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 잘 알려지지 않은 걷기코스를 찾아라..

무슨 미션 같은 일을 주말마다 한다..

그넘의 코로나 사태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2위 자리를 이태리가 차지하면서 세계는 펜데믹 상태가 되었다.

 

 

근신하기도 쉽지 않다..

주말에 인적 드믄 곳이라도 잠시 걸어야 소화가 되리니..

가까운 완주 봉서사로 간다..

왕년에 다녀온 곳이기에 뇌리를 스친다..

두억마을 경로당을 내비에 치고 가다가 봉서사 표지를 보고 좌회전하여 저수지 직전 공터에 차를 세운다..

 

 

 

간중제(용진저수지)를 끼고 가는 길은 여전하다..

 

 

 

 

그길에서 금년 첫 매화를 만났다..

예년같으면 남도로 매화구경 한창 다녔을 터인데..

시절에 어수하니 코로나 사태이후로 머리도 길어졌고, 고혈압 약도 간당간당한다..

 

 

촛점을 잡느라 부산한데, 매화 속 벌은 꼼작도 않는다..

얼어죽었나, 말라죽었나??

 

기다리다 지쳤어요

혼자서는 이밤이 너무 너무 추워요

땡벌올림

 

 

 

봉서사 근방의 바위에 웬 사람 이름이??

박기순??

개선불망비..

언젠가 절을 수리할 때 큰 시주를 한 모양인가?

 

 

 

범패시조 진감국사비가 있다..

진감국사는 신라 흥덕왕때 당나라로 구법여행을 떠나 마조선사의 문하 창주 신감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았다.

도의국사와 동시대 인물인바, 귀국하여 지리산 쌍계사에 자리잡았다..

그는 우리나라에 범패를 처음 도입했고, 차나무를 들여와 다도문화에 기여했다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 중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탑비가 그에 관한 것이다.

그의 비가 이곳에 선 이유는?

진감국사는 쌍계사에 주석할때  고향인 익산군 금마를 방문하면서 봉서사에 들러 범패를 가르쳤다고 한다

 

 

 

납골묘지는 관리가 되지 않고 잡초가 무성하고..

 

 

진묵대사의 부도탑엔 여전히 곡차가 가득하다..

 

 

응?? 이건 무슨 시추에이션인가?

그간 이절을 중창한 호산스님의 아들과 태고종이 송사를 하고, 태고종이 승소한후에는 주지 자리를 두고 분쟁이 발생해서 잘 관리가 되지 않는 듯하다.

 

 

 

범종각에는 진묵대사의 시귀가 여전하다..

 

天衾地席山爲枕 (천금지석산위침)
月燭雲屛海作樽 (월촉운병해작준)
大醉居然仍起無 (대취거연잉기무)
却嫌長袖掛崑崙 (각혐장수괘곤륜)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삼고 산을 베개 삼고

달을 촛불삼고 구름을 병풍삼고 바다를 술통 삼아 

크게 취하여 거연히 일어나 춤을 추니

어허 긴 소맷자락이 곤륜산에 걸리겠구나!

 

진묵대사는 무애행으로 걸림없이 살았다는데, 후인들은 유애행에 걸림들이 많구나.


 

 

작은 조사전에 진묵 모자의 영정이 같이 있다..

효자인 진묵은 자신의 출가로 어머니의 제사가 끊길까 염려하여  무자손 천년향화지지에 어머니 무덤을 썼다..

과연 그 곳에 성모암이라는 절(김제시 만경읍 화포리)이 생겨 지금껏 제사를 모시고 있단다

 

진묵대사는 서산대사와 동시대를 살았다..

(자세한 비교는  http://blog.daum.net/servan/6349482  참조)

 

진묵대사는 만경읍 화포리에서 태어나 이곳 봉서사에서 출가했고, 오도한 후에는  김제 망해사에 보임을 했다고 한다..

http://blog.daum.net/servan/6349575 참조

 

그는 호남지역의 전설적인 도인으로 숭상되었고,  원불교 창시자 소태산도 봉서사를 가보고 싶은 곳 3군데 중 하나로 꼽았다고 한다..

