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회 현강연서회전에 출품된 현강 선생의 글씨..

 

 검이불루 화이불치(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지만 누추하지 않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았다"

제18회 현강연서회전에 출품된 현강선생의 작품

내 눈에는 마치 루오의 야수파적 작품같이 보인다..

 

글의 출전은 삼국사기』백제본기 시조 온조왕조..

온조왕이 건축한 궁궐에 대한 평인데..이는 그대로 백제 예술에 대한 총평이라 할만하다..

 

***


 

그 전시회 중에 내눈을 확 잡아댕기는 글..

내용이 정갈하고 정겹다..

차한잔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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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고창신)

 

옛 것을 법으로 삼아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

 

 

장암 이곤순전...

 

내 첫 사부의 고교 동창..

내 둘째 사부의 사부..

 

글씨는 일중 김충현에게 배우고,

한문은 학산 조종업으로부터 배웠다..

 

글씨는 예서, 행서 초서, 한글까지 다양한 글씨가 가득하다..

 

서권기는 모르겟고, 그저 문자향만 가득 맡고 와서

여기에 좀 나누어 드린다..

 


우계 성혼의  우음이란 시를 장암 선생씀


 

반평생 산에 누워 한 일이 없으니

뉘라서 나를 보고 시비할손가

 

저런 경지에 언제 다다를까..


만해 한용운의 선시를 장암 씀


 

먹구름 거치고 고월이 드러나니

사방 멀리 나무까지 역역히 나타난다..

 

이는 얼마나 성성한 경지인가..

유교의 대가나 불교의 대가나 장군 멍군할 정도..



해불양수

 

바다는 물은 사양하지 않는다..

바다의 포용력을 누가 당하랴..

 

위 세글씨 중 공짜로 가지라면 어느 것을 가질까요?

 

 

 


(장암 서, 순천자흥 : 순리를 따르는자가 흥한다.)

 

“속기(俗氣)를 벗고 명리(名利)에 초연해지면 글씨는 맑아지는 법입니다. ”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견 서예인 장암 이곤순 선생(60)은 “서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성과 단순성”이라며 “어떤 예술이든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라고 강조했다. 지행합일(知行合一)적인 품격이나 자세를 갖추지 않으면 서예인으로서의 아무 의미가 없다고 말하는 장암 선생은 대전 시립미술관에서 대전·충남 서예사에 큰 획을 그을 전시를 열고 있다. 40년 넘게 서도의 길을 꼿꼿하게 지켜온 장암 선생을 만나 굳건하게 정립한 ‘장암 풍’ 서예의 미학과 철학에 대해 들어봤다. <대담=송신용 편집국장>

-서예에 입문하게 된 배경이나 동기가 있을 텐데.

▲처음 붓을 잡은 인연이 된 것은 어린시절 천자문을 배울 때부터다. 작은 손으로 붓을 쥐고 저녁 때마다 아버지 앞에서 한자를 썼다. 천자문을 통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서예가 체질화가 됐다고 할까…. 그리고 고등학교 때까지 서예가 뭔지도 모르면서 틈틈이 습자를 썼다. 인연이 됐는지 스승이신 일중 김충현 선생님의 교본으로 습자를 했다. 충남대학교에 입학하고 1967년 동방연서회에서 주최하는 서예대회에 나가 상을 타게 됐다. 일중 선생님이 이사장으로 계셔서 그 뒤로 꾸준히 교분을 갖게 됐다. 자주는 못 가뵙고 방학 때 틈틈이 찾았고,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야 자주 만나뵐 수 있었다.

-37년 만에 개인전을 열게 됐는데 그 동안 전시회를 갖지 않은 이유가 뭔가.

▲대학 시절에 한 번, 학교를 졸업하고 멋모르고 의기로 한 번, 전시회를 열었다. 그 이후부터 실력을 쌓기 위해 서예공부에만 전념했다. 개인전은 자신이 이룩한 작품 세계를 한번에 보여주거나 중간마다 변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것인데, (나는) 뭔가 하나를 크게 이뤄놓고서는 하고자 했던 바람이 있었다. 또 전시 때문에 제자나 주변사람이 고생할 수도 있다는 생각도 개인전을 갖지 않은 이유 중 하나다. 명필인 추사도 작품을 통해서 널리 알려지지 않았나. 작품이 좋다면 후대에 자연스레 전해지게 되는 것이지 특별한 변화도 없이 전시회를 연례행사처럼 하는 것은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

-그럼 다음 전시는 언제쯤 가질 생각인가.

