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용 갱을 떠나 화청지로 간다..

천연온천지역이라 고대로 부터 왕들의 휴양지로 쓰였다..

이곳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로맨스로 유명해진다..

 

사진을 올리면서 양귀비 동상 사진을 자세히 보니..

비로 샤워하는 양귀비의 나신이 여전히 섹쉬하다..

화청지에서 온천하고 나온 양귀비의 나신도 저 처럼 섹쉬햇을까?

적어도 당현종의 눈에는 그렇겠쥐??


 

 

 

 

화청지는 천연 온천지여서 역대 왕들이 애용하던 장소였다..

서주 시절 유왕은 이곳에 여궁(驪宮)을 지어 포사와 온천을 즐겼다..

당 태종은 이 곳에 탕천궁을 지었고, 당현종은 양귀비와 즐기기 위해 증측한뒤 화청궁이라 개칭한다..

 

 

이 연못은 최근에 장한가라는 스펙터클 공연을 하고 있다..

건너편이 관람석이다..

우리도 이곳 관람이 끝난뒤 근처에서 식사를 하고 공연을 볼 예정이었는데, 결국 비 때문에 보지 못했다..

 

 

 

 

뒷산 여산에 봉화대가 있는데, 지금은 곤돌라가가 설치되어 관광하는 곳이 되었다..

서주 시절 유왕과 포사가 이 곳에서 즐기는데, 포사는 좀체 웃을 줄을 몰랐다..

왕이 여러 묘책을 다해도 웃을 줄 몰랐던 포사..

실수로 뒷산 봉화대의 연기가 오르고..왕실의 위험을 알리는 신호라고 생각한 제후들이 헐레벌떡 몰려왓다가 실수임을 알게된 제후들의 황당한 표정을 보고 

포사가 웃기 시작하자, 유왕은 실수 놀음을 반복한다...단지  포사의 웃음을 보기 위해서...

한 여인을 위해 팽개친 국정..그 끝은 비참했다..

폐위된 왕비의 동생 신후백과 공모한 견융족의 공격을 받고 구원의 봉화를 올렸으나 제후들은 봉화를 무시하였다...

결국 유왕은 살해되고 포사는 견융족에게 끌려갔다.. 

결국 서주는 수도를 이곳(호경)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게 되고, 동주 시대 즉 춘추전국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양귀비의 동상은 10년전과 다름없다..

그러나 당나라의 미녀들은 현재 보다 오동통한 스타일이란다..

실제 양귀비도 허리가 굵은 통통한 몸매엿다는데...

 

 

역사서에 나타난 양귀비의 모습은 환비연수(環肥燕瘦)라는 말에 담겨있다..
조비연은 날씬하고 양옥환은 퉁퉁하다는 말이다..

키 164cm, 69kg
풍만하지만 농염한 그녀...음악, 가무에 뛰어나 풍류를 좋아하는 현종 체질에 맞앗고..
총명하고 눈치가 빨라 황제의 비위를 잘맞추었다고 한다..

 

장한가에서 백낙천은 양귀비를 이렇게 묘사햇다..


廻眸一笑百媚生(회모일소백미생)

六宮粉黛無顔色(육궁분대무안색)

 

눈동자 돌려 한 번 웃으면 천하의 교태가 흐르고

분단장한 육궁 궁녀들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녀는 피부가 고왓는데 화청지 연화탕에서 하루 5번씩 온천하면서 피부를 관리했단다..

 

春寒賜浴華淸池(춘한사욕화청지)
溫泉水滑洗凝脂(온천수활세응지)
侍兒扶起嬌無力(시아부기교무력)
始是新承恩澤時(시시신승은택시)
雲鬢花顔金步搖(운빈화안금보요)
芙蓉帳暖度春宵(부용장난도춘소)

 

봄 날씨 쌀쌀하여 화청지를 하사하시니
온천물이 매끄럽게 흘러 보드라운 살결을 씼어주네
시녀들이 부축해서 일으키니 요염하게 하늘거렸는데
이것이 천자의 사랑을 받게 된 시초였다
구름같은 머리카락, 꽃다운 얼굴, 걸으면 흔들리는 금비녀
연꽃 수놓은 따뜻한 휘장 안에서 봄 밤이 깊어간다

 

- 백낙천, 장한가 중에서 -

 

 

 

연화탕은 당현종과 양귀비가 목욕하던 곳이다..

 

 

 

 

 

 

 

연꽃과 금붕어 모습이 마치 당현종과 양귀비의 만남처럼 극적이다..

양귀비는 당현종의 8번째 며느리..

그러나 그녀에게 반한 그는 며느리를 귀비로 삼는다..

적절치 못한 만남은 결말이 좋지 않은 법..

양귀비의 총애를 업고 오라비 양국충 일당이 전횡하자, 결국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고

서촉 땅으로 피난 가던 중 마외역에서 호위병들의 반발로

양귀비는 자결하고 만다..

그들 만남은 10년만에 끝낫다..

양귀비의 나이 37세..

 

 

 

백낙천의 장한가 중 마지막 귀절이 새겨있다..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칠월 칠일 장생전에
인적 없는 깊은 밤에 속삭이던 말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역사는 중층 첩첩 싸이는 법이다..

이곳에서는 1936. 12. 12. 중국판 12.12 사건이 벌어진다..이름하여 시안사건..

당시 시안에는 국민당 소속의 만주 군벌 출신 장학량이 공산당 토벌작전을 수행 중이었다..

