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성산 정상에서 다시 내려간다.

목표는 궐리사 방향으로 하산하여 명재고택을 관람하고 애향공원 주차장으로 복귀한다.

 

다시온 문제의 삼거리..어??

표지판에 변화가 있다?? 

관청이 수정을 해주지 않자, 의병이 나서서 매직펜으로 궐리사를 추가해 주었네..ㅎ

아직도 의병과 죽창에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가??

 

내려가는 길은 짧지만 제법 가파르다..

 

사람이 잘 다니지 않는 코스인가본데 하산할 수록 길이 희미해지는 미스테리..ㅎ

 

엉겅퀴에 반한 나비..

모든 것에 짝이 있다는 음양 조화의 신비..ㅎ

 

다시 신작 임도와 만나는데..

 

그런데, 여기서도 성의 없는 표지판이 말썽이다..

표지판의 궐리사는 숲속의 오솔길을 가리키는데..동행은 옆 넓은 임도길이라고 말한다..

결국 오솔길은 고라니 다니는 길 같고, 임도길이 대문으로 가는 길임이 판명된다..

표지판 좀 정확히 설치하자..ㅎ

 

하여간 고라니 오솔길로 권리사 뒷담장에 도착..

 

궐리사 내력을 보니..

공자의 고향, 노나라 니구산 궐리촌에서 따온 것이다.

공자 사당이다.. 

 

顔色整齊 中心必式 夙興夜寐 衣帶必飭
안색정제 중심필식 숙흥야매 의대필칙

 

주련에 소학의 한 귀절이 걸렸다..

얼굴빛을 바르게 하면 속마음도 반드시 경건하게 되고

일찍 일어나고 밤에는 잠자며, 옷과 띠를 반드시 갖추어야 한다.

 

이렇게 하면, 잘 웃지도 못하고 밤에 딴짓 못하겠다..ㅎ

조선시대에 양반 유머가 발전하지 못한 이유를 알겠다.

지금도 정치인이 "웃으며 화내는 법"을 모르고, 직설로 공격하기를 좋아하는 문화적 DNA가 생긴 것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논어 속의 공자를 보면 지혜와 언어의 달인으로 보인다..

그러기에 그는 제자 수준에 따른 맞춤교육으로 교사라는 직업을 탄생시켰다..

 

늦은 앵두가 붉은 입술로 송별해준다..

 

금계국의 환영을 받으며 들어가는 명재고택..

 

입구 건물 초연당.

안에 학생들이 점심을 먹고있길래, "여기 식사되나요?"하고 물으니

왈, "여기는 도서관인데요.." 헉!!

 

 

고택의 장독이 늘어 이제는 고택의 경관을 빛나게 한다..

전에 왔을 때는 이정도로 많지 않았다.

명재 집안의 장맛은 몇백년의 전통이 있다..

전에 350년전통의 보성선씨 종가의 간장이 1리터에 500만원씩 팔렸다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이 집의 간장도 백화점에 출시된단다..

이제는 찾는사람이 많아 사랑채 옆 빈터에 많은 장독을 두고 간장의 생산을 늘렸나보다.. 

 

산에서 내려와 노곤한 참에 400년 묵은 느티나무가 보내는 시원한 바람에 저절로 누워 눈을 감게된다.

 

잠결에 주인장에 손님에게 이 집 풍수에 대해 설명하는 소리가 들린다.

좌 청룡 (동쪽)가 허해서 비보하기 위하여 느티나무를 심었단다.

그렇다고 해도, 이 나무가 몇백년을 지탱해주는 것이 신기하다..

명재 윤증..

그는 숙종년간에 스승 송시열과 분당하여 소론의 영수 역할을 하면서 백의정승이라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다..

이 집은 명재 윤증이 눌러 살던 집은 아니란다..

본인은 원래 이곳에서 좀 떨어진 곳에 단촐한 집에서 살앗는데, 제자들이 주선하여 이 집을 지었으나, 

정작 본인은 분에 넘친다고 생각한 듯 이곳에서 살기를 싫어하여 아들이 살았고, 가끔와서 묵기는 하였단다.

 

명재 윤증은 개성과 소신이 뚜렷하다.

