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다시 찾아왔다..단재생가..

전에도 추운 겨울에 왔는데, 이번에도 그렇다..

그가 추운 시절에 춥게 살아왔기에 추우 계절에 와서 보아야 그의 간난고초가 조금이라도 실감될 것 같기도 하다..



지난 번과 달라진 것은 생가 곁에 홍보관이 생긴 것이다..




그는 태어나 8살까지 이곳에서 살았다..8살이후 청주시 상당구 낭성면에서 성장했다..



민족사학자로서의 그의 면모를 보여준 조선상고사는 1931년 6월부터 같은해 10월까지 조선일보에 '조선사'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것인데, 1948년에 이를 엮어 출간되었다.



그는 57세인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하였다...




역사란 무엇인가?

아와 비아의 투쟁이다..





그가 태어난 이곳은 할아버지의 외가(즉 진외가)인 안동 권씨 집성촌이었다..





8세 이후 집안 본향인 청주 낭성면 귀래리 고두미 마을로 이사간 뒤 할아버지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다..

어려서 부터 총기있고, 한시도 잘 지었다...

지금으로 치면, 영어를 조기 교육하여 초등학생이 영시를 짓는 것으로 보면 된다..

그런데, 요즘 문정부가 유치원 영어교육금지 운운하는 것은 조선시대만도 못한 가소로운 일이다..





人生四十太支離(인생사십태지리) : 인생 사십 년이 너무도 지리하여

貧病相隨暫不移(빈병상수잠불이) : 가난과 병 잠시도 날 떠나지 않는구나

最恨水窮山盡處(최한수궁산진처) : 한스러워라, 물 다하고 산 다한 곳

任情歌曲亦難爲(임정가곡역난위) : 내 마음대로 노래부르기도 어렵구나

 

- 백두산도중(白頭山途中) -




"가을 밤에 읊다" (추야술회秋夜述懷)의 시가 행서로 써있다..

                                            
孤燈耿耿伴人愁   고등경경반인수   가물거리는 등불아래 근심만 가득하여
燒盡丹心不自由   소진단심부자유   일편단심 다 태워도 자유롭지 못함은
未得天戈回赫日   미득천과회혁일   하늘이 준 창으로도 밝은 해 되돌리지 못했으니
羞將禿筆畵靑丘   수장독필화청구   몽당붓으로 청구강산의 역사를 끄적임이 부끄럽구나
殊方十載霜侵鬢   수방십재상침빈   이역 땅 방랑십년 귀밑머리 서리내려
病枕三更月入樓   병침삼경월입루   병들어 누운 베갯머리 삼경의 달빛만 비쳐드네
莫說江東鱸膾美   막설강동노회미   말하지 말게나! 강동의 농어회 맛이 좋다고
如今無地繫漁舟   여금무지계어주   지금은 고깃배 맬 땅 한뼘도 없다네 



단재..붉은 마음를 간직한 사람..



생가 옆으로 산 길이어진다..

도리뫼에서 모랭이로 이어지는 길..

숫눈을 밟고 걸어간다..





쇠재 너머로 식장산이 보인다..




솔고개를 넘어 가면 모랭이마을이다..



모랭이 정류장에서 바람을 피하며 뜨거운 차와 요기를 하고  다시 생가로 돌아간다..




모랭이 동쪽으로는 금동고개로 대전둘레산길 1코스와 2코스가 이어지고..

서쪽으로 정생마을 사기점골에는 조선시대 백자가마터가 있다..




돌아오는 길 솔고개에서 바라보는 쇠재 오르는 길...




저 아래 단재 생가가 오도카니 앉아 있다..

그의 일생처럼..

궁벽한 곳에서 추운 계절을 보내고 있다..



돌아가는 길에 정생동 사기점골에 들렀다..

조선 후기의 백자가마터..





<오늘 걷기> 대전시 어남동 단재생가 - 쇠재 - 솔고개 - 모랭이  왕복 약 7km


누구나 가슴에 깊이 박힌 대못 하나 품고 있다고 한다.

빼려해도 뺄 수 없고, 빼려할수록 더 깊이 박히는 대못이다.

그럴 때는 걷는 것이 제일 좋다.

걷다 보면 다른 시각, 후각, 청각의 자극을 받게 된다

이런 다양한 자극을 자연스럽게 받아드리다 보면, 내안의 대못은 대못대로 다양한 자극의 일부가 되어 작아지기 때문이다..


<김정운 저,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중에서>




이 추운 겨울 한복판에서 길을 고르는데, 3가지 주문이 들어왔다..