 

 

진묵의 행각은 민간에 전설처럼 전해지고 있다.

그와 유학자 봉곡선생과의 일화도 많이 전해진다..

봉곡 김동준은 사계 김장생의 문인으로 성리학자였다

진묵이 봉곡으로부터 책 한질을 빌려 가면서 보다가 절에 도착하엿을 때 다 보고 다 외웠다던가 뭔가..ㅎ

 

 

이 그림은 진묵과 봉곡 여종의 이야기를 형상화 한 것인가??

http://blog.daum.net/wboss/4270047 참조 

 

 

이 산에 진묵이 머물 때가 명산이엇다.

 

그래서 누실명에서 이렇게 말한다

산이 높지 않더라도 그 안에 신선이 있으면 명산이요 (山不在高 有仙則名 )

물이 깊지 않더라도 용이 살면 신령함이 있다(水不在深 有龍則靈) 

 

 

 

 



코로나 바이러스가 기승이다..

확진자가 3600명에 육박하고  18명이 사망했다.

사스, 메르스는 저리가라다.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는다고 난리다.

한나라만 막으면 될 걸 때를 놓치니 60개나라에서 출입을 막는다..

"감염주도 방역"라는 비아냥이 나온다..

"소득주도 성장" 빗대어 하는 소리다..



모임이나 사람 많은 데 가지마라고 방송이 난리부르스니

이런 때 집에 근신하거나 나가도 마스크 쓰는 것이 남을 위한 봉사가 되는 판이다..



아무리 난세이지만 집에서만 근신하려니 소화불량에 걸릴 지경이다..

그래서 궁리하기를 사람이 적은 트레킹 코스를 찾아가기로..

평소에는 인기좋은 코스를 찾다가 인기 없는 코스를 찾을려니 웃으운 생각이 든다..

개똥도 약에 쓸라면 없다는 형국이다..

평소 멀리 돌아다니느라 못갔던 주변의 코스를 찾아본다..



공주 금학생태공원으로 갔다..

작은 저수지를 낀 둘레길은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사람이 적을줄 알았더니 주변에 공주산림휴양마을이 있어서인지 걷는 사람이 많다..




저수지 둘레길은 너무 짧고 지도를 보고 주변 주미산으로 올라간다...

제법 걷기 좋은 오솔길이 이어진다..

물론 사람도 거의 없으니 오늘의 목적에도 부합하고..





이제 식당가기도 꺼려지는 판이라..

뜨거운 물과 컵라면을 지참해서 좋은 자리잡아 점심으로 대신한다..

이 난세를 슬기롭게 헤쳐가야지..





우한 코로나가 확산되어 대구는 몇백명, 대전에도 2명의 확진자가 생겼다.

"문열어 놓고 모기를 잡을 수 있느냐?"

"겨울이라 모기가 없다"

는 식의 웃기는 논쟁을 하는 동안 어떻게 들어왔는지도 모르게 코로나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어가고 있다..

"겨울에 추운데 왜 문열어 놓았나?'하고 반문하고 싶다..

이제 모기장이라도 펼치고 그안에 들어가야 할까부다.

***

이런 상황에서는 사람이 드문 자연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떠오른 곳 완주 화암사다.

6년만에 찾아간다.

http://blog.daum.net/servan/6349624 참조



그사이에 사람도, 길도 변했다.

사람이 변한 것은 다리를 다쳐 걷는 거리가 줄었다..

해서 전보다 더 절에 가까운 곳에 차를 주차하고 걸어간다..



길이 변한 것은  절가까이 넓은 주차장이 생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길도 넓어지고 데크도 많이 만들고 복수초에 관한 스토리텔링이 생겨났다..






며칠전 내린 비로 계곡과 이끼가 반들거리는 이 구간만은 예전 그대로다..





물길과 사람길이 조화로운 구간은 이제 새로운 전통으로 자리잡아 간다..






안도현 시인의 시가 변함없이 걸려있다.

잘 늙은 절이라 칭송하고 잇지만, 본인은 잘 늙어 가고 있는지.

