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 격포항 여객터미널에 7시에 도착했다..

원래는 가거도에 갈 예정이었는데, 일본행 태풍의 영향으로 남해, 동해안 풍랑이 심해 서해로 방향을 돌렸다.

위도 섬 안내도를 보니, 등산 트레킹 코스가 엄청길다..

애고, 이번엔 편히 쉬는 캠핑이 어렵겠구나..

 

위도행 카페리는 아침 7시 55분경 첫배이고, 하루 4회 운행한단다.

그런데, 7시에 도착해서는 첫배자리가 없다.

먼저온 사람 말로는 6시경에 도착해야 첫배를 타고, 그것도 마지막에 차를 실고,  내릴 때 선방으로 가야 좋은  캠핑장소를 선점할 수 있단다.

그리고, 나오는 배까지 왕복으로 끊어야 안전한단다..

고수에게 배우는 노하우가 꿀팁이다..ㅎ

 

결국 첫배를 놓치고, 채석강 주변에서 어슬렁 거리다가 9시 55분발 2번째 배로 간다.

이 곳 갈매기는 꼬깔콘도 잘 받아먹는다..

격포항과 내변산이 아름다이 환송한다..

 

50분을 가면 위도와 식도가 손을 맞잡고 환영한다..

 

파장금항에 내려 서둘러 캠핑장소인 위도 해수욕장으로 갔으나, 눈독 들인 나무데크 4곳은 이미 전날 온 팀들이 선점하고 잇엇다.

주변에 캠핑 팀들이 많이 있는데, 전망좋고 물 구하기 쉬운 잔디 밭에 쉘터를 설치하고,

소세지 안주로  와인부터 한잔하니 세상이 핑크빛으로 보인다. ㅎ

 

점심 식사를 서둘러 마치고 위도 종주 트레킹을 나선다.

가는 길에 만난 식도의 풍광..

3일째 아침에 식도에 들르마 약속을 했는데..ㅎ

 

위도 종주의 시작은 석금 방파제에서 시작한다.

노부부가 저녁거리 낚시를 하고 있다..

 

종주 산행 능선 아래에 자리잡은 대리마을..

갈매기와 먹거리를 공유한다..

 

위도에는 이런 고슴도치 조형물이 많고, 길 이름도 고슴도치길로 명명했다.

연유를 보니, 위도 섬모양이 고슴도치 모양이란다.

그런데, 고슴도치가 가슴에 품고 있는 넘은 토끼섬이다.

 

등산로 입구에 캠핑카를 세운 노익장들..

조개를 삶고, 전어를 굽는다.

캠핑와서는 여러가지 해야한단다.

먹거리 현지에서 장만하고, 놀거리 이것 저것 할 줄 알아야 한다.

차에 건반도 실고 다닌다.

저녁에 만나 반주에 맞춰 노래가 한곡 했으면..ㅎ

 

차에 씌인 한 귀절..

Time and tide wait for none

시간과 물결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도연명도 같은 말을 했다.

歲月不待人 세월부대인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고..

 

그런데, 그는 멋진 시를 덧붙엿다.

 

盛年不重來 성년부중래
一日難再晨 일일난재신
及時當勤勵 급시당면려
歲月不待人 세월부대인

 

좋은 시절은 다시 오지 않으며
하루는 두번 새지 않는다 
때에 맞게 열심히 살아라 
세월은 사람을 기다리지 않는다.

 

오늘에 맞는 트레킹 열심히 올라가 보자.

오늘은 종주코스 중 절반

석금 - 망금봉 - 위도해수욕장 약 7km를 걷는다.

망금봉 높이가 240미터라고 우습게 보면 안된다.

해발 0 에서 출발하니까..

 

석금 등산로는 처음부터 얄짤없이 가파른 등산로를 올라간다.

돌아보니 거륜도가 보인다.

섬 중의 섬에 몇가구가 산다..

 

거륜도 우측으로 오조도, 중조도, 내조도가 보이고..

이른바, 조도 시리즈..ㅎ

왕년에 유행하던 유머..

만지면 커지리..ㅎㅎ

 

방파제에서 바라보면 대리마을..

핑크지붕..어게인 마을인가?? ㅎㅎ

 

숲길 오르막에 바람도 없어 답답하게 걷다가 능선오르자 가슴이 탁 터진다..ㅎ

 

아름다운지고..이 능선길..

 

숲길에서 야생 염소와 눈이 딱 마주쳤다..

한동안 서로 바라보다 카메라로 찍을 때까지 기다려준 모델 정신에 경의를 표한다.

 

한참 헉헉 거리고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란다..

아직도 망금봉 2km나 남았다..

이 코스 7번을 M자 형으로 오르락 내리락해야 한다.

망금봉은 높이 240m이지만, 7번 오르막을 누적하면 누적 고도는 800미터 급을 오르는 것 같다..ㅎ

 

망금봉 가는 도중 바라보는 미영금 해수욕장과 날마펜션 의 풍광..

 

또 한구비 너머가면 보이는 곳은 깊은금 해수욕장이다.

왜 이리 금이 많은가??

