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차 12/24 월요일
오늘 일정은 뮤지컬 에비타의 주인공 묘가 있다는 레콜레타로 간다..
레콜레타는 부촌 지역이름이다..
우리로 치면 강남 청담동 쯤되나??
지하철로 이동한다..
산 자가 평화로운 미소로 잠든 거리를 지나 죽은 자들의 안식처를 찾아간다..
레콜레타 묘지의 입구에는
requiéscat in pace 편히 잠드소서 라고 써있다..
뒷면에는 EXPECCTAMUS DOMINUM (주님을 기다립니다)..
주님을 기다리다니..죽은 목숨이 찾아가야 도리 아닌가?? ㅎ
이곳은 부촌지역으로 1870년대 황열병과 콜레라가 창궐할 때 독립을 주도했던 부유층들이 고지대인 이곳에 주거를 짓기 시작햇다..
이 묘지는 아르헨티나의 대통령이었던 베르나르디노 리바다비아의 주도로 만들어져 1822년 준공되었다.
그래서 이 묘지에는 대통령, 노벨상 수상자등이 묻혀있다..
저기는 베르나르도 이리고예(1822- 1906 )의 무덤이다..
그는 변호사, 외교관,상원의원을 지냈다.
이들 묘에는 각 문이 있고 문 아래 지하로 연결된 묘지가 있단다.
카를로스 마슈비츠는 엔지니어다..
웨딩드레스를 입은 젊은 여인과 개는 무슨 사연인가?
이 여인은 결혼 후 알프스로 신혼여행을 갔다가 눈사태로 남편과 함께 목숨을 잃었단다..
키우던 개를 사랑했나보다..
개를 함께 동상으로 만들었으니..
우리가 목표로 찾아간 곳은 두아르테 가족묘다.
거기에 유명한 에바 페론이 묻혀있다..
왜 그녀는 남편 페론 옆에 묻히지 않았을까?
에바 페론(1952 - 1982)
그녀는 가난한 집안에서 성장하여 나이트클럽 댄서, 라디오 DJ로 인기를 끌엇다
1944년 노동부 장관이던 후안 페론을 만나 결혼하고 그의 정치활동을 돕고, 그가 집권하자 27세 나이로 영부인이 된다.
페론은 친 노동자정책과 빈민 구제 정책으로 인기를 얻는다..
그녀 또한 자선사업으로 국민의 인기를 얻는다..
1952년 페론이 재선된후 그해 33세 나이로 자궁암으로 숨을 거둔다..
불우한 환경을 딛고 영부인이 된 미모의 여인, 그리고 자선사업을 베풀다가 요절한 그녀는 사후 성녀처럼 대접하는 사람이 생겼다.
그녀의 높은 인기 때문에 그녀의 시신은 방부처리되고 미이라가 되어 2년간 대중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쿠데타 후 군사정부는 그녀의 미이라를 이탈리아로 반출해서 시골 성당에 안치했다..
1955년 군사 쿠데타로 페론이 쫓겨났고, 그는 망명생활 중 이사벨과 3번째 결혼을 한다..
18년의 망명생활후 페론은 돌아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1년도 못되어 1974년 사망하고, 부인 이사벨이 대통령을 승계했다..
그녀는 낮은 지지율을 만회해보려고 에바 페론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그리고 에바의 시신을 국내로 운구해와 페론 대통령 옆에 안치했다.
그러나 76년 쿠테타로 이사벨이 쫓겨나고
군사정부에서 그녀의 시신을 그녀의 집안인 두아르테 가족 묘지에 안치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람의 평가에 따라서 천한 창녀에서 부터 가난한 자들의 성녀로 불리는 그녀도 이제는 방황을 끝내고 안식을 취하고 있을까?
그녀의 일대기는 뮤지컬 "에비타"로 제작되어 크게 히트했다..
뮤지컬의 주제곡 "울지말아요 아르헨티나여!"(Don’t Cry For Me Argentina)은 오래동안 회자했다..
이 모든 것을 이룬 이후에도 여전히
당신들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믿지 않을 거예요
당신 앞에 서있는 이 여자가 당신이 알던 그 아이라는 것을
비록 이렇게 멋지게 차려입고 있기는 하지만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당신 앞에 서있는 것이랍니다.
나는 이렇게 해야만 했어요, 나는 변해야만 했어요
내 삶을 저 밑바닥 인생으로 팽개쳐둘 수 없었어요
저 태양 빛으로부터 한 걸음 물러나 창 밖만 바라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나는 자유를 선택했지요
이곳 저곳 뛰어 다니며 새로운 세계를 경험했지요
하지만 아무 것도 내게 감동을 줄 수는 없었어요
진실로 나는 당신을 저버리지 않았답니다.
