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속의 法에서 佛家의 法으로
'아함경' 10년걸쳐 번역한 변호사 이상규씨
"절에서 福만 빌지말고 함께 공부하자고 펴내"

▲ 이상규 변호사는 “일반 신자들도 부처님 말씀, 곧 법(法)을 함께 공부하자는 뜻에서 책을 냈다”고 말했다.

/ 이명원기자

“스님이나 전문 불교연구자가 번역한 경전들은 ‘잘 아는 입장’에서 번역하고 해설했기 때문인지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 같은 일반 신자도 부처님 말씀을 이해하기 쉽도록 제 나름대로 재정리했습니다.”

올해 71세의 원로 변호사·법학자 이상규(李尙圭)씨가 10여년에 걸쳐 초기 불교경전인 ‘아함경(阿含經)’을 번역·재편집, 7권짜리 ‘전해오는 부처의 가르침’(해조음)을 펴내 눈길을 끈다. 그의 경력은 화려하다. 만 19세에 고시 행정과, 이듬해엔 사법과에 합격해 공직생활을 시작해 법제처 법제관, 국립중앙도서관장을 지냈고 1980년 문교부 차관을 마지막으로 공직을 떠난 후에는 변호사 생활을 하면서 고려대 법대 객원교수도 지냈고 지난 5월부터 환태평양변호사협회(IPBA) 회장을 맡고 있다. 그가 세속의 법에서 부처님의 법의 세계로 시선을 돌린 것은 회갑 때부터.

“60년 삶을 돌아봤습니다. 열심히 살았고 ‘본전은 찾았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한편으론 진한 회의가 들었습니다. 고시 준비시절 접했던 불교 공부를 제대로 해보고 싶었습니다. ‘다시 원점(原點)’이라고 마음먹었죠.”

이씨는 그 후 사건수임도 줄이고 평일은 하루 5시간 이상, 휴일엔 10시간 가까이 불교공부에 투입했다고 한다. 첫 결실은 지난 2000년에 발간한 ‘금강경의 세계’. 그 후 집중적으로 매달린 것이 이번에 발간된 ‘부처의 가르침’이다. ‘아함경’은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후 제자를 비롯한 대중들에게 그때 그때 상황에 맞게 설법한 내용을 구전(口傳)으로 이어오다 문자로 정리한 초기경전.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승불교에서는 이해력이 낮은 사람을 위한 소승불교의 경전이라고 경시(輕視)돼 왔다. 그러나 이 변호사는 “아함경은 구술(口述)형식으로 전해 왔기 때문에 부처님의 육성(肉聲), 원음(原音)에 가깝다”고 말했다. 특히 아함경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내용들을 ‘불교의 근본원리’ ‘연기법(緣起法)’ ‘중도론(中道論)’ ‘실천수행론’ 등 주제별로 일목요연하게 재편집하고 번역과 해설을 붙인 것이 이씨가 펴낸 책의 가장 큰 특징. 번역문도 불가피한 경우를 빼고는 일반용어로 고치고, 그 뒤에 부처님이 설법할 당시의 상황과 배경을 상세히 해설하고 있다. 생생한 해설을 위해 인도를 여러 차례 답사, 현지의 지리와 기후 등을 상세히 파악했음은 물론이다.

이씨는 “부처님도 열반에 드실 때 ‘나를 의지하지 말고 법(法)에 의지하라’고 하셨듯 불교는 스스로 공부해야 하는 종교”라며 “이 책은 불교신자들에게 절에 가서 복만 빌지 말고 함께 공부하자고 권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한수기자 hansu@chosun.com)

 

***

저와 숙세의 인연으로 맺어진 분..이제 불법 삼매에 드셨으니..그 향기 은은하고 멀리 멀리 퍼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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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안 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이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

성전 스님이 수행기 ‘행복하게 미소 짓는 법’(도솔)을 펴냈다.
성전스님은 산사로 들어와 ‘행복하게 미소짓는 법’을 발견했는데, 이는 “마음 속에 맑고 투명한 빛을 떠올려라”, “만나는 모든 것들과 대화하라”, “행복을 위한 구절 하나씩을 기억하라”, “호흡을 통해 고요한 이완의 즐거움을 터득하라”, “손해로 화가 날 때는 전생의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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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문


 

홀연히 생각하니 도시 몽중이로다.

