰 둘러댄 것이다.

얼마 가니 "불* 조심"이라고 쓴 전봇대가 나왓다..

다시 물엇더니 이번에 4글자에 맞춰 "또 전봇대"라고 둘러댓다..

얼마 갓더니 "언제나 불조심"이라고 쓴 전봇대가 나타났다..여자가 물엇다..

남자가 말햇다 "마지막 전봇대"..

 

썰렁한 유머였다..

 

그러자 가이드가 분위기를 바꾸려고 물엇다..백두산 날씨가 변덕스러워 천지를 꼭 본다는 보장이 없다..

백두산 천지를 볼수 잇는 3대 조건이 잇다..

 

첫째는 운이 좋아야 한다..

 

그럼 두번째는 무엇인 줄 아는가?일행 중 한 사람이 답햇다..

" 또 운이 좋아야 한다"

 

3번째는?

"마지막으로 운이 좋아야 한다"

 

모두 한참을 웃었다..  그러는 사이 백두산에 가까이 갈수록 신기하게 날씨는 더욱 화창해지고 잇었다.. 

 

 

 

산문에서 셔틀버스를 갈아타고 가서 다시 찝차를  탓다..말티고개보다 더 구비 구비 돌아 천문봉에 도착..

500미터를 오르니..

아!!사진에서 그렇게 자주 보앗던 그 호수가 그대로 거기에 있다..

색감..어찌 표현해야하나..사진으로 표현할 수 없는 생생함..

 

 

깊고 푸른..코발트 같기도하고 비취같기고 하고..녹색도 섞인 형용하기 어려운 색감..

푸른 하늘이 담긴듯하고..구름의 그림자가 지면 검어지는..

 

사진 찍기에 정신이 없다가..바위에 걸터 앉아 한참 천지를 바라보며 명상에 잠긴다..

 

천지를 바라보며 천지와 하나인 나를 느끼며 천치처럼 웃는다..ㅎㅎ 

 

 

(비룡폭포에서)

 

천문봉에서 내려와 다시 비룡폭포(중국명: 장백폭포)로 향했다..

백두산 북쪽 달문으로 해서 떨어지는 천지의 물이 폭포를 만들고..

 

정말 장관이다..1주일전에 폭포옆으로 달문을 통해 천지물가로 올라가는 길이 낙반사고로 사람이 다치고 폐쇄되어 폭포 가까이 접근은 금지되었다..

 

하지만, 물에 발을 담그고 폭포를 감상하기는 부족이없다..발이 얼어 붙는듯 시리다..

 

바위에 걸터 앉아 폭포를 바라보며 명상을 한다..

번뇌가 물이 되어 쏟아져 내리고 시린 물이 되어 저 아래를 향하여 사라져 간다..

 

백두산에서 자유롭게 웃으며 행복을 느낀다..이것이 관광이다..

(오사카 도톰보리)

도톰보리(道頓窟) 구경갔다..

우리나라 남대문 시장 쯤 되나..무척 혼잡하다..

거기서 헤메고  식당을 찾아 갔다.. 무사히.. 

 

  거기서 만난 경찰..

허리에 둘른 소지품이 다양하다..수갑..곤봉..무전기..별에 별것..

 

 신사이바시(心齋橋)

도톰보리와 크로스되는 상가..명동 쯤된다나..

잠벗과 딸래미는 신났다..

 

 도톰보리에 한글이 써잇다..

"사주세요.." 웃기는 일본 상술..

 

(히메지성 해자)

점심요기를 하고..마지막 목적지 히메지 성을 들러 오카야마 공항으로 가기위해 출발한다..

일본 연휴라 고속도로가 막힌다..

5월초에는 일본 여행가지 마시길..

일본 사람들은 국내여행도  패키지로 다닌단다..

고속도로 통행료가 무척 비싸단다..

그런데도 5월초의 연휴에는 우리의 명절귀성차량처럼 고속도로가 만원이다..

방송도 아침부터 생중계하고..

우리 가이드도 엄살이다..

하여 결국 히메지성에 당도하여 잠시 해자만 감상하고..성안 관람은 포기하고 돌아섰다.. 

 

멀리서 히메지 성의 머리만 보인다..

아쉬움에 성의 전모가 나오는 입장권을 찍었다..

 

딸래미는 그 사이 성이 새겨진 과자를 사왓다..