▲기약은 없지만 용트림이라고나 할까. 할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되겠지. 모든 것이 무르익고 성숙돼야 세상에 선보이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의 순리에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어떤 예술이든 자연을 거역하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특히 동양예술은 자연 친화적이다. 상형문자는 자연의 형태를 본뜬, 자연에서 나온 것이다. 자연에 나온 문자를 가지고 서예를 하고 또 서예를 통해 다시 자연에 동화되는 표현을 하는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연성과 단순성이라고 생각한다. 복잡한 것은 함축하고 불순물이 없는 순수한 것을 만드는 작업을 하기 위해 노력 중이다. 속을 벗어나게 되면 초연해질 수 있고 글씨도 맑아질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많은 광석을 용광로에 넣고 순도 99.9%를 얻어낼 수 있는 것처럼 글씨의 본질적인 것을 찾을 때 순수함을 나타낼 수 있다. 하지만 쉽지는 않다.

-서예를 시작할 때 대전의 서예계는 어땠는가.

▲대전은 서예의 본 서법과 거리가 먼 불모지였다. 어린 마음에 제대로 서예의 뿌리를 내려야겠다고 생각해 (성서동인회)를 만들었다. 충남대 2학년 때인 1967년, 서예의 기본인 한자에 대해 체계적으로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충남대 서예연서회를 조직했다. 학산(鶴山) 조종업 교수를 지도교수로 모시고 회원들끼리 공부를 하고 한문도 배우고…. 훗날 충남대 서예연서회가 대전·충남 서예의 모체이자 핵이 됐다. 초대작가 10여 명 등 전국적으로 쟁쟁한 서예가인 야천 이동희, 송암 정태희, 염호택, 현강 박홍준 등 많이 배출해 냈다.

-그 당시 동양화 등 다른 미술가들과 교류가 있었나.

▲그림하고 글씨는 같다. 그림을 붓으로 힘있게 쓰면 서예가 되고, 글씨를 회화처럼 그리면 그림이 되는등 본류는 같다. 심향 박승무, 풍경화가 이동훈, 서양화가 이인영, 입립, 정명희, 도예가 이종수 등과 친분을 쌓고 교류를 했다. 대전에서 미술이나 서예분야가 활성화 된 것은 충청남도전이 생긴 1971년도부터다. 첫해 출품작 수가 충청남도 통틀어 17여 점밖에 안 됐다. 지금은 800여 점 나오니까 대단한 발전을 한 것이다.

-붓을 잡은지 50년이 넘고, 서예를 시작한 것은 40여년 됐다. 한 길을 걷는데 엄청난 고집이 필요했을 것이다. 서예에 대한 자신만의 철학이 있다면 어떤 것인가.

▲선비정신을 바탕으로 깔고 지행합일적인 품격이나 자세를 갖지 않으면 서예인으로서의 의미가 없다. 논어 중 ‘子曰 學而時習之면 不亦說乎아’(배우고 때로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 ‘有朋이 自遠方來면 不亦樂乎아’(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人不知而不이면 不亦君子乎아’(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음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라는 말이 있다. 이러한 개념을 마음속에 명심해두고 서도의 길을 걷고 있다. 서예는 운명과 같다. 또 딴 재주가 없으니까.(웃음) 고통이 따라도 ‘이것이 나의 숙명이다’고 생각하고 붓을 놓지 않았다. 그러다 괴롭고 힘들어 잠시 쉬어도 며칠이 지나면 또 다시 붓을 잡게됐다.

