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프의 그립처럼 붓에서는 집필이 중요한데..
부드러운 면서도 강고한 저 집필을 흉내 내려하여도 되지 않는다..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천천히 홀로 자유롭게.. (0) | 2011.09.01 |
---|---|
소동파가 쓴 이백의 촉도난 (0) | 2011.09.01 |
우아함에 관하여.. (0) | 2011.09.01 |
악비가 쓴 출사표 (0) | 2011.08.31 |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0) | 2011.08.30 |
골프의 그립처럼 붓에서는 집필이 중요한데..
부드러운 면서도 강고한 저 집필을 흉내 내려하여도 되지 않는다..
천천히 홀로 자유롭게.. (0) | 2011.09.01 |
---|---|
소동파가 쓴 이백의 촉도난 (0) | 2011.09.01 |
우아함에 관하여.. (0) | 2011.09.01 |
악비가 쓴 출사표 (0) | 2011.08.31 |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0) | 2011.08.30 |
모든 좋은 것은 우아함에서 오고
우아함은 예술의 경지에 이른 숙련에서 오고,
예술의 경지에 이른 숙련은 쉽게 얻어지지 않는다.
-노먼 매클린-
소동파가 쓴 이백의 촉도난 (0) | 2011.09.01 |
---|---|
집필 (0) | 2011.09.01 |
악비가 쓴 출사표 (0) | 2011.08.31 |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0) | 2011.08.30 |
붓 끝에서.. (0) | 2011.08.30 |
제갈량..유비의 삼고초려의 지우를 입고 유비사후 천하 삼분의 약소국 촉을 이끌던 충신의 대명사
국궁진력하다 지친 몸을 오장원의 전선에서 눕힌다..
악비..금나라에 수도가 함락되는 정강의 변을 당하여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 중원을 회복하기위하여 전선을 전전하던 장수..
남송의 이순신 격..한 때 금군을 대파하여 중원회복을 눈앞에 두었으나 화친파 진회의 농간에 빠져 옥사하는 비운의 충신..
그 악비가 금군을 대파하고 중원에 진출하여 남양을 지날때 무후사에 들렀다가
제갈량의 출사표를 쓰다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글이다..
청나라 이전엔 중국 화하족의 영웅으로 존경 받아 악비가 진회를 발로 밟은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청나라 이후 다민족 국가를 표방하는 현 중국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단다..
***
이참에 제갈량의 명문 출사표를 읽어 보자..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선제창업미반,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피폐, 차성위급존망지추야
선제께서 왕업을 시작하신 지 아직 반도 미치지 못한채 중도에서 돌아가시고, 이제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는데 익주는 피폐해 있으니, 진실로 흥하느냐 망하느냐 위급한 때입니다.
그러나 모시는 신하들이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지사들이 밖에서 자기 몸을 잊고서 애쓰는 것은, 대개 선제의 두터웠던 대우를 추모하여 이를 폐하에게 갚고자 함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성스러운 폐하의 귀를 넓게 열어, 선제가 남긴 덕을 빛나게 함으로써 지사의 의기를 넓히고, 스스로 덕이 없다고 여겨 의기를 잃고 충간의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중략)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함은 전한이 흥하고 융성한 까닭이요, 소인을 친근히 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함은 이것이 후한이 기울어지고 쇠한 까닭입니다.
(중략)
신이 본디 미천한 백성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갈며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제후에게 알려져서 출세할 것을 구하지 않았더니,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낮추시어 세 번이나 신을 초옥 안으로 찾으시어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께 힘써 일할 것을 허락하였더니 국운이 기울어짐을 만나 패군의 때에 임무를 받고 명령을 위급한 때에 받은 것이 그 이래로 21년이 됩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조심함을 아시는지라 임종하시매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신이 명을 받은 이래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하신 일에 효과가 없어 선제의 밝으심을 해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에 깊이 들어가 이번에 남쪽을 평정하고 무기와 갑옷이 풍족하니 마땅히 삼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중원을 평정하고 노둔한 힘이나마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버리고 다시 한의 황실을 일으켜 옛 도읍지로 돌아가는 것이 신이 선제께 보답하는 방법이요 폐하게 충성하는 직분인 것이요
손해와 이익을 짐작하고 나아가 충성스러운 말을 다하는 것은 곽유지, 비위, 동윤의 임무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도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는데 실효를 거둘 일을 맡기시어 효과가 없으면 곧 신의 죄를 물어 선제의 영앞에 고하시고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허물을 꾸짖어 그 태만을 밝히시옵소서.