그 때 장개석이 작전 독려차 이곳에 방문하였는데, 장학량은 항일 전쟁을 위한 국공합작을 위해 장개석을 체포하는 구데타를 일으킨다..

12.12. 장학량의 추종세력이 기습을 하여 장개석의 호위부대를 사살하자 장개석은 틀니도 끼지 못하고 담넘어 뒷산으로 도주하엿다가 체포된다..

그리고 12.26까지 연금되었다가 협상끝에 석방되고, 국공합작이 성사된다..

장학량은 군법제판에 회부되어 10년 복역후에도 대만까지 끌려가 연금생활을 한다..

쿠데타 행동대장 양후청은 1949년 처형된다..

 

 

 

 

 

 

좌측이 장학량..아버지는 만주군벌 장작림..일본군의 만주침략으로 근거지를 잃고 일본과의 복수전이 아닌 서안지방 공산당 토벌전투에 동원되자, 부하들과 함께 불만을 품어 왔다..

우측 양호성(후청) ..쿠데타 행동대장격.. 강경파로서 장개석의 미움을 받아 결국엔 1949년 처형된다..

 

 

12.12. 밤중에 장개석이 도주한 뒷산..

 

 

 

山水唐音 (산수당음)


非必絲與竹, 山水有淸音,

반드시 비단과 대나무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산수에 맑은 소리가 가득하니..

 

 

粉壁爲紙, 以石爲繪

벽을 종이로 삼아 돌로 그림을 그린다..

 

 

 

 

 

 

 

화청지에 상가에서 회전식 샤브샤브로 배를 채우고 나오는데..

시안의 1년치 강수량이 그칠 줄모르네..

내일 화산에 가야 하는데..ㅜ.ㅜ

 

 

 

시안 여행 2일차 오후 일정은 진시황 병마용갱을 구경하러 간다..

입구에 도착하니 10년전과는 많이 달라졌다..

주차장에서 병마용갱까지 10분이상 걸어가야 한다..

전에는 병마용갱 앞에서 주차하고 바로 들어 간 거 같은데..


 

 

 

 

 

병마용갱은 그대로다..

발굴현장을 그대로 지붕을 덮어 보존하면서 관람한다..

 

 

 

실제 진시황의 군대 얼굴을 정교하게 조각하여 구워 만든 도용들..

그 노고와 고통..그 세월이 얼마인가?


 

병마용들은 진시황릉의 사후세계를 지키는 군대이다..

키는 184- 197cm 로 실제 보다 크게 만든 것 같고, 장군도용이 병사보다 크게 만들엇다..

현재 발굴규모는 8000병사와 130개의 전차, 520점의 말..


 

 

 

 

영원한 제국을 꿈꾸며 불로장생 비법을 갈구하던 그는 오히려 더 일찍 49세라는 나이로 죽는다..

산삼을 먹는 사람보다 산삼을 찾으러 다니는 사람이 더 오래 산다는 이치를 몰랐던 거다..


 

그는 차선책으로 사후세계도 황제로 영원히 살고 싶엇을 것이다..

수많은 도자기 병사의 호위를 받으며 수은 강으로 둘러친 흑산 귀굴에서 무슨 부귀영화가 있으리오..

적선성덕(積善成德)..선을 쌓아 큰 덕을 이루어야 겨우 갈지 모를 천당이나 극락을

가혹한 노동과 착취로 쌓아올린 거대한 능 안에서 어찌 편히 잘 수 있겠는가?


진시황의 여산릉은 40년간 70만명의 인부를 동원하여 건설하엿다, 

진니라 말기 장안을 점령한 항우의 군대가 릉을 도굴하여 30일동안 릉을 파헤치고 보물을 실어 날랏다고 하는데, 그 때 도굴된 곳이 이곳 병마용일 가능성이 높다..

 

 

 

 

 

 

 

 

 

서서 쏴 자세의 도용(입사용)..머리 우측에 상투..

 

 

앉아 쏴 자세의 도용(궤사용)..좌측 머리에 상투..

 

 

 

하급장교..머리 장식과 신발코가 단순하다..

 

 

 

 

장군급은 머리 장식이 화려하고 신발코가 높다..

표정은 여유롭고,..

 

 

 

 

전차 박물관 입구 기둥..하단은 옥이란다..엄청크다..

천자문에 옥출 곤강(玉出崑岡)이라 했는데..

옥이 곤강에서 많이 난다는 뜻이다..

산시성에 곤강이 있는가?

곤강이란 곤륜산을 의미하고, 중국에서는 황하의 원천이 되는 산이다..

하긴 산서성은 춘추전국시대 황하의 상류에 위치한 나라 였으니..

 

전차..4마리 말이 이끈다..

보통 2마리가 끌고 2사람이 타는 전차가 보통인데, 진나라는 4두마차가 주류였단다..

그만큼 군사력이 강력했겠지..

춘추전국 시대 나라의 크기를 천승국, 만승국으로 나누는데, 그 기준이 전차 보유대수를 말한다..천승국은 전차를 1000대 정도 보유한 나라를 말하고,

만승국은 전차 1만대를 보유할 정도의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 당시 보통 전차 1대에 2명이 타고, 보병 30명이 따라 붙으니, 천승국이면 병력이 3만2천명  즉 1개 사단 병력을 보유한 나라이고.,..

만승국은 32만명 10개 사단을 보유한 나라이다..

