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도가 쓴 오수당.. 낮잠자는 집..

혜곡 최순우가 위 글씨가 좋아 편액을 만들어 성북동 자신의 집에 붙이고..자신을 오수노인이라 칭하고 유유자적 살기로 맘을 먹엇다

낮잠에서 깨어나면 어떤 마음이 었을까?

 

 

매심(梅心)이란다..

매화를 바라보는 마음..매화를 가꾸는 마음..매화같은 마음..어느 마음이던 좋겠지..

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제 향기를 팔지 않는다..는 그 마음..

 

추사가 쓴 매심사의 글씨..혜곡의 성북동 집에 걸었다..

 

 

그리하여 그의 집은 문만 닫아 걸면 바로 깊은 산골이 되는 곳이라 하여..

두문즉시심산(杜門卽是深山)이라 택호를 정하엿다...

 

언제 성북동 혜곡 선생의 집에 들러야겠다..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청산이 내마음을 맑게 한다..  (0) 2011.05.15
적벽부를 쓰다..  (0) 2011.04.05
사발체 - 선교유거  (0) 2011.03.14
열화당(悅話堂)  (0) 2011.03.14
허허체 - 황희정승  (0) 2011.03.13

 

 

선교유거( 仙嶠幽居)..

 

강릉 선교장에는 조선 말기의 서예가 소남 小南 이희수 선생이 쓴 ‘선교유거 仙嶠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신선이 기거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1836년생으로 1909년 별세했다. 향년 73세.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에 살면서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강원도 생활은 강릉에서 시작했으나 그 후 송정, 북평, 삼척으로 옮겨 후학들을 지도했다.
소남(少南)이라는 이희수의 아호는 스승인 눌인 조광진이 붙여준 것으로 서성으로 일컬어지는 진나라 왕희지의 자인 일소(逸少)에서 소(少)를, 당나라의 대표적인 서화가인 우세남(虞世南)에게서 남(南)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남의 필맥은 백하(白下) 윤순(尹淳)으로 시작해 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를 거쳐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을 이어받았으며 여기에 격조 높은 왕희지체와 우세남의 글씨를 섭렵함으로써 사발체(四八體)라는 특유의 독창적인 서법을 개발 구사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하면 사발체란 무엇일까. 이는 다섯 손가락이나 필봉에 전혀 힘을 주지 않고 팔이 어깨에서 탈골된 것처럼 운필을 함으로써 아무런 제약이나 막힌 곳 없이 그야말로 물 흐르듯이 시원스러운 느낌을 주는 필법이라고 한다. 따라서 서예를 모르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언뜻 치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안목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기운생동의 기풍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소남의 작품은 무낙관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는 그의 성격과 무관치 않아 보이는데 남에게 그림이나 글씨를 주는데 인색치는 않았으나 도장 찍기를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림을 받아가며 상대방이 굳이 도장 찍어줄 것을 간청하면 "이 사람아 원래 낙관이라는 것은 그림 그리고 빈자리가 허술해서 찍는거야. 그림에 무슨 도장이 필요해" 하며 물리쳤다고 한다.

 

 

광풍제월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벽부를 쓰다..  (0) 2011.04.05
오수당(午睡堂)..낮잠 즐기는 집..  (0) 2011.04.01
열화당(悅話堂)  (0) 2011.03.14
허허체 - 황희정승  (0) 2011.03.13
광풍체-봉래 양사언과 비자기(飛字記)  (0) 2011.03.13

 

 

 

강릉 선교장(船橋莊)... 대략 120여 칸에 달하는 저택이다.

보통 99칸까지가 민간주택의 한계라고 하지만, 선교장은 99칸을 넘어선 집이다.

손님들이 묵는 행랑채의 길이만 해도 60m가 넘고, 23개의 방이 있었다.


 조선 최고의 저택인 이 집의 큰 사랑채 이름은 열화당(悅話堂)이다.