금딩이가 아니고..

지형에서 보듯이 오목하게 들어간 지형들이다..

후미>> 구미 >> 금으로 발음이 변화하여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서너차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한 끝에 도착한 망금봉 정상

 

망금봉 표지석도 없으니 각자 카톡이나 하면서 맥칼없이 쉰다..

망금봉을 지나면서 위도 해수욕장과 배후의 위도 상수원 댐이 보인다..

 

저 아래 보이는 길은 깊은금에서 치도리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다..

 

치도리 해변 앞에 있는 섬은 딴치도 란다..

재미잇는 지명이다.

본명 옆에 있다고 딴 자를 붙이는 작명..

 

망금봉에서 치도리 도로로 내려가는 길에 잘 다듬어진 계단..

그런데, 어떤 길은 전혀 정비가 안된 길도 잇고..

담당자의 성실도에 따라 다른가??

 

도로에서 맞은편 가족묘 옆으로 올라간다..

도제봉으로 가는 길이다..

 

 

 

치도리 앞 딴치도..큰 딴치도, 작은 딴치도..

첫 구분 딴, 소구분 큰,작은,  

멘델의 학명처럼 작명구조가 명확하다..ㅎ

 

 

웃을 일이 아니다.

도제봉 전 삼거리에서 위도 상수원댐 표지를 보고 가는 길이 심상치가 않다..

초입부터 잡초가 무성하더니, 진행할 수록 길 자취가 사라진다..

이 등사로는 폐도 햇나?

폐도 했으면 안내도에 표시를 해주고 대안을 제시해야 하지 않을까?

 

숨돌리며 돌아보니 오늘 지나온 능선들이 훈장처럼 늘어서 있다..

 

길에 국가지점번호가 있으면 관리하는 등산로라는 얘기인데, 길이 구분이 안된다.

이 표지판 좌측으로 가야할까? 우측으로 가야 할까?

우리는 길이 좀더 분명해 보이는 우측으로 갔는데, 상수원댐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럼 왼쪽으로 진행했어야 하나??

 

우측 방향으로 가며 보니 등산로 줄도 있고, 썪어가는 벤취도 있어 왕년에는 등산로였음이 분명한데,

이제는 폐도 상태라..가면 안되는 길이다..

하지만, 숙소인 위도해수욕장으로 가려고 부득이 진행한다..

또 6시 마지막 버스 떨어지기 전에 석금으로 가서 차도 회수해야 하고..

 

길은 험난하고

마음은 심난하고

다리는 칡넝쿨이 잡고

얼굴은 거미줄이 잡고

해는 떨어지고

날은 어두워지고

 

상황이 꼬일수록 다리 아픔은 사라지고 가슴이 긴장된다..

하여간 길가로 내려오긴 했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위도 해수욕장 방향 하산을 구상하는 분은  갈림길에서 위도 상수원댐 표지방향으로 가지말고, 도제봉 방향으로 더 직진하면 치도교 출렁다리를 만나는데,

거기서 차도를 따라 위도 해수욕장으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

 

우여곡절 끝에 6시 막차 버스를 타고 석금으로 가서 차량도 회수하고, 

헤드랜턴 달고 텐트도 치고, 오겹살도 구워 와인과 마시고..

10시쯤 지치고 취한 몸을 텐트에 뉘인다..

 

 

하의도 웅곡선착장에서 목포로 가는 뱃시간이 넉넉하다.

김대중 생가 옆 소금창고와 염전을 구경한다.

 

와서 보니 소금이 귀한 이유는 하늘을 담아 결정체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름 과학적 마인드로 바닷물을 요리조리 교통정리하고, 비가 올땐 고농도 소금물을 창고에 저장하기도 한다.

 

염전의 불래앤 화이트 사이에 모든 것이 그림이 된다.

 

이번에 큰바위 얼굴 표지를 보고 달려간다.

내비가 이상하게 좁은 길로 안내해 고생한다.

관광후 하의면사무소쪽 나가는 길은 넓고 좋던데..

 

자세히 보니 큰바위 얼굴은 처용이 웃는 모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처용얼굴을 한 스핑크스라 할까?

 

말년의 DJ도 고향을 돌아보면서 이곳을 들렀나 보다.

 

다음 행선지는 모래구미 해수욕장이다.

그런데 해수욕장이라고 하기에는 모래사장이 손바닥만 하다.

 

당초 계획엔 캠핑첫날 이곳 데크에 캠핑하려고 한 것인데,

이제 와 보니, 안하길 천만 다행이다. 

데크도 3개뿐이고 다 노후하고, 공간이 너무 좁다.

 

돌밭의 해수욕장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 캠핑여행은 이리 저리 잘풀린 케이스다..

 

천사의 섬을 떠날 때는 비너스급 천사가 환송을 한다.

선실에서 한참을 뒹굴거리니 목포에 도착한다.

 

유달산이 환영해준다.

그사이 목포에도 해상케이블카가 생겼다.

한번 유행이 부니 바닷가는 케이블카요, 산과 저수지는 출렁다리로다..