춘추전국시대 오패 소리를 들은 진(晉), 초(楚), 제, 진(秦), 오나라 정도가 만승국 소리를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전차는 진나라 말기 기병의 등장으로 서서히 퇴장한다..

초한전..즉 유방, 항우가 쟁패하던 진나라 말기에는 기병이 대세가 되는 것이다...

1말 한마리는 사람 12명의 식량을 먹으니 기병을 유지하려면 엄청난 경제력과 보급체계를 유지해야 한다..

 

 

천하 통일후 진나라는 몽염장군에게 30만명을 주어 흉노를 토벌하게 하고 만리장성을 쌓다가 망한다..

재통일후 유방은 흉노 토벌에 나섰다가 흉노 기병에게 백등산에서 포위되어 겨우 빠져 나와 조공을 받치는 조약을 체결한다는,,,

 

 

 

 

진시황의 무지막지한 2개의 프로젝트..병마용갱과 만리장성..

2천년 뒤에 대박 터트리고, 자신의 평가를 바꾸어 놓을 줄 누가 짐작이나 했겠는가?

현대인이야..정신이 아니라 돈이 최고인 시대에 사니 관광객 돈 떨어뜨리고 가게 만드는 유적의 창시자가 최고일 밖에..ㅋ

 

 

아니나 달러?

10년만에 다시간 병마용갱 입구에서 10분을 걸어 올라가게 만든 속셈은 나올 때 알게 되엇다..

상가 골목을 10분 걸어서 나오게 만들기 위해서였다는 사실...

10년 동안 중국이 엄청 돈맛을 알게 되고, 돈을 쓰게 만들려고 고민했다는 사실..

10년전 처음 서안을 방문했을 때 화장실 풍경이 문도 없고 앉아서 서로 얼굴 보면 똥 싸던 곳이 많았는데, 이제는 우리 대도시와도 손색없이 발전하였다..

이런 장사, 관광마인드로 가면, 10년후에 우리를 능가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주차장에 대기한 택시들..운전석 우산이 인상적이다..]

문닫아 놓고 스마트폰 보면서 손님 기다리는 우리나라가 사회주의 국가 같고.

손님을 받으려고 애쓰는 자세의 중국이 더 자본주의 국가 같다..ㅎㅎ

 

 

전차의 시대 전국을 통일하여 수레바퀴의 크기를 통일한 진나라는 기병의 시대가 도래하자 몰락한다..

재통일 한 한나라는 흉노와의 굴욕을 참으려 체력을 비축하면서 기병시대에 대비하여 서역의 천리마를 얻기 위해  장건을 파견하는 등 서역의 정세를 파악한뒤

한무제 때 흉노원정을 시작하지 않던가?

중국!! 무서운 저력의 나라다..

 

 

2일 째 비가 내린다..

시안은 연간 강수량이 600mm 정도 인데, 3박 4일 동안 비예보다..

그러면 시안의 1년치 비를 맞고 간다는 이야기..ㅎ

문제는 3일째 화산을 갈 수 있느냐이다..

 

 

비가 오니 일정을 조정하여 실내 구경거리부터 보기로 한다..

먼저 시안의 역사를 조명해주는 산시성 역사박물관을 간다..

우리만 머리 쓰는게 아니다..

모든 관광객이 다 모였다..어찌나 붐비던지 찍은 사진 촛점이 흐리다..ㅜ.ㅜ 

 

 

 

산시??

우리 한자 발음으로 섬서..

송대(宋代) 이후에 산시루(陝西路)라고 불려졌기 때문에 현재는 산시성으로 불리고, 약칭은 산(陝,섬)이라고 한다..

산시성은 경수와 위수가 합쳐져 흐르다가 황하 본류와 합류하는 지형이다..

그런데 경수는 물이 흐리고, 위수는 맑은 데  두 강이 합류하면 탁류와 청류가 썩이지 않고 흘러 간다고 한다..

이를 두고 "涇渭分明" 즉 경위가 분명하다는  속담이 나왔다..

 

 

 

강이 흐르고 토지가 비옥하니 110만년 전 부터 이 지역에는 구석기시대 인류인 남전원인들이 살았다..

 

 

 

세월이 흘러 "기(棄)"라는 사람이 순임금 때 농관(農官)으로 발탁되어 후직(后稷)이라 불렸는데,

그는 위수 강변 태(邰, 셴양(咸陽) 우궁()현 부근)에 봉해져서 주나라 시조가 되었다..

그후 은나라 말기 주 무왕이 강태공을 군사로 삼아 궐기하여 은을 멸하고 주의 천하를 건립하자, 시안 인근의 호경에 도읍하였다..

주나라 시절 한 마부가 이민족 칩입때 공을 세워 산시성 기산의 작은 제후가 되었다..이것이 진(秦) 나라의 시작이다..

그의 후손이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한 진시황이다..그 도읍지가 셴양(咸陽)이다..

진나라를 무너뜨린 한나라는 현 시안성 부근에 도읍하여 장안이라 불렀다..이는 그 이후 당나라때 다시 도읍지가 되었다..

현재 시안성은 명나라때 수축한 것이고, 영락제의 명에 의해 시안(서안)으로 개명되었는데..당나라 시절의 1/8크기라고 한다.. 

 

 

 

 

주나라 시절의 악기..

 

 

 

 

진나라의 병부..부절..

둘로 갈라진 신표를 맞추어 부합해야 병권을 행사할 수 잇다..