  ‘기쁘게 이야기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선교장을 건축한 무경 이내번의 손자 오은(1773-1832)이 순조 15년(1815)에 건립하였는데,

건물 이름은 중국 진나라 때의 도연명 시인의 시「귀거래사(歸去來辭)」중에서 따왔다한다.

"....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憂愁)를 쓸어 버리리라.....

(.... 世興我而相遺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하는 구절 가운데 "친척들의 이야기를 즐겨 듣고 (悅親戚之情話)"에서 '悅'자와 '話'자를 따서 '열화당(悅話堂)'이라 이름지었다.

 

수만 석을 하는 부잣집이었던 이 집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기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었다.

 

‘열화(悅話)’야말로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일은다름 아닌 인간들끼리의 이야기에 있었다.

‘열화당’이라는 편액(扁額)에는 이러한 삶의 철학이 들어있다..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수당(午睡堂)..낮잠 즐기는 집..  (0) 2011.04.01
사발체 - 선교유거  (0) 2011.03.14
허허체 - 황희정승  (0) 2011.03.13
광풍체-봉래 양사언과 비자기(飛字記)  (0) 2011.03.13
망모당  (0) 2011.03.10

 

 

황희정승의 글씨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정승의 호는 방촌(尨村)..삽살개 사는 동네라는 정도아닐까..

위 글씨의 내용은 이렇다..

 

靑山臨黃河(청산임황하)   푸른 산이 황하에 임하여

下有長安道(하유장안도)   산 아래로 장안 가는 길이 있네

世上名利人(세상명리인)   세상에서 명리만 쫓는 사람들은

相逢不知老(상봉부지노)   서로 만나도 어른 알아볼줄 모를텐데..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의 유순을 보내며<送柳淳>를 초서체로 쓴 것이다..

 

무엇이든지 국정에 관한 공사가 아니라면 '허허'하고 웃어넘겨 '허허정승'이라고도 불린 그였다.
서로 싸우는 하인들에게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고 심지어 타박하는 부인의 말도 맞다고 한 그..

그런 성품이기에 그의 글씨도 허허로운듯 자유스러우면서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는 절제가 배어있는 듯..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발체 - 선교유거  (0) 2011.03.14
열화당(悅話堂)  (0) 2011.03.14
광풍체-봉래 양사언과 비자기(飛字記)  (0) 2011.03.13
망모당  (0) 2011.03.10
따지고 비교하기  (0) 2011.03.03

 

 

                                                    양사언의 화락문조성(花落聞鳥聲)  

 

봉래 양사언

 

1517(중종 12)~1584(선조 17).
조선 전기의 문인·서예가.


***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시조의 주인공

 

그는 강원도 고성군 구선봉(九仙峰)아래 감호(鑑湖) 부근에 정자를 지엇다. 정자 이름을 ‘하늘에서 날아온 정자’란 뜻의 비래정(飛來亭)이라 지었다.
고래의 수염으로 큰 붓을 만들어 정자 편액 글씨를 쓰는데,  혼신의 힘을 다해 활달하면서도 기운찬 필치로 날 비(飛) 자를 먼저 큼직하게 써 놓았다. 그러고 나서 보니 글자의 한 획 한 획에 금방이라도 하늘로 날아오를 듯이 꿈틀거리는 용의 기상이 완연하였다.  ‘비’ 자에 이어 ‘래(來)’ 자와 ‘정(亭)’ 자를 내리썼으나 그 글자들은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할 수없이 비자로만 족자를 만들어 정자에 걸었다..
1584년 어느날 바람이 갑자기 불어 닥쳤다. 서재의 문을 벌컥 열어젖힌 바람은 방안에 두었던 책이며 병풍이며 족자들을 사정없이 휩쓸고 나가 공중으로 흩날려 버렸다. 

