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경강 억새길을 걷기 위해 찾아온 비비정..

참새들이 비비거리고 있다..

 

비비정예술기차카페도 변함없이 철로에 정차중이다..

 

정자에 걸린 시 한수 읽고 간다..

 

中分大野散江湖
半壁蒼崖開別區
沙霧霽餘明月小
水雲飛盡遠峰孤


중분대야산강호
반벽창애개별구
사무제여명월소
수운비진원명고


들판을 가로질로 강과 호수가 나뉘었고
높은 벼랑끝에 별세계가 열렸네
연무 걷힌 모래밭에 작은 낮달이 떠있고
물안개 다 걷히니 먼데 산이 외롭다..

 

전주명필 강암선생의 비비정 글씨가 힘차다..

 

작년에는 춘포교- 백구풍월을 걸었는데, 이번에 비비정 - 춘포문학마당 구간 억새길을 걷는다.

 

 

비비정에서 출발하는 억새길은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실패한 일기중계..

뜨거운 햇살이 기다릴줄 몰랐다..준비해간 우산을 양산으로 쓰고 간다..

 

백발같은 억새를 보면 동변상련의 심정이 되어 마음이 편하다..ㅎ

 

드디어 천변 구간이 등장한다..

억새와 하얀 구름은 죽마고우처럼 죽이 잘 맞는다..ㅎ

 

작년에 통성명한 노란 미역취..여전히 잘나가고 있구나..

 

주로 자전거길을 걸으니 정자에 앉아 발바닥을 쉬어주어야 한다..

햇살이 병이라면 그늘과 바람은 약이랄까?

 

자칭 시인이라면 이런 장면에서 시한수쯤 쑥쑥 뽑아올려야 하는데..

멍하니 강을 바라본다..

강멍이라고 해야하나..ㅎ

 

콘크리트 속에서만 살다보니 이런 생명체에도 흠칫 놀란다..

개구리가 오히려 의연하다..

 

편도 5km를 걷고 작년에 걸었던 춘포교 못미쳐 회군한다..

춘포교 이후 풍광은 작년 블러그를 참조하면 만경강 억새길 정체를 어느 정도 알수 있을 것이다.

(https://blog.daum.net/servan/6351742  ) 

 

자유..란 얽매이지 않고 끌려다니지 않는데서 나온다.

자연..천도무친(天道無親), 천지무인(天地無仁)의 불식(不息)의 행위에 이를 때 "스스로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 속에서 자유를 느낀다..

우리는 애착, 끌림, 집착, 중독 속에서 소외감을 벗어나려고 하나, 자유를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유는 독(獨)이다.

고(孤)와 고(苦)의 거품을 벗어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된다..

 

탱자가 아무도 모르게 익어가는 것..

그것이 자연이고 자유다..

 

 

 

일렁이는 억새위에서 고고한 비비정을 보며 돌아왔다.

 

 

<오늘 걷기> 비비정 - 만경강 하류쪽 왕복 9KM, 60% 자전거길,

<추천 걷기> 흙길로 만경강 억새길을 즐기려면 춘포교에서 하류로 걷기를 추천한다..

춘포역에 들렀다.

일제 침탈기에 군산, 강경, 익산 등 금강변 도시들이 번성했다.

이곳 춘포역도 만경평야의 쌀이 일본으로 유출되던 시절과 성쇠를 같이 했다.

 

 

이제 노선변경과 고속철의 등장으로 시계바늘이 멈춘 역이 되엇다.

 

시간이 흐르면 만물이 변한다.

생로병사, 영고성쇠, 성주괴공, 영허소장(盈虛消長)

그래서 우리는 영원 불멸에 집착한다..

 

춘포역에서 만경강쪽으로 직진하면 만나는 다리..(이름 모름)

그 다리를 건너 전주 초남이 성지로 가려다가  강변에 펼쳐진 억새밭에 매료되어 차를 다리 밑 주차장에 세운다.

 

걷기 초기에는 억새와 갈대도 구분하지 못햇는데, 이제는 많은 식물과 통성명하고 지낸다. ㅎ

 

흔히 억새는 산에 피고, 갈대가 강에 핀다는데, 만경강에는 억새가 왜이리 많을까?