그는 무실과 실심을 강조한 실용주의자 같다고나 할까?

특히 허례허식을 싫어하여, "제상에 떡을 올려 낭비하지 말 것이며, 일꺼리가 많은 유밀과 기름이 들어가는 전도 올리지 말라”고 한 유언할 정도였단다.

그의 집안 제사상에는 조기도 한마리가 아니라 토막으로 올린단다..

음식은 종이를 입에 물고 남자들이 장만한다..

추석 제사상의 경우 앞줄에 과일, 2번째 줄에 김치, 3째줄에  백설기..

이렇게만 딱 차린다..

송편 대신 백설기를 올리는 것은 "변하지 않는 마음"을 뜻한다던가?

설날에는 백설기 대신 떡국를 올린다..

그뒤 후손들은 이 정신을 계승하여 기제사도 한밤중이 아닌 저녁에 지내고, 구한말에는 이미 양력으로 제사날을 정했다고 한다..  

이런 실용, 간이의 정신은 정통파 내지는 교조주의적 성리학자들과는  확연히 차이가 난다..

 

명재 윤증은 송시열의 제자이고, 그 아버지 윤선거는 송시열과는 동문수학한 친구 사이다..

명재는 벼슬을 한 적이 없고, 임금이 벼슬을 내리고 불렀어도 나가지 않았단다..

10차례 벼슬이 내려지다가 우의정 벼슬까지 내리며 불러도 사양하였으니 백의정승이라 할 만하다.

 

왜 그는 그의 스승 송시열과 반목하고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졌을까?

 

우선 우암 송시열은  보수적 성리학자를 넘어서 교조주의적인데, 심하게 말하는 사람은 주자탈레반이라고 부른다.

주자전서의 1자 1획도 고칠 것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백호 윤휴가 "중용"에 집주를 달면서 독창적인 견해를 내자, 송시열이 윤휴를 "사문난적"(이단자)으로 몰아 부쳤다..

이때 윤선거가 윤휴를 긍정적으로 보아주자, 송시열은 윤선거의 과거사(병자호란 때 강화도가 함락되고, 동지인 김익겸이나 자신의 처 등이 순절하였는데, 본인은 탈출한 사건)을 들먹이며 힐난하면서 이른바, 회니논쟁이 벌어졌다.

그뒤, 윤선거가 죽자 아들인 윤증이 아버지의 친구이자 스승인 송시열에게 비문 작성을 부탁하자 성의없게 작성해주었고, 재차 요청하는데도 거절하면서 스승과 제자는 갈라서게 된다.

 

이 두사람의 관계는 이황과 기대승의 관계와 비교된다.

이, 황 두 사람도 "사단칠정론"으로 논쟁이 붙었으나 서로 존중하였고, 안동사람인 이황이 죽으면서 자신의 비문작성을 호남의 기대승에게 부탁하였고, 기대승은 흔쾌히 성의껏 작성해주었다..

 

 

 

사랑채에 걸린 글씨..

위 글씨는 허한고와(虛閑高臥)..아래 쪽 글씨는 도원인가(桃源人家)

다 비우고 한가롭게 누웠으니 여기가 바로 무릉 도원이라..

 

이은시사(離隱時舍)

떠나고 은거할 때를 아는 사람이 사는 곳..

 

***

명재 윤증이 벼슬에 나가지 않은 이유는 세가지..

첫째, 서인들이 남인들의 쌓인 원한을 풀어 주지 않으면 안 된다.

둘째, 외척의 세도를 막지 못하면 안 된다.

셋째, 당론이 다른 자는 배척하고 순종하는 자만 등용하는 풍토도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전제들이 해소되지 않는한 정계에 진출해보아야 진흙탕 싸움에서 벗어 날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대화를 함께 하며 명재를 지지했던 박세채는 훗날 영조 때 탕평책을 뒷받침하였던 것을 보면 명재가 탕평책의 선구였음을 알겟다.. 

 

결국 조용히 은거하며 집안에서 세운 사립학교격인 종학당에서 후진을 양성한다..

그 결과 집안의 후손중 42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

요즘 뜨고 있는 윤석열은 이 집안 사람이다. 윤증은 그의 9대 종조부 쯤 된단다.