 

유달산 정상은 이등바위에서 막걸리 한잔에 목포의 눈물을 부르던 시절과 별 변함이 없구나!! 

 

고하도 용오름 길도 여전하구나.

이제 해변 데크도 자식처럼 낳아 키우고 있네..ㅎ

 

 

해상 케이블카 타고 가자는 일행도 잇엇는데, 이 시간에 이거 타고 가면 대전엔 오밤중에 도착해서 곤란하다고 달랜다.

여기도서도 밤중 무서운 변소처럼 빨간 것과 하얀 것이 있다.

여기서는 하얀 것이 더 무섭다.

밑창이 유리니까..ㅎㅎ

 

 

목포의 맛집을 찾아 저녁을 먹는다.

1만원짜리이상 메뉴는 못하고 7000원짜리 메뉴만 한단다..

어찌되었건 한상 차려놓고 가인이 선전하는 잎새주를 시켜 한잔하면서 

가인이 부르는 "목포의 눈물"을 들으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 한다.

 

 

youtu.be/AC0UzW_rO9Y

신도에서 배를 타고 하의도 당두선착장에 도착했다.

이곳까지는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배에서 내리자 마자 김대중 생가로 향한다.

이 곳에 캠핑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길가에 천사들이 늘어서 있다??

신안군이 1004개의 섬이 있다고 광고하더니, 상징을 천사(엔젤)로 슬적 치환한다.

더구나 김대중 생가 앞에 집중 배치하니, 마치 천당으로 가는 길을 연출하는 모양새다..

 

생가 앞에 그는 비둘기를 들고 있다.

비둘기??

노아가 대홍수 끝에 육지를 찾으려고 날려 보냈던 새..

그래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성령을 상징하기도 한다.

복원된 생가는 생각보다 크다. (구미의 박정희 생가보다..ㅎ)

실제 집터는 작은 것을 보면 실제와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한다.

 

그는 이곳에서 1924년에 태어나 1936년 목포로 이사갈 때까지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무엇하는 사람일까?

안내문에는 일본인 땅의 소작인이었다고 한다.

단순한 농민이 아니고, 이장을 지내고, 소작쟁의 때에는 앞장서는 말빨이 있는 사람이었단다.

 

그는 하의도에 소학교가 들어서기 전에 서당에서 공부를 했다.

그래선지 그는 서예휘호를 많이 남겼다.

하의도에 소학교가 생기자 10살 쯤 하의 보통학교에 입학한다.

4학년 때 목포로 전학간다.

중고등학교 때는 은행원을 목표로 공부했단다.

그 당시 식민지 학생들의 안정된 직업은 은행원, 교사였다.

박정희는 사범학교에 진학한 것처럼..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창시개명을 해 도요타 다이쥬(豊田 大中 풍전 대중)로 창씨개명했다.

박정희의 창씨명이 다까끼 마사오이듯, 그 시대를 살던 사람이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목포공립상업학교를 1944년 졸업하고, 만주 건국대학을 진학하려다가 징집문제 때문에 포기한다.

그 직전 박정희는 1938년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만주국은 일본의 위성국이어서 조선인이 바라는 장학금제도가  많았다.

그는 고졸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직원으로 취직한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이 떠나자 적산회사의 관리인이 되어, 졸지에 청년사업가로 변신한다.

그는 해방후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고, 공산주의 계열인 조선신민당의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6.25. 당시 목포해운공사 사장으로 선박 여러척을 보유한 자산가라는 죄목으로 인민군에게 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바람에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그의 생가에 걸린 글씨 한 점

양춘포덕택  陽春布德澤

만물생광휘  萬物生光輝

 

따뜻한 봄볕이 은덕과 혜택을 베푸니

만물이 살아나 빛을 발한다.

 

그래서 그는 북한에 햇볕정책을 썻던가?

그러나 북한은 살아나 빛나는 폭탄(원폭)으로 보답하는가?? 

 

복원생가 옆 원래 집터..협소해 보인다.

그도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박정희도 그렇다.

그 시대의 선각자들은 어떻게 가난을 벗어나느냐로 고민했다.

 

그의 마음 속에도 붉음이 잇었다.

 

문득 돌아본 그의 동상에 다시 필이 꽃혔다.

이 동상의 모습이 그의 인생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그는 왼손을 뒤로 감추고 잇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왼손?? 

그는 항상 군부와 호남 밖 사람들의 의심을 받았다. 

 

80년대 3김을 평가한 말이 잇다

"JP는 때묻었고, YS는 어리고, DJ는 의심스럽다" 

 

 

그는 장인(첫 부인 차용애의 부친)의 권유로 한민당에 입당한다.

그 당시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으로서 사설도 썼단다.

이렇게 기른 필력으로 훗날 저서를 여러권 썻다.

그래서 "김영삼이 읽은 책보다 김대중이 쓴 책이 더 많다" 웃으개 소리도 잇었다. 

 

54년 선거에 목포에 출마하여 낙선한다.

장차 호남의 맹주가 될 사람의 출발은 이렇게 미약했다.

 

그리고 1956년 민주당 신파 (장면 파)에 가입하고, 장면을 대부로 하여 카톨릭 세례를 받는다.