최근에 조국 사태에 대한 그의 입장은 한국의 에밀 졸라 진중권에게 조롱당할 정도이니..





우화루는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반기는데, 검둥이는 사라졌네.

처마 밑에 안자 먹거리를 나누었는데..





우화루에 걸린 목어에 검둥이 모습이 스며있는듯..




우화..꽃비..

이 꽃은 복수초를 말하는 것인가?




선조때 건축된 대웅전과 광해군 때 만든 동종이 오랜 세월을 견뎌왔다.




내려오는 길에 복수초 밭을 만났다..



복수초..

이름 좋다..복과 장수의 꽃이라니까..

꽃말도 영원한 행복이다..

이른 봄에 남먼저 피어나니 이 꽃을 보는 사람에게 복과 장수, 영원한 행복의 덕담을 주는 듯하다.


한편, 서양이름은 아도니스란다.

그리스 신화에 의하면, 아도니스는 비너스의 애인인데, 그가 죽어서 핀 꽃이 아네모네라는 것이니,

서양인들은 신화와는 동떨어진 작명을 한 것 같다.



화암사에서 복수초로부터 복과 장수의 수기를 받은 것 처럼 기분좋게 돌아간다.. 



우한코로나 땜시로 근신모드인데..

잠벗의 제안으로 광덕산 광덕사를 간다...

광덕산 서편은 아산 외암마을이고, 동편은 광덕사가 있다..




바위의 화두..이뭐고..시심마..

항상 견문각지하는 이것이 무었인고? 하고 반조하는데 길이 있나니..



광덕산 광덕사인줄 알았는데, 태화산 광덕사라고 써있다..

지금은 태화산과 광덕산이 많이 떨어져 있는데, 왕년에는 광덕산이 태화산이었나?



일주문 뒤 현판은 호서제일선원이다...

호서??

호(湖)의 서쪽에서는 제일가는 선원이라는 뜻이다..

어느 호(湖)를 말하는가?

1) 단순히 호수로 보아 제천의 의림지를 말한다는  설..

   그럴경우 호서란 충청도를 뜻한다.

 2) 미호천의 호를 의미한다는 설.

    그러면 미호천 서쪽 충남지역을 가리킨다..




세종의 3째아들 효령대군이 경을 배껴쓴 사경을 부인과 함께 이절에 시주하였단다..




찻집의 호객행위가 은근하다..



보화루 앞 호두나무가 천연기념물이란다..

지금부터 700년전 고려 충렬왕 때 유청신이 호두 종자를 들여왔단다..

이 나무는 그 때 이식한 호두나무의 후손 중 제일 오래된 나무다..

그덕에 광덕면의 호두생산량이 60%를 차지 한다..

이런 호두 생산이 있었기에 1937년 천안명물 호두과자가 나오게 되었다.



유청신..

그는 전라도 고이부곡 출신인데, 몽고말을 잘해 원나라 측에 잘 응대해 충렬왕의 신임을 받아 벼슬이 장군반열에 오르고, 그 덕에 고향은 고흥현으로 승격된다..

그러나 그는 고려를 원나라의 일개 성으로 만들려는 주장에 가담하는 등의 행동으로 고려사 간신전에 등재되었다.. 


유청신이 들여온 호두나무가 우리나라 최초의 호두나무인지에 관하여는 논란이 있다.

신라시대 민정문서 즉 신라장적에 호두나무가 등장하기 때문에

유청신이 들여온 호두나무는 우리나라 최초가 아니라 단지 중국산 호두나무의 도입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







광덕사의 창건시기에 관하여

절 입구에는 신라 선덕여왕 때 자장률사가 창건했다고 써놓고,

대웅전 표지에는 신라 흥덕왕 때 진산화상이 창건했다고 써놓아 서로 모순된다..

생각컨대, 천안 광덕 지역은 선덕여왕 당시에는 신라의 땅이 아니었으므로 통일신라 시대인 흥덕왕 때 창건설이 맞는 것 같다..



돌연 적선당에서 웃음소리가 낭자하다..

고요히 선열에 잠기는 방인데??