폐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좋은 방도를 자문하시고, 좋은 말을 살펴 받아들여 선제의 남기신 말을 깊이 따르소서.
신이 은혜 받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는지라, 지금 멀리 떠나기에 앞서 표를 올림에 눈물이 앞을 가려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선제창업미반,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피폐, 차성위급존망지추야
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연시위지신, 불해어내, 충지지사, 망신어외자,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개추선제지수우, 욕보지어폐하야. 성의개장성청, 이광선제유덕,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회홍지사지기, 불의망자비박, 인유실의, 이색충간지로야.
....
親賢臣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先帝在時,
찬현신워소인 차선한소이흥륭야, 친소인원현신, 차후한소이경퇴야. 선제재시,
...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신본포의, 궁경남양, 구전성명어난세, 불구문달어제후,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선제불이신비비, 외자왕굴, 삼고신어초려지중, 자신이당세지사.
由是感激, 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유시감격, 허선제이구치. 후치경복, 수임어패군지제, 봉명어위난지간,
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勤愼. 故臨崩, 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이래이십유일년의. 선제지신근신. 고임붕, 기신이대사야. 수명이래,
夙夜憂慮, 恐付託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숙야우려, 공부탁불효, 이상선제지명. 고오월도로, 심입불모.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奬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금남방이정, 병갑이족, 당장솔삼군, 북정중원, 서갈노둔, 양제간흉,
以復興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이부흥한실, 환우구도, 차신소이보선제, 이충폐하지직분야.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褘.允之任也. 願陛下,
지어짐작손익, 진진충언, 칙유지.위.윤지임야. 원폐하,
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탁신이토적흥복지효, 불효칙치신지죄, 이고선제지령.
若無興德之言則責攸之.褘.允等之咎, 以彰其慢. 陛下亦宜自謀,
약무흥덕지언칙책유지.위.윤등지구, 이창기만. 폐하역의자모,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이자추선도, 찰납아언, 심추선제유조. 신불승수은감격, 금당원리,
臨表涕泣, 不知所云.
임표체읍, 부지소운.
집필 (0) | 2011.09.01 |
---|---|
우아함에 관하여.. (0) | 2011.09.01 |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0) | 2011.08.30 |
붓 끝에서.. (0) | 2011.08.30 |
세종대왕의 친필.. (0) | 2011.08.30 |
羲之頓首,快雪時晴,佳想安善。未果,爲結,力不次。王羲之頓首。山陰張侯。
큰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자 왕희지는 친구에게 안부편지를 보낸다.
본문은 공책 정도의 작은 크기 인데. 본문의 20배 정도의 발문이 붙었다..
***
재위 11년째 되던 해(1746년) 봄 2월 어느 날, 건륭제는 뜻하지 않게 동진(東晋)시대의 서예가 왕순(王珣)의 ‘백원첩(伯遠帖)’을 손에 넣게 됐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천재일우로 내가 이 보물을 손에 넣게 되었구나!”
그는 이미 선대에 황실로 들어온 왕희지(王羲之)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中秋帖)’을 백원첩과 합쳐 ‘세 가지 보물(三希)’이라 부르고는, 이들을 한 곳에 모셔두기 위해 자신이 정무를 보는 양심전(養心殿)의 전전에 작은 서재를 꾸몄다. 한 평이 조금 넘는 작은 방에 ‘세 가지 희귀한 보물’을 모셔놓았다 하여 그 이름을 삼희당이라 지었다.
이들은 모두 왕희지 일가의 글씨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산둥(山東)에서 태어났으나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변의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 정착, 수많은 서첩을 남긴 왕희지(303∼361)는 글씨의 나라 중국에서도 ‘서성(書聖)’으로 추앙 받는 인물. 한마디로 글씨의 대가다.