그의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

이 세레명을 받자, 그가 탄식했다.

"왜 하필이면 목 잘린 사람의 이름을 주시는가?"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의 저자로서 신앙을 지키다 헨리8세에게 죽는다.

이 세례명이 그의 인생의 나침판 처럼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판 헨리8세 박정희의 핍박을 받으면 대항마로 성장하였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다.

 

그는 민주당 신파의 추천으로 1961년 강원도 인제 보선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러나 2일만에 5.16이 터지며 국회가 해산된다.

박정희와의 첫 악연이다.

 

1962년 이희호와 재혼한다.

첫부인은 그의 낙선시절 미용실을 운영하며 고생하다가 병사햇다. 김홍일, 김홍업은 첫부인의 소생이다.

 

1963년부터 그의 인생이 피기 시작한다.

목포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한일조약 반대 투쟁당시 그는 실익을 따져 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반일프레임으로 걸었으면 그는 토착왜구로 몰렸을 것이다.

 

그의 사업경력과 신문사 사설집필 경력으로 그의 모토 하나가 탄생한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겸비해야 한다"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터진다.

"40대 기수론"

박정희의 3선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이 야당의 쇄신책으로 40대기수론을 주장한다.

여기에 이철승, 김대중이 가담한다.

그리고 70년 야당 대선 후보 전당대회가 열린다.

대표이던 유진산은 같은 민주당 구파(윤보선 계) 출신 김영삼을 지지한다. 

1차 투표결과  1위 김영삼 2위 김대중 3위 이철승이 되었다.

다음날 결선 투표를 앞두고, 김영삼이 후보수락 연설문을 쓰는 동안, 김대중은 이철승과 접촉하여 차기 당대표로 이철승을 밀어주는 조건으로 지지를 얻어낸다.

그리고 결선투표결과 김대중이 역전하여 대선 후보가 된다.

이제 그와 박정희의 운명의 대결이 시작된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당시 김대중, 김영삼이 반대했다는 것은 두고 두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는 71년 대선에서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
이에 대한 박정희 대답은 이렇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 "

 

그들의 말대로 역사는 흘러갔다.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당시 일본 방문중이던 김대중은 일본에 망명하여 반정부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중정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국내로 끌려들어와 가택연금된다.

 

 

10.26.후 서울의 봄에 5.18.광주항쟁으로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불사조처럼 살아나 대권의욕을 보여 4수만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IMF가 터졌다. 정권 교체의 기회를 잡았다.

그는 적과의 동침을 선택했다.

5.16 세력인 김종필과 DJP 연합을 구축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그의 "상인적 현실감"을 극적으로 발휘한 사건이다..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이 어떤 것이냐"를 생각했다는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대통령이 된후

1. 그는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2. 한일관계를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미래의 공동발전으로 설정한 것이다.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으로 일본 문화를 개방하고, 2002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요즘 적폐청산에 집착하여 미래의 비전을 몰각하고, 반일 프레임으로 한일관계를 극단으로 몰고가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3. 그러나 그의 햇볕정책은 논란의 여지가 잇다.

   너무 평화에만 집착하여 북한의 변화유도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핵개발의 숨통만 틔워주었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현재까지 북한의 핵개발 가속화로 빛이 바랬다. 

 

4. 그가 남북정상회담을 자랑하였으나 국군포로와 납북자 귀환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내 생애 3대불가능 중

마이카 시대는 박정희가 열어주었고, 평화적 정권교체는 김대중이 완수했다.

이제 마지막 남북통일은 누가 이룩할 것인가?

 

통일은 구걸이나 평화집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처방과 진단 그리고 부드럽고 단호한 정책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그와 노무현을 비교한 말이 잇다.

"김대중은 생각의 과녁이 너무 멀어 맞추기가 어렵고,

노무현은 과녁은 가까우나 막 움직여서 맞추기가 어려웠다"

 

생가 뒷편에 청소년을 위한 유스호스텔도 있다.

 

생가 언덕 정자에 올라 바람을 맞는다.

변방의 섬에서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을 맞던 소년들이 대통령이 되엇다.

동쪽 거제의 김영삼, 서쪽 하의도의 김대중

시대와 역사는 참으로 절묘한 포석을 하였다.

 

그가 꿈꾸던 마하아시아의 평화는 손바닥 위에 어리광처럼 인연과 조건을 맞추지 못하고

눈길에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기고 말앗다.

 

전환의 시대에 태어나 4번의 위기와 4번의 도전으로 정상에 오른 의지의 한국인이엇다.

 

 

그가 꿈꾸던 평화는 더 멀어진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이 낫다는 말로 위로해본다.

 

태극정원에는 서해5도까지 선명하다

누가 만든 태극인가?

태극이 무극이 되는 그날이 오면 우리나라는 7040의 부강국이 될 것인가?

 

지금도 어딘선가 변방의 땅에서 큰 포부 키우며 사는 소년들이 있으리라.

그들의 빛나는 인생과 업적을 미리 수기하고 축복하노라..

 

신도에는 해수욕장이 하나 있다.

