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인문기행 2

절강성 소흥, 강소성 의흥 주변을 소개한다..

 

소흥은 왕희지의 고향이자 난정서에 등장하는 일상일영(一觴一詠, 술한잔에 시한수)이 벌어진 유상곡수의 현장이라 관심이 많았다.

소흥의 역사를 보면,

중국의 전설 우임금의 무덤이 있는 곳이고, 전국시대 월나라 수도였을 때는

월왕 구천, 명신 범려, 미인 서인의 스토리가 있었다

삼국지 시대에는 회계라고 불리는 오나라 땅이었다.

당나라 시인 하지장, 육유,  명나라 양명학의 창시자  왕양명, 청나라 말기 근대소설의 선구자 노신의 고향이다.

언젠가 중국여행 시간이 돌아오면

소흥- 황산- 무이산을 구경하면 좋겠다..

 

***

이책을 읽으면서 알게되어 행복한 것 중 하나는 하지장의 발견이다..

이월춘풍사전도(二月春風似剪刀)라는 명귀를 쓴 시인

"이월 봄바람은 가위같구나"

버드나무에 신록의 나뭇잎이  올라오는 모습을 마치 봄바람이 가위질하여 오려 붙인 것처럼 묘사한 감각이 너무 현대적인 표현이기 때문이다.. 

 

碧玉妝成一樹高 
萬條垂下綠絲? 
不知細葉誰裁出 
二月春風似剪刀 

 

벽옥장성일수고
만조수하록사조
부지세엽수재출
이월춘풍사전도

 

푸른 옥빛으로 단장한 키 큰 버드나무
가지마다 푸른 끈을 아래로 드리웠네
저 가느다란 잎은 누가 오려 만들었을까
이월의 봄바람은 가위와 같구나

 

 <하지장, 영류(詠柳, 버드나무를 읊다)>

 

그는 당나라 전성기인 당현종때 과거에 급제하여 세자(당 숙종)의 사부가 된다.

그는 술을 좋아하고 호방한 성격으로 사람들과 잘 어울렸다.

말년에는 사명광객(四明狂客).."사명산의 미친 나그네"라 자칭하고 살았다.

이런 하지장을 두보는 음중팔선가에서

"하지장은 말탄 것이 배탄 듯하여

눈이 흐려 우물에 빠지면 물속에서 잠을 자네"

하고 묘사했다.

이런 모습을 단원 김홍도가 "하지장도"로 그렸다.

 

그는 70세의 나이에 장안의 도교사원 자극궁에서 30세의 젊은 이백을 만났다 

이때 이백이 그에게 "촉도난"이라는 시를 보여주었고, 

이에 하지장은 이백에게 "그대는 이세상에 귀양온 신선(謫仙, 적선)이요"라고 평하여

이 말이 평생 이백의 별호가 되었다.

 

그가 이백과 술을 마실 때, 돈이 부족하자, 임금이 하사한 금거북을 허리춤에서 떼어 주었단다.

이백이 이를 말리자.

人生得意須盡歡(인생득의수진환)      

莫使金樽空對月(막사금준공대월)      

 

인생에 뜻을 얻었을 때  즐기기를 다할지니 

금 술통 헛되이 달빛 아래 두지 말게

 

라는 이백의 시를 읊으며 "당신을 만나 술을 실컷 마시면됐지 금거북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단다

 

그의 나이 85세 장안 생활을 청산하고 당현종의 허락을 받고, 귀향하는날 

문무백관이 동문밖에서 전송을 했다니, 참 팔자 좋은 사람이다.

그리고 얼마뒤 안록산의 난이 터지고 당나라는 개판시절로 들어간다..

(마치 코로나 발생전인 2019년에 대규모 환송잔치하고 귀향한 것이라고 보면 된다..ㅎ)

 

그가 고향에 와서 읊은 명시가 전해진다.

 

어려서 고향 떠나 늙어서 돌아오니
사투리는 그대론데 머리털은 빠졌네
아이들은 서로 보며 내가 누군지 몰라보곤
어디서 오셨어요, 웃으며 물어보네

 

小小離鄕老大回 (소소이향노대회)

響音無改鬢毛衰 (향음무개발모쇠)

兒童相見不相識  (아동상견불상식)

笑問客從何處來  (소문객종하처래)

 

그는 귀향 1년후 86세에 귀천한다.

 

벼슬되지, 술되지, 풍류되지,

풍류남아로서 이백도 부러워할 정도로 최고의 인생을 산 사람이다..

 

 

 

 

중국 절강성 소흥..산음의 난정..

왕희지의 사당..왕우군사..