왕희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서법은 전서와 예서 일색이었는데, 강남에 문화다운 문화를 진작시킨 동진시대 왕희지 일족에 의해 행서, 초서, 해서로 다양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됐을 뿐 아니라 그 서법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중국 문인들의 모델이 됐다. 그러므로 그에게 서성이란 칭호를 내렸다 해서 결코 과분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왕희지의 서법에 매료된 건륭제는 만주족이라는 혈통의 한계를 초월하여 중국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색 유리기와가 흰눈에 덮여버린 날, 그는 근엄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소박한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예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예술사랑에 빠진 ‘문화황제’
삼희당, 나아가 양심전에선 첫눈에 봐서 이렇다할 만한 장식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가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안(書案), 탁자, 의자, 장롱 등이 하나같이 자단목 같은 진귀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마루에 깔린 요는 담황색 공단인데, 그 위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바꿨다. 여름에는 갈포나 하포, 겨울에는 수달피와 담비 가죽, 해룡피를 깔았다. 동난각(東暖閣)의 남쪽 창문과 항탁(온돌 위에 놓은 작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두 개의 당대(唐代) 도자기가 놓여 있다. 옥기와 도자기, 서화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도 건륭제가 가장 애지중지한 것은 단연 쾌설시청첩이다. 이것은 왕희지가 대설이 내린 다음 날씨가 화창하게 개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 산음장후(山陰張侯)의 안부가 궁금해 그 심정을 전하고자 쓴 한 장의 서한문이다. 재질은 종이가 아니라 마(麻)이고, 가로 14.8cm, 세로 23cm의 작은 지면에 4행의 행서로 고작 28자만을 적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건륭제는 이를 보고는 ‘신기(神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서화를 평할 때는 ‘능(能)’ ‘묘(妙)’ ‘신(神)’이란 말로 표현했다. ‘신’은 그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찬사였다. 실제로 건륭제는 서첩 옆에다 ‘神’이란 글자를 직접 써넣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천하무쌍 고금선대(天下無雙 古今鮮對)’라는 댓구를 덧붙였으며, 삼희당이란 인(印)을 세 개씩이나 찍었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이 서첩에 매료됐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단지 낭만적인 기분에서 이 서첩을 마주한 것은 아니다. ‘춘전(春前)의 서설(瑞雪)’ ‘입춘, 감설(甘雪)이 내리다’라는 글귀까지 남겨놓은 것을 보면 그는 눈을 어지간히도 기다렸던 모양이다.
출처 : 신동아 테마기행
우아함에 관하여.. (0) | 2011.09.01 |
---|---|
악비가 쓴 출사표 (0) | 2011.08.31 |
붓 끝에서.. (0) | 2011.08.30 |
세종대왕의 친필.. (0) | 2011.08.30 |
추사가 다산에게 (0) | 2011.08.28 |
본에 의지하여 고양이를 그려라!
끊임없이 자꾸 그리다가
두귀가 솟고 무니가 얼룩진 곳과 심식의 길이 끊어진 곳과 나와 경계가 다 없어진 곳에 이르면
붓 끝에서
별안간 산 고양이가 펄쩍 뛰어 나오리니..
(고봉선사 "선요"중)
악비가 쓴 출사표 (0) | 2011.08.31 |
---|---|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0) | 2011.08.30 |
세종대왕의 친필.. (0) | 2011.08.30 |
추사가 다산에게 (0) | 2011.08.28 |
선필 (0) | 2011.08.27 |
세종대왕의 친필로 추정되는 문서가 공개됐다.
국내 서지학계 원로인 천혜봉(千惠鳳)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9일 논문을 통해 공개한 이 문서는 ‘御賜 喜雨亭 孝寧大君 房(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이란 제목의 10쪽짜리.
세종 즉위 7년인 1425년(을사년·乙巳年)에 기우제를 지낸 뒤, 형 효령대군이 있던 서울 한강 근처의 합강정(合江亭)을 방문해 쓴 글일 가능성이 있다.
해서체(楷書體·) 한자로 쓰여 있으며 ‘어진 형 덕분에 가뭄이 끝나고 비가 내려 기쁘다. 합강정의 이름을 희우정으로 바꾸도록 하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문서의 마지막 부분엔 ‘乙巳 夏四月丁丑 國王 弟 도(을사 하사월정축 국왕 제 도)’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도’는 세종의 본명.
이 서체를 살펴본 이경희(서예학) 동방대학원대 교수는 “세종의 글씨를 베낀 모각 글씨와 서체가 비슷해 일단 세종의 친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학계의 정밀 고찰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세종의 친필 문서는 발견된 바 없다.
아래 글씨는 세종의 글씨 복사본이라며 경매싸이트에 올려진 글씨다..
과연 대왕의 글씨일까?
어찌되었건
전에 불탄 숭례문의 글씨가 형인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설이 있고, 아들인 안평대군의 글씨도 유명한 것으로 보아 세종대왕도 필재는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왕희지의 쾌설시청첩 (0) | 2011.08.30 |
---|---|
붓 끝에서.. (0) | 2011.08.30 |
추사가 다산에게 (0) | 2011.08.28 |
선필 (0) | 2011.08.27 |
제사조차 몸소 행하지 못하니.. (0) | 2011.08.26 |
추사가 다산에게
추사가 쓴 글씨의 일부.