-서예인을 많이 배출했다. 제자들에게 엄한 호랑이, 존경받는 스승으로 꼽히기도 한다. 제자 양성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자식을 정신과 육체의 계승자라고 본다면 제자는 정신과 예술의 계승자이다. 연령을 떠나서 내가 생각하는 서예인으로서의 비인부전(非人不傳)해 왔다가도 안 돼서 내쫓은 사람도 있고, 내가 싫어서 떠난 사람도 있고, 예술에 동화가 돼 같이 공부하는 사람도 있다. 학교를 포함해 거쳐간 사람이 5000명 이상이 되지 않을까. 제자를 양성할 때 일중 선생이 나를 가르칠 때의 교수법을 그대로 한다. 국전 등에 작품을 낸다 하면 스승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 쓰라는 것이 비일비재 하지만 나는 제자 스스로 작품을 하도록 한다. 그렇게 하다보면 세월이 쌓이면 능력있는 제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고기를 잡아주는 것이 아니라 방법을 가르쳐 주는 것이 중요하다.

-서예는 향유하는 사람이 많은데도 불구하고 조명이 안된 부분이 많다. 부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하나.

▲대전은 공공 미술관, 서예학과도 많지만 서양화를 중심으로 공부한 사람들이 주축이 돼, 그들만의 헤게모니가 형성돼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 나라, 제 민족의 미술을 제일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공무원 등 행정을 하는 사람은 서양문화가 최고인 줄 안다. 우리네 보석이 있는데 발견하지 못해 안타깝다. 이번 전시를 통해서 우리 민족의 고유 유산인 서예를 조금이라도 알리는 기회가 됐으면 한다.

-누구나 쉽게 서예를 접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전문적으로 눈을 뜨지 않는 한 깊이 있게 감상하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한국인이라면 붓으로 쓴 글씨에 대해서는 조금씩 향수를 갖고 있을 것이다. ‘이곳은 글씨체가 힘있게 나갔다’라는 생각과 함께 획을 발견하면 그 자체로 하나의 감상이 될 수 있다. 서예는 격, 기운이 다르기 때문에 한자 등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공부를 하면 더 즐겁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까지 1만여 명이 넘는 관람객이 전시장을 찾았다. 80세 이상의 연로하신 분들도 어린손자의 손을 붙잡고 서예를 보면서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사람이 문자는 몰라도 서예 속에서 어떤 기운을 느낀는 것 같다. <정리 김효숙·사진 장길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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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주의불망(扁舟意不忘)

조각배 타고 돌아갈 생각 잊지 못하네..

 

임진왜란시 일본에 포로로 끌려간 소년이 서예가로 성장하엿다..

운해 홍호연..

글씨 끝이 뭉특한 개성있는 글씨로 혹부리체라고 불렸다..

그러나 글씨에 서린 사연이 눈물겹다.. 

 

 

임진왜란시 1593  제2차 진주성 싸움에서 진주성이 함락되고 7만여 군관민이 학살된후 그 여파로 인근 고을  산청에 까지 왜군이 들이 닥쳤다. 10살 소년 홍운해는 부모형제와 떨어진 상태에서 붓을 들고 있었고 글씨를 잘섰던 까닭으로 학살을 면하고 포로로 잡혀간다..

살얼음같은 생사의 고비를 글씨의 정진의 버텨내에 혹부리체의 대가로 성장한다..

60년이 지난 70세에 귀향을 시도 햇으나 거부당한 그 심정을 쓴 나타낸 "편주의불망"

 

 

귀향을 거부당하자 영주에게 자신의 녹봉을 감하되 나머지는 자손에게 물려줄수 잇기를 탄원한다..

6년후 영주가 죽자 7일만에 할복 순사하는 충성심을 보여 결국 자손들은 홍씨 성을 지키고 녹봉을 물려받을 수 있엇다..

할복당시 유서로 남긴..참을 인(忍)..

 

그의 1차 염원(귀향)은 당대에 이루지 못햇으나

2차 염원(자손의 안녕)은 계속 이어져 400년이상 홍씨의 성을 쓰고 있었는데 12대손  고우(洪) 요시로는 죽음 앞두고 나고야시에

글씨등 유품을 기증한다..

그는 딸만 두었고 일본법관습상 여성은 남편 성을 따르므로 결국 홍씨 성이 사라질 운명에 처하고 장차 유물관리가 어렵다고 판단되자 나고야시에 유물을 기증한 것이다.