넓은 해변은 잇으나 모래사장까지는 밀물이 들어와서 언덕쪽에 데크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탐색결과, 데크는 7개, 식수대에 물이 나오고, 화장실, 샤워실이 있었다.

1박에 지장이 없는 것으로 판단, 우선 바닷물이 미치지지 않을 손바닥만한 모래사장에 쉘터부터 쳤다.

 

그리고 양쪽으로 4명씩 텐트를 친다.

이 해변에는 우리 일행이 1박2일 전세낸 모양이 되었다.

모래밭의 원주민 달랑게가 근심어린 모습으로 쳐다본다.

 

 

 

완성된 텐트에 들어가 보니 5성급 뷰가 나온다.ㅎ

 

일단 자리 잡으니 새우부터 꺼내 구워 와인과 함께 파티부터 연다.

 

바닷물에 들어가 몸을 띄워 보는게 몇해만이던고..ㅎ

 

 

그러다,  모래에 묻혀 찜질방 삼매도 즐겨보고..

 

물놀이도 할 만큼하고, 항도 탐사에 나선다.

썰물이면 육지가 되는 섬..

 

 

항도에서 바라본 신도해변의 풍경은 지중해 부럽지 않다.

이 좋은 곳을 독점하는 기분이란..ㅎ

거기서 볼 때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하얀 파도만 보이더니

여기서 보니 뜬금없이 일어났다 뜬금없이 사라지는 파도가 보인다.

왜 뜬금없이 파도가 일어나는가?

인연이, 조건이 맞으면 일어나고, 인연이,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잠시후 친척집을 방문한 일가족이 바다에 나와 바지락을 캔다..

호미로 몇번 쓱쓱 하면 바지락이 감자처럼 나온다..

 

달랑게는 부산하다..

"이게 머선 일이고. 마 쥑이네" 

길고 긴 여름날도 기운다.

 

그 여름 바닷가 행복했던 모래성 

파도에 실려가 버렸네..

 

의자에 앉아 황혼을 즐긴다.

붉은 노을을 노래하고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도록 그림으로 마음에 새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어둠이 내린 바닷가의 하늘이 별들의 고향이었다.

마치 딸 수 있을 것처럼 초롱 초롱한 별빛은 어릴적에 보던 하늘과 같앗다.

흔한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찍느라 모두 바쁘다.

 

내 주제가 문리버를 부르기 안성마춤의 시공간을 만났다.

이런 기회를 어찌 지나치랴~

 

문리버~ 와이더 댄 어 마일

아임 크로씽 유인 스타일 썸데이~~

오 드림메이커, 유 핫브레이커 

웨어레버 유어 고잉, 아임 고잉 유어 웨이..

 

노래 부르다가 문득 옆사람에게 문리버가 어디에 있지? 하고 물엇다.

그러나 문리버(은하수)를 찾지 못했다는..ㅜ.ㅜ.

  

이유가 있었다..

여름밤에 은하수를 보기 어려운 이유는 은하수 자체가 매우 희미하기 때문이란다.
은하수를 보기 위한 조건이 있다. 
1. 우선 인공불빛이 없어야 한다.

 즉 6등성의 별까지 충분히 보일 정도로 아주 깜깜한 지역을 찾아야 한다.

2. 시야가 넓게 트여있는 곳이면 더욱 좋다.

 

밤새 밀물이 텐트 옆까지 밀려들어 온 것처럼 거세게 철썩 거리는 파도소리에 깊이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모처럼 7시간을 연속으로 잤다.

 

다음 날 아침 달랑게 대표가 찾아왔다.

이제 좋은 말할 때 방을 빼달란다.

그 넘뒤로 험악한 표정의 달랑게들이 몰려든다..ㅎ

 

뱃시간도 되어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다.

해변의 쓰레기도 다 치우고..

시간이 없어 등대 능선의 전설을 만들지는 못했다.

마치 자라들의 천지창조 설화가 깃든 것 같았는데..ㅎ

 

선착장으로 나왓으나 섬은 아직 홋이불을 감싸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밤이 무더워 새벽녁에 겨우 잠들었나보다 

 

저멀리 연락선이 보인다.

신도여! 안녕..

별빛이 흐르던 해변을 잊지 못할거야..

승봉산 트레킹이 늦어져 뱃시간을 걱정했는데, 신안 1004의 섬답게 다양한 배 선착장과 연륙교를 활용하는 주민들의 조언을 들으니 오히려 시간이 남았다.

주민들의 조언은, 하의도 웅곡선착장으로 가는 배시간은 촉박하지만, 하태도 신의선착장으로 가는 배는 여유가 있다는 것이다.

신의 선착장에 내려서는 연륙교를 이용하여 하의도 웅곡항으로 이동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당초 하의도 모래구미에서 캠핑하 계획을 즉시 수정하여 하태도 금리해변에서 캠핑하기로 했다.

 

여유시간에 안좌도 김환기 고택을 찾았다.

1913년생인데, 기와집에서 태어낫나??

기와집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생활을 하였으니 부유했을 것 같다.