억새도 물을 좋아하는 물억새가 따로있다..

산에서 나는 참억새보다 물억새가 소 사료에 좋단다..

 

강아쥐풀에서 백발의 억새까지 컬러풀 강변..

 

억새길에 바람이 불어야 폼이난다.

흰머리 날리면서 달려온 어머니가 생각나고..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하는 노래도 실감나게 들린다..

 

그리운 것은 그리운대로 내 맘에 둘거야..

억새길에서는 그리운 것이 너무 많아 마음이 무거워진다..ㅎ

 

 

흐르는 강물, 휘날리는 백발 모두 잊고 그저 걷는다..

 

억새에게 애교를 부리는 이 꽃은?

미국 미역취..미국에서는 골든로드라고 불린다.

꽃말은 경계(조심)이란다..

비염 유발하니 경계하란다..  

볕 좋고 풍광 좋은 날 길을 걷다가 잠이 쏟아진다.

의자펴고 앉아 한참을 자불다..

 

우리는 춘포쪽으로 걸어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거꾸러 비비정 방향으로 갔어야 전북 순례길 5구간과 만나는 것이었다.

 

무슨 타이틀을 달든 가을날에 좋은 길 잘 걸었다.

그래서 이름을 붙였다..

만경강 억새길..

 

원래 계획은 전북 순례길 5코스 중 왕궁5층석탑 - 초남이 구간을 걸어야 하는데,

이번에는 중점 지점별 탐방과 걷기로 수정했다.

1) 비비정 + 비비정 예술열차 + 금와생태습지

2) 춘포역 + 만경강 억새길

3) 초남이 성지

 

그래서, 먼저 도착한 것은 익산시 삼례읍 금와생태습지 공원이다.

 

 

금와..금개구리..

역사상 금개구리가 왕이 된 적이 있다.

부여의 금와왕, 주몽의 양아버지..

 

보랏빛 작살 열매가 눈을 확 끌어 당긴다..

 

보호습지에는 슈크렁과 억새가 울타리 역할을 한다..

 

 

금개구리는 이제 겨울잠 준비를 하나?

이름만 날리는 공간을 고추잠자리와 당랑거사가 전세내어 산다.

요즘 테스형도 걱정하는 전세난 시대에 참 여유로운 공간이다..

 

가을 트렌드, 빨간 잎 빨간 열매로 패셔너블하게 차린 이것은 남천인가??

 

 

훌쩍 공원을 돌고 개천옆 후상제방길을 따라 걸으면 만경강이 나온다..

 

오호..이 샛강 이름이 석탑천이고, 여기서 비비정을 돌아보고 오는 둘레길이 있구나??

 

요즘 시골이라고 깔보면 안된다..후생복지가 잘 되어있다.

파크볼 골프장, 게이트볼장에 노인 요양보호 프로그램 등..

 

만경강 제방에 올라섰다.

강변에 억새가 가득하다..

 

억새 사이로 보이는 것은 호남선 폐철도 위에 만들어진 열차카페..

 

돼지감자꽃도 푸른 하늘을 이고 서니 호박꽃과 견줄만 하다..ㅎ

 

만경강 8경..

세심청류, 봉동인락, 신천옥결, 비비낙안, 백구풍월, 사수곡류, 신창지정, 만경낙조, 

 

언제 다시 날잡아 만경강 8경을 주제로 만경강 억새걷기를 하면 좋겟다.

<비비정- 춘포 >구간 걷기..

 

 

비비정 앞 한내 백사장 내려 앉는 기러기떼 모습을 비비낙안이라고 표현햇다..

모래밭에 기러기 내려앉는 모습은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고 하여  대표적인 동양적 미적 표현 중 하나였다.

그래서 서예의 멋진 글씨나 여인이쁜 맵시도 평사낙안이라 표현했다..

 

그러고 보니 비비정의 맵시도 평사낙안이로다..

 

비비정..날고 나는 정자..

비비정은 조선 선조 때 최영길이 건립하였고, 영조 때 중건되엇다가 사라진 것을 1998년 복원하였다.