아쉬움을 달래며 히메지성을  아삭아삭 씹어 내솜 깊숙이 간직한다..

나는 히메지와 한몸이 되었다..

 

오카야마공항에 잉어 풍선이 떴다..

어린이날 일본 전역에 잉어 깃발이 나부꼈다..

남자 아이 키우는 집에서 내거는 풍속이 잇단다..

귀국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문득 관서지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의문이 들엇다..

 

집에 와 검색해보니 이렇다..

 

일본의 원래 수도는 천황이 거하였던 쿄토[京都]였다. 이 일대를 키나이[畿內] 지역이라고 불렀다.

우리의 경기와 비슷하다.  수도를 군사적으로 방위하기 위하여  아스카시대에서 나라 시대에 걸쳐서 키나이 지역을 중심으로, 주요 간선도로에 관문을 세운다.

 

그리하여 쿄토를 중심으로 동쪽 지역에 3개의 관문, 스즈카관[鈴鹿?], 후와관[不破?], 아라치관[愛??]을 세우고  3개 관문을 산노세키라고 불렀는데, 이 관문들의 서쪽인 쿄토 쪽이 관서, 즉 칸사이지역이 되었는데,  행정구역으로 따지자면 쿄토부, 오사카부, 시가현, 효고현, 나라현, 와카야마현이 여기에 속한다.

 

옆에서 잠벗이 묻는다..

그란디, 우리나라 관서지방의 유래는 알어유?..몰류..

 

 

 

이번 일본여행의 진짜 목적이 오사카성을 보는 거였다..

낭인 시절 대망을 읽고 난후 보고 싶었던 성..

 

그 오사카성에 도착하여 올라 가는 길..

보행도로에 참새를 조각하여 놨을까?

무슨 의미가 잇을법하지만..아는 사람이 없다.. 

 

 

 

중국 서안에 갔을 때 서안성의 해자도 대단하였지만, 이곳 해자가 더욱 대단하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히데요시의 아들을 제거하기 위하여 도쿠카와 이에야스가 10만의 군대로 쳐들어 온다..

하지만..이런 해자와 5만명이 지키는 오사카 성을 함락시키지 못햇다..

결국 포위 끝에 해자를 메꾸는 조건으로 철수하였다..

트로이의 목마처럼..

해자가 없는 오사카성은 그이후 이에야스의 재침으로 함락되어 불탔단다..

물론 토요토미의 아들은 제거되었고..

그 일족이 망한 것은 우리나라에서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업보 때문일게다..

 

(오사카성 천수각)

 

오사카성 천수각은 일본을 상징하는 건물 같아서, 나는 예전 건물인줄 알앗다..

하지만, 원래 오사카 성은 불타고.. 지금 보는 것은 최근에 외관만 비슷하게 지엇고..

내부는 박물관 식으로 지었다..콘크리트에..엘리베이터도 설치해놓고..

우리나라 유홍준 같은 사람이 잇었으면 입에 거품을 품고 매도하였을 텐데..ㅎㅎ

 

 

천수각 안에 이성의 원 주인 풍신수길(토요토미 히데요시)이 앉아잇다..

일본인들은 제1의 영웅으로 친단다..

 

하층민 출신으로 오다 노부나가의 시종이 되어 추운 날에는  아침에 주인의 신발을 가슴에 품어 따뜻하게

데웠다는 충성심의 사나이..

 

자신을 원숭이라고 놀렸지만 출신에 관계없이 실력대로 대접해주는 오다에게 충성을 다하여 그의 오른 팔

지위에 올랐다..

하지만, 명문가 출신으로 상대적으로 대접을 못받고 박대당한다고 생각했던 부하 미쓰히데가 오다를 기습하여 살해

하자, 급거 전선에서 대군을 이끌고 복귀하여  복수전을 감행하여 정권을 잡는다..

이어 전투와 협상으로 전국 통일을 마무리하고..

씰데없이 우리나라를 찝적거리는 통에..

 

풍신수길의 신사 앞에 우리나라 백성의 코를 베어가 만든 코무덤이 있단다..

그 코의 70%가 전라도 사람 코란다..

정유재란 때 남원성이 함락되면서 만명이 학살 당하고 코가 베어졌단다.. 

 

(오사카성 전도)

난공불락의 면모..