그는 인생후반은 미국 뉴욕에서 생활하다가 1974년 사망했다.

 

그의 고택이라면서 그의 그림 복사판도 걸어놓지 않아 아쉽다.

 

그의 그림은 경매에서 85억에 낙찰될 정도로 인기가 높다..

ttps://youtu.be/ky06dSjuwtU

 

 

그는 한국에서는  반추상화 그림을 그렸는데,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작품활동할 때는 동시대 화풍대로 추상화를 그렸다..

https://youtu.be/Bp8b02OPjY8

 

고택 방문의 의미도 못느끼고 돌아서는 기분을 달래는 옆집의 벽화..

김환기 작품 모사일까?

주변 담장이라도 그의 그림을 벽화로 그려놓으면 좋을텐데, 관광마인드가 부족하다.

 

선착장으로 돌아와 하태도 신의선착장으로 가는 배를 탔다.

승객도 별루 없다.

 

하태도 신의선착장에 내리니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얼릉 캠핑장소를 찾아야 한다.

 

금리해변을 향해 산길을 꼬불 꼬불 넘어가 어두운 해변에 도착했다.

데크는 낙후하고 수풀이 우거져 그냥 해변 모래밭에 텐트를 치기로 한다.

급하게 쉘터를 치고 고기굽고 와인 한잔하니 안도감이 든다.

 

일단 자고, 내일 아침 8시 배로 하의도 웅곡항에서 신도가는 배를 타기로 한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야 한다.

다음날 눈을 뜨니 참 자그만 해변이다.

주변 산책할 시간도 없이 바로 텐트를 걷어 하의도로 간다.

 

 

좋은 세상이다.

다리하나 건너면 하의도다..

 

 

선착장에서 싫는 배는 우리 차 2대 밖에 없다.

선장의 허락하에 준비해간 아침식사를 선실해서 한다.

 

 

신도는 지척인데, 배가 5개 섬을 돌아가느라 2시간이 걸린단다..

식사후 선실에 대자로 누워 부족한 잠을 보충한다.

 

도착 10분전 소리에 깨어나 하선 준비를 한다.

드디어 신도에 도착한 것이다.

 

 

 

 

이미 큰봉산에서 내려올 때부터 몸이 지쳤다.

비등구간에서 오버 페이스한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먼저 지친게 다행스럽게도 일행의 페이스 조절에는 도움이 되었다

폭염경보에 생각지도 않은 센 트레킹으로 힘드는 차에 내가 자주 쉬며 템포를 늦춰주니

울고 싶은데 뺨 때려준 격이 되었다는..ㅎㅎ

 

승봉산이 요즘 게임을 좀 해본 모양이다.

올라가면 갈수록 경관을 보상으로 주면서 중독되도록 유도한다.

 

올라갈수록 더 멋져지는 풍광이 안전에 전개되니 폭염의 고통과 육체적 피로도 저절로 씻어지는듯..

 

더 큰 보상을 기대하며 고통을 기꺼이 감수하려는게 인간의 심리이다.

보상없이 고통을 감수하려면 철학이나 종교가 필요하다.

 

무릉도원이 어디 계곡과 동굴 사이에만 있다더냐?

두개의 바위 사이에도 청춘처럼 존재한다.

 

뭬야!! 1004개를 보려면 어디까지 올라야 하는거야??

 

승봉산 정상에 서니 거짓말처럼 천사가 보인다.

다리 벌린 천사..

이름하여 천사대교..

 

 푸른 아름다움에 푸른 꽃을 더하니 7가지 푸름으로 치장한 "푸르디 푸른" 장엄이라..

 

쪽빛, 남색, 곤색, 군청, 감청, 인디고, 네이비, 청, 옥, 시안 중에 어느 푸름에 점을 찍을거요?

굳이 점을 찍어야 하는가?

단지 푸름 속에 물들을 뿐이네.

 

천사의 마중을 받고 만물상을 선물로 받으면 하산길은 풍족해진다.

 

면사무소 방향을 선택하여 내려간다.

푸름사이에 뻘이 불뚝 나선다.

푸름이 죽으면 누름이 일어선다는 황건의 외침 듣지도 못했는가?

 

창천과 황뻘이 싸우는 틈바구니를 지나 지친 몸을 이끌고 하산을 재촉한다.

노닥거리며 걷는 사이 뱃시간이 촉박하다.

 

돌아보니, 승봉산이 전송한다.

고금생전에 언제 다시 보겠는가?

 

<오늘걷기> 노만사 - 마당바위 - 큰봉산 정상 - 수곡임도 - 승봉산 - 암태중학교  약 6KM

장마가 8.15.까지 이어지는 것은 처음인 것 같다.

원래 목표는 강원도 선자령 캠핑인데, 비 예보가 잇어서 급히 장소를 서해 신안 섬 중 하의도 신도로 골랐다.

인연이란 씨앗에 비유되고, 파도에 비유된다.

조건이 맞으면 갑자기 나타나는 것이기에..

당초엔 목포 - 하의도 - 신도로 계획되었는데, 카페리 수리라는 변수가 생겨 암태도 - 안좌도- 하태도 - 하의도 - 신도 이런 식으로 바뀌었다.