 

 

관서지인(觀書知人)..

글씨를 보면 그 사람을 안다는 말이 맞는지..왕희지의 용모가 글씨 수준으로 미끈하다..

화가의 뾰샵이겠지?

 

 

거위를 좋아햇다는 왕희지..사당에도 거위 연못이라는 아지(鵝池)..아들 왕헌지와 합작품이란다..

 

묵의 연못..동양 서예의 원류..

이 못의 물이 흐르며 이 먹물을 많이 쓰느냐 적게 쓰느냐로 서체가 변하였으니..

장강보다 길이 흘러 동방에 이르렀다..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뜰에 가득한 달빛..   (0) 2011.12.02
황국..  (0) 2011.12.02
고매원으로 글을 쓰다..  (0) 2011.09.26
[스크랩] 신라 명필 김생의 집자비 낭공대사의 백월비  (0) 2011.09.16
묵향  (0) 2011.09.16

 

한동안 소동파에 빠져 적벽부를 썼다..

그를 다룬 책 "소동파, 선을 말하다"를 읽다가 무릎을 탁쳤다..

"덕은 아무리 지나쳐도 나쁘지 않지만,  정의는 너무 지나치나면 잔인해진다.."

이 문장을 읽고 당대의 시인 구양수가 자신의 시대가 지났음을 선언하였다던가..

 

그는 시, 서, 화, 문장에 두루 능해 천년에 한명  나올 천재란 소리를 들었다..

시인으로는 도연명을 사모하여 도연명이 살았다는 "동파"를 따서 자신이 사는 곳을 동파라도 명명하고 호로 삼있다..

정치적으로는 왕안석의 개혁파에 반대하는 보수파로 귀양살이에 시달렸다..

정신적으로는 선불교에 귀의하여 심오한 정신적 경지을 읊는다..

 

후에 송설체로 유명한 조맹부가 그를 추모하고 추종하엿단다..

우리나라 조선 전기의 관용서체가 송설체인데..

송설체는 소동파의 글씨를  추종하엿고 소동파가 촉 출신이라 송설체를 촉체라고도 한다.

그 소동파는 왕희지를 추종하였다..

 

내가 서예를 배우면서 우연히 왕희지의 난정서를 쓰고, 조맹부가 쓴 "조식의 낙신부"를 쓰다가

소동파의 적벽부를 쓰는데..

이들의 관계가 이렇게 맺어진 것을 알고는 묘한 인연을 느낀다..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흠휼이란  (0) 2011.09.15
법이란 귀한자라고 아첨 하지 않고..  (0) 2011.09.15
국방의 초석  (0) 2011.09.15
손해보는 것이 곧 복이다..  (0) 2011.09.14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0) 2011.09.10

 

 

羲之頓首,快雪時晴,佳想安善。未果,爲結,力不次。王羲之頓首。山陰張侯。

 

큰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자 왕희지는  친구에게 안부편지를 보낸다.
본문은 공책 정도의 작은 크기 인데. 본문의 20배 정도의 발문이 붙었다..

 

***

재위 11년째 되던 해(1746년) 봄 2월 어느 날, 건륭제는 뜻하지 않게 동진(東晋)시대의 서예가 왕순(王珣)의 ‘백원첩(伯遠帖)’을 손에 넣게 됐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천재일우로 내가 이 보물을 손에 넣게 되었구나!”

그는 이미 선대에 황실로 들어온 왕희지(王羲之)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中秋帖)’을 백원첩과 합쳐 ‘세 가지 보물(三希)’이라 부르고는, 이들을 한 곳에 모셔두기 위해 자신이 정무를 보는 양심전(養心殿)의 전전에 작은 서재를 꾸몄다. 한 평이 조금 넘는 작은 방에 ‘세 가지 희귀한 보물’을 모셔놓았다 하여 그 이름을 삼희당이라 지었다.

이들은 모두 왕희지 일가의 글씨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산둥(山東)에서 태어났으나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변의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 정착, 수많은 서첩을 남긴 왕희지(303∼361)는 글씨의 나라 중국에서도 ‘서성(書聖)’으로 추앙 받는 인물. 한마디로 글씨의 대가다.