 집을 지키던 사람은 황급히 땅에 떨어진 물건들을 다 주어 모았다. 그런데 다른 것은 잃은 것이 없었으나 ‘날 비’ 자를 쓴 족자만 보이지 않았다. 그 사람이 살펴보니 그 족자가 공중으로 날아올라 바다를 향해 날아가메 이를 뒤쫓았으나 종적이 묘연하였다.

그뒤 가깝게 지내던 벗이 족자가 없어진 날짜와 시간을 따져보니 그가 귀양살이 하다 세상을 떠난 때와 정확히 일치하였다

(유근, 飛字記) 

 

***양사언의 일생

 

자는 응빙(應聘), 호는 봉래(蓬萊). 돈녕주부 희수(希洙)의 아들이다.

1546년(명종 1)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556년을 전후로 대동현감을 지냈으며 그 이후 삼등·함흥·평창·회양 등지를 다니며 역임했다.

 회양에 나간 것은 금강산을 따라 스스로 택한 것으로 이때 금강산에 관한 시를 많이 남겼다. 만폭동 입구에 "봉래풍악 원화동천"(逢萊楓岳元化洞天)이라는 8자를 새기기도 했다.

1564년에 고성군의 구선봉 밑 감호(鑑湖)가에 정자 비래정(飛來亭)을 짓고 풍류를 벗삼으며 은거했다.

1582년(선조 15) 다시 안변군수로 나갔으나 다음해 번호(蕃胡) 변란을 당해 수사(守士)의 책임을 지고 해서에 귀양가서 1584년 68세로 죽었다.

그는 문명을 날리면서 허균·이달 등과 교유했다. 허균은 〈성수시화 性叟詩話〉에서 금강산에 관한 그의 시를 유선지흥(游仙之興)에 젖어 있다고 평했다.

점복(占卜)에 능하여 임진왜란을 예고했다고 하는데 양사언에 관한 도술적 설화가 지금까지 전한다.

조선 전기 4대가로 일컬어질 만큼 서예를 잘해 초서와 해서에 능했다.

자신의 〈미인별곡〉과 허강의 〈서호별곡〉 및 한시 등을 쓴 〈봉래유묵 逢萊遺墨〉이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가사로 〈미인별곡〉이 있으며 문집으로 〈봉래집〉이 전한다.

 

***양사언의 출생인연


 양사언의 본관은 청주, 자는 응빙이고 주부를 지낸 희수의 후처의 아들이었다. 그는 법적으로 서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서자로 알게 된 데에는 각별한 사연이 있다. 

  양사언의 아버지 양희수는 천성이 산수 유람을 좋아하였다. 한번은 백두산까지 올라 두루 구경하고 돌아오는 길에 안변을 지날 때 낮잠에 말죽을 먹이고자 주막에 다다랐으나 집집마다 문을 잠그고 비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시냇가에 한 어염집이 보여 거기를 찾아가게 됐다.
 이때 마침 집주인은 들일(혹은 계회)나가고 열여섯 살 소녀가 혼자 집을 보고 있었는데 점심 시중을 들고, 말죽 한 통을 먹이는 것이 아주 곱고 영리해 보였다. 양희수는 떠나면서 이 아리땁고 친절한 소녀에게 사례를 하려 했으나 굳이 사양하며 접빈객은 사람의 도리일 뿐이라고 했다. 이에 양희수는 더욱 소녀를 기특하게 생각하고 감사의 뜻을 남기고 싶어 손부채에 달려 있던 향합을 풀어주니 이를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았다. 
 그 후 몇 해 뒤 소녀는 그 향합을 들고 양희수를 찾아와 "여자의 행실로 사람의 신물을 받고 어찌 다른 데로 시집가리오"라며 한사코 말리는데도 기어이 양희수의 집에 들어와 살았다. 양희수는 처음엔 소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는데 소녀는 정성으로 집안 살림에 힘썼다. 마침 양희수는 상처하였던지라 소녀를 맞아들여 본ㅊ가 쓰던 방에 들게 하고 가정 살림을 맡겼다. 그리고 그들 사이에 아들이 생겼는데 그가 곧 양사언이다. 조선 사회에서 후처는 첩과 달라 정실과 똑같으니 양사언은 서자가 아닌 것이다. 