성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성은 함락되기 마련..

 

오사카 성에서 진주성을 생각한다..

김시민과 논개..

오사카성에서의 2번의 싸움과 진주성에서의 2번의 싸움..

연관은 없지만, 무언가 보이지 않은 인연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은 왜 일까?  

 

오사카성 천수각 지붕을 장식하는 치미.

물고기 모양인데 화재 진압을 상징하는 것이다.

 

 천수각에 그려진 호랑이 그림..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다..

임진왜란때 풍신수길이 조선의 호랑이를 잡아 오라고 족쳐서 왜군은 호랑이 사냥부대를 별도로 만들엇을

정도 였단다..

아마 저 호랑이의 모델은 조선의 호랑이였을 것이다..

비록 죽어 박제되어 바다 건너왔겠지만,  그 기상이 살아 있는 듯하다..  

 

 

나라의 도따이지를 관람한 후 길을 달려 오사카현 사카이시에 도착하엿다..
대망이란 소설이 생각 낫다..
사카이항구의 상인들이 오다, 도요토미, 도쿠가와 등을 지원하면서 무역상권을 확보하는 이야기도 곁다리로 나온다..
그 사카이에 온 것이다..

 

오다 노부나가는 사카이의 상인들을 통하여 조총을 구입하고 곧 그 효능을 알아 채고
조총병 3000명을 양성한다..
후일 전쟁의 신이라 불리는 다케다 신겐이 양성한 기마병과 맞붙을 때..
조총병 3천명을 3열 횡대로 배치하고 1열 쏘고 앉아 장전하는 동안 2열, 3열이 번갈아 쏘는 소위 "연속사
격"의 개념을 세계최초로 구상하여 실전에 적용하여 대승을 거두고 전국 통일의 주도권을 잡는다..

당시 조총의 유효거리라 해야 100미터 남짓..
기마대가 100미타를 질주하여 접근하는 시간 10초이내..
그사이에 접근막으려면 연속사격에 의한 집중포화 밖에 없다..
이 연속사격의 개념은 영국이 소총으로 줄루족과 싸웠던 19세기에나 생긴 개념이고..
기관총의 발명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오다는 그런 혁신적인 아이디어로 전국을 통일하였다..
이를 뒷받침한 통일의 기수들은 사카이의 상인들이었다는 것..
그런데. 그 조총의 총구가  그후엔 토요토미에 의하여 우리에게 겨누어졌다는 역사도 곁들여 생각한다.
전국통일을 앞두고 부하의 배신으로 오다가 사망한후 정권을 잡은 토요토미는 사카이 부근에 오사카성을
짓고 근거지로 삼는다..
그 이후 오사카는 일본의 핵심도시가 되었다.. 

(호텔에서 바라본 사카이 구항)

저녁식사는 호텔에서 부페로 하였다..
음식 맛으로 따지면..
중국은 불맛이고..
일본은 칼맛이고..
한국은 손맛이라는데..

이번 일본 여행에서는 제대로 회맛을 보지 못하였다..
일본은 회의 천국이라는데..
하지만, 일본에는 회떠주는 집은 없다..
기후도 습하고 위생관념이 철저하여 요리집에서만 회를 먹을 수 잇단다..
또한 음식낭비도 없다..
조금씩 주고..추가시에는 꼭 요금을 받는다..

일본에서 회, 스시가 유명해진 이유..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675년 천무천왕이 육식금지령을 내렸다..소, 돼지, 닭까지..
그러다 보니 자연히 생선을 먹게 되었다는...
육식금지는 메이지 유신때 풀렸다..

 

다음날  창밖을 보니  항만과 동상이보여 산책길에 찾아 나섰다..
방황끝에 해변에 도착하였다.. 
무슨 상인지..알지 못하고...막연히 일본 천황이나 귀족의 동상인줄 알앗는데..

호텔에 돌아와 관광책자를 보다보니
그 동상이 평화와 번영을 기원하는 용녀신상이란다..
그리고 그곳이 사카이 구항이라는 것도 알앗다..
처음 동상은 수족관 앞에 세웠다가 평성12년에 다시 이곳에 복원하였단다..
우리는 용왕을 섬기는데 여기는 용녀신을 섬기는구나..

 

일본의 호텔엔 불교,신도의 국가답게
성경 뿐아니라 불경도 같이 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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