천만고 영웅호걸 북망산 무덤이요, 부귀문장 쓸데없다. 황천객을 면할쏘냐!

오호라! 나의 몸이 풀 끝에 이슬이요, 바람속의 등불이라.

삼계대사 부처님이 정녕히 이르사대,

마음깨쳐 성불하여 생사윤회 영단하고

불생불멸 저국토에 상락아정 無爲道를

사람마다 다된다고 팔만사천 가르침이 유전이라.

사람일 때 못닦으면 다시 공부 어려우니 나도 어서 닦아 보세.

닦는 길 말하려면 허다히 많건마는 대강추려 적어보세.

앉고, 서고, 보고, 듣고, 착의끽반, 대인접화

일체처 일체시에 소소영령 지각하는 이것이 무엇인고?

몸뚱이는 송장이요, 망상번뇌 본공하고 천진면목 나의 부처

보고, 듣고, 앉고, 서고, 잠도 자고, 일도 하고, 눈한번 깜짝할 새

천리만리 다녀오고, 허다한 신통묘용 분명한 나의 마음, 어떻게 생겼는고?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를 잡듯,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를 때 물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아들 잃은 후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

생각 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하여 가되,

일념이 만년되게 하여 잠도 잊고 밥도 잊을 때에

대오하기 가깝도다.

홀연히 깨달으면 본래 생긴 나의 부처 천진면목 절묘하다.

아미타불 아니면 석가여래 이 아닌가?

젊도 않고 늘도 않고 크도 않고 작도 않고

본래 생긴 자기 靈光 蓋天蓋地 이러하고 열반진락 따로 없다

지옥천당 본공하고 생사윤회 본래 없다.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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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무아지경

   지난 월드컵 때  우리 선수 몇몇은 득점 당시 아무 생각이 없었다고 말했다. 운동선수들이 흔히 말하지만, 우리 일상생활에서도 쉽게 쓰고 듣는 이말.

히딩크는 선수들에게 “긴장이 없는 집중과 경기를 즐기는 마음”을 강조했지만, 어떻게 보면 무아지경을 가장 적절히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무아(無我)사상은 불교사상의 핵심이자 독창적인 발상이다.

무아사상 탐구의 사례집이라 할 수 있는 벽암록은 중국 역대고승의 선화(禪話) 100개를 편집한 책이다. 우선 1칙이 인상적이다.

 

2. 달마가 모른다고 말하다(達磨不識, 제1칙)

  달마대사는 인도 향지국의 왕자로 태어났으며, 석가모니의 의발을 넘겨받은 제1조 마하 가섭 이후 제27조 반야다라의 법을 잇고, 스승의 부촉을 받아 520년 무렵 배를 타고 중국으로 건너와 중국 선불교의 초조(初祖)로 불린다.

이 이야기는 달마가 소림사로 가기 전에 있었던 일을 화두로 삼고 있다.

당시 남중국의 양무제는 수많은 절을 짓고 수행승을 공양하여 불심천자라 소문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짐이 황위에 오른 이후 수많은 절을 짓고, 경을 간행하고, 중을 기른 것이 셀 수가 없소, 그리하여 내게 어떠한 공덕이 있겠소” 묻자, 달마는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답한다.

“무엇이 불교의 본질이 되는 가장 성스러운 진리요?”

“텅비어서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짐과 마주한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습니다”

소크라테스를 연상시키고, 맹자가 양혜왕에게 왜 하필 이익을 따지느냐고 묻는 형국이 아닌가?         

당시 달마가 가져왔다는 능가경은 유식학파의 기본교재라 할 수 있는데, 오직 마음이 일체의 현상을 만들어 내고, 해탈은 사고의 대상을 왜곡하지 않는 ‘순수한 사고‘가 유지되어야 가능하다는 교설을 담고 있다.