 

 

 

 

 

秦王掃六合 진왕소육합

虎視何雄哉 호시하웅재

揮劍決浮雲 휘검결부운

諸侯盡西來 제후진서래


진왕이 육국합종을 쓸어버리고

호랑이처럼 천하를 바라보니 어찌 영웅이라 않을소냐

칼 휘둘러 흘러가는 구름 가르니

제후들이 서쪽으로 몰려와 조아리네

 

- 이백, 고풍 -

 

 

 

 

진시황은 전국의 도로를 건설하고,그 길을 따라 전국을 몇차례나 순행하다가 결국은 길 위에서 죽는다..

 

 

진시황의 여산릉..

10년만에 가니 주변을 발굴한다고 출입통제하고 있다..

릉 자체는 완벽한 기술을 보유할 때까지 발굴을 미루고 있단다..

 

 

통일후 진나라는 4가지를 통일한다..

1) 문자

2) 도량형

3) 화폐

4) 마차의 폭

 

진시황이 이러한 통일은 중국을 경제 공동체로 만들어 이후 뗄 수 없는 한 몸의 나라를 만들엇다..

우리로서는 진시황에 의하여 중국이 통일 되지 않고 6국의 분립이 유럽처럼 계속 되었어야 행복하였을 것인데..ㅎ

 

 

전국시대가 되면 우경(牛耕)이 시작되고, 철제 농기구가 보급되어 농업 생산력이 확대된다..

진나라가 강국으로 부상하자, 인근 한나라에서 첩자 정국을 파견하여 경수에 인공수로를 건설하는 토목공사를 하게 함으로써 진나라의 국고를 탕진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정국이 첩자임이 밝혀져 사형을 시키고 공사를 중지시키려고 하였다가, 실제 공사를 완공한 후의 실익을 재평가한 뒤,

그대로 공사를 진행시켜 10년간의 공사끝에 진시황 원년 관개수로를 완성 시킴으로써 관중평야를 비옥한 농토를 만들었다..

그 땅에서 나오는 소출로 진나라는 60만대군의 식량을 조달할 수 잇었다..

 

 

진나라가 6국을 통일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1) 외국인이라도 능력이 잇는 자를 등용했다...

  즉 정국 뿐 아니라 상앙, 이사 등 외국인 능력자를 중요하여 적재 적소에 사용하였다..

 

2) 공평한 상벌제도를 적용했다..

상앙 - 이사 등 법가를 중용하여 혈연, 신분이 아니라 전공에 의하여 상벌을 엄히 함으로써 군대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하였다..

 

그러면, 진나라의 멸망의 원인은 무엇인가?

 

과도한 통제와 과도한 신상필벌제도에 있다고 본다..

 통일후 전쟁으로 지친 백성을 좀 쉬게하면서 세금도 낮추어 경제적 안정을 찾아야 하는데, 아방궁 공사나 병마용갱 공사, 만리장성 공사에 백성 들을 무리하게 동원하고,

제반 지시를 어긴 백성을 가차 없이 처벌하니, 통일 15년만에 농민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2000년이 흐르고, 관광입국의 시대가 되니 진시황이 백성의 고혈을 짜서 만든 병마용갱이나 만리장성이 관광상품으로 대박이 나고,

그바람에 현대 중국은 진시황을 폭군이 아니라 영웅으로 재평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위 사진은 한나라 시대의 도용이다..작고 소박하다..

왜 갑자기 그렇게 되었을까?

 

 

 

진나라의 각종 공사에 동원된 백성이 약 300만명으로 추산되는데, 가혹한 노역과  엄벌에 진승, 오광의 농민반란을 신호탄으로 전국에 반란이 일어난다..

그 당시  두각을 나타낸 항우와 유방..

위 지도에 보듯 유방이 한발 앞서 장안에 입성하자, 진나라의 모든 규정을 무효화하고, 약법삼장(約法三章)을 발표한다..

즉, 살인죄, 상해죄, 절도죄를 제외하고 나머지는 폐지한다는 선언으로 민심을 회득한다..

그리고 항우를 물리치고 한나라를 건국한 후에도 법령을 간소화 하고, 백성을 부담을 낮추어 휴식시키는 정책을 실시한다..

특히 한 문제는 정치 이념을 황로학(노장사상)의 노선으로 취하여 흉노에게 조공을 받치더라도 전쟁을 쉬고 백성을 쉬게하여 이른바 "문경의 치(文景之治)"라는 평화시대를 열었다,,

이러한 선정으로 국력이 회복되어 한 무제의 대외 원정정책이 가능해졌고, 전한, 후한 400년의 기틀이 되었다..

 

그러니 전한시대의 그런 정신에서 만들어진 도용들은 진나라에 비해 작고 소박하다..

현대 중국의 입장에서 관광에 별 보탬이 안되는..ㅎㅎ

 

 

한고조의 부인 여후..

여걸..한신의 토사구팽을 주도하고, 유방 사후 자신의 왕국을 꿈꾸엇다..

 

 

그러나 그녀의 옥새만은 여성스럽다..

 

 

사마천의 무덤 사진...

한무제 때 사기를 저술한 역사가..

사마천은 집안대대로 사관을 담당하는 사마씨 집안에서 태어낫다..

그의 아버지는 역사서를 집필하기 위하여 자료를 모으면서 아들 사마천을 후계자로 키우기 위해 전국을 유람시켰다..

만리를 여행하고 각 지역의 역사, 설화를 수집하였다.