아마 오늘이 정월 대보름이라 모처럼 윳놀이라도 하는 모양이다..



절구경을 마치고 절 뒷산 광덕산으로 향한다..





팔각정 직전 길다란 계단을 보고 돌아선다..ㅎ

요즘 무릎 보호기간이다..



내려오다가 장군바위 쪽으로 올라가니 완만한 오르막이라 걷기 좋다..




그것도 잠시 늦은 시간이라 적당히 돌아선다..



돌아오면서 생각한다

아직 십리라도 걸을 수있는 다리가 남아있고, 밥 1그릇 소화시킬 힘도 있다.

기적이 없었다면 기적이란 단어는 없을 것이란다..

희망과 기적을 믿으며 꾸준히 걸으리라..



광덕사 설경이 좋다니, 눈올 때 와보시라..






계룡산 북편으로 간다..

우한 페렴에 겁먹고 사람이 적은 곳으로 가는 것이다..

벌써 사스보다 많은 3백명이상이 사망했다..

우리나라도 18번째 확진환자가 광주에서 발생했다..

전국이 자발적 근신 중이다..

진원지인 중국인의 입국을 제한해야 확산을 막지 않을까?



상신리 마을회관 이름이 선유당이다..

신선들이 노는 집..

이런 동네 오래 살면 저절로 신선이 되겠다..



구룡사지에 갔더니 전망 좋고 양지 바르다..

절터에 군침흘리며 돌아선다..






계룡산 임도로 들어섰다..

계곡따라 걸어가는 오솔길이 정겹다..






이곳에 구곡을 설정한 노인네 심사는 요즘 잘나가는 송가인 펜카페에 가입한 노인네와 비슷하겠지..ㅎ

모두 풍류를 즐기며 늙어가는 것을 잊으려는 마음..

내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구곡의 원조 중국 무이산을 가고 말리라..



철조망을 치면 우한바이러스를 막을 수 있을라나?



애초엔 길이란 없었다.

많은 사람이 다니며 생겼기에 길이 되었다..

지금은 만들어 유도하기도 하지만..



무슨 어려움이 닥쳐도 궁리하다보면 빠져나갈 길이 생기기 마련이다.



연약한 나무도 단단한 바위를 우짜든지 감싸안고 공존하는 길을 찾았다..



불끈 바위에서 힘을 얻어도 잠시뿐..

밀려오는 눈꺼풀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렵다..

비몽사몽간에 내려오는데..

용트림치는 이무기가 보이고..



갑자기 죠스도 눈에 들어온다..



십리짜리 다리와 오래된 오수 땀시로 큰배재도 못보고 내려온다..




우한코로나 영향인지, 피자집도 휴업이다..

그래도 동네운영 간이식당은 운영중이다..

4000원짜리 잔치국수와 5000원짜리 야채전으로 배를 불린다..

배가 불러야 우한코로나도 이길수 있다..ㅎ





여주 걷기여행의 도화선이 된 폰 박물관..

백북스 특강에 "수집가의 철학" 책의 저자, 이병철씨의 강의를 들었다..

해직 기자에서 소일거리로 시작한 집필, "석주명의 나비"로 히트를 치기도 했는데, 어느 때 부터 폰에 빠졌다.. 

우리나라가 스마트폰 세계강국인데, 폰 박물관 정도는 있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한 생각이 폰 박물관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개인이 감당하기는 벅차기에 여주시에 수집품을 기증하고,  박물관장 공모에 응해 관장이 되었다..



이곳에는 폰의 역사와 유물..우리나라 스마트 폰의 성장이야기가 들어있다.



처음 이야기는 최초의 전화기는 물 전화기였다는 말..




그리고 물전화기는 자석 전화기로 진화하여 1876년 유선전화의 시대를 열었다..



20년뒤인 1896년 마르코니가 무선송수신기를 개발한다..

나중에 유선전화와 무선송수신기가 결합하여 정보통신이 된다..




스웨덴 자석식 전화기

1890년대 고종때 서울- 인천 간에 위 전화와 비슷한 에릭손 전화기를 개설했단다..