다산이 추사와 함께 다산의 제자인 황상(1788~1870)이 머문 산방을 찾아 하룻밤을 지내는데,
황상은 두 사람에게 조로 지은 거친 밥에 아욱국을 끓여 아침으로 내놓는다.
청빈한 생활과 정성에 감동한 다산이
남원노규조절(南園露葵朝折)
동곡황량야용(東谷黃梁夜용)
남쪽 밭 이슬 젖은 아욱 아침에 꺾고
동쪽 골짜기 누른 조를 밤에 찧네’는 시를 짓고
추사가 이 시구 중 露葵와 黃粱에다 社를 붙여 글을 썼다. 이는 ‘고결한 선비의 거처’라는 뜻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다산과 추사의 나이 차이나 유배생활 시기 등에 비추어 두사람이 함께 황상의 집을 방문한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 때문에 훗날 황상의 청빈생활을 전해들은 추사가 이에 감동해서 다산의 제자에게 '노규황량사'를 써 주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 다산과 추사
다산과 추사는 24년의 나이 차이가 나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와추사가 동갑내기여서 아들처럼 여길 연령이다.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시를 배우고 글을 배웠던 제자 초의대사와 추사는 동갑이다..
추사가 다산에게 주역에 관하여 토론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고, 추사가 보낸 고려청자에 심은 수선화를 받은 다산이 쓴 시가 전한다.
<수선화>
신선의 풍채나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仙風道骨水仙花
30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다. 三十年過到我家
복암 이기양이 옛날 사신길에 가지고 왔었는데 茯老曾携使車至
추사가 이제 대동강가 아문에서 옮기었다오. 秋史今移浿水衙
외딴 마을 동떨어진 골짝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서 窮村絶峽少所見
일찍이 없었던 것 얻었기에 다투어 떠들썩하다. 得未曾有爭喧譁
어린 손자는 처음에 억센 부추잎에 비유하더니 穉孫初擬薤勁拔
어린 여종은 도리어 일찍 싹튼 마늘싹이라며 놀란다. 小婢翻驚蒜早芽
흰 꽃과 푸른 잎새 서로 마주 서 있으니 縞衣靑相對立
옥 같은 골격 향그런 살결에서 향내가 절로 풍기는데 玉骨香肌猶自浥
맑은 물 한 사발과 바둑알 두어 개라 淸水一盌碁數枚
티끌조차 섞이지 않았으니 무엇을 마시는지.…… 微塵不雜何所吸
**다산과 황상
그들 사제의 관계는 애뜻하다..
강진에 유배갔던 초기 주막에 임시 거쳐할 때 한양의 유명한 선생님 귀양왔다는 사실을 알고 15살의 황상이 찾아왔다고 한다.
황상이 글을 배운지 7일만에 다산 선생은 한 권의 책을 주었는데...
이 때, 제자 황상은 책을 받기를 꺼리며, 자신은 머리도 좋지 않고, 융통성도 없으며, 잘 배우지도 못한다며 걱정을 했다.
이 말을 들은 다산선생은 편지 한통을 써주었다.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단점)을 너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 기억력이 뛰어난 병통은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고,
둘째 , 글 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은 허황한 데 흐르는 폐단을 낳으며,
셋째 , 이해력이 빠른 병통은 거친 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자는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자는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자는 빛이 난다.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뚫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닦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그렇다면 근면함을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데 있다.
이 가르침을 받은 황상은 말씀을 평생 잊을까 두려워 하며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고 한다.
학자이자 시인으로 성장한 황상..
다산이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가야산 백적동에 은거하며 다산초당(茶山艸堂)과 같은 원림인 일속산방(一粟山房)을 일궈냈다.
다산은 황상을 그리워한 나머지 자신에게 소식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토로할 정도였다.
이미 황상의 나이도 48세에 이르고, 정약용은 74세의 노인이 되어서 황상은 떠나간 스승을 마냥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스승을 뵙고자 찾아 나선다. 스승의 회혼례 축하와 죽기 전에 꼭 한번 뵈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열흘을 걷는 긴 여행을 시작하게 한 것이다.
18년 만의 스승과 제자의 꿈 같은 해후를 만끽하고 황상은 다시 강진으로 귀향한다. 그러나 귀향 중에 스승의 부음을 듣는다. 그는 길을 되돌려 마재로 돌아오고 상을 치른 후 강진으로 돌아간다.
후에 스승의 자제인 정학연 형제와 평생 의지하며 살았다.