사람이 아니라 나라에 충성한다는 신념..

여야를 막론하고 공평하게 수사하겠다는 의지..

검수완박이라는 압박에 저항하여 과감히 사표내고 나오는 기개는 조상의 DNA와 닮았다.

그러나, 그가 별의 순간을 어떻게 관리하고 성장하여 정상을 밟을지는 국가적인 관심사가 되었다..

윤증과 송시열의 관계가 문통과 윤석열의 데자뷰처럼 여겨진다.

 

안주인인 사랑채를 설명하면서 댓돌위에 늘어놓은 돌이 금강산을 묘사한 것이란다..

윤씨 집안의 포부가 크긴 큰가보다..

 

 

 

조선시대 충청도 양반 중 논산의 3명문가를 비교한 "삼치례" 이야기가 잇다..

 

광산 김씨는 먹치레

파평 윤씨는 묘치레

은진 송씨는 집치레 

 

연산의 광산 김씨는 제사를 모시는데 성의를 다하고 제수를 푸짐하게 장만하고 제물을 1자씩 괴고 각종 음식도 많이 만들어 밤중에 제사가 끝나면 나누어 먹고 아침엔 각자 봉게도 싸주어 보낸단다..

노성 파평 윤씨는 조그만 제사상에 조촐하게 제사를 지내지만, 묘을 단장하고 석물을 잘 꾸미는 전통이 있단다..

은진 송씨는 좋은 집을 짓고 단장하는데 관심이 많단다..  

 

 

향교 정문을 지나 몇백미터 가면 애향공원 주차장이다.

그늘 시원한 곳에 앉아 점심을 먹고 다시 벤치에 누워 오수를 청한다.

한가하고 나무 그늘 좋은 넓은 공원이 부럽다..

 

 

 

<오늘걷기> 노성애향공원 - 옥리봉- 정상 - 옥리봉 - 궐리사 - 명재고택 - 애향공원  약 5km

 

논산 노성산을 오랜만에 다시 갔다.

지난번에 1코스를 올라갔다가 2코스로 하산했다.

그런데, 2코스로 하산하기 직전 궐리사 방면으로 내려가지 못한 것을 아쉬워 하였는데, 이번에는 권리사 쪽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명재고택 인근에 노성애향공원으로 내비를 치고 간다.

양반의 상징 갓을 형상화한 조형물이 기다리고 있다.

유행을 따르느라 작은 출렁다리도 새로 생겻다.

 

무심코 가까운 등산로 입구로 올랐는데, 그것이 지난번 하산 코스였다..

 

 

이제 원추리도 피기 시작한다.

그늘이 좋은 오르막 등산로라고 좋아하면서 걷는 동행에게 1코스로 가자고 우길 수 없었다.

 

오르다 보니 새로 개설한 임도와 만난다..

우측으로 가면 명재고택과 권리사와 이어진다.

 

 

오르막과 정상을 좋아하는 동행..무조건 GO..

능선에 오르니 노성천이 운에 들어온다.

 

 

여기다..지난번에 상월표시 쪽으로 갔어야 권리사와 명재고택으로 이어지는데..

표시의 부족성은 아직도 개선되지 못하고 있다..

 

 

이제 다리심이 늘어선인지 오르막길도 즐기줄 아는 내가 대견하기도 하다..

 

잠시 업다운과 밀당하는 사이리 멀리 계룡산 천왕봉이 보인다.

 

산불로 그을린 소나무들이 도열한 길을 걷자니 마음이 짠하다..

 

드디어 노성산성이 보인다.

백제시절에는 사비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였고, 공주를 방어하는 전초기지였다.

 

 

노성산 정상에 서면 계룡산의 진면목이 다 보인다.

 

천왕봉과 저 아래 경천저수지까지..

 

우측으로 향적산 국사봉도 보이고..

정상에서 맛보는 금년 첫 수박..맛도 풍광처럼 눈부시다..

 

 

정상의 정자이름이 니성산정이다..

니성??

노성산의 옛이름 니구산에서 나온 이름이다.

니구산도 공자 고향의 산과 닮았다해서 붙은 이름이다..현재의 노성(魯城)도 공자의 나라 노나라 성이라는 의미이다.