그후 진주박물관의  '임진왜란 조선인 포로의 기억'의 전시회를 통해 유물을 따라 그의 염원도 귀환하였다..

 

참 아픈 우리의 역사다..

 

(한국비림박물관 정경)

중국 서안에 비림(碑林)이 있다..

서예대가의 글씨가 새겨진 비석을 모아 놓았다는 곳이다..

그 비림을 본떠 우리나라의 역대 위인, 서예가, 왕, 고승의 필적을 새겨 모아 놓은 곳이다..

보은읍에서 수한면쪽으로 25번 국도를 타고 가다가 저수지를 지나자 마자 우측에 자리잡은 "한국비림박물관"은 폐교한 학교시설을 이용하여 만들었다..

담벽, 건물벽에 석판을 붙이거나 걸어놓았다..

글씨를 좋아하는 나에게는 이런 횡재가 없다..

사실, 이번 나들이 중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낸 곳이다..

물론, 동행한 잠벗은 차안에서 홀로 잠들었지만.. 

 


(강감찬 장군의 글씨)

 

강감찬 상원수는 20만의 병력을 지휘하여 10만의 거란군을 귀주에서 대파한 명장..

그 공으로 내려진 벼슬의 이름이 어머어마하다..

"개부의동삼사 추충협모 안국봉상공신 특진검교태사 천수현 개국후"

 

과연 그의 글씨도 활달하고 호방하다..

 

(서산대사)

 

그 다음으로 눈을 끄는 것은 서산대사의 글씨다..

길을 가다가 낮닭우는 소리 듣고 확철대오하였는 고승..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킨 일은 누구나 알 것이다..

그 공에 대한 선조의 보답은 이런 벼슬이다..

"국일도대선사  선교대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

하지만, 도통한 분이 이런 벼슬을 좋아했을리 없다.

 

 그가 열반 직전 자신의 영정 뒷면에 적었다는 글씨이다..

"80년전에는 그가 나이더니

 80년후에는 내가 그로다.."

 

(원교 이광사의 글씨)

(창암 이삼만)

 

원교 이광사(1705~1777)와 창암 이삼만(1770~1847)은 서예사에서 후학인 추사 김정희(1786~1856)의 그림자에 묻혀버린 명필들이다. 조선적 특색을 표현하는 진경 문화가 무르익은 18세기 영정조 시대 두 대가는 동국진체라는 조선풍 서체로 일가를 이룬다. 하지만 일생은 재앙과 절망으로 가득했으니, 역적으로 몰린 원교는 23년간 귀양살이를 하다 객사했고, 창암은 약초를 캐어 연명하며 나뭇가지와 지팡이로 글씨를 수련해야 했다.

명문가의 자제로 재주까지 타고나 호의호식하던 추사..

그가 잘나가던 기고만장한 시절에 원교 이광사가 쓴 전남 대흥사의 대웅전의 현판을 떼어버리라고 할 정도 였으니, 학문, 교우, 취처가 늦어서 삼만이라 했다는 시골 초야의 서예가 창암의 글씨야  우습게 알았으리.. 

하지만, 추사도 제주도 유배 생활하면서 수양이 되었는지 유배 이후에는 위 2분의 글씨를 존중하였다고 한다..

 

 

(담징의 그림)

 

일본 법륭사의 금당벽화 "사불정토도"로 유명한 담징의 그림이다..그벽화의 일부 " 관음보살상"이다..

교과서에서 말로만 듣던그림을 이제사 본다.. 

 

 


(박정희, 육영수 부부)

 

비림박물관에 한 부부의 글씨가 있다.

 

유신시절 어느 개그맨이 라디오 방송에서 간도 크게 이런 개그를 했다..

"박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부부싸움을 하면 어떻게 될까요?

"육 박 전"

다음날 그는 방송계에서 사라졌다..

유신시절 대학 "인간과 국가"라는 강좌에서 레포트 과제 제목이 "한국적 민주주의의 토착화"였다..

하지만, 그는 경제적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지만, 3선개헌, 유신헌법 등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주의는 후퇴시키면서, 운동권을 강화시키는 꼴이 되었고, 그 인과는 오늘에 이어지고 있다..