출처: 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 하,유홍준 p.205-p.206

 

***

 

유명한 그의 초서는 뱀과 용을 풀어 풀어놓은 듯하다는 평을 들었다..광풍이 몰아치는 듯..하여 광풍체라 명명한다..

 

**양사언의 시

 

山岳爲肴核(산악위효핵)  높고 낮은 산을 안주로 삼고, 
滄溟作酒池(창명작주지)  푸른 바다물로 술 못만들어
狂歌凋萬古(광가조만고)  미친 노래 불러 옛일을 슬퍼하니  
不醉願無歸(불취원무귀)  취하지 않으면 아니 돌아가리라.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열화당(悅話堂)  (0) 2011.03.14
허허체 - 황희정승  (0) 2011.03.13
망모당  (0) 2011.03.10
따지고 비교하기  (0) 2011.03.03
소암 - 차중유진의(此中有眞意)  (0) 2011.03.03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06년, 당시 주지번은 중국 황제의 황태손이 탄생한 경사를 알리기 위해 조선에 온 공식외교 사절단의 최고책임자인 정사(正使)의 신분이었다. 주지번 일행이 조선에 도착하기 전에 한양에서는 임금과 대신들이 함께 모인 어전회의에서 그 접대 방법을 놓고 고심할 정도였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는 그가 서울에 오니 국왕인 선조가 교외까지 직접 나가 맞이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지번은 조선으로서는 매우 비중있는 고위급 인사였던 것이다.


그러한 주지번이 교통도 매우 불편했을 당시에 한양에서 전라도 시골까지 직접 내려온 것은 오로지 표옹의 은혜에 보답하기 위한 사적인 이유에서였다. 주지번은 장암리에 살던 표옹을 일생의 은인이자 스승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추측컨대 그는 공식 업무가 끝나자마자 부랴부랴 짐을 챙겨 표옹의 거처를 방문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표옹과 주지번 사이의 아름다운 사연은 ‘표옹문집’에 기록돼 있는데, 정리하면 이렇다.


표옹은 임진왜란이 발생한 다음해인 1593년에 송강 정철의 서장관(書狀官) 자격으로 북경에 갔다. 그의 나이 38세였다. 그때 조선의 사신들이 머무르던 숙소의 부엌에서 장작으로 불을 지피던 청년이 하나 있었다. 그런데 이 청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면서 무언가 입으로 중얼중얼 읊조리고 있었다. 표옹이 그 읊조리는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니 장자의 남화경(南華經)에 나오는 내용이 아닌가. 장작으로 불이나 때는 불목하니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여관 뽀이’인데, 그 주제에 남화경을 외우는 게 하도 신통해서 표옹은 그 청년을 불러 자초지종을 물어보았다.


“너는 누구이기에 이렇게 천한 일을 하면서 어려운 남화경을 다 암송할 수 있느냐?”


“저는 남월(南越)지방 출신입니다. 과거를 보기 위해 몇 년 전에 북경에 올라왔는데 여러 차례 시험에 낙방하다보니 가져온 노잣돈이 다 떨어져서 호구지책으로 이렇게 고용인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너, 그러면 그동안 과거시험 답안지를 어떻게 작성하였는가 종이에 써 보아라.”


표옹은 이 청년을 불쌍하게 여겨 시험 답안지 작성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청년이 문장에 대한 이치는 깨쳤으나 전체적인 격식에는 미흡한 점이 있었으므로, 조선의 과거시험에서 통용되는 모범답안 작성 요령을 알려준 것이다. 그러고 나서 표옹은 자신이 지니고 있던 중요한 서적 수편을 필사하여 주고, 거기에다가 상당한 액수의 돈까지 손에 쥐어주었다. 시간을 아껴 공부에 전념하라는 뜻에서였다. 그 후에 이 청년은 과거에 합격하였다.