양무제야 그 이치를 알 수 없었고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생각할 밖에, 달마는 양자강을 건너 숭산 소림사 뒤편 토굴에 은거하며 9년간 면벽수행에 들어간다.

 

3. 제6조 혜능(慧能)

절에 가면 법당의 바깥벽에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는데, 대개 불교설화나 고승의 일화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왼쪽 팔이 잘려진 채 피를 흘리고 서있는 사람의 그림이 있다.

한 팔을 잘라 구도의 의지를 밝힌 제2조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장면이다.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편안케 해주소서”

“그 마음을 가져 오라, 그러면 편안케 해주리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됐다, 이제 마음이 편안한가”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렸다고 하는데, 달마는 그 마음의 실체가 없다고 말하고 있는가?

혜가의 법을 이은 제3조 승찬은 신심명(信心銘)이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도에 이르는 길은 어려움이 없다. (至道無難)

단지 차별하고 선택하는 마음이 없다면 (唯嫌揀擇)

미움도 사랑도 버리면 도는 통연히 명백하리라.(但莫憎愛 洞然明白)

이 글을 보면 마음 속에 일어나는 인식과 의식작용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위 글을 주제로 하여 이루어진 화두가 벽암록 제57칙, 제59칙이다.

다시 제4조 도신과 제5조 홍인을 거쳐 제6조 혜능(慧能)에 이른다.

그는 글자도 모르는 나무꾼인데, 나무 팔러 갔다가 손님이 금강경(金剛經)을 읽는데,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어라”(應無所住 而生其心)라는 구절에 마음이 동하여 홍인 대사를 찾아가 입산 8개월만에 제5조 홍인의 의발을 전수받는다.

그가 제5조로부터 인정을 받은 게송이다.

“보리(菩提)에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는 것인데 어디에 때가 끼고 먼지가 일 것인가.“

혜능과 그 제자들의 활동에 의하여 중국의 선종이 전성기를 맞게 된다.

 

4. 諸法無我

제행무상(諸行無常)과 함께 불교의 3대 기치(三法印)의 하나인 이 말은, 모든 존재나 현상에는 고정불변하는 실체로서의 “나”라는 것이 없다는 의미라 한다.1) 우리가 자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은 자아가 아니라는 뜻이다. 인간의 존재는 5온(五蘊, 즉 육신(色), 감각(受), 지각(想), 욕구(行), 인식(識)이 잠시 뭉쳐 있다는 것이다. 이 5온은 그것을 한데 통합한다는 자아라는 관념에 매달려 있는데, 실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다만, 모이고 흩어지는 과정만이 이어질 뿐.

“괴로움은 있다. 그러나 괴로워하는 자는 없다.

  행위는 실행된다. 그러나 행위하는 자는 없다.

  평화는 있다. 그러나 평화 속에 머무는 자는 없다.

  길은 있다. 그러나 그 길을 가는 자는 아무도 없다.“(붓다고사의 청정도론)

위에서 혜가가 불안한 마음을 말했을 때 달마가 마음을 가져오라고 한 가르침은 이 무아사상과 연관지으면 좀 이해 될 듯도 하다.

 

5. 벽암록에 관하여

  선(禪)이라는 것은 불입문자(不立文子), 이심전심(以心傳心)의 방법을 취한다고 하지만, 선에 관한 책도 적지 않다고 한다.

그 중 이 벽암록은 ‘종문제일서’라 꼽히는데, 예로부터 전해오는 공안(화두) 1,700여가지 가운데 대표적인 100가지를 뽑아 본칙(本則)으로 소개하고 , 앞뒤로 수시와 평창을 덧붙였다.

원래 송대의 선승 설두중현이 100개의 본칙에 대한 송(頌)을 붙여 송고백칙(頌古百則)이라는 책을 냈는데, 다시 제자 원오극근이 수시(垂示), 착어(着語), 평창(評唱)을 덧붙여 벽암록이라 이름지었다.

수시란 설두가 뽑은 본칙을 읽기에 앞서 그 칙의 종지나 착안점을 제시하는 일종의 서문이고, 착어는 짤막한 단평, 평창은 해설에 해당한다.