연하협구름다리 선착장에서 내려 바로 양반길 출렁다리를 건너 양반길 2코스를 걷는다.

옥녀계곡이나 선유대에서 회군할 생각이다.

 

멀리서 보면 그림같은 풍경이다.

가까이서 보면 심오하거나 심드렁하겠지..ㅎ

 

양반길 전망대 오르다가 돌아보면 연하협 구름다리가 더 멋지게 보인다.

 

 

충청도 양반길이라 하니, 어떤 사람들은 조선시대 한양으로 과거보러가던 길이냐고 묻는다.

산막이옛길은 산으로 막혀있는 지형이라 길은 커녕 도주가 어려워 귀양가는 길이었다.

 

 

일방으로 통과할때는 몰랏는데, 다시 돌아올 걸 생각하고 자세히 보니 큰 업다운을 2-3번해서 옥녀계곡, 큰성골에 도착..

체력을 생각해 이쯤에서 돌아가기로 한다.

먼저 각시와신랑길을 걷고 왔다면 선유대까지 갔을지도 모른다..

아쉬운 분은 왕년에 걸었던 블러그 참고하시라.

https://blog.daum.net/servan/6350595

 

 

연하협구름다리로 돌아와서 보니 산막이옛길 노래도 있나보다.ㅎ

https://youtu.be/rwuYHrGkvzo

각시와신랑길을 걷기위해 구름다리를 건너간다.

신랑바위 유람을 마친 배가 돌아오고 잇다.

여기서 왕복 3.2km

 

그런데, 예상외로 오솔길이 참 정겹고 좋다.

마치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기도 하다.

 

산막이옛길 노래 가사에도 등장하는 찔레꽃이 오늘 만개하였다.

역대 찔레꽃 노래 중에 제일 경쾌하다는..ㅎ

 

 

철판데크길도 잘 만들었다.

그때 멀리 각시바위가 보인다.

전에는 그냥 선유대라고 불렀던 것 같다.

 

 

전에 걸었을 때 찍은 사진을 참고로 올린다.

 

 

갑자기 너덜길이 나타난다.

문득 어느 섬에 온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배를 타고 와서 벼루길을 걷다가 너덜길이 나타나는..ㅎ

 

잘 빌지 않지만 여기서는 빌고 싶은 마음이 들어 여러가지 소원을 마구 빌었다..ㅎ

 

원앙섬..

물이 적으면 백사장도 드러나는데, 오늘은 물이 가득//

 

신랑바위가 여기인가??하는 의구심을 잠재우는 한 단어...종점..

신랑바위 너머 풍경이 멋지다..

 

강 건너편 선유대 지역에서 바라보면 이렇게 보인다.

 

좌측 신랑바위와 우측 각시바위가 한눈에 들어 온다.

명색이 신랑, 각시인데 둘을 만나게 하는 오작교나 노둣돌이라도 있어야 되는거 아닌겨~

노래로라도 만나게 해야겠다.

https://youtu.be/DQAU8t-HjK4

 

 

그때 유람선이 나타났다. 사진찍기 좋은 절묘한 시간에..

 

내마음 처럼 작약꽃이 활짝 피었다.

 

돌아온 연하협구름다리..

선착장에 줄선 인파..어차피 난 걸어간다..ㅎ

 

신랑바위- 연하협구름다리 - 산막이마을까지 3km 구간 충청도 양반길 1코스, 각시와 신랑길이다..

 

삼신바위가 삼신할매하고 같은겨~ 다른겨~

각시바위와 신랑바위가 맺어지지 못한 전설을 보면, 삼신할매 중매력이 별루 없는갑다..ㅎ

가만히 안내문을 읽어보니 삼신할매가 여기에 눌러 앉아 헤찰하다가 승천기회를 놓치고 바위로 강등되었다는 것 아님??

 

유람선이 연락부절로 다니는 길을 걷는 기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ㅎ

 

수월정에 도착..

산이 높다고 명산이 아니다. 신선이 있어야 명산이다.

물이 깊다고 신령한 것이 아니다. 용이 살아야 신령하다.

 

그런 신선같고 용같은 인물이 노수신이다..