김구선생이 민비 살해 일본 낭인 살인 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인천감옥에 수감중 위 자석식 전화를 통행 감형통보을 받앗단다..



금성사 전화기..60년대말 우리 집에도 개설되었다..





1992년 정보통신이 이루어진다..

아날로그 전화가 문자와 사진을 전송하는 디지털 방식으로 바뀐다..

1994년 전화와 컴퓨터가 결합한 PDA폰이 나오고 스마트폰으로 진화하기 시작한다..



1983년 최초의 휴대폰이 등장한다..





1989년 최초의 폴립형 휴대폰..

모토롤라 제품이다..




휴대전화 시대 잘나가던 핀란드의 노키아 전화..2003- 2009년 까지 전성기를 구가한다.






한국은 1996년 CDMA 폰을 개발..1997년 수출하기 시작한다..




2002년 삼성폰을 1000만대를 팔았다..







한 때 삐삐의 전성시있었다



위 사진 중앙에 있는 것이 내 애용하던 삼성폰이다..

한편, 스티브 잡스의 애플사가 스마트폰을 개발하자, 모토롤라, 노키아 등 전통의 강자가 레이스에서 탈락한다

하지만, 삼성은 스마트폰 흐름에 잘 올라탔다..

현재 애플과 삼성이 양강인데, 중국의 화웨이가 도전하고 있다..

기술의 흐름을 예측하고 선도하고 동참하지 않으면 도태되는 진화의 최전선이 폰의 역사이다..




우리나라 스마트폰의 선전은 공급측인 스마트폰의 기술과 수요측인 한글 사용이 시너지를 발휘한 덕이다..

나라는 작아도 스마트폰 활용자는 엄청많고, 그것도 2년내에 최신폰으로 바꾸는 열성 활용자가 많으니 스마트폰 내수 시장도 크고 경쟁도 치열하다.

치열한 경쟁이 잇었기에 스마트폰이 세계 시장에서 몸싸움할 체력을 키웠던 것이다..

우리나라만의 월드클래스급 경쟁력은 스마트폰, 원자력 등이다..

이런 것은 계속 키우고 발전시켜야 한다..

젊은이들이 공무원을 선호하게 만드는 시대는 앞으로 미래가 두렵다..







여주 신륵사로 향한다..



이 절은 세종대왕 영릉이 옮겨오자 영릉의 원찰이 되었다.




불이문의 사천왕도가 인상적이다..








조사당에 지공, 나옹, 무학 대사의 영정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우선 이절은 나옹화상과 인연이 깊다..

그가 이 절에서 열반하여 다비할 때 많은 사리가 나왔다고 한다..


나옹은 충목왕 때 중국 원나라에 구법유학을 떠났다..

거기서 인도 출신 지공화상을 만나 제자가 되었다..

수행끝에 지공과 평산 처림의 인가를 받고, 수년간 중국에서 설법하였다.

공민왕 7년 고려로 돌아와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의 환대를 받는다..

광명사에서 오교양종의 모든 승려들을 상대로 공부선을 주관할 때 환암 혼수를 인가한다..

그후 주로 양주군 회암사에 주석했다..

그러나 화암사 중창을 거창하게 하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자, 역풍을 맞는다..

우왕 2년에  경북 밀양 영원사로 떠나라는 왕명을 받고 병든 몸으로 가던 중 신륵사에서 열반에 이른다..

세속 나이 57세, 법랍 37세 였다..

그의 제자는 환암 혼수, 무학대사 등 48명이 된다..



지공화상과 나옹선사의 사리가 보관된 라마탑형 사리함..

일본인에 의해 도굴되어 현재는 미국 보스턴 미술관에 소장되어 잇단다..



한국 조계종의 종조가 누구냐? 하는 논쟁이 있다


- 신라말 당나라에서 육조 혜능의 선불교 계통을 이은 구산선문 중 가지산파 창시자 도의국사를 원조로 하는 것은 다툼이 없다..

그러나 고려 대몽항쟁기에 도의국사의 법맥이 유명무실해진다..

고려말 중국 원나라에 구법유학을 한 인물들이 있었으니, 태고 보우, 나옹 혜근, 백운 경한 등 3명이다..