그러다가 한 무제에게 궁형을 당하자, 절치부심하며 "사기"라는 명저를 저술하였다..

그의 생식기는 끊어 졌으나 가장 훌륭한 저작물을 생산하였으니 진정한 대장부다..

 

그의 무덤 위에는 5그루의 측백 나무가 자라고.. 입구에는 "고산앙지(高山仰止)"라고 쓰여있다..

시경(詩經)』 소아(小雅) 차할편(車舝篇)에 나오는 문구로 “높은 산처럼 우러러 사모한다”는 의미이다.

 

 

사마천의 죽음은 구체적으로 알려져 있지 않으나, 부근에 후손들이 풍(馮)씨와 동(同)씨로 개명하여 사는 것으로 보아 한 무제 말기 다시 처형당한 것으로 추측된단다..

 

 

후한이 쇠하면서 삼국의 시대가 열린다..

제갈량이 6출 기산하면서 장안과 관중 지역을 공략하였으나 끝끝내 성사시키지 못하고 오장원에서 죽는다..

 

 

당나라가 건국되면서 장안에 다시 도읍을 정하고, 당태종의 정관의 치가 이루어지자..장안은 당시 최대의 국제도시가 된다..

인구 100만.. 그 당시 당삼채라 불리는 화려한 도자기들이 만들어진다..

색채화려한 도자기 말이 이를 대변한다..

 

 

 

당나라하면 양귀비가 생각난다..

중국 4대 미인 중에 첫 손에 꼽히는 그녀..

그녀는 어떤 모습이엇을까?

역사서에 묘사되는 모습은 결코 현대적으로 v라인의 날씬한 여자는 아니였다는 사실..

위 미인도에 등장하는 여인처럼 오동동한 스타일이라는 거..

 

 

당나라 여인의 헤어스타일은 현대 여성보다 더 과감한 것 같다..

 

 

눈썹은 어떤가?

밑에서 3번째가 가장 인기잇는 스타일이었단다..

현대 한국 여성은 위에서 첫번째 스타일 아닌가?

 

 

당나라 시대 장회태자묘의 사신도

장회태자는 당 고종의 6째 아들이며 즉천무후의 아들이다..

사신도 중에 신라사람은 누구일까?

 

 

 

시안은 낙양과 더불어 우리나라 경주와 같은 고도이다..

볼거리가 많고 인문의 집결지라고 할 수있다..

 

 

박물관 구경을 마치고 점심먹으러 시안 성벽이 보이는 중식당에 들렀다..

향초를 모두 뺀 중식은 참 맛있다..

더구나, 서봉주가 있으나 즐겁지 아니하랴~

 

 

 

 

 

 

 

중국 시안(西安)에 갔다..10년만에..

 

 

센양..우리 발음으로 함양 공항에 내리자, 황사특유의 매케한 냄새와 함께 거친 바람이 불어 닥친다..

차를 타고 1시간을 가야 서안 시내에 도착한다..

 

 

셴양(함양)은 진나라의 도읍지..위수를 건너 시안으로 간다..

 

 

길가 표지판이 재미있다..

닭의 해에 보계(宝鸡,바오지)시를 관광하시라..

대길하고 크게 이익이 되리니..

 

 

일단 3일간 묵을 5성급 샹그릴라 호텔에 짐을 풀었다..

 

 

 

 

 

길가에 색색의 자전거가 비치되어 있네..사연은 뒤에 알아보기로 한다..

 

 

그리고 간 한국 식당거리에 가서 점심을 국내식으로 먹었다..

시안에 삼성 전자 단지가 있어서 한 불럭이 한국식당 거리다..

한국관의 주인도 중국사람처럼 생긴 한국사람이다..ㅎ

 

 

 

그리고 찾아간 첫 방문지..대안탑..

10년전과 다른 풍경은 주변에 상가 빌딩이 가득하다는 거..

 

 


비가 귀하다는 시안에서 비를 맞으며 관광하는 것은 규슈에서 눈맞으며 걷는 것과 같다고 할까?

대안탑이 있는 절의 이름은 대자은사(大慈恩寺)이다..

어머니의 은혜를 기린다는 말이다..

어느 어머니??

당고종이 황태자시절 어머니 문덕황후 즉 당태종의 황후를 기리기 위해 지은 절이다..

 

 

그런데, 이 경내에 현장법사가 인도에 가서 가져온 불경을 보관하기 위하여 대안탑을 지었다..

처음에는 5층 이었으나 측천무후가  10층으로 중수하였는데, 일부 소실되고 7층만 남게되엇다..


대안탑..기러기 안(雁)자를 쓴다..왜??

현장법사가 서역을 통해 인도로 구법순레를 가던 중 길을 잃었는데 기러기가 나타나 길을 안내하였다는 설화에서 따왓단다..


 

 

 

 

용조괴..

용의 발톱을 닮앗다는 회화나무..


 

 

 

 

대안탑 만으로 입장료를 받는 것이 미안한지 금속판과 목판에 현장법사의 구법순례행을 부조로 새겨 전시한다..

가이드 말로는, 몇백년 뒤에는 이것도 유물이 될거라는 생각으로 만들었단다..


 

 

현장은 627년경 서역 실크로드를 거쳐 4년만에 인도에 도착하여 나란다 사원에서 5년간 시라바드라에게 불법을 배우는 등 17년을 머물다가,

645년 수많은 경전을 가지고 다시 당나라 장안으로 돌아왓다..