그는 명종 초기 문정왕후, 윤원형 집권기에 을사사화로 진도에 귀양가서 19년을 살았다.

정약용의 유배생활 18년보다 길었다.

그는 진도에서 오랜 세월동안 성리학과 양명학 등 학문에 매진하였다.

정약용과 달리 그에게는 해피엔딩이 기다리고 잇었다.

명종 20년 문정왕후가 죽자, 그는 이곳으로 유배지를 옮기게 된다.

선조가 즉위하자 복권되고, 선조 6년에는 우의정에 이르러 동서 분당을 막기위해 노력한다.

그의 나이 70세에 영의정에 임명된다. 

 

수월정 정자는 후손이 노수신의 적소생활을 기념하여 지은 것인데, 원위치는 연하협이지만, 괴산댐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하자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산막이마을에 식당이 많다.

시원한 잔치국수로 허기를 달랜다.

선착장에 가서 배를 타고 주차장이 있는 차돌바위선착장으로 돌아갈까 했는데..헐

사람이 엄청 줄섰다..

그래서 두다리로 해결하기로 했다..

 

오늘 배가 엄청 바쁘다..한번에 3척이 눈에 들어오네..ㅎ

 

처자도 개도 즐거운 길이다..ㅎ

흙아, 물아, 바람아

우리는 느그가 있은깨 안죽고 잘산다.

고맙다이~

 

이 시인할매를 삼신할매로 임명해야 쓰것다..ㅎ

 

<오늘 걷기> 연하협구름다리 - 양반길 출렁다리 - 양반길 2코스 옥녀계곡 왕복(2.5km) - 양반길 1코스 신랑바위 왕복(3.2km) - 수월정 - 산막이마을 선착장 - 입구 주차장  약 11km

요즘 산막이옛길에서 유람선이 한몫한다는 말을 듣고 확인하러 간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니, 장미가 환영한다.

3번째 방문인데, 올 때마다 세련되고 이뻐진다..ㅎ

민들레도 이만큼 컸다..ㅎ

다람쥐도 잘 커서 밥값을 한다..ㅎ

 

길도 짜임새 있게 꾸며졌다.

등산코스, 산책코스, 트레킹코스, 선상유람코스..골라 골라..ㅎㅎ

요즘 잘나가는 출렁다리도 갖추었으니 이제 남은 것은 케이블카나 짚라인만 남았다..

 

원래 계획은 연하협구름다리까지 걸어가서 양반길 일부 구간을 걸은뒤 배를 타고 돌아올 생각이었는데..

초입부터 선착장에서 호객하는 소리에 끌려 당장 출발하는 배인지 물었더니,

그렇단다..가격은 편도 6천원..그래서 일단 승선했다..

결과적으로 잘했다..

나중에 돌아 올 때보니 배타려고 줄서서 기다리더라..

 

배를 타고 연하협까지 가는 덕에 새로 개설된 신랑각시길에 집중해서 왕복하여 걸을 수 있었다.

먼저 배를 타고 간 것이 탁월한 선택이었다는..ㅎ

이런 것을 종심소욕불유구의 경지보다 높은 종심소욕자성사(從心所欲自成事)다..

마음가는 데로 해도 일이 저절로 이루지는 경지말이다..ㅎ

 

마침 그때 연하협에서 돌아오는 배가 있었다.

관람객이 많은 주말, 공휴일에는 25분 간격으로 운항한다..

 

이 괴산호에는 낚시배도 많더라..

 

배가 출발했다..

마치 영화 화면처럼 풍경이 다가온다..

 

뒤쪽으로 괴산댐이 보인다.

내년부터는 주말에 저 괴산댐을 걸어서 통과할수 있단다.

그러면 괴산호 둘레길이 완성된다..

 

저 돌출된 전망대는 유리바닥이라고 해설한다..

낚시 드리우고 잇는 풍경이 평화롭다..

 

한반도 지형을 돌아서자 환벽정이 보인다.

정자라면 접근이 가능할 터인데, 왜 나는 가볼 생각을 않했을까?

다음에 갈때는 저곳을 들려야겠다..

 

 

물가에 한무더기 꽃은 짐작컨대 찔레꽃이 아닐까?

산막이옛길을 걷다보니 찔레꽃이 많이 보였다..