붓 끝에서.. (0) | 2011.08.30 |
---|---|
세종대왕의 친필.. (0) | 2011.08.30 |
선필 (0) | 2011.08.27 |
제사조차 몸소 행하지 못하니.. (0) | 2011.08.26 |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0) | 2011.08.26 |
선필이라고 모두 명필은 아니다.
다만 독특한 체취를 띠고 있다.
선승들의 글씨는 법첩이나 교본에서 벗어나 있거나. 기예 측면에서 부족한 면이 있어도
걸림없이 자연스럽게 휘갈긴 멋과 맛과 기운이 살아 있어 볼수록 깊은 맛이 나는 경우가 많다.
근대 불교의 중흥조 경허..
天下覓醫人 灸猪左膊上 (천하멱의인 구저좌박상)
천하의 명의를 찾았더니 돼지 왼쪽 어깨에 뜸을 뜨네.
글씨보다도 시에 더 관심이 간다..
원시는 이렇다..
懷州牛喫草(회주우끽초)
益州馬腹脹(익주마복창)
天下覓醫人(천하멱의인)
灸猪左膊上(구저좌박상)
회주 땅 소가 풀을 뜯어 먹는데
익주 땅 말의 배가 터질듯 불러
천하의 이름 난 의사를 찾았더니
돼지 왼쪽 어깨에 뜸을 떠주더라
당나라 두순선사의 계송..
무슨 뜻인줄 알겠는가?
뱁새가 대붕의 뜻을 다 짐작하려면 가랭이 찢어져 죽는다..ㅎㅎ
위 글씨는 경허의 무애행처럼 행서도 거칠 것이 없구나..
만공의 즉심시불
경허의 제자..허벅지 살이라도 베어 내어 시봉하고 싶다던 제자..
총독부 전국 주지회의에서 일갈의 사자후를 품던 기개는 그 스승에 그제자..
어째 글씨는 백범의 총알체를 연상케한다..
경봉 선사의 글씨
달마도를 그리고 뭐라 썼는데 해득하기 어렵다..
궁리 끝에 알아낸 것은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지허노호지 불허노호회
노호가 깨달음은 인정하지만 알음알이를 내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뱁새가 대붕의 뜻을 알려면 머리가 터진다..
한번 터져 볼까?
노호란 늙은 오랑캐라는 뜻이니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를 이름이다..
이글의 원전은 참선 공안집 무문관 9측이다..
흥양 양 선사에게 한 스님이 물었다.
“대통지승불은 십겁의 오랜 세월을 좌선도량에서 공부하고도 불법이 나타나지 않아 성불을 못했다는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양 선사가 말하였다.
“듣고 보니 그렇구나.”
스님이 말하였다.
“이미 도량에 앉았는데 무엇 때문에 불도를 이루지 못했습니까?”
양 선사가 말하였다.
“그가 성불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 공안 아래 무문이 평창하기를,
只許老胡知, 不許老胡會. 凡夫若知, 卽是聖人. 聖人若會, 卽是凡夫.
노호는 다만 반야의 지혜로 깨달은 것은 인정하지만 알음알이를 내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범부도 깨달으면 곧 성인이라하고 성인도 알음알이를 내면 바로 범부인 것이다.
이어 송(頌)을 붙이되
몸을 가다듬음이 마음 깨침만 하겠는가
마음이 요득하면 몸에 근심 없는 것을
만약 몸과 마음이 더불어 요득하다면
신선이 무엇 하러 고관대작을 찾겠는가?
더 궁금하신가? 그러면 무산본각 저 무문관 강설을 보면 임제선사의 우는 애기 젖주며 달래는 듯한 자세한 설법이 나온다..
성철의 불..
5공시절..명실불상부..언행불일치의 시대..
이주일이 나와서 뭔가를 보여드린다면서 오리걸음을 걷고, 얼굴이 아니고 마음이라 외치며 웃겻지만..
모두 따라 웃을 뿐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표어로 눈을 가리고 마음보다는 돈을 쫓아 다녔던 시절..
산속의 한 선승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고 일갈한다..
너무 당연한 한마디에 사람들은 한 바가지 찬물을 마신양 시원해햇다..
물론 곧 잊고 갈증에 시달렸지만..
그렇게 간결한 그의 법어는 글씨도 간결하다..佛..부처..그 한마디..
세종대왕의 친필.. (0) | 2011.08.30 |
---|---|
추사가 다산에게 (0) | 2011.08.28 |
제사조차 몸소 행하지 못하니.. (0) | 2011.08.26 |
넘치는 것을 경계하여... (0) | 2011.08.26 |
여불비.. (0) | 2011.08.2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