그러나, 이 책이 찬술된 지 얼마 뒤에 원오의 수제자 대혜종고가 책을 불질러 버렸다 한다.

그 이유는 당시 선객들이 어느 정도 참선을 한 뒤 큰 깨달음을 얻은 것 같은 언행을 하고 다녀 이들을 불러 점검해보니 벽암록을 줄줄 암기하는 것을 보고, 공안선이 구두선(口頭禪)으로 전락하는 것을 염려하여 그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원나라 대덕 연간에 장명원이라는 사람이 이 책의 사본을 찾아내어 “종문제일서 원오벽암집”이라고 간행하였고, 이를 저본으로 하여 벽암록이 널리 공간되었다.

우리나라에도 여러 종류의 벽암록이 출간되었으나, 필자는 조오현 역해 불교시대사 간행의 벽암록을 읽었다.

이 책은 수시와 본칙, 설두의 송이 번역과 원문이 병기되어 있고, 역자의 사족이 붙어있다.

 

6. 마조 도일(馬祖 道一)

벽암록 제3칙 마조 일면불 월면불(馬祖日面佛月面佛)의 공안에 나오는 마조 도일은 혜능의 제자인 남악 회양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그 사제간의 일화가 재미있다.

마조가 좌선을 하고 있는데 스승 회양이 묻는다.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좌선을 하고 있습니다”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부처가 되려구요“

그러자, 회양은 기왓장을 주워 옆에 앉아 숫돌에 갈기 시작했다.

“기왓장은 갈아 무엇하실 것입니까?”

“기왓장을 갈아 거울을 만들까 한다”

“기왓장을 간다고 거울이 됩니까?”

“그러면, 좌선만 한다고 부처가 되느냐”

이어 화양이 말한다. “좌선을 익히는 중이라면 선이란 결코 앉아 있는 것이 아니고, 좌불을 익히고 있는 중이라면 부처는 원래 정해진 모양새가 없다는 사실을 명심하게”

선의 추진력은 자신만의 체험을 통해 부처, 법, 깨달음 등의 의미를 다시금 깨닫기까지 관습적 사고와 고정관념을 뒤엎는데 있다고 한다.

선승들은 고된 수련생활을 거쳐 내면적 성장이 이루다가 스승의 한마디 도움에 이치를 깨닫는다하여 “줄탁동시”라는 말도 있다.(벽암록 16칙)

마조는 평상심이 곧 도(平常心是道)라는 법어로 유명하다.

“도는 닦아 익힐 필요가 없다. 오직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면 된다. 나고 죽는다는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별난 짓을 벌이는 것을 더러움에 물든다고 하는 것이다. 단번에 도를 이루고 싶은 생각이 있는가. 평소의 마음이 바로 도이니라”

평상심이 나날의 생활에 최선을 다하는 진실한 평소의 마음이라는 뜻인 것 같은데, 스트레스, 미움, 나태, 욕망이 수시로 엇갈리는 사회생활 속에서 평상심을 유지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마조 도일의 제자인 서당 지장으로부터 선법을 전해 받은 홍척, 도의에 의해 신라의 9산선문이 시작되었고, 마조선의 적손이라는 임제종이 태고 보우(太古 普愚)에 의해 우리나라에 전해져 청허 휴정(서산대사)으로 이어졌다.

 

7. 흉허복실(胸虛腹實)

  국궁의 활쏘는 자세를 배우면서 흉허복실(胸虛腹實)이란 말을 들었다. 가슴은 비우고 뱃심은 두둑히 하라는 뜻인데, 일상생활의 자세로도 배울만하다고 느껴진다.

“빈 마음이 없으면 세상일이 보이지 아니하고, 실한 마음이 없으면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不虛心 不知事 不實心 不成事)”라는 옛글도 마음자리를 가르치고 있다.

가끔 생활을 하면서 능력부족과 스트레스를 느낄 때면, 결과에 연연하지 아니하고 빈 마음으로 최선을 다하려고 한다. 스트레스는 완벽이나 결과에만 집착하다 보면 더욱 가중되는 것 같다.