원래 송시열이 써준 현판은 정자가 1988년 임실로 이건되면서 임실면 성수면 봉강리 계월촌 비비정에 달려잇고,

1998년에 복원된 비비정 정자에는 전주 서예가 강암선생이 쓴 현판이 걸려있다.

 

이 정자에 우암 송시열이 지은 비비정기가 걸려있다.

내력은 이렇다.

 

우암은 최영길의 손자 최양의 부탁으로 비비정기를 써주었는데, 

대대로 무관을 지낸 최영길과 그의 아들 최완성, 손자 최양을 언급하면서, 호산 최후량이 살림이 넉넉하지 못함에도 정자를 보수한 것은 효성에서 우러난 일이라 칭찬한다.

그리고  "비비정이라 이름한 뜻을 물으니 지명에서 연유된 것이라 하나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대의 가문이 무관일진대 옛날에 장익덕(장비)은 신의와 용맹으로 알려졌고, 악무목(악비)은 충과 효로 알려진 사람이었으니 두 사람 모두 이름이 '비'자字였다. ‘장비’와 ‘악비’의 충절을 본뜬다면 정자의 규모는 비록 작다 할지라도 뜻은 큰 것이 아니겠는가."

비비정의 이름에 대해 덕담을 기재했다.

 

 

비비정 중건기를 지은 농산 신득구는 논어의 "학이시습" 처럼 학문을 배우고 닦는 것을 마치 새가 날고 날듯이 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비비정의 이름을 풀이했다. 

 

 

이제 비비정에서 보면 열차카페가 보인다.

왕년에는 양반들의 강변 카페였겠지만,

 

한내의 기러기는 안보이고, 샛강의 오리만 한가롭다.

 

 

호남선 폐선 교각위에 세워진 열차 카페에 들어간다.

 

 

 

 

차창에 만경강이 푸근하다.

뒷자리에서 여기는 저녁 노을이 끝내준다며 자랑하는 말이 귀에 꽂힌다.

그러면, 언젠가 다시 오게 된다.

이곳에서 춘포까지 만경강 억새길을  걷고 돌아와 노을까지 감상하고 가면 좋으리..

 

차기 대선주자도 좋은 곳은 아는가 보다..ㅎ

 

구절초, 억새의 배웅을 받으며 돌아간다.

 

풍접초와 슈크렁도 요즘 잘 나가나보다.

 

 

요즘 suv 필이 꽃힌 잠벗때문에 사진을 찍어도 suv가 걸리네..ㅎ

배추 속처럼 알차게 살아가야 하는데, 자꾸 겉멋만 들려 사는 것 아닌지 돌아보는 날이다..

 

 

<비비정 둘레길> 금와생태습지 공원 - 후상제방길 - 석탑천변 - 만경강뚝 - 비비정 예술열차 - 비비정 - 호산서원 <원점회귀> 3km

* 만경강 억새길  걷기 정도에 따라 거리 증가 가능...

익산역앞 솜리에 가게 된 것은 kbs 동네한바퀴 영향이다.

이곳이 이리역 개설당시부터 중심가였기에 명칭도 이리 영정통 문화예술의 거리, 또는 근대역사문화공간으로 불리기도 한다.

내비가 엉뚱한 곳으로 안내해 방황하다가 사람들이 줄을 선 칼국수 집에서 동행이 대기하는 동안 주변을 정탐하여 

겨우 목적지를 발견했다.

일단 칼국수를 혼잡한 인파 속에 먹으면서 코로나가 걱정되었다는..ㅎ

점심 식사후 고구마 빵이 인상깊었던 솜리당 빵집을 찾아 갔더니 이미 고구마빵등 대부분 팔려나가고 자투리만 남았있었다.

 

2층에 올라가 밖을 내다보니 go - 100입구가 보인다.

각종 사진찍게 인테리어 해놓은 곳이란다..

go-100이 뭔가 했더니 사랑 고백을 말하는갑다..ㅎ

일제 시대 삼산병원을 개조한 익산근대역사관..

익산역의 옛이름 이리역이 개통하면서 발전한 동네..