그래서 암태도 승봉산이 스케줄에 들어왔다.

그런데, 대타가 역전 만루 홈런을 친 격이 되었다는..ㅎ

 

차가 신안 앞바다 압해도 입구 김대중대교를 지난다.

눈에 띄는 무화과를 한 가득 산다.

 

신안군은 관내 섬을 긁어 모아 1004개라고 선포하고, 천사의 섬으로 부른다.

그러더니, 은근히 엔젤의 형상으로 자신을 포장하기 시작한다.

압해도 - 암태도를 연결하는 천사대교를 지난다.

 

이 다리가 완공되면서 암태도, 자은도, 안좌도, 팔금도, 자라도, 추포도, 박지도, 반월도 등 7개섬이 육지로 연결되었다..

이제 10개의 섬을 다이아몬드 형태로 연결한다는 프로젝트는 3개의 섬과 연결만 남았다.

 

오후 4시반에 안좌도 복호항에서 배를 타기까지 암태도 승봉산을 트레킹한다.

좀 수월하게 하려고 들머리를 노만사로, 날머리는 암태중학교로 잡는다.

 

노만사..이슬이 가득 모이는 절..

이절은 19세기 말에 세워졌는데, 절 뒤편 약수가 유명하다.

 

한옥 가정집같은 분위기의 법당..

 

법당 뒤로 돌아가면 약수천에 맑은 물이 가득하다.

정말 푸른 이끼에서 맑은 물이 이슬처럼 떨어져 가득 고인다.

한잔해!

이처럼 맑은 물 아니 마시고 어쩌리..

절 옆으로 등산로가 시작된다.

거북바위는 영락없이 거북이 모습이고, 와불은 법당이 좁아 밖에 누워계시고..ㅎ

 

영락없는 오리바위를 지나면 마당바위로 가야한다.

정말 마당이 기다리고 있다.

섬이 1004개인지 세어보기 좋은 곳이다..ㅎ

 

달개비의 바다를 향한 푸른 마음이 서리 맞은 이월화보다 더 찬란해 보인다.

 

마당바위를 지나 큰봉산 정상을 향해 가는 길..

선두가 왔던 길로 돌아가 등산로로 가지 않고, 네이버 지도만 믿고 가더니 어렵쇼??

밀림이 나오네..

잘 다니지 않아 임도가 밀림이 되었나 보다..

 

결국 길을 놓치고 비등으로 정상으로 가는데, 폭염경보가 내린 날 할 짓이 아니었다는..ㅠ.ㅠ.

 

 

결국 등산로와 만났으나 염천폭염에 몸이 지쳤다.

 

그래도 눈을 즐겁다.

높고 낮은 저 섬들에게 우열이 무슨 상관이랴~

 

큰봉산을 내려오면서 보니 저 앞 높은 산이 승봉산이란다.

산 하나만 가볍게 올랐다 내려가는 줄 알았더니, 이건 산 2개를 오르는 등산이다.

가볍게 생각하고 간식을 챙기지 안았는데, 배도 고프고..ㅎ

 

 

마지막 하산을 마치면 수곡리 임도와 만난다.

승봉산 등산만 하려면 차를 이곳에 몰고와 시작하는 것도 한 방법이 되겠다.

 

멀리 좌측으로 고라금과 누적금이 한꺼번에 보인다.

편한 마음으로 고라금으로 간다.

길가의 표지판이 수줍음을 타고 숨어 잇는 바람에 잠시 헷갈렸다..

작은 만 속에 숨겨진 두리뭉실 큰 바위덩이들..

쌀푸대라도 쌓아 놓은 느낌이다.

 

이제는 누적금으로 간다.

커다란 개가 사는 풍광이 멋진 펜션을 지나는데..

콩국수 주인이 낙조를 보라는 곳이 이곳인가 보다.

누적금이 노적(볏단)가리가 쌓인 모습의 바위가 있어 누적금이란다..

내가 보기엔 망월폐견(望月吠犬 달을 보고 짖는 개)의 모습인데, 누구는 달을 보는 킹콩 모습이란다..

이제 캠프로 돌아간다.

당산과 사유지 사이 임도를 따라가면 바로 돌삭금이다.

신비로운 대나무 숲을 지나면 돌삭금이다.

바닷물에 발을 씻으며 오늘의 피로를 닦는다.

마지막 밤을 위한 파뤼는 구운 새우와 와인으로 시작한다.

배부른 밤 그녀의 음악으로 즐거움을 더한다.

인생은 즐거워~

3일째 아침 구름 속에 일출은 보이지 않는다.

핑크빛 세상에서 기념탑을 쌓는다. ㅎ

 

아침 식사후 모두 장비를 걷고 짐을 싸서 포구로 나간다.

당산입구 데크에 앉아 잠쉬 쉬고 당산의 사당을 들른다.

당산의 상록수림과 사당은 외연도의 관광1번지인데, 관리가 소홀해 일부 데크길이 부서져서 걷기도 불안하다.