왕희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서법은 전서와 예서 일색이었는데, 강남에 문화다운 문화를 진작시킨 동진시대 왕희지 일족에 의해 행서, 초서, 해서로 다양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됐을 뿐 아니라 그 서법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중국 문인들의 모델이 됐다. 그러므로 그에게 서성이란 칭호를 내렸다 해서 결코 과분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왕희지의 서법에 매료된 건륭제는 만주족이라는 혈통의 한계를 초월하여 중국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색 유리기와가 흰눈에 덮여버린 날, 그는 근엄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소박한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예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예술사랑에 빠진 ‘문화황제’

삼희당, 나아가 양심전에선 첫눈에 봐서 이렇다할 만한 장식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가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안(書案), 탁자, 의자, 장롱 등이 하나같이 자단목 같은 진귀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마루에 깔린 요는 담황색 공단인데, 그 위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바꿨다. 여름에는 갈포나 하포, 겨울에는 수달피와 담비 가죽, 해룡피를 깔았다. 동난각(東暖閣)의 남쪽 창문과 항탁(온돌 위에 놓은 작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두 개의 당대(唐代) 도자기가 놓여 있다. 옥기와 도자기, 서화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도 건륭제가 가장 애지중지한 것은 단연 쾌설시청첩이다. 이것은 왕희지가 대설이 내린 다음 날씨가 화창하게 개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 산음장후(山陰張侯)의 안부가 궁금해 그 심정을 전하고자 쓴 한 장의 서한문이다. 재질은 종이가 아니라 마(麻)이고, 가로 14.8cm, 세로 23cm의 작은 지면에 4행의 행서로 고작 28자만을 적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건륭제는 이를 보고는 ‘신기(神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서화를 평할 때는 ‘능(能)’ ‘묘(妙)’ ‘신(神)’이란 말로 표현했다. ‘신’은 그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찬사였다. 실제로 건륭제는 서첩 옆에다 ‘神’이란 글자를 직접 써넣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천하무쌍 고금선대(天下無雙 古今鮮對)’라는 댓구를 덧붙였으며, 삼희당이란 인(印)을 세 개씩이나 찍었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이 서첩에 매료됐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단지 낭만적인 기분에서 이 서첩을 마주한 것은 아니다. ‘춘전(春前)의 서설(瑞雪)’ ‘입춘, 감설(甘雪)이 내리다’라는 글귀까지 남겨놓은 것을 보면 그는 눈을 어지간히도 기다렸던 모양이다.

 

출처 : 신동아 테마기행

'쓰기道'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우아함에 관하여..  (0) 2011.09.01
악비가 쓴 출사표  (0) 2011.08.31
붓 끝에서..  (0) 2011.08.30
세종대왕의 친필..  (0) 2011.08.30
추사가 다산에게  (0) 2011.08.28

 

 

 

난 정 서 ( 蘭 亭 序 )

 

행서의 용(龍)이라 불리는 난정시서(蘭亭詩敍)는 왕희지가 51세 때에 '흥에 겨워서 쓴' 작품으로, 고금의 서적중에서 영원히 빛나는 밝은 별이라 하겠다.

동진의 목제(穆帝) 영화(永和)9년 3월에 명승지 난정에서 우군장군(右軍將軍) 왕희지의 주재하에 성대하고 풍아(風雅)로운 모임을 가졌다. 거기서 각지의 명사들이 모여 시를 지었는데 이것으로 난정집을 엮었다.

 여기에 왕 희지가 전서(前序)를 보탰는데 이것이 유명한 난정서가 된 것이다.

즉석에서 시편의 서(序)를 짓고 쓴 것이지만 서(書)뿐만 아니라 문장이나 사상도 지극히 높은 수준의 작품이라 한다.

이 진적은 줄곧 왕가(王家)에 진장되어 7대째인 지영(智永)에게까지 전해졌다가, 당태종이 왕희지의 글씨를 몹시 사랑하여 이 난정서를 입수했다.

후에 당태종은 이를 존중히 여겨 "천하 제일의 행서"라 명하고 죽을 때 관속에 같이 넣게 함으로써 아쉽게도 진적은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지금 전하여지는 것은 임서한 필사본들이다..

 

****

난정집서 /왕희지


영화9년 계축년(353년) 3월초 회계 산음의 난정에 모여 "계제"를 행하였다.


여러 현인들이 모여들고 노장이 함께 어울렸다.

이곳은 높은 산, 고개가 있고 깊은 숲, 울창한 대나무 그리고 맑은 물이 흐르는 여울이 좌우로 띠를 이루었다.


흐르는 물을 끌어 잔을 띄우는 물굽이를 만들고 순서대로 자리를 잡으니 비록 성대한 풍악은 없어도

술 한 잔에 시 한 수씩 읊으며 또한 그윽한 정회를 펼칠만 하였다.


맑은 날씨에 따뜻한 바람이 불어오는 이날, 머리를 들어 세상의 넓음을 우러르고 고개를 숙여

사물의 흥성함을 살피면서, 경치를 둘러보고 정회를 펼침에 보고 듣는 즐거움을 두루 만끽하니 기쁘기 한량이 없었다.