하춘화와 이주일이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폭발 사고 후 이리역이 기억에서 사라진 이유는 이리시와 익산군이 통합하여 익산시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는 금마가 중심지였는데, 철도역 개통 1방에 역사가 바뀌었다.

전성기때는 전주의 도청도 옮길 뻔 했었단다..

세월이 흐르면 모든 게 변한다.

돌발변수가 발생하여 급변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코로나 같은 이상한 전염병이 일상을 이상하게 변하게 만든다.

고질병이 되지 않고 빨리 사라지기를..

어려운 시절 청년은 더 괴롭다.

밥은 먹었어? 수고했어..

따뜻한 말이 그리운 시절이다.

내가 19에 너를 낳았는데, 언제 요로코롬 컸다냐?

시상에..세월이 유수와 같다더만 나는 이렇게 늙고 우리 딸은 허연 꽃이 되버렸네잉..

 

어디를 가도 세파를 지나온 흔적..

그리고 또다시 세파가 닥친다..

주말 날씨가 오락가락한다.

장기예보나 며칠전까지 일요일은 비라고 한다.  그래서 그에 맞게 장소를 물색해보니 전북지역은 흐림이다. 

전북 순례길 코스에 자리잡은 익산 왕궁리 5층석탑을 보러간다.

넓은 공간에 홀로 선 5층탑..

1500년의 세월을 견딘 포스가 느껴진다.

 

이곳이 백제 무왕의 왕궁이라는 사실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성왕 전사이후 패배주의에 사로잡힌 백제인들에게 심기일전의 프로젝트가 필요했던 것이다.

5층탑이 내려다 보이는 솔밭에 누워 솔바람 소리를 자장가 삼아 눈을 감아본다.

눈감으면 몇천년전의 평화도 느껴볼 수 있다. 

북문지로 나가니 고도리 석불을 모티브로 장승을 세워놨다.

대나무 풍경소리가 여유롭다.

북문지에서 직선으로 임도가 이어지길래 무작정 걸어간다.

몇백미터 걷다보니 조통달 판소리 전수관이 보인다.

조통달..

아버지도 국악인이고, 이모는 유명한 박초월이다.

그는 유명한 임방울에게도 판소리를 배웠단다.

가수 조관우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그는 아들이 국악을 못하게 했단다..아마도 그 과정이 힘드니까 그랬겠지.

하지만, 아들도 그끼를 어쩔 수 없엇나 보다. 길은 다르지만 가수가 되었으니..

길 끝에서 만난 석불과 예도원..

익산문화원장을 지내고 인간문화재 화공 164호인 인도(引導) 이인호가 지은 문화 사랑방이란다.

그는 조통달과 함께 박초월에게 판소리를 배운 인연도 잇고, 불교예술, 단청 등에 조예가 있다.

기세배??

정월 대보름 경에 농기에 세배하는 단체 민속놀이란다..

이 근처에 익산 향토 문화 관련 단체가 모여있다.

돌아오는 길..

영고성쇠의 굴레를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일까?

이곳이 백제 무왕의 왕궁이라면 왜 불탑이 존재하는가?

유물관의 설명으로는, 무왕이 이곳에 왕궁을 짓고 천도하지만, 그의 사후 의자왕은 이곳을 무왕을 추모하는 절로 바꾸면서 불탑을 세웠다고 한다.

글쎄 왕궁에 불탑을 세우고 절로 바꾸었다는 설명도 썩 명쾌하지는 않은 것 같다.

무왕의 재기 노력은 아들 의자왕 초기 결실을 맺는듯했으나 결국은 의자왕의 방심과 대당 외교 실패로 하루 아침에 재가 가 되었다. 

역사는 지층처럼 쌓인다.

오층탑 인근에 고려시대 석조여래입상이 동,서로 서있다.

투박한 고려의 스타일로..

고려의 불교는 선종을 기반으로 하니 불상의 장엄에서 신라에 미치지 못한다.  

일년에 한번 만나 회포를 푼다는 200미터 거리의 입상은 무심히 이쪽을 건너다 본다.

이제 발길을 익산역 부근 솜리 예술문화의 거리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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