마음을 비우는데는 가끔은 음악도 좋다. 카치니의 아베마리아를 들으면, 자신을 한없이 낮추고 높은 곳을 향하여 갈구하는 쏘프라노의 그 간절한 음색에서 마음 속의 큰공간을 느낀다.

어떤 때 동양화의 빈 여백도 도움이 되겠지만, 사색의 계절이라는 이 가을에 번뇌잡상에 시달리는 마음을 탐구하는 선불교의 책을 읽으면서 마음의 공간에 떠다니는 날파리 같은 잡념을 제거하면 마음이 다소 비워질지 누가 알겠는가?

벽암록에서 논쟁거리에 휘말린 고양이를 죽이는 선사의 이야기(제63칙), 화상의 방귀뀌는 소리도 부처의 소리냐고 묻다가 얻어맞는 납자의 이야기(제79칙)도 재미있지만, 추운 방을 덥히기 위하여 목불(木佛)을 쪼개 군불을 지피면서 이를 따지는 원주스님에게 “다비해서 사리를 얻고자 한다”고 말하는 단하 천연선사의 이야기(제76칙)에서 자유인(自由人)을 느낀다.

벽암록은 “언어의 불완전성과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 열린 마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사물의 실상(實相)을 보라,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여 정진하라, 자유자재하는 마음을 즐겨라”를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치열한 구도정신, 깨달음을 위한 사제간의 인정, 깨달음에 대한 스승의 인가를 통해 후세의 교재가 되고 있는 것이다.

법학도가 사례연구를 하면서 법적 마인드를 수련하듯, 벽암록은 불교적 마인드를 단련하는 사례집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벽암록에는 정답이 없다. 같은 대답을 반복하는 것은 새로운 번뇌에 불과하니까.(終) 

-2004.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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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갈량..유비의 삼고초려의 지우를 입고 유비사후 천하 삼분의 약소국 촉을 이끌던 충신의 대명사

            국궁진력하다 지친 몸을 오장원의 전선에서 눕힌다..

악비..금나라에 수도가 함락되는 정강의 변을 당하여 송나라가 남쪽으로 천도한 이후 중원을 회복하기위하여 전선을 전전하던 장수..

         남송의 이순신 격..한 때 금군을 대파하여 중원회복을 눈앞에 두었으나 화친파 진회의 농간에 빠져 옥사하는 비운의 충신..

 

그 악비가 금군을 대파하고 중원에 진출하여 남양을 지날때 무후사에 들렀다가

제갈량의 출사표를 쓰다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는 글이다..

 

청나라 이전엔 중국 화하족의 영웅으로 존경 받아 악비가 진회를 발로 밟은 모습의 동상이 세워져 있었는데..

청나라 이후 다민족 국가를 표방하는 현 중국에서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단다..

 

***

이참에 제갈량의 명문 출사표를 읽어 보자..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선제창업미반,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피폐, 차성위급존망지추야

 

 

선제께서 왕업을 시작하신 지 아직 반도 미치지 못한채 중도에서 돌아가시고, 이제 천하가 셋으로 나뉘었는데 익주는 피폐해 있으니, 진실로 흥하느냐 망하느냐 위급한 때입니다.
그러나 모시는 신하들이 안에서 게으르지 않고 충성스런 지사들이 밖에서 자기 몸을 잊고서 애쓰는 것은, 대개 선제의 두터웠던 대우를 추모하여 이를 폐하에게 갚고자 함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성스러운 폐하의 귀를 넓게 열어, 선제가 남긴 덕을 빛나게 함으로써 지사의 의기를 넓히고, 스스로 덕이 없다고 여겨 의기를 잃고 충간의 길을 막아서는 안됩니다.

(중략)

어진 신하를 가까이 하고 소인을 멀리함은 전한이 흥하고 융성한 까닭이요, 소인을 친근히 하고 어진 신하를 멀리함은 이것이 후한이 기울어지고 쇠한 까닭입니다.