태고 보우는 임제종 석옥 청공의 인가를 받앗고, 나옹은 평산 처림과 지공의 인가를 받았고, 백운은 석옥과 지공의 인가를 받았다..

그런데 종조가 되려면 출중한 제자들로 법맥이 이어져야 한다..

나옹이 왕명으로 공부선을 개최하였을 때 환암 혼수를 인가하였고, 환암 혼수는 태고 보우의 인가도 받는다..

한편, 환암 혼수의 법맥은 청허 서산, 사명당 등을 거치면서 우리나라의 대표 법맥이 되었다..

따라서 조계종의 종조가 되려면, 환암 혼수를 인가한 나옹이나 태고 보우가 되어야 한다는 귀결이 된다..


이에 대해 기성종단(비구 + 대처)이었던 태고종은 태고 보우선사를 종조로 모셨는데,

그러나 대처승 퇴출을 주장하며 등장한 현 조계종은 종조를 보조국사 지눌로 모시는 것으로 차별화하였다..

보조국사 지눌은 중국에 유학한 적도 없고 국내에서 육조단경과 서장을 가지고 수도하여 독자적으로 깨달은 분이다..

그래서 스승과 제자의 인가에 의한 전등설에 의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에서 현재까지 법맥이 이어지지 않는 단점이 잇다..


그후 성철 스님이 이의를 제기하고, 보조국사를 종조로 하면 불교의 법맥이 이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환암 혼수의 스승으로 중국 임제종의 맥을 이은 태고 보우선사를 종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최근에 한 스님은 환암 혼수의 진정한 스승은 나옹선사라고 주장하면서, 나옹선사를 조계종의 종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보조국사 지눌, 태고 보우 선사, 나옹 혜근 선사 중 누구를 한국 조계종의 종조로 보아야 하는가 하는 것이 쟁점인데

결국 훌륭한 제자로 이어진 라인(법맥)이 어디냐가 종조 논란의 귀결이다..

종조 논쟁은 위 3분 중 누가 도력이 뛰어나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 법맥이 오래 훌륭한 제자를 끊이지 않게 배출햇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https://shindonga.donga.com/3/all/13/859548/2  참조



나옹선사의 유명한 시가 있다..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나옹의 제자 중에 뛰어난 사람은 환암 혼수와 무학 대사인데,

환암 혼수는 고려의 마지막 국사로서 조선 건국 무렵 사망하고, 조선초기 무학대사가 각광을 받으면서 나옹의 법맥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나

조선 중기 이후에 그 법맥이 끊어지고, 법맥이 계속 이어진 환암 혼수 법맥이 주류가 되었다..

즉, 오래 살아남는 자가 강한 것이다.



안동 김씨 세도정치 때 사람 김병기의 송덕비가 절에 서있다.

왜 여기에 있을까??


1856년(철종 7) 4월 12일 여주읍내에 큰 불이 일어나 가옥 수백 채가 불에 탔는데 김병기가 그의 아버지 김영근과 함께 수백 석의 식량과 돈을 풀어 백성들을 구휼한 바 있는데 이를 기리기 위한 공덕비가 경기도 여주시 영월루 공원에, 여주시 신륵사에 송덕비가, 여주시 상동에 구휼비가 세워져 있다.

당시 안동 김씨 중에서는 인덕이 있는 사람인 모양이다..

당시 흥선대원군과도 좋은 관계를 맺었기에 대원군 집권시 안동김씨를 퇴출시킬 때에도 김병기만은 예외로 중용한다..




은행나무 한 줄기에서도 보살을 찾는 정성..ㅎ



구룡루

원효의 창건설화에 등장하는 아홉 룡과 관련이 있다.




보우, 나옹과 변조 신돈은 같은 시대를 살았다.

보우는 공민왕의 국사, 나옹은 왕사 대접을 받았는데,

신돈은 노국대장공주 사후 공민왕의 신임을 얻어 6년간 개혁정치를 시도한 인물이다.

신돈은 불교계에서는 화엄종 사람들을 기용하고, 보우와 나옹을 박해했다고 한다.