 17년간 130여국의 여행경험을 "대당서역기 12권"으로 저술했다

이 여행기에 영감을 받아 저작된  소설이 서유기이고, 이 소설 속의 삼장법사는 현장을 모델로 한 것이다..

오공, 오정 등도 그 당시 수행했던 고창국출신 4명의 제자를 모델로 한 것인데, 순례 중 제자 2명은 죽고 2명만 고창국까지 수행햇단다.


 

 

 

 

현장법사가 장안으로 돌아온 직후  당태종은 고구려 원정을 갓다가 안시성에서 참패를 하고 돌아온다..

현장이 경,율, 논 삼장법사로 불리며 역경사업에 몰두하고 잇을 때

중국 남부에서는 새로운 불교인 선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있었는데, 대표적 인물이 오조 홍인대사이다...

 


현장 법사의 제자로는 규기 스님과 신라사람 원측 스님이 유명하다..

현장법사는 번역사업의 후계자로 규기 스님을 스카웃하고, 그를 가르쳐 역경사업을 이끌어간다..

그가 유식론 번역을 완성하여 규기스님에게만 강의할 때 원측스님이 소문을 듣고 몰래 도강한뒤 돌아와 종을 쳐서 대중을 모으고,

자신이 직접 강론을 하였다는 일화가 송 고승전에 나온다..


 

 

 

기러기의 도움으로 길을 찾는 현장법사..


 

 

현장법사는 664년 63세로 열반한다.. 

현재 불자들이 독송하는 반야심경은 현장법사가 번역한 것이다..


 

 

현장법사와의 조우로 시안에서의 첫날  일정을 장식한다..

 

 

이어서 친구의 시안 공장을 방문한다..

 

 

자동화 시스템으로 직원 30여명이 매출 몇백억을 올린다..

 

 

 

우리 나라 예산 400조인데, 삼성의 매출이 250조 된다니 대단한 규모라 아니할 수없다..

그중 100조가 반도체의 매출인데, 그 중 40조가 수익이라니 황금알을 낳는 산업이다..

 

삼성의 시안 공단..

황사 심한 이곳에 삼성이 전자단지를 건설하는 것은 모험이었다..

시진핑의 고향인 섬서성에 투자함으로써 시진핑의 호감을 사고, 아울러 세계 유일의 반도체 제품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생산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리고 있다..

더구나 낸드플래시 메모리를 개발한 사람은 서울대 출신이 아니라 충남대 출신이라는 사실..

향후 2차로 10조 규모의 2차 단지를 계획하고 있는데, 친구의 회사도 일부 부지를 확보할 예정이란다..

 

 

 

 

저녁식사는 견남산이라는 식당에 갔다..

입구에 도연명의 시.."음주'가 걸려있다..

 

結廬在人境(결려재인경): 초가집지어 마을에 살고 있어도
而無車馬喧(이무거마훤): 수레소리 조차 들리지 않는구나.
問君何能爾(문군하능이): 그대에게 묻노니 “어찌 그럴 수 있는가?”
心遠地自偏(심원지자편): 마음이 속세에서 멀어지면 저절로 그럴밖에.
采菊東籬下(채국동리하): 동쪽 울타리 아래 국화 꺾어 들고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 유연히 남산을 바라본다
山氣日夕佳(산기일석가): 산기운이 아름다운 저녁
飛鳥相與還(비조상여환): 새는 날아 서로 어우러져 돌아오네
此中有眞意(차중유진의): 이 가운데 참다운 진리가 있으니
欲辯已忘言(욕변이망언): 말하고자 하다가 문득 할 말을 잊었네.

 

 

 

말을 잊게한다는 이 식당에서 서봉주로 인해 말이 많아졌다..

서봉주..

중국 4대 명주로 섬서성에서 생산된다..

그 중 화산논검 서봉주는 술병안에 화산이 들어있다..

45도의 빠이주를 작은 잔에 부어 홀짝 거리니 취기가 양양하고 말은 줄줄 새어 흐른다..

 

 

 

화산논검??

김용의 소설 '영웅문'에서 무림고수 다섯명이 이곳 화산에서 무림비급 '구음진경'을 놓고  겨룬다..

전진교 '왕중양', 동사 황약사, 서독 구양봉, 부개 홍칠공, 남제 단황야 5명이 겨뤄

이중 전진교 '왕중양'이 천하제일로 인정 받는다..

모레 화산에 오를 때 검을 사든지, 요 서봉주를 사든지 해야겠다..

 

 

음식 접시에도 시가 써있네..

 

月黑雁飛高  월흑안비고
單于夜遁逃  선우야둔도
欲將輕騎逐  욕장경기축
大雪滿弓刀  대설만궁도


달빛은 깜깜한데 기러기는 높이 날고

흉노 선우는 밤을 틈타 도망을 가네

날쌘 기병 거느리고 쫒으려하나

대설이 활과 칼에 가득내렸네

 

당나라 노륜의 ​새하곡(塞下曲)이다..

 

식당도 수준이 잇구나..ㅎ

 

 

비맞으며 가서 뭐하는 걸까요..ㅎ

 

 

 

새벽 3시 반에 나와서 밤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20대에 이렇게 살았으면 소년등과햇겠다..ㅎ

 

 

 

 

테아나우 숙소에서 출발하여 밀포드 트레킹과 밀포드 사운드 크루즈를 마쳤다..(언제?? 이미 연재하였으니 1편- 4편까지 보시라)

밀포드 사운드에서 렌터카가 주차된 테아나우 다운스로 간다..