(중략)

신이 본디 미천한 백성으로 남양에서 몸소 밭갈며 구차히 어지러운 세상에서 생명을 보존하고 제후에게 알려져서 출세할 것을 구하지 않았더니,
선제께선 신을 비천하다 여기지 않으시고 외람되게도 스스로 몸을 낮추시어 세 번이나 신을 초옥 안으로 찾으시어 신에게 당세의 일을 물으시니

이로 말미암아 감격하여 마침내 선제께 힘써 일할 것을 허락하였더니 국운이 기울어짐을 만나 패군의 때에 임무를 받고 명령을 위급한 때에 받은 것이 그 이래로 21년이 됩니다.
선제께서는 신이 삼가고 조심함을 아시는지라 임종하시매 신에게 큰일을 맡기셨습니다.
신이 명을 받은 이래 아침 일찍부터 밤까지 근심하고 탄식하며 부탁하신 일에 효과가 없어 선제의 밝으심을 해칠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오월에 노수를 건너 불모의 땅에 깊이 들어가 이번에 남쪽을 평정하고 무기와 갑옷이 풍족하니 마땅히 삼군을 거느리고 북으로 중원을 평정하고 노둔한 힘이나마 다하여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를 쳐 없애버리고 다시 한의 황실을 일으켜 옛 도읍지로 돌아가는 것이 신이 선제께 보답하는 방법이요 폐하게 충성하는 직분인 것이요
손해와 이익을 짐작하고 나아가 충성스러운 말을 다하는 것은 곽유지, 비위, 동윤의 임무이니 원컨대 폐하께서는

신에게 도적을 토벌하고 한실을 부흥시키는데 실효를 거둘 일을 맡기시어 효과가 없으면 곧 신의 죄를 물어 선제의 영앞에 고하시고 곽유지, 비위, 동윤 등의 허물을 꾸짖어 그 태만을 밝히시옵소서.
폐하께서도 또한 마땅히 좋은 방도를 자문하시고, 좋은 말을 살펴 받아들여 선제의 남기신 말을 깊이 따르소서.
신이 은혜 받은 감격을 이기지 못하는지라, 지금 멀리 떠나기에 앞서 표를 올림에 눈물이 앞을 가려 말할 바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先帝創業未半, 而中道崩殂 , 今天下三分, 益州疲弊, 此誠危急存亡之秋也.

선제창업미반,이중도붕조,   금천하삼분, 익주피폐, 차성위급존망지추야

然侍衛之臣, 不懈於內, 忠志之士, 忘身於外者,

연시위지신, 불해어내, 충지지사, 망신어외자,

蓋追先帝之殊遇, 欲報之於陛下也. 誠宜開張聖聽, 以光先帝遺德,

개추선제지수우, 욕보지어폐하야. 성의개장성청, 이광선제유덕,

恢弘志士之氣, 不宜妄自菲薄, 引喩失義, 以塞忠諫之路也.

회홍지사지기, 불의망자비박, 인유실의, 이색충간지로야.

....

親賢臣遠小人, 此先漢所以興隆也, 親小人遠賢臣, 此後漢所以傾頹也. 先帝在時,

찬현신워소인 차선한소이흥륭야, 친소인원현신, 차후한소이경퇴야. 선제재시,

...
臣本布衣, 躬耕南陽, 苟全性命於難世, 不求聞達於諸侯,

신본포의, 궁경남양, 구전성명어난세, 불구문달어제후,

先帝不以臣卑鄙, 猥自枉屈, 三顧臣於草廬之中, 諮臣以當世之事.

선제불이신비비, 외자왕굴, 삼고신어초려지중, 자신이당세지사.

由是感激, 許先帝以驅馳. 後値傾覆, 受任於敗軍之際, 奉命於危難之間,

유시감격, 허선제이구치. 후치경복, 수임어패군지제, 봉명어위난지간,

爾來二十有一年矣. 先帝知臣勤愼. 故臨崩, 寄臣以大事也. 受命以來,

이래이십유일년의. 선제지신근신. 고임붕, 기신이대사야. 수명이래,

夙夜憂慮, 恐付託不效, 以傷先帝之明. 故五月渡瀘, 深入不毛.