무릇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서 한 평생을 살아가되, 어떤 사람은 벗을 마주하여 서로 회포를 나누고,

어떤 사람은 정회를 대자연에 맞기며 유람을 하기도 한다.


비록 취하고 버리는 바가 서로 다르고, 느긋하거나 조급한 성향도 각자 같지 않건만, 자신의 처지를 만족하며

잠시나마 득의하면 기쁘고 흡족함에 빠져 장차 늙어 죽으리라는 것도 모르는 법이다.


(그러나) 흥이 다하면 다시 권태로워지듯, 감정이란 세상사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감흥도 단지 그에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예전의 기쁨도 고개 돌리는 잠깐 사이에 곧 시들해지니 그로 인하여 더더욱 감회를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 목숨의 길고 짧음이 하늘에 달려있다 해도 결국에는 죽어야 할 운명임에랴.

옛사람이 이르기를 "死生亦大矣(죽고 사는 것이 역시 크도다)”라고 했으니 어찌 애달프지 않으리오!


매번 옛사람들이 감흥을 일으켰던 까닭을 살펴보건대 마치 내 마음과 딱 들어맞는 듯하여,

그들의 글을 보며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가슴에 와 닿지 않음이 없었다.


그런즉 삶과 죽음이 하나라는 말이나 팽조가 요절하였다는 식의 말이 얼마나 허황되고 거짓인지 알겠다.


후세 사람들이 오늘의 우리를 보는 것 또한 오늘 우리가 옛사람을 보는 듯하리니, 슬프도다.


오늘 모임을 가졌던 사람들이 모두 그 술회를 시로 적었으니 비록 후세에는 세상이 달라져도

정회가 일어나는 까닭은 한가지인즉 뒷사람도 이 글을 보면 또한 느끼는 바가 있으리라.

 

(원문)

永和九年, 歲在癸丑, 暮春之初, 會于會稽山陰之蘭亭, 修契事也.

영화구년, 세재계축, 모춘지초, 회우회계산음지난정, 수계사야.


群賢畢至, 少長咸集. 此地有崇山俊嶺, 茂林修竹; 又有淸流激湍, 映帶左右.

군현필지, 소장함집. 차지유숭산준령, 무림수죽; 우유청류격단, 영대좌우.


引以爲流觴曲水, 列坐其次; 雖無絲竹管弦之盛, 一觴一詠, 亦足以暢敍幽情.

인이위류상곡수, 열좌기차; 수무사죽관현지성, 일상일영, 역족이창서유정.


是日也, 天朗氣淸, 惠風和暢; 仰觀宇宙之大, 俯察品類之盛; 所以遊目騁懷, 足以極視聽之娛, 信可樂也.

시일야, 천랑기청, 혜풍화창; 앙관우주지대, 부찰품류지성; 소이유목빙회, 족이극시청지오, 신가락야.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或取諸懷抱, 悟言一室之內; 或因寄所託, 放浪形骸之外.

부인지상여, 부앙일세, 혹취제회포, 오언일실지내; 혹인기소탁, 방랑형해지외.


雖趣舍萬殊, 靜躁不同; 當其欣於所遇, 暫得於己, 快然自足, 不知老之將至.

수취사만수, 정조부동; 당기흔어소우, 잠득어기, 쾌연자족, 부지노지장지.


及其所之旣倦, 情隨事遷, 感慨係之矣. 向之所欣, 俯仰之間,

급기소지기권, 정수사천, 감개계지의. 향지소흔, 부앙지간,


以爲陳迹, 猶不能不以之興懷; 況修短隨化, 終期於盡. 古人云: "死生亦大矣." 豈不痛哉!

이위진적, 유불능불이지흥회; 황수단수화, 종기어진. 고인운: "사생역대의." 기불통재!


每覽昔人興感之由, 若合一契; 未嘗不臨文嗟悼, 不能諭之於懷.

매람석인흥감지유, 약합일계; 미상불림문차도, 불능유지어회


固知一死生爲虛誕, 齊彭傷爲妄作. 後之視今, 亦由今之視昔, 悲夫! 故列敍時人, 錄其所述, 雖世殊事異,

고지일사생위허탄, 제팽상위망작. 후지시금, 역유금지시석, 비부! 고열서시인, 록기소술, 수세수사이


所以興懷, 其致一也. 後之覽者, 亦將有感於斯文.

소이흥회, 기치일야. 후지람자, 역장유감어사문.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