 

 

 

테아나우에서 이곳에 이르는 외길..구절양장 말티고개다..

왜 이곳으로 오는 길을 찾지 못해 배로 들어왓는지 알게 해준다..

호머터널을 지난다..그 위가 키 써밋에서 본 마리안 호수 뒷쪽 산들이다..(아님 말구??) ㅎ

 

 

 

 

다운스에서 차를 찾아 다시 테아나우 숙소에 도착..

뉴질랜드산 고기를 구워 화이트와인을 마시고 기분이 나 레드와인 개봉하여 밀포드 트레킹의 완주를 자축한다..

일행에게 물었다..

밀포드 트레킹 중에 제일 기억나는 장면이 무엇인지..

다수가 500미터 높이에서 떨어지는 서덜랜드 폭포를 꼽았다..


 

다음날 일정이 빡빡하다..

새벽5시부터 설쳐 6시에 출발...크라이스처치로 간다..

내가 떠날 비행기 밤 9시 출발..

여기서 운전시간만 8시간은 잡아야 될둣한데..

중간에 마운틴 쿡 빙하를 구경하기로 하였으니 가능할지 모르겠다..


 

 

일단 출발..새벽 달도 이곳에선 푸른 색이 감돌며 선명하다..

공해가 없는 곳이라 그렇겟지?


 

 

 

퀸즈타운에 들려 파인우드 롯지에 맡겨 놓은 일부 짐를 찾고..보관금 20딸러를 환불 받고..


 

 

달리다보면 풍경이 건조시대로 바뀐다..

이유는 서쪽 호주쪽 태즈마니아해에서 불어 오는 공기가 서쪽의 고산지대인 서던알프스 산맥에 비와 눈이 다 내리고 이곳오면 뜨거운 바람만 남기 때문이다..


 

 

 

이렇게 평화스럽게 사육된 소고기를 먹어야 건강에도 좋다..

뉴질랜드 소고기 잘 먹고 간다..


  

 

차가 마운틴 쿡을 향해 가는 길에 푸른 호수가 나타난다..

푸카키 호수...


 

마운틴 쿡..뉴질랜드 최고봉 3754m를 보러 가는 길에 비가 날리기 시작한다..


 

 

원래는 빙하위를 걸어 볼려고 했으나 비가 내리는 바람에 가장 차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다는 태즈만 빙하를 보러 갔다..

주차장에서 15분 거리..


 

 

 

 

비 맞으며 올라간 그 곳에 푸른 호수는 모양을 잃었고..

태즈만 빙하는 물로 변한 호수엿다..


 

 

원래 기대한 마운틴 쿡의 이러한 위용은 보지도 못하고 돌아섰다..

 

 

 

 

 

소나기의 유래..

소의 잔등을 경계로 비가 내리고 안내렸다는 말처럼..

푸카키 호수가 시작되는 곳이 비구름의 경계였다..


 

 

 

 

푸카키 호수의 푸름에 빠져 가다 서다를 반복하며 끊없는 블루를 즐겼다..


 

 

 

 

 

 

 

 

 

차를 돌려 들린 곳은 테카포 호수 부근의 선한 목자의 교회..


 

이 작은 교회에 사람이 몰리는 이유는 크라이스트 처치에서 퀸즈타운으로 가는 도중에 있기때문이다..

 

 

 

초석에 신의 영광과 메켄지 군의 초기 정착자들의 개척정신을 기리기 위해 세웟다고 써있다..


 

푸른 호수를 배경으로 서잇는 작은 십자가를 바라보며 교회안에 한동안 앉아있었다..


 

 

태초에 빛이 잇어 별이 생겨나고 물이 생겨 비구름이 오가기를 수십억겁..

푸른 호수가 생기고 생명이 생겨나 구름처럼 문명을 이루었나니..

생각하라..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고..

 

 

 

 

그렇게 3시간 전에 크라이스트처치 공항에 도착..

중국 광저우로 가는 대붕을 탔다..

남두육성과 남십자성이 빛나는 남반구에서 북두칠성이 빛나는 북반구를 훌쩍 날았다..

광저우에서 중원천하를 굽어보며 청구의 금수강산으로 돌아왔다..

언제나 돌아오면서 느끼는 것은 내땅, 내 나라가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終)


 

 

 

 

테아우로 숙소로 돌아와 프레쉬 초이스 마트에 가서 뉴질랜드 고기, 피노누아 레드와인 등을 샀다..

쌀도 파는데, 스시용 쌀을 사면 우리 쌀과 같은 밥을 먹을 수 있다..

속성 스테이크를 만들어 레드와인으로 즐겁게 루트번 트레킹 완주를 자축햇다..

 

 

 

다음날 늦으감치 깨서 하루 쉬기로 했다..

내일의 밀포드 트레킹을 위한 체력 비축...

하지만, 낮잠까지 자고나니 오후에는 몸이 근질거려 테아나우 산책에 나섰다..

 

 

 

 

 

이곳 사람들..아니 유럽 사람사는 곳은 정원과 화단, 꽃을 잘 가꾸는 것 같다..

그것이 이웃에 대한 배려, 봉사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집마다 개성있는 장식들을 달고, 태양열전지판을 단 저 집도 인상적이다..

멋있고 실용적인,,

 

 

 

 

테아나우 호수 가에 캠핑차가 서있다..