그의 따님은 이번 경선 승복을 통하여 민주주의의 고양에 기여하였다.

미국의 존 메케인의 말처럼 "민주주의는 효율적일 뿐 아니라 도덕적이어야 한다.."

 

어째거나, 박 대통령의 글뜻은 이렇다.

"관이 깨끗하면 백성은 스스로 편안하다." 

 


 

미인도를 보자..

"정원에 핀 매화는 귀인과 같고,

 옥비는 말 없이 스스로 예쁘네"

 


 

(정지용 시)

 

흑백의 숲에서 시간가는줄 모르고 고인들과 어울려 놀았다..

그리곤, 흐믓한 미소를 머금고 집으로 돌아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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欽恤以明法秋肅春溫以國典公平而布信靑天白日見人心
흠휼이명법추숙춘온이국전공평이포신청천백일현인심

 

"흠휼이란, 밝은 법으로 때론 가을 처럼 엄하게, 때론 봄처럼 따스하게 베풀고
  나라의 법으로 공평하게 대하여 믿음을 널리 펼쳐서, 

  푸른 하늘 환한 태양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위 글씨는 정향(靜香) 조병호(1914-2005) 선생의 전서체이다..
정향은 청양 출신으로 우하 민형식과 위창 오세창에게서 사사 받아 추사 김정희, 소당 김석준, 백당 현채의 정통을 이어 받았으며 전서와 와전의 독보적인 권위자로 평가받았다.

또한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작가 신영복씨의 스승이기도 하다..
신영복씨가 대전교도소에 수감중일 때 서도반이 생기면서 정향 선생에게서 체계적인 지도를 받게 된다. 교도소란 살인범·도둑놈이나 가는 곳으로만 알던 정향 선생이 신영복 등 사상범들이 옥중에 있는 것을 알고는 깜짝 놀라며 “아, 이분들은 귀양 온 사람들이구나”하고 생각하고는 7년간 매주 교도소에 와 글씨를 지도해주었다고 한다
(http://www.hani.co.kr/section-021075000/2006/06/021075000200606220615026.html)

 

특히 정향선생의 단군숭모정신은 유명한데, 1958년 논산군 두마면 석가골(신도안)에 단국사당을 처음 건립하였고, 1984년 대전 정림동 52번지 매봉산 아래로 옮겼는데, 1993년 단군사당을 대전대학교에 기증하였단다. 매년 음력 3월 15딜에 어천제, 10월15일에 개천제가 봉행된다고한다..(http://blog.paran.com/hanshinb/23930670)

 

*** 글의 뜻

 

흠휼이란 우리 나라 과거 형법 정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개념이다.
흠휼지전(欽恤之典); 죄수를 신중히 심의하라는 은전(恩典)인데, 흠휼이란
죄인을 처벌할 때 죄는 미워할지라도 그 사람은 불쌍히 여겨야 한다는
생각으로 사건의 전말을 신중히 다루어 억울한 형벌을 받도록 하지 말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런 정신은 기준을 어긴 형구(刑具)의 실태를 조사해 이를
고치게 한다거나 형벌을 남용한 관리를 처벌하는 등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다산 정약용이 특히 흠휼을 강조했는데, 그는 부득이 형률로 다스릴 수밖에
없는 경우에는 '그 일을 삼가고 그 사람을 애처롭게 여기는' 단옥(斷獄)의
근본인 흠휼(欽恤)에 입각해야 한다고 했다." (『목민심서』, 형전, 단옥;
http://www.jontong.co.kr/00spr/11s_1.ht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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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이 최후의 휘호를 서각한 것..


백범이 암살당하기 4개월 전인 1949년 2월 독립운동가 손정채(1947년 타계)의 딸 손승월 씨에게 써 준 글씨로, 지금까지 알려진 백범의 글씨 중 최후의 것이다.


‘月到千虧餘本質 柳經百別又新枝(월도천휴여본질 유경백별우신지) 대한민국 31년 2월 74세 백범 김구’로 크기는 세로 83cm, 가로 33cm.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근본은 그대로이고, 버들은 100번 부러져도 새 가지가 돋는다.."