지금까지 이 힘든 나날 속에서도
이 미칠 것 같은 삶 속에서도
나는 약속을 지켰어요
그러니 나를 멀리 하지 마세요
재산이나 명예에
나는 욕심을 낸 적이 없어요
비록 세상 모든 사람들은 이런 것들을 열망할 지 모르지만
그것들은 환상에 불과하거든요
비록 그렇게 보일지라도 그것들은 진정한 해결책이 아니랍니다.
진정한 해답은 여기 이 곳에 항상 있어요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당신들도 나를 사랑해 주기를 바랍니다
나를 위해 울지말아요..아르헨티나여!
https://youtu.be/OpbRIP--r-o
후안 페론이 시작한 페론주의 등 포퓰리즘이 아르헨티나를 선진국 문턱에서 끌어내렸다고 비판한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부조는 이념을 떠나 반드시 필요한 정책이다..
그러나, 항상 중요한 것은 광주 펭귄마을에 붙어있는 구호를 잊지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유행에 따라 살지 말고 형편에 따라 살자"
아르헨티나건 그리스건 경기가 좋을 때 포퓰리즘이 시작되었고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경기 하강 국면에 지출을 줄이지 못하는 것이 포퓰리즘의 문제다..
그래서 아르헨티나나 그리스는 재정파탄을 맞은 것이다..
여기와서 느낀 것은 "잘못하면 아르헨티나 꼴난다"고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르헨티나는 자원이 풍부하고 농산물이 지천이라 기초생계비용은 저렴하다..단지 공산품이 비싸다..
예를 들어 소고기는 한우의 1/10, 와인은 한국의 1/3 가격이다..
그러니, 우리나라가 포퓰리즘으로 붕괴되면, 아르헨티나 처럼 살지 못하고, 그 보다 더 못산다고 봐야한다..
훌리오 로카 (1843 ~ 1914)
그는 1879년 육군장관이 되어 파타고니아 지역의 인디오를 토벌하고 대초원 지대의 식민정책에 성공시켰다.
1880년 대통령에 취임하였고, 1898년에도 대통령에 재선되어 칠레와의 국경문제를 해결하고, 경제성장을 꾀하였다.
엔리케 랄란 교수..
이 양식이 맘에에 든다..
내 무덤의 비석을 세운다면 이런 모양이 어떨까?
납골당에 안치한다면 이런 양식으로 표지를 만들고..ㅎ
문제는 여기에 쓸 말이다..
이 블러그 활동을 하는 것도 최후의 한마디를 쓰기 위해서다..
남에게 주워듣지 않고 읽지 않은 "나만의 한마디"를 쓰려고 한다..
Father Fahy 파히 신부(1805 - 1871)
Anthony Dominic Fahy는 아일랜드 골웨이에서 출생, 1831 년 3 월 19 일 로마카톨릭 성직자 서임,
미국 오하이오 주 서머셋에서 활동, 1843 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 아일랜드 군목으로 임명되어 부임.
파히 (Fahy)는 후안 마누엘 데 로사스 (Juan Manuel de Rosas ) 정권의 열렬한 후원자였다.
살아서 증오하고 상대의 무덤을 파던 자들도 죽어서는 서로 이웃하여 안식을 구한다..
그렇다면, 살아서 서로 이웃하며 안식을 구하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죽은 자의 안식처를 떠나 이번에는 산 자의 양식터 엘 아테네오 서점을 찾아갓다..
걸어 갈만한 거리..
그러나 개점 시간이 9시 부터라 문이 잠겼다..
아직 30분이 남았다..
일단 인근 카페에 가서 차와 빵으로 아침을 먹는다..
다시 서점으로 가서 입구에 진열한 베스트셀러를 보니, 그중 오바마 부인 미셀 오바마의 자서전 "비커밍'이 "미 히스토리아"라는 제목으로 진열되어있다.
"
이 서점은 1919년 아르헨티나가 잘 나갈 때 오페라 극장으로 지어졌다..
호시절 지나자 영화관으로 쓰이다가 2000년에 서점으로 개장했는데, 이제는 관광명소로 등장했다..
그러나, 궁금햇다..
온라인이 시대에 이렇게 장중한 서점에서 책을 사려고 모여드나?
인증샷만 찍고가는 거 아닌가?
고양이는 알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