만일 내가 일정을 축소하지 않았다면 저런 풍경 속에 있었을 것인데..ㅎ

 

 

저멀리 밀포드의 산지가 보인다..

 

 

 

 

참 평화로운 곳이다..

뉴질랜드는 우리 한반도 보다 1.2배정도 큰데, 인구는 500만이 사니 인구 몇천의 소도시가 즐비하고,,

이렇게 정적인 정경이 흐르는데, 우리 나라 사람은 6개월 살면 지겨워 탈출하지 않을까?

 

 

호수가에 앉아 빵부스러기를 주엇더니 요트장 오리들이 다 모였다..

날개짓까지 하며 달려오는 모습이 한 두번 경험이 아니다..

 

 

 

 

이곳은 별장이 많은 것 같다..

부자는 당연히 요트를 갖추고..

 

 

 

호수에 발을 담근 나무를 한참 바라보앗다..

테아나우..소용돌이 치는 물의 동굴..이란 뜻의 동네..그 것도 물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

생명이란 이렇게 질기고 고귀한 것이다..

 

 

 

이 선착장은 당일치기가 가능한 케플러 트레일로 도선해주는 곳이다..

우리 리더가 오늘 일정으로 이곳 걷기를 비춘 적이 잇는데, 아무도 호응하지 않아 흐지 부지..ㅎ

 

 

 

 

휘귀조류 타카헤가 중심지에 상징처럼 서있다..

뉴질랜드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많다..

천적이 없는 평화로운 시대에 날개는 퇴화 하였다..

격랑의 시대, 경쟁이 치열한 시대를 사는 우리들..때로는 장점으로 바뀔수도 있다는 계시가 아니겠는가?

 

 

 

 

셋째날 맥켄지 헛의 아침은 비가 개고 날씨가 좋다..

 

 

일단 짐을 꾸려놓고 1시간 거리의 스플릿 바위(갈라진 바위)를 보러 간다..

 

 

 

 

하얀 이끼가 물위에 신비롭다..

 

 

 

 

절묘하게 갈라진 바위..

김유신장군의 단석산 설화와 같은 스토리라도 있는 것일까?

없음 만들어 주고 올까?

 

 

 

 

이제 숙소를 떠나 하우드 헛을 향해 떠난다..

뒤를 돌아보니 멕켄지 헛이 숲속에 아득하게 보인다..

 

 

 

약간의 고도를 높인다..무슨 풍광이 펼쳐질까?

오!! 설산들이 즐비하다..

 

 

 

 

산전..수전을 겪고 오늘은 공중전을 하는 느낌..

하늘과 맞닿은 백두를 바라보노라니 동지애가 느껴진다고나 할까?

 

 

 

뒤를 보면 써니 크리크가 흐르고 앞을 보면 얼랜드 폭포가 쏫아지니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라..

 

 

 


하늘 아래 땅이 있고

땅 위에 내가 있으니

그 사이에 산과 강이 생겨났더라.. 


 

 

길이 발목을 잡는다..

아니 눈이 자연에 사로잡혔다..

 

 

 

 

174미터에서 쏟아지는 얼랜드 폭포는 시원하다..

우비 입고 폭포에 접근한다..

 

 

 

대단한 기세...입이 쩍..

 

 

우비 입기 싫은 일행은 아래로 우회하여 폭포를 통과..

 

 

 

 

 

자연이 제공하는 충분한 수분공급에 대지는 피부와는 달리 파란 이끼로 보답한다..



 


 

오전 중에 하우든 호수 옆 하우든 헛에 도착..

슬며시 무단으로 들어가 라면을 끓여 먹는다..ㅎ


 

오두막안에 그림..

바람..구름..비..그리고 해..루트번의 길에서 만나는 것은 이뿐..

이것이 천지조화 속이고 우주의 만법이라..

우리 인생은 우주의 만법과 함께한다..

그런고로 루트번은 인생이다..

 

 

원기 보충하여 종점을 향해 치닫는데...

키 써밋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에 배낭을 벗어놓고 왕복 2시간 거리의 샛길 탐사에 나선다..


 

 

분위기 만점..설산을 보며 오르는 기분..최고다..


 

 

 

 

 

 

산의 기운을 받아야 큰 인물이 된단다..

명산대처를 찾아 다니는 것도 보탬이 될터이다..

이제 더 크지는 않겠지만, 마음이라도 툭 터질터이다..


 

 

 

크리스티나 산과 크로스컷 산 사이에 마리안 빙하호가 자리잡고 있는 풍광..


 

 

 

마리안 호수로 가는 트레일도 잇다는데..이때는 생각도 못햇다..

실제 가보면 이런 모습을 볼 수 있단다..

 

 

 

 

키 써밋에 한반도 지형이 있다..ㅋㅋ



 

 

 

 

 

천진한 눈과 태고의 눈이 만나는 순간..


 

 

 

 

 

아쉬운 발걸음을 돌려 지그재그로 내려간다..

 

 

 

종점 더 디바이드로 가는 도중에 만난 새..

 

 

 

더 디바이드로 내려왔다..

분수령이라는 의미의 이곳..

그런데, 문제는 차를 렌터해서 오기로 한 일행이 오지 않은 것..

이곳은 카톡도 되지 않는 곳..연락을 취할 방도도 없다..

둘씩 갈라져 히치하이킹하기로..

우리는 멕시코계 호주인 차에 편승하였는데..

그 여자가 한국 친구에게 아리랑을 배웠다고 하길래..4종의 아리랑을 불러주며 테아나우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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