 

수월정이 보인다.

지금이 극락처럼 보이지만, 조선 중기때에는 이곳은 귀양지였다.

산으로 둘러막혀 탈출이 어려운 지형..

노수신이 연하동에 귀양을 산 적이 있다.

그 후손이 이를 기려  수월정을 지어 보존하였는데, 1957년 괴산댐 건설로 수몰위기에 처하자, 이곳으로 이전하였단다..

 

금세 연하협구름다리가 보인다.

 

여기는 삼신바위란다..

구체적 내용은 다음편에서..

 

삼삼오오 도시어부가 행복한 곳이다..

어찌 도시어부만 행복하랴..

캠핑족도 숟가락을 언졌다. 차박하기도 좋은 곳 같다..

 

비오는 주말..질지않은 길을 찾아간다.

5월에 벌써 찔레꽃은 시들어간다.

찔레꽃 노래의 8할이 슬픈 정서다..

노래의 태생이 원래 슬픔, 한 아니었을까?

5월의 여왕은 단연 장미다..

오만한 콧대와 표독한 가시를 가지고도 많은 추종자를 달고 다니는 것은 고양이와 쌍벽이 아닐까?

 

장미로 인해 데이지도 안개꽃처럼 보인다.

 

딱 제때 맞추어 꼬마기차가 달려온다.

오늘은 비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리는 행운방울이라도 해도 좋다..ㅎ

 

요즘 개양귀비 축제하는 곳도 있는데, 우중에 멀리 가지않고 만끽하는 붉음은 횡재라고 할 수있다..

한밭 수목원의 동원, 서원을 이어걸으면 6km 걷기를 즐길 수있다.

 

가막살 나무가 이리 많은 줄은 꽃이 피어서야 알게된다.

꽃말이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전설은 바로 금지된 사랑이네..헐

그런 줄 진즉에 알았다면 송가인의 금지된 사랑을 들으면서 걷는건데..ㅋ

 

화려함은 작약, 목단에 장미화를 당할 수 잇다.

이들이 피어나는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것 아닐까?

더구나 꽃다운 아그들이 뛰어다니기 좋은 요즘..

5월은 푸르구나..노래 소리 절로난다..

 

때죽나무..

서양사람은 스노벨(snow bell)로 부르는데, 정말 딱 맞는 이름같다.

냇가에서 물고기 잡을 때 때죽나무나 쪽동백의 푸른 열매를 갈아서 물에 풀어 넣으면 물고기들이 잠시 기절을 하게 되어 손쉽게 잡기도 한다.

 

볼때마다 뭐라부르나 고민한다.

마가렛, 샤스타데이지..

비슷해서 그냥 혼용해서 부르기도 한다.

샤스타데이지는 꽃말이 인내, 순진, 평화

마가렛은 진실한 사랑, 사랑의 점괘라서 꽃잎을 하나씩 떼면서 사랑을 점쳤단다.

사조영웅문에서도 황용이 꽃잎을 떼면서 사랑점을 치는 장면이 나오더라..ㅎ

꽃과 함께 걷기 좋은 5월에 만난 한밭수목원..

비가 고마운 날이다..

이번 여행에 봉선사는 안중에 없었다.

포천 가는 길 도중에 안중에 들어왔기에 마지막 스케줄에 넣었다.

일주문부터 개성이 뚜렷하다.

한글애용 절..

 

더구나 절에 들어서자 보이는 큰 연못과 넓은 풍광..

산속 좁은 절 풍경에 익숙한 눈이 잠시 흔들렸지만, 곧 중심을 잡았다.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피던 고려적에는 절들이 이런 평지 들판에 많았을 것이다.

 

어제의 황사가 사라지고 화창한 햇살이 가득한 오늘,

마치 무명, 번뇌를 다 보리로 변회시킨듯 부처와 중생이 모두 평안하고 행복한 날이다..

 

호랑이도 너털웃음 짓는다.

호랑이들이 왜 이리 웃는가??

주인 신령이 인자하신 분이었네..ㅎㅎ 

 

모든 부처님이 행복하시니 방생했던 자라도 나와 행복을 나눈다..

 

오늘은 부처와 중생 그리고 청춘이 하나되는 날이다.

