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서예전에 출품된 노태악 대법관의 글씨

 

一點冬心朶朶圓(일점동심타타원)
品於幽澹冷雋邊(품어유담냉준변)
梅高猶未離庭砌(매고유미이정체)
淸水眞看解脫仙(청수진간해탈선)

한 점 겨울 마음인가 송이송이 둥글다
그윽하고 담백한 성품은 차도녀같네
매화가 고상하다지만 뜨락을 벗어나지 못하는데
맑은 물에서 제대로 보니 해탈한 선녀같구나

 

추사 김정희가 지은 수선화라는 한시다..

추사는 금수저출신이라 24세 젊은 나이에 사신일행으로 청나라 수도 연경에 가서 처음 수선화를 보고 매력에 빠졌다..

한양에 와서도 고급 도자기에 수선화를 심어 놓고 애지중지 사랑하였는데..

50대 중반 제주도에 귀양와서 대정현에 유배살이 할 때보니 

그 귀한 수선화가 들판에 지천이라 푸대접받고 소먹이로 사용하는 것을 보고 

수선화를 마치 자신의 처지처럼 안타깝게 바라본다..

 

왕년에 제주에 가서 추사 유배길를 걸으며 수선화와 수인사하던 추억이 떠오른다..

https://servan.tistory.com/6349933

 

 

 

"달이 밝으면 구름이 끼고   꽃이 고우면 비가 내린다.."

 

- 초의, 추사의 제문에서 -

 

***

 

화혜복지소의, 복혜화지소복(禍兮福之所倚, 福兮禍之所伏).

행복 속에 불행이 숨어있고 불행 속에 행복이 있다..

-노자-

 

낙중유우(樂中有憂), 우중유락(憂中有樂)

즐거움 가운데 우환이 생겨나고, 우환 속에 즐거움이 있다..

 

- 이황,자찬묘지명 -

 

**

 

번뇌와 보리는 둘이 아니다(菩提煩惱不二)

 

***

 

성중유패(成中有敗), 패중유성(敗中有成)

성공 속에 실패가 숨어 있고, 패배가 성공의 기틀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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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소거사자찬..

황산 김유근이 짓고, 추사 김정희가 해서체로 정성껏 쓰다..

안동 김씨의 김유근과 경주 김씨의 김정희는 집안이  정치적 대립관계지만, 둘은 서화를 즐기는 친구였다..

황산 김유근이 실어증에 걸려 말을 못하게 되자, 스스로 묵소거사라 친하면 자찬을 지었다..

추사가 옥사에 걸려 제주로 귀양갈 때 집권세력이던 김유근이 실어증으로 구원해주지 못한채 몇달 뒤에 사망한다..



當黙而黙, 近乎時, 當笑而笑, 近乎中. 周旋可否之間, 屈伸消長之際. 動而不悖於天理, 靜而不拂乎人情. 黙笑之義, 大矣哉. 不言而喩, 何傷乎黙. 得中而發, 何患乎笑. 勉之哉. 吾惟自況, 而知其免夫矣. 黙笑居士自讚

침묵해야 할 때 침묵한다면 시중(時中)에 가깝고, 웃어야 할 때 웃는다면 중용(中庸)에 가깝다.

옳고 그름을 판단할 때가 온다거나, 세상에서 벼슬하거나 아니면 은거를 결심할 시기가 온다.

이러한 경우 행동할 때는 천리(天理)를 위반하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는 인정(人情)을 거스르지 않는다.

침묵할 때 침묵을 지키고, 웃을 때 웃는다는 의미는 대단하다.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나의 뜻을 알릴 수 있으니 침묵을 한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중용의 도를 터득하여 감정을 발산하는데 웃는다 한들 무슨 걱정이 되랴! 힘쓸지어다. 나 자신의 상황을 생각한다면 화는 면할 수 있음을 알겠다.

묵소거사가 자신을 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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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추사의 글씨를 좋아하여  추사관련 책을 많이 사 읽고, 추사 유배길도 걸었다..

그런데 이 책 처럼 충격적인 내용은 없었다..

 

기존 평론가들이 부작난화(不作蘭花)로 해독하는 것을 저자는 부정난화(不正蘭花)라고 해독하면서 완전히 다른 해석을 시작한다..

부정난화라고 해독하려면 정난화가 있다는 것인데,

정난화는 남송 말기  사초思肖 정소남鄭所南이 노근란露根蘭을 그리며 남송에 대한 충정과 반원 정신을 표현함으로서 시작된 난화를 말한다.