1371년 신돈의 실각후 보우와 나옹은 다시 중용되었다.




여기도 황포돛배가 다닌다..

강에는 배가 다녀야 강 답다..

강은 근대까지 고속도로역할을 했다..

이 강으로 영월 아우라지의 뗏목이 내려왔으며, 이황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도 배를 타고 갔고, 나옹도 여주에 올 때는 배를 이용했다고 한다..





강 건너는 금은모래 강변유원지이고 폰 박물관이 있다..




지난 12월의 여주 걷기

전 주에 "수집가의 철학"의 저자의 특강을 듣고 갑자기 마음이 동했다..

그는 여주 폰 박물관 관장이기도 한다..

우리나라가 스마트폰의 강국이 된 것은 기술력 뿐 아니라 한글이 한몫을 했다고 본다..

한글로 스마트폰 입력이  편리하기 때문에 저변이 손쉽게 확대된 것이다...

한글의 창시자가 여주에 잠들어 있다..

세종대왕의 영릉(英陵)..

물론 그 옆에 같은 이름의 효종의 영릉(寧陵)도 있다...

결국 여주걷기는 한글테마 걷기가 된 셈이다..







조선을 조선답게 만든 임금..

내치로는 인재육성(집현전), 과학기술 육성, 음악진흥, 한글창제

외치로는 북로 남왜 정책으로 대마도 정벌, 6진개척을 들 수 있다..

그야말로 부국강병정책으로 나라을 안정시킨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그리고 한국인의 자존심이 된 한글 창제다...

그가 만원권의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이유다..

그 한글로 인해 우리가 스마트폰 시대를 주도한다는 거..

나비효과라고 할까??












음악을 정비하면서 편종..

편종은 중국 은나라 때부터 왕의 행사에 사용되었던 악기인데, 고려 예종 때 송나라에서 수입되었다..







편경..



백아(흰기러기)는 편경이 흰 기러기 울음 소라처럼 청아함을 상징한다..



편경과 편종은 음악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나?

편종이 한 옥타브 더 높은 소리를 낸다.

종묘제례악에서 같이 연주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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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종의 영릉은 공사하는 중이라  사진방문으로 대신한다..




효종의 북벌 정책에 대해 생각한다..

그의 정책에 누가 동조했을까?

우암 송시열이 동조했다고?

그는 관념적 북벌론자였다..

효종 사후 그는 제갈량 처럼 북벌을 주장하지 않았다..



효종 시대의 조총부대를 보며 생각한다..

임진왜란 후 정예 조총부대를 양성했더라면 후금의 기마병을 조총으로 격파하였을 것이고,

그러면 조선이 고려 시대 거란을 물리친 것처럼 천하는 3분 되었을 터인데..ㅎ

하지만, 조선의 조총부대에 대한 관념은 전혀 발전이 없었다..

구슬이 서말이면 뭐하나, 꿸 줄아는 사람이 없는데..ㅎ

병자호란 쌍령전투 때 조선의 조총병은 미숙한 대처로 청나라 800기병에 박살나고 몇만의 영남 근왕병이 붕괴되고 말았고..

결과적으로 고립무원이 된 남한산성도 항복할 수 밖에 없었다는..

그 때 조선에 오다 노부나가처럼 조총부대를 3단 연속사격의 개념으로 훈련 시켜 청나라 기병과 대적했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인데..

그럴만한 왕이나 장군이 잇어야 하는 것인데, 인조 정권에서는 기대할 수 없었다는..

인조야 말로 아버지 선조처럼 아주 위선적인 리더였다는..

지금의 문통도 거의 같은 수준 아닐까??







세종대와의 영릉은 공사중이라 멀리서 알현만 하고 효종의 영릉으로 간다..






왕의 숲길은 5월 -10월만 개방한대서 멀리서 눈팅만 하고 간다..



효종의 영릉







영릉의 숲길을 걸으며 조선의 흥망성쇠를 생각한다..

문약에 빠져 입으로 싸우던 사람들..

그 유전자가 내려와 지금도 입과 댓글로 싸움을 지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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