*** 

행서체는 인쇄체 같은 해서체와 자유분망한 초서체의 중간 정도의 여유를 보여주는 서체이다..

흔히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편하게 마음가는데로 쓰는 글씨랄까?

옷으로 따지면 의식용도 아니고 잠옷도 아니고 평상복이라고 할까?

 

백범의 글씨체의 특징은 떨리는듯한 필체이다..

수전증 때문이 아니고 왜경에 맞은 총알이 박혀 있어서 글씨를 쓸 때 특정부위의 통증으로 자연히 떨리게 되었단다..

 생전의 백범은 유머러스하게 자기 글씨는 총알체라고 하였다..

 

정말 존경스런 글씨라 아니할 수 없다..

 

***

위 글귀의 시는 조선조 상촌(象村) 신흠(申欽·1566~1628)의 작이다..

 

桐千年老恒藏曲 (동천년노항장곡)

梅一生寒不賣香 (매일생한불매향)

月到千虧餘本質 (월도천휴여본질)

柳經百別又新枝 (유경백별우신지)

 

오동나무는 천년을 묵어도 본래의 곡조를 간직하고

매화는 일생 동안 춥게 살아도 제 향기를 팔지 않으며
달은 천 번 이지러져도 그 본질은 그대로이고 

버드나무는 100번 꺾여도 새 가지가 돋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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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음식점에 갔다..

술을 마시다 쳐보니 웬 사람 둘이 쳐다보고 잇다..

자세히 관찰하니 글씨 해제가 써있다..

空자를 사람 얼굴 처럼 썼다..

일종에 전서체라고 할까..

 

공수래 공수거..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간다는..

 

글의 출처는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득의 양양한 맹상군을 울렸다는 시귀..

 

空手來 空手去   공수래 공수거

世上事 如浮雲   세상사 여부운

成墳墓 人散後   성분묘 인산후

山寂寂 月黃昏   산적적 월황혼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나니

세상사 모든 일 뜬구름과 같도다

죽은 뒤 무덤에 들어가고 사람들이 가고나면

적적한 산 속에 달빛만 외로울테지..

 

 

솔로몬이 다윗왕의 반지에 새겼다는

" 그것 또한 지나가리니"와 같은 정서랄까?

 

큰틀의 사람은 기쁨의 절정에서도 감정을 조절하여 방심을 경계하였나 보다..

점심에 후배들과 점심을 하고 먼저 보내고 느긋하게 계산하려보니..아풀싸..

지갑이 없네..

곰곰히 생각하니

지갑을 집에 두고 나왔네..

하여..직원을 오라 부르고 홀로 룸에 앉았는데  눈에 들어오는 시귀..

 

 

중국 당나라 중기의 시인 왕유..

 

 그대에게 술한잔 권하노니

 마음편히 지니시게


 세상인정이란 물결같이 뒤집히는 것

 백수되도록 사귄 벗도 칼을 겨누고
 성공한 이도 후배의 앞길을 막나니


 풀빛은 비에 젖어 푸르름 짙어져도
 봄바람 차가와 꽃은 피지 못하거늘


 뜬구름 같은 세상 말을 해 무엇하랴
 누워서 배불리 지내는 게 제일이지

 

 

 

그 옆에는 행서체로 한문을 써놓앗다..

 

酌酒與君君自寬  작주여군군자관 
人精蒜覆似波瀾  인정산복사파란 
白首相知猶按劍  백수상지유안검 
朱門先達笑彈冠  주문선달소탄관 
草色全經細雨濕  초색전경세우습 
花枝欲動春風寒  화지욕동춘풍한 
世事浮雲何足問  세사부운하족문 
不如高臥且加餐  불여고와차가찬 

 

원제목은 酒與裵迪(작주여배적)"으로서, 불우한 친구 배적에게 술을 권하며 위로하는 내용이다..

 

이렇게 술한잔 따라주면 시한수 읊어주는 멋진 친구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내가 그런 친구가  되어주려고 하나..

시상은 천박하고 글씨는 비루하니..

백년하청(百年何淸)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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