이런 충절을 강조하는 난화는 성리학이 절대적 이데올로기로 군림하던 조선에 들어오면서 선비문예의 중심으로 자리잡고 정난화 대접을 받게 었단다

 

그런데, 정소남 이전의 난화 즉 굴원의 이소 등에 나타난 난의 상징은 "백성의 소리"였단다..

추사가 추구한 부정난화란 이런 전통적인 상징으로서 난화를 그림으로써 "백성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공평한 인재등용 등으로 개혁을 바라는 동지를 규합"할 목적으로 난화를 그렸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추사는 고증학적인 입장에서 성리학의 공리공론적 경향을 배격하고 공자가 원래 추구했던 현실 직시하는 실사구시의 유학을 난화를 통해서 표방했다 한다.  

 

난엽이 오른 쪽으로 꺽인 그림은 서풍이 부는 것인데, 서풍은 가을 바람이고 역경, 고난을 뜻하고, 왼쪽으로 꺽인 그림은 동풍이 부는 것인데, 동풍은 봄바람이고 순경, 미래상을 표현한다

 

문자향, 서권기란 "그림과 글씨의 조형에서 풍기는 느낌"이 아니라 "난화의 제화시나 문장 숨겨진 사의(寫意)를 읽어 내야" 가능하다..

기존의 학자들은 그런 학문적 깊이가 없어서 추사의 글씨를 오독한 부분이 많다고 주장한다..

이책을 읽다보면 저자의 고전 공부의 깊이가 느껴지고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

 

저자는 말한다.

다산이 귀양지에서 500권의 책을 저술할 때, 지적 학문적 수준에서 그와 필적할만한 추사가 그저 난을 환쟁이 수준으로 희롱이나 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아들 상우에게 한 말이 의미가 있다..

아들 상우가 제주도에 종이를 가득 보내자, 추사는 서너 장이면 될 것을 많이 보냈다며, 

“넌 아직 난경취미를 터득지 못했다(汝尙不解蘭境趣味)”며 “문자향서권기를 가슴에 담아 그리면 많이 그릴 필요가 없으니 종이는 더 이상 보내지 말라”고 질책했다.

 

이 의미를 깊이 생각해보라.

단순한 난 그림이라면 많이 반복해서 그려야 발전할터이지만, 추사처럼 글자 속에 의미를 담으려면 난화를  많이 그릴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가 말하는 문자향, 서권기란 고전에 달통하고 자유자재로 변용할 수있어야 깊이 있는 제화시를 쓸 수 있고, 그런 연후에야 추사스타일의 난화를  그릴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요즘 사군자 그림에 깊이 없는 제화시를 쓰고, 문인화라고 칭하며 "문자향, 서권기를 풍긴다"하는 것은  잘못된 이해의 결과라는 결론이 나온다..

 

 

 

 

어느 날 서지환이라는 사람이 찾아와 말하기를, 송나라 탁계순이라는 사람이 혜주에 유배된 소동파를 찾아가 뵙고 돌아갈 때 글씨를 요구하면서, 그 옛날 당나라 때 채명원이 안진경의 글씨를 갖고 있어서 세상에서 이름을 얻었듯이 저도 공의 글씨를 얻는다면 이름이 묻히지 않을 것이니 이로써 만족하겠습니다라고 말하여 소동파가 기꺼이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써주었듯이 저도 선생님의 글씨를 하나 받아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싶습니다라며 청했다.

 

 그래서 완당은 서지환에게 글씨를 한 폭 써주며 이렇게 덧붙였다.

지금 서지환이 천리길 멀리 와서 나를 용산(龍山)의 병사(丙舍)로 방문하여 · · · · · · 탁계순의 고사를 이끌어 글씨를 요구하니 내 써주기는 써준다. 그러나 내 글씨로 인해 (그대의) 이름이 세상에 전해지고 전해지지 못하는 것은 (내게) 따질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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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가 다산에게

추사가 쓴 글씨의 일부.

 

 

다산이 추사와 함께 다산의 제자인 황상(1788~1870)이 머문 산방을 찾아 하룻밤을 지내는데,

황상은 두 사람에게 조로 지은 거친 밥에 아욱국을 끓여 아침으로 내놓는다.

 

청빈한 생활과 정성에 감동한 다산이  

남원노규조절(南園露葵朝折)
동곡황량야용(東谷黃梁夜용)

남쪽 밭 이슬 젖은 아욱 아침에 꺾고

동쪽 골짜기 누른 조를 밤에 찧네’는 시를 짓고

추사가 이 시구 중 露葵와 黃粱에다 社를 붙여 글을 썼다. 이는 ‘고결한 선비의 거처’라는 뜻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하면, 다산과 추사의 나이 차이나 유배생활 시기 등에 비추어 두사람이 함께 황상의 집을 방문한 것은 불가능해 보인다. 이 때문에 훗날 황상의 청빈생활을 전해들은 추사가 이에 감동해서 다산의 제자에게 '노규황량사'를 써 주었다는 말이 전해진다.