숙야우려, 공부탁불효, 이상선제지명. 고오월도로, 심입불모.

今南方已定, 兵甲已足, 當奬率三軍, 北定中原, 庶竭駑鈍, 攘除姦凶,

금남방이정, 병갑이족, 당장솔삼군, 북정중원, 서갈노둔, 양제간흉,

以復興漢室, 還于舊都, 此臣所以報先帝, 而忠陛下之職分也.

이부흥한실, 환우구도, 차신소이보선제, 이충폐하지직분야.

至於斟酌損益, 進盡忠言, 則攸之.褘.允之任也. 願陛下,

지어짐작손익, 진진충언, 칙유지.위.윤지임야. 원폐하,

託臣以討賊興復之效, 不效則治臣之罪, 以告先帝之靈.

탁신이토적흥복지효, 불효칙치신지죄, 이고선제지령.

若無興德之言則責攸之.褘.允等之咎, 以彰其慢. 陛下亦宜自謀,

약무흥덕지언칙책유지.위.윤등지구, 이창기만. 폐하역의자모,

以諮諏善道, 察納雅言, 深追先帝遺詔. 臣不勝受恩感激, 今當遠離,

이자추선도, 찰납아언, 심추선제유조. 신불승수은감격, 금당원리,

臨表涕泣, 不知所云.

임표체읍, 부지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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羲之頓首,快雪時晴,佳想安善。未果,爲結,力不次。王羲之頓首。山陰張侯。

 

큰 눈이 그치고 하늘이 맑아지자 왕희지는  친구에게 안부편지를 보낸다.
본문은 공책 정도의 작은 크기 인데. 본문의 20배 정도의 발문이 붙었다..

 

***

재위 11년째 되던 해(1746년) 봄 2월 어느 날, 건륭제는 뜻하지 않게 동진(東晋)시대의 서예가 왕순(王珣)의 ‘백원첩(伯遠帖)’을 손에 넣게 됐다.

그때의 심정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천재일우로 내가 이 보물을 손에 넣게 되었구나!”

그는 이미 선대에 황실로 들어온 왕희지(王羲之)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과 왕헌지(王獻之)의 ‘중추첩(中秋帖)’을 백원첩과 합쳐 ‘세 가지 보물(三希)’이라 부르고는, 이들을 한 곳에 모셔두기 위해 자신이 정무를 보는 양심전(養心殿)의 전전에 작은 서재를 꾸몄다. 한 평이 조금 넘는 작은 방에 ‘세 가지 희귀한 보물’을 모셔놓았다 하여 그 이름을 삼희당이라 지었다.

이들은 모두 왕희지 일가의 글씨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산둥(山東)에서 태어났으나 난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 양자강변의 저장성(浙江省) 사오싱(紹興)에 정착, 수많은 서첩을 남긴 왕희지(303∼361)는 글씨의 나라 중국에서도 ‘서성(書聖)’으로 추앙 받는 인물. 한마디로 글씨의 대가다.

왕희지 이전까지만 해도 중국의 서법은 전서와 예서 일색이었는데, 강남에 문화다운 문화를 진작시킨 동진시대 왕희지 일족에 의해 행서, 초서, 해서로 다양하게 발전하는 계기가 마련됐을 뿐 아니라 그 서법의 아름다움은 그대로 중국 문인들의 모델이 됐다. 그러므로 그에게 서성이란 칭호를 내렸다 해서 결코 과분하다고 할 수는 없는 일이다.

왕희지의 서법에 매료된 건륭제는 만주족이라는 혈통의 한계를 초월하여 중국문화의 전통을 계승하고 싶었다. 그래서 황색 유리기와가 흰눈에 덮여버린 날, 그는 근엄한 황제로서가 아니라 소박한 한 사람의 문인으로서 예술의 세계에 깊이 빠져든 것이다.