이것이 화엄세계아니던가??

 

화쟁삼매보다 더 오묘한 화중삼매를 즐기기 좋은 오늘..

 

티기탈리스도 꽃을 피웠다..

 

대의왕전은 약사여래를 모시는 곳인가??

오늘 여기만큼은 우울증이 저절로 치료되는 묘약을 뿌렸어라..

 

고려 광종때 처음 창건된 절이다.

인근에 광릉이 들어서자 조선 예종이 광릉의 수호절로 지정하였다.

6.25로 절이 불탄이후 주지 운허스님이 중창불사를 주도하면서 절 편액을 모두 한글로 바꾸었다.

운허스님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데 집중하면서 불교 대중화에 열정을 쏟았다.

큰법당(대웅전)도 목조가 아니라 철근콘크리트로 지으면서 목조양식을 그대로 본떠서 그야말로 법고창신하였다.

그는 춘원 이광수와 6촌형제였는데, 해방후 춘원이 친일 변절자로 지탄받는 상황에서 잠시 봉선사에 묵을 곳을 마련해 주기도 하였다.

그의 유언도 “한글로 ‘경전 읽고 번역하던 운허당법사의 관’이라고 써 주시오. 이 몇자가 나의 생애를 다 표현할 것이오.”라는 것이었다. 

 

대웅전 현판 큰법당은 석주스님이 썼다.

기둥글(柱聯)도  한문 선시(禪詩)를 한글로 옮겼다.

온누리 티끌 세어서 알고

큰바다 물을 모두 마시고

허공을 재고 바람 얽어도

부처님 공덕 다 말못하고

 

큰법당 안에는 화엄경을 한글로 번역하여 동판에 새겨놓았다.

 

절을 돌아서 나오는데,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뵈었던 관음보살님이 여기와 계시네..ㅎ

Long time no see..

광릉하면 크낙새가 연상된다.

광릉은 내기억 속에 고양시 부근으로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번 여행을 통해 확인하니 남양주와 포천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다는..ㅎ 

또 광릉과 광릉수목원이 달리 관리되는 곳이라는 것을 예약하면서 알게되었다.

광릉수목원은 예약제 + 현지매표를 동시에 할 정도로 인기가 있다.

예약도 일요일보다 토요일이 먼저 매진된다.

광릉은 그냥 가면 입장이 가능할 정도로 여유가 있다. 

 

광릉을 수호하는 숲이 광릉수목원이 되었는데, 이제는 더 인기 좋은 곳이 되었으니

이도령보다 방자가 출세한 격이다.

 

수목원 초입에 보이는 저 "국토녹화기념"글씨는 물통(노태우)이 쓴 것이란다.

사실 국토녹화는 어릴적 기억으로 각종 사방사업, 식목사업과 벌목금지, 연탄사용을 지속적으로 20년이상 시행한 결과다.

운동권이 그리 싫어하는 아버지 박통의 공로이다.

 

막연히 구경할 것이 아니어서 전나무 코스를 따라 걷기로 했다.

 

육림호 옆 카페..

용머리 물받이통이 이쁘다.

점심 때까지 걸을 예정인데, 수목원안에는 식당은 없다. 그래서 카페에서 빵을 몇개 샀다.

 

어버이 날이라 가족들이 많이 왔는데, 평탄한 지형이라 노소가 같이 관람하기 좋은 곳이다.

 

각선미가 시원한 나무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전나무 숲길이 시작된다.

200미터의 전나무 숲길은 3대 명소에 들어간단다. 

1923년경에 오대산 월정사의 전나무 종자를 받아 조성했단다.

 

그러면, 월정사와 광릉 2곳의 전나무 숲길외 다른 1곳의 전나무 숲은 어디일까?

부안 내소사 전나무 숲길이란다..

 

벤취에 잠시 쉬는데, 기념석이 눈에 들어온다.

딸 박통이 저 기념석을 세운 것은 취임후 2달뒤다..

그러나 그 1년뒤 세월호 사건이 터지면서 그녀의 정치행로가 바뀌기 시작한다.

 

아름드리 전나무 숲에 누워보라는 유혹의 글씨에 끌려 누웠다.