바로 이 청년이 주지번이었다.

 

그는 을미년(乙未, 1595)에 과거에 장원급제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표옹을 만난 지 2년 후에 수석합격한 셈이다. 당시 중국사람들은 학사문장가로 초굉, 황휘, 주지번 세 사람을 꼽았는데, 그 중에서도 주지번이 가장 유명하였다고 한다.

 

송씨 집안의 구전에 의하면 주지번이 한양에 도착해서 전라도 왕궁에 사는 송영구라는 사람의 행방을 물었다고 한다. 이때 주변에서는 “죽었다”고 답변하였다 한다. 그러나 주지번이 좀더 수소문한 끝에 표옹이 살아 있음을 확인하였다. 그래서 왜 거짓말을 했느냐고 추궁하니까 “대국인 명나라 사신이 한양에서 시골까지 찾아가면 접대 준비 때문에 가는 곳마다 민폐가 심하니 부득이 죽었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는 대답이었다. 그러자 주지번 왈 “그러면 말 한 필과 하인 1명만 준비해 줘라. 다른 준비는 필요없다.” 이렇게 해서 전주객사를 거쳐 장암에 도착한 것이다.


주지번은 조선에 올 때 희귀한 책을 선물로 가지고 왔다고 한다. 물론 일생일대의 은인이자 스승인 표옹에게 드릴 선물이었다. 그 책 분량이 80권 정도였다고 하는데 그 책들은 나중에 규장각에 보관되었다.


주지번이 왕궁면의 장암에 위치한 표옹의 집을 방문해서 남긴 흔적은 현재 두 가지가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망모당(望慕堂)이라는 편액이고, 다른 하나는 표옹의 신후지지(身後之地, 묘자리)를 택지해준 것이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자기를 도와준 은인의 양택에는 망모당이라는 글자를, 은인의 편안한 사후를 위해서는 음택 자리를 잡아줌으로써 은혜에 보답한 셈이다.    

 


    편액의 좌측 밑에 ‘주지번서(朱之蕃書)’라고 선명하게 양각돼 있는 ‘망모당’은 글자 그대로 ‘멀리서 추모한다’는 뜻이다. 표옹의 집에서 바라다보면 전방 10리 거리에 표옹 부모의 묘소가 보이는데, 표옹은 부모를 기리기 위해 망모당이라는 글귀를 주지번에게 부탁한 것이다

 

(출처 : 조용헌 저, 명문가이야기)

 

***

 

고금동서, 사람의 인연과 의리를 생각한다..

요즘 흔한 말로 하면 "있을 때 잘해!"

베품의 미학을 느낀다..

스승이 배우기를 싫어하는 제자들에게 글씨를 써오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서법을 모른다고 했다,

 

"서법에는 관계하지 말고 붓가는대로 써 오너라."

 

제자들은 고개를 갸웃 거리며 글씨를 써왔다. 글씨를 본 스승이 말했다.

 

"서법으로는 전연 맞지 않지만, 그러나 이 가운데는 순일한 맛이 있다.

세상에 시,서를 배우는 자가 무위지경에 들지 못하는 것은 따지고 비교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의 제자들이 서법이라는 서자도 모르고 시란 시자도 모르면서 오히려 그 글과 시에 순전한 기가 있는 것은 마음가짐에 전혀 꾸밈이 없기 때문이다.

러므로 시를 배우는 자,  이런 이치를 알지 못하면 시를 말할 수 없다. 서를 배우는 자, 이 이치를 알지 못하면 서를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비단 시서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道도 이와 같다."