갈림길에서 표지판이 없어 좌측으로 먼저 가니 사랑나무 쉼터가 있다

연리지 동백나무가 있었는데, 2010년 콘파스 태풍때 부서져 죽었다는..

다시 돌아나와 우측 데크로 올라간다.

상록수 숲이 점점 신비한 느낌으로 가득하다.

이곳에 사당이 있어 주변 숲을 보호하니 자연 상록수숲이 울창해졌으리라.

이 신령한 공간에 사당이 있다.

사당에 모신 신은 누구인가??

예전 부터 외연도에서는 중국 장수 전횡을 풍어신으로 모시고 있었는데, 1936년 돈을 모아 사당을 짓고 

매년 음력 2월 14일에 당제를 지내고 있다.

<사당에 걸린 전공사당기 내용>

공의 성은 전 씨요, 이름은 횡이다. 옛날 제나라의 공족(왕실후예)이다. 

한나라가 흥하고 제나라가 망하자 의리로 절개를 굽히지 않고 오백여 명의 군사와 더불어 바다 건너 반양산(半洋山)에 들어와 살았다. 

한나라가 그를 두려워하여 사신을 보내 부르자, 공은 부득이 두 사람의 빈객과 함께 낙양에 이르렀으나 상화점(霜花店)에서 스스로 목을 베었다. 

오호라, 공이 부름에 응한 것은 실제 한나라의 위세가 두려워서가 아니라 섬에 남아 있는 사람들이 참화를 면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함께 간 두 사람 역시 한나라의 벼슬을 받지 않고 슬퍼하다가 공의 무덤 옆에 구덩이를 파고 죽었다. 

섬에 남아 있던 오백 명도 역시 한날한시에 함께 죽으니 천만 년 옛적부터 어디서도 들을 수 없는 일이다. 

공의 의로움이 어찌 이토록 지극하였는가. 비록 서산이나 동해로 가려 하였으나 반양산을 벗어나지 못했으니, 반양산은 지금의 외연도이다. 

지금에 이르러 수천 년이 지났지만, 오히려 사당을 세우지 못하고 다만 석대(石臺)로 신을 제사하는 당을 삼았었다. 

섬 사람들이 그 절의를 잊고 있다가 신명에 감동하여 나무를 베어 비로소 사당을 건립하고 희생을 진설하여 제를 지내게 되었다. 공의 정령이 완연히 위에 머물러 있으니 어찌 풍성하지 않을 것이며, 어찌 공경하지 않으리오.

전횡?? 그는 누구인가?

그는 진시황 죽음이후 벌어진 초한지 시대의 실존 인물이다.

그는 산동성 제나라 공족(왕실후예)이었는데, 진승,오광의 난 이후 종형 전담을 따라 거병하여 진나라  장한 군대와 전투를 하엿고, 전담이 제왕이 되자 그 휘하 장군이 되엇다.

그뒤 항우, 유방의 세력 싸움에 우여곡절을 겪으며 최종적으로 항우의 편에서 자신도 상제왕이 되었으나, 한신의 군대에 패배하고 휘하 500명과 함께 동쪽 섬으로 피신한다. 

그리고 위 사당기 내용처럼 스스로 자결하고 나머지 500명 부하도 자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자세한 내용은 ko.wikipedia.org/wiki/%EC%A0%84%ED%9A%A1 참조)

 

그런데, 그가 피신했던 동쪽의 섬이 어디냐는 논란이 된다.

1) 이곳 외연도라는 설

2) 중국 산동성 전횡도라는 설-  중국 산동성 즉묵시 부근 전횡도에는 그의 동상과 500부하의 묘가 있단다.

   (www.acetour.cn/bbs/board.php?bo_table=tour_1&wr_id=41 참조)

 

주변의 신령한 숲의 분위기에 매료된다.

우리나라 신라 초기 이런 신령한 숲들이 많았단다.

계림도 그렇고, 신이 논다는 신유림(神遊林)..하늘을 비춘다는 천경림(天鏡林) 등이 그렇다.

당산 입구 쉼터로 돌아와 다시 짐을 메고 포구로 간다.

슬슬 빗방울이 떨어진다.

포구에서는 내일은 비가 많이 오고 바람도 불어 배가 못뜰지 모르니 오늘 배로 나가라고 권유하는 방송을 한다.

참 우리는 장마전선을 중국과 일본에 묶어둔 고기압의 한복판에 들어와 3일을 잘 보내고 간다.

하늘이시여! 감사합니다..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후유증도 잇다. 발과 다리에 피를 봤다.

뱀이 많다고  담배잎만 열심히 준비했는데,  그 방심한 틈을 노린 모기(샌드블라이 보다 무서운 페블플라이)에게 

오지게 당했다.

이 모기는 즉시 가렵지 않고 하루지나면 가려운데, 심하게 자국도 남기고 4일은 가려움으로 고생한다.

갈매기가 위로한다.

그래도 안개속에서 헤매지 않고 경치 다 잘보고, 배도 날씨 관계로 연착없이 제시간에 떠나는 것을 3대 적덕의 음복이니

감사하게 여기시게..ㅎ

그려~ 덕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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