전나무들이 까꿍하고 인사한다.

 

짧은 전나무 숲길을 지나 고개를 넘으면 열대식물원이 나온다.

여기서 부터는 관람모드로 바꾼다.

이리 저리 내키는데로 걷는다.

 

축소싸이즈 다보탑도 보이고, 난대식물원에 붉은 꽃도 눈길을 끈다. 

 

수목원의 나비는 꽃재벌급이다..ㅎ

 

작약도 피었고.. 

 

보라꽃창포도 피었다.

단오가 언제더라?? 금년은 6월14일이니 머리 감을 날은 아직 멀었다.

 

예상치 못하게 철쭉을 만났다.

칼라가 조선 공주 같지 않은가??

토종 철쭉이다..

 

큰꽃 으아리..아름다운 당신의 마음..

 

이 꽃은 이름도 희한한 버베나..

 

수목원에서 700미터 거리의 광릉으로 이동했다.

주차공간을 쉽게 찾았다.

입장료 1000원..

 

광릉은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의 능이다.

문종 말년 각종 초상을 치르다가 중전을 맞이할 시간을 놓쳤다..

그 바람에 외톨이가 된 단종..

차라리 문종이 세조를 섭정으로 임명했으면, 세조가 단종을 죽이지는 않았을까?

어차피 세조의 자식들은 단명했으니 후사를 굳이 자기 직계로 세우려고 욕심을 부리지 않았을 것 같은데..ㅎ

 

결국 조선의 왕계는 세조의 핏줄로 이어졌다.

 

어디선가 새가 나무쪼는 소리가 따다다닥 울려퍼진다.

크낙새 인가??

크낙새는 1993년 이후 광릉 숲에서도 사라져서 우리나라에서는 멸종한 것으로 보인단다.

결국 그 소리는 딱따구리의 소리인가 보다..

 

좌측이 세조, 우측이 왕비..

 

동행에게 "나 죽은뒤 첫제사를 이렇게 차려줄래?" 물으니

피식 웃으며 "언제는 차 한잔만 올려달래더니"한다.

 

하기사, 죽은뒤 만반진수가 무슨 소용이랴~

살아서 좋은데 걷고 제손으로 맛있는 음식 먹는 것이 최고의 제사가 아닐까? 

비둘기낭에서 일단 숙소인 한화코도에 가서 1시간 자면서 쉰다.

어스름이 깔리는 5시 산정호수 둘레길을 걷는다.

 

궁예를 만났다.

산정호수 뒷편 명성산에서 죽음을 맞았다.

그가 부하들에게 철원에서 쫓겨나 이산에 와서 울부짖었다해서 명성(鳴聲)산이란 지명이 생겼다.

 

상견례에 망무봉을 대동하였다.

 

김일성 별장이 있다고라??

실은 별장이 아니고 이곳을 방문할 때 수리조합사무실을 사용한 모양이다.

그것을 김일성 별장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문통시대에 맞추어 복원한다는 둥 떠드는 모습이 가소롭다.

 

여기서 내려다 보니 숙소가 보인다.

 

망봉산이 멋지게 우뚝하다..

 

그래 여길 오기 잘했어..

수첩에 오랫동안 적혀있었지..ㅎ

 

호수둘레길은 3km 정도 된다.

10월 명성산 억새필 때 등산후 호수로 하산하는 코스가 있다.

트롯 열풍이 호수에도 밀어닥쳤나 했더니..

아~ 임모씨 고향이 포천이랬다..ㅎ

 

 

 

호수길 걷기좋고, 카페에 빵집에 포토존에 아기자기 가족동반으로 즐기기 좋은 곳이다.

 

호수 택시배가 고장낫나? 아님 종료시간이 되었나?

관리보트가 다가가 끌고간다..ㅎ

 

동행이 치즈호떡을 사먹으려는데, 영업시간이 끝났단다..ㅎ

 

이 좋은 곳도 1100년전에는 울다가 배고프게 죽어간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몸만 외눈박이가 아니었다.

정신도 그러해서 부하들의 신망을 잃엇다.

요즘도 내로남불, 위선의 지적을 못보는 외눈박이들이 많다.

여기와서 봐라..

그 말로가 어떤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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