도연명의 시에서 따온‘차중유진의(此中有眞意)’를 쓴 소암의 작품. ‘이 가운데 참뜻이 있다’는 뜻이다. 예술의전당 제공


 

  • [리뷰]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췄다”
  • 현중화 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전
  • 김양동·계명대교수(서예·전각)
    입력 : 2007.06.19 00:28 / 수정 : 2007.06.19 00:28
    • 필가묵무(筆歌墨舞), 붓이 노래하고 먹이 춤추는 경지. 소암 현중화(1907-1997)선생 탄생 100주년 기념 특별전(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18일 폐막) 감상하고 느낀 한마디 소감이다.

      제주도 서귀포에는 일본에서 귀국하여 붓 한자루로 고결한 생애를 마친 묵선(墨仙) 한 분이 계셨다. 길고 긴 흰 수염, 펄럭이는 두루마기 차림의 훤칠한 키, 그 모습에서 이미 탈속의 풍자를 느끼게 했던 분이 바로 소암 선생이다. 선생은 약관에 도일하여 와세다대학 정경학과 전문부를 마친 엘리트 서예가였다. 재일 한국 유학생들의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소암은 일경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한 피신의 수단으로 일본의 서도대가 마츠모토 호우수이(松本芳翠)의 문하생이 된다. 이것이 결국 그의 예술적 자질을 자극한 계기가 되어 그는 글씨에 대한 흥미 수준을 넘어 본질적 접근과 탐구를 하게 되었다. 육조(六朝) 서체를 비롯한 각체의 고전을 두루 섭렵하고 1955년 49세 때 귀국한 소암은 51세(1957)부터 국전에서 활동을 시작, 당시 한국 서단의 대부격인 손재형으로부터 ‘서단의 이채로운 존재’란 평가를 받았다.
      이번 전시는 90평생 소암 예술의 성취 부분 중에서 특히 만년의 미발표작 100여 점을 중점적으로 보여주었다. 여기서 우리는 종횡무진한 소암 예술의 진면목과 예술적 가치를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소암의 서예세계는 고전을 철저히 학습 수용하고 재해석하여 걸러낸 다음, 유, 석, 도(儒釋道) 삼가(三家)사상을 혼융한 내용을 개성적인 표현으로 자재롭게 구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행초서에서 드러나고 있는 질탕하고 표일한 흐름, 미친 듯 분방한 봉망에서 터지는 격정과 묵기 임리(淋?)한 획질, 그 율조와 흥취는 만리를 달려온 진애를 한꺼번에 씻어 내는 소나기의 시원한 바람같은 느낌을 준다.

      그 중에서 백미는 취필(醉筆)이다. 코냑이 없으면 붓을 들지 않았다던 소암, 그런 풍류와 낭만이 있었기에 취시선(醉是僊·취하면 그것이 곧 신선이다)과 같은 큰 글씨의 광초(狂草) 벽서(壁書)를 남겼다. 취시선은 어느 요정에서 흥건히 취한 소암이 고은 베로 도배를 한 벽에 휘갈겨 쓴 초서로 글자 한자의 크기가 사람 키와 같다. 취시선 앞에선 서예를 모르는 사람도 탄성을 토하며 서예가 바로 이런 멋이었구나 하고 금방 붓을 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 정도이다.

      소암은 현실의 명리에 대한 체념을 글씨로써 초탈하여 달관의 경지에 오른 진정한 필묵의 자유인이었다. 세속으로부터 자기해방을 하고자 했던 대서예가 소암의 글씨에는 그가 짊어진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있다. 90평생 ‘먹고 잠자고 쓰고’ 했던 선풍도골(仙風道骨)의 취묵신선이었던 소암선생, 그는 이 시대 필묵으로써 자아를 완성했던 보기 드문 거인이었음이 분명하다.
  •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망모당  (0) 2011.03.10
    따지고 비교하기  (0) 2011.03.03
    검이불루 -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고..  (0) 2011.03.03
    장암 이곤순 - 뉘라서 나를 보고 시비할손가  (0) 2011.03.03
    혹부리체 - 홍호연  (0) 2011.02.11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