 

** 다산과 추사

 

다산과 추사는 24년의 나이 차이가 나 다산의 둘째 아들 정학유(丁學游)와추사가 동갑내기여서 아들처럼 여길 연령이다.

다산초당에서 다산에게 시를 배우고 글을 배웠던 제자 초의대사와 추사는 동갑이다..

추사가 다산에게 주역에 관하여 토론하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고, 추사가 보낸 고려청자에 심은 수선화를 받은 다산이 쓴 시가 전한다.

 

<수선화>

 

신선의 풍채나 도사의 골격 같은 수선화가                          仙風道骨水仙花
30년을 지나서 나의 집에 이르렀다.                                  三十年過到我家
복암 이기양이 옛날 사신길에 가지고 왔었는데                    茯老曾携使車至
추사가 이제 대동강가 아문에서 옮기었다오.                       秋史今移浿水衙
외딴 마을 동떨어진 골짝에서는 보기 드문 것이라서             窮村絶峽少所見
일찍이 없었던 것 얻었기에 다투어 떠들썩하다.                   得未曾有爭喧譁
어린 손자는 처음에 억센 부추잎에 비유하더니                    穉孫初擬薤勁拔
어린 여종은 도리어 일찍 싹튼 마늘싹이라며 놀란다.            小婢翻驚蒜早芽
흰 꽃과 푸른 잎새 서로 마주 서 있으니                              縞衣靑相對立
옥 같은 골격 향그런 살결에서 향내가 절로 풍기는데             玉骨香肌猶自浥
맑은 물 한 사발과 바둑알 두어 개라                                  淸水一盌碁數枚
티끌조차 섞이지 않았으니 무엇을 마시는지.……                  微塵不雜何所吸 

   

 

**다산과 황상

그들 사제의 관계는 애뜻하다..

강진에 유배갔던 초기 주막에 임시 거쳐할 때 한양의 유명한 선생님 귀양왔다는 사실을 알고 15살의 황상이 찾아왔다고 한다.
황상이 글을 배운지 7일만에 다산 선생은 한 권의 책을 주었는데...
이 때, 제자 황상은 책을 받기를 꺼리며, 자신은 머리도 좋지 않고, 융통성도 없으며, 잘 배우지도 못한다며 걱정을 했다. 
이 말을 들은 다산선생은 편지 한통을 써주었다.

 

공부하는 자들이 갖고 있는 세 가지 병통(단점)을 너는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첫째 , 기억력이 뛰어난 병통은 공부를 소홀히 하는 폐단을 낳고,

둘째 , 글 짓는 재주가 좋은 병통은 허황한 데 흐르는 폐단을 낳으며,

셋째 , 이해력이 빠른 병통은 거친 데 흐르는 폐단을 낳는다.

 

둔하지만 공부에 파고드는 자는 식견이 넓어지고,

막혔지만 잘 뚫는 자는 흐름이 거세지며,

미욱하지만 잘 닦는 자는 빛이 난다.

 

파고드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뚫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닦는 방법은 무엇이냐. 근면함이다. 

그렇다면 근면함을 어떻게 지속하느냐. 마음가짐을 확고히 갖는 데 있다.

이 가르침을 받은 황상은 말씀을 평생 잊을까 두려워 하며 가슴에 새기며 살았다고 한다.

 

학자이자 시인으로 성장한 황상..

다산이 유배지에서 풀려난 후 가야산 백적동에 은거하며 다산초당(茶山艸堂)과 같은 원림인 일속산방(一粟山房)을 일궈냈다.

다산은 황상을 그리워한 나머지 자신에게 소식을 주지 않는 것에 대해 섭섭한 마음을 토로할 정도였다.

이미 황상의 나이도 48세에 이르고, 정약용은 74세의 노인이 되어서 황상은 떠나간 스승을 마냥 그리워하다가 마침내 스승을 뵙고자 찾아 나선다. 스승의 회혼례 축하와 죽기 전에 꼭 한번 뵈어야 한다는 조바심이 열흘을 걷는 긴 여행을 시작하게 한 것이다.

18년 만의 스승과 제자의 꿈 같은 해후를 만끽하고 황상은 다시 강진으로 귀향한다. 그러나 귀향 중에 스승의 부음을 듣는다. 그는 길을 되돌려 마재로 돌아오고 상을 치른 후 강진으로 돌아간다.

후에 스승의 자제인 정학연 형제와 평생 의지하며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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