예술사랑에 빠진 ‘문화황제’

삼희당, 나아가 양심전에선 첫눈에 봐서 이렇다할 만한 장식을 찾아내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가구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서안(書案), 탁자, 의자, 장롱 등이 하나같이 자단목 같은 진귀한 나무로 만들어진 것임을 알게 된다. 마루에 깔린 요는 담황색 공단인데, 그 위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수시로 바꿨다. 여름에는 갈포나 하포, 겨울에는 수달피와 담비 가죽, 해룡피를 깔았다. 동난각(東暖閣)의 남쪽 창문과 항탁(온돌 위에 놓은 작은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두 개의 당대(唐代) 도자기가 놓여 있다. 옥기와 도자기, 서화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 중에서도 건륭제가 가장 애지중지한 것은 단연 쾌설시청첩이다. 이것은 왕희지가 대설이 내린 다음 날씨가 화창하게 개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 산음장후(山陰張侯)의 안부가 궁금해 그 심정을 전하고자 쓴 한 장의 서한문이다. 재질은 종이가 아니라 마(麻)이고, 가로 14.8cm, 세로 23cm의 작은 지면에 4행의 행서로 고작 28자만을 적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건륭제는 이를 보고는 ‘신기(神技)’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예로부터 중국에서 서화를 평할 때는 ‘능(能)’ ‘묘(妙)’ ‘신(神)’이란 말로 표현했다. ‘신’은 그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찬사였다. 실제로 건륭제는 서첩 옆에다 ‘神’이란 글자를 직접 써넣기까지 했다. 그것도 모자랐는지 ‘천하무쌍 고금선대(天下無雙 古今鮮對)’라는 댓구를 덧붙였으며, 삼희당이란 인(印)을 세 개씩이나 찍었다. 이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이 서첩에 매료됐는지 짐작이 간다.

그가 단지 낭만적인 기분에서 이 서첩을 마주한 것은 아니다. ‘춘전(春前)의 서설(瑞雪)’ ‘입춘, 감설(甘雪)이 내리다’라는 글귀까지 남겨놓은 것을 보면 그는 눈을 어지간히도 기다렸던 모양이다.

 

출처 : 신동아 테마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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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에 의지하여 고양이를 그려라!

 

끊임없이 자꾸 그리다가

두귀가 솟고 무니가 얼룩진 곳과 심식의 길이 끊어진 곳과 나와 경계가 다 없어진 곳에 이르면

 

붓 끝에서

별안간 산 고양이가 펄쩍 뛰어 나오리니..

 

(고봉선사 "선요"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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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의 친필로 추정되는 문서가 공개됐다.

국내 서지학계 원로인 천혜봉(千惠鳳) 성균관대 명예교수가 9일 논문을 통해 공개한 이 문서는 ‘御賜 喜雨亭 孝寧大君 房(어사 희우정 효령대군 방)’이란 제목의 10쪽짜리.

세종 즉위 7년인 1425년(을사년·乙巳年)에 기우제를 지낸 뒤, 형 효령대군이 있던 서울 한강 근처의 합강정(合江亭)을 방문해 쓴 글일 가능성이 있다.

해서체(楷書體·) 한자로 쓰여 있으며 ‘어진 형 덕분에 가뭄이 끝나고 비가 내려 기쁘다. 합강정의 이름을 희우정으로 바꾸도록 하라’는 내용 등이 담겨 있다.

문서의 마지막 부분엔 ‘乙巳 夏四月丁丑 國王 弟 도(을사 하사월정축 국왕 제 도)’라는 문구가 적혀 있다.

 ‘도’는 세종의 본명.

이 서체를 살펴본 이경희(서예학) 동방대학원대 교수는 “세종의 글씨를 베낀 모각 글씨와 서체가 비슷해 일단 세종의 친필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면서 “학계의 정밀 고찰이 필요하다”고 평가했다.

지금까지 세종의 친필 문서는 발견된 바 없다.

 

아래 글씨는 세종의 글씨 복사본이라며 경매싸이트에 올려진 글씨다..

과연 대왕의 글씨일까?

 

어찌되었건

전에 불탄 숭례문의 글씨가 형인 양녕대군의 글씨라는 설이 있고, 아들인 안평대군의 글씨도 유명한 것으로 보아 세종대왕도 필재는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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