1) 가까운 곳 2) 새로운 곳 3) 힘들지 않을 것

이 조건에 맞출 곳이 있을까?

우선 단재 신채호 생가 둘레길을 생각했다..너무 평탄해서 겨울엔 추울 것 같았다..

그러다가 근처 천비산에 눈이 갔다..

대전둘레산길에 벗어나 잇어서 마치 서자처럼 취급받는 산...



일단 내비에 중암사를 치고 간다..정생동마을을 지나 정생지까지 간다..

정생지가 끝나갈 무렵 넓은 공터가 잇어 주차 및 회차가 편리한 곳이다..

강추위에 정생지는 거울처럼 얼어 붙었다..새 한마리 나돌아 다니지 않는다..



중암사 표지를 따라 올라가면 거목이 나온다..

마을이나 절이 있었다는 징표...예전에 묘각사라는 절이 있었단다..



평범한 임도 길인데, 신비암 직전에 산길로 700미터 가면 중암사라는 표지가 있긴 하지만, 일단 군자대로행이다..

소로는 내려올 때 이용하기로..ㅎ



 곧은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빛나는 길만이 길이 아닙니다
 굽이 돌아가는 길이 멀고 쓰라릴지라도
 그래서 더 깊어지고 환해져 오는 길
 서둘지 말고 가는 길입니다
 서로가 길이 되어 가는 길입니다
생을 두고 끝까지 가는 길입니다


- 박노해, 굽이 돌아가는 길-





중암사 직전의 정자 부근도 주차할 수 있는 공터가 있다..



동장군..이번엔 신났다..약졸들 맘껏 부리며 승승장구중이다..



멀리 식장산이 보일 즈음 부도탑이 나타난다..





홍파당이라는 글씨가 뚜렷한 부도탑..

정조8년(1784)에 건립된 탑비로 보아 오래된 부도탑들이다..




순서로 보아 수월당 부도탑이다..

수월..문리버와 사형지간 같은 당호라 더 정감이 간다..ㅎㅎ




오래된 절터에 비해 가정집 같은 법당..





산너머 신대리 문암에 사는 박보살..50여년을 이절에 봉사하였단다..

우리 집 보살보다 한수위네..ㅎ





이 묘한 비석 비스무리한 돌의 정체는 정료대(庭燎臺)란다. 

기둥위에 판석을 올려놓은 형태로 옛날 조명시설로 야간 긴급상황시  이곳에 관솔이나 장작을 쌓아 불을 피웠다.





비석에는 부실(副室) 유인(孺人) 영산 신씨 영세원향비라고 씌여 잇다..

추측컨대, 진주 목사의 소실인 영산 신씨가 자손도 없이 죽게되자 1868년 이 절에 재산을 시주하고 영원히 향을 올려달라고 한 것 같다..

1868년이면 고종 5년으로 병인양요 2년 뒤이며 독일상인 오페르트가 남연군 묘 도굴을 시도한 해로 전국이 어수선 할 때다..

조선 시대 1냥의 가치가 2만원 -5만원이라는 견해에 의하면, 460만원 - 1150만원 정도 되는 것 같다..

내 생각엔 1000만원 정도 가치가 되어야 영세원향비를 세워줄 것 같다..



이런 마음으로 땅을 시주받고 열심히 수행하여 부도탑이 즐비한 한 절이었으리..



산신각에는 영규대사의 영정이 있다..



법당 옆 푸른 대숲 사이로 영규대사 순의비가 있다..

영규..

그는 서산대산의 제자로서 갑사 청련암에서 수행하다가 거병한 최초의 승장이었고, 조헌의 의병과 연합하여 청주성을 탈환하엿다..

그리고 조헌과 함께 금산으로 진군하여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왜군과 격전을 벌여 조헌의 700의병, 영규의 800 승병이 전사하엿다...

그런데, 금산에는 700의총만 있는 것은 부당하는 주장이 있다..



기허당 영규대사 순의비..의를 위하여 죽엇다는 것이다..

순교는 아니지만, 나라와 백성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보살행이라 아니할 수 없다..

왜 여기에 그의 비가 있을까?

그는 금산 연곤평전투에서 복부에 부상을 입고 이곳 까지와서 피묻은 갑옷을 벗어 놓고, 공주 계룡면 월암리까지 가서 숨을 거두었단다..

왜 공주로 돌아가려고 하였을까?

일설에 의하면, 충청감사 윤선각이 조헌의 의병을 견제하는 바람에 소수의 병력으로 금산 전투에 나설 수 밖에 없었던 상황이엇기에  공주감영으로 감사 윤선각을 찾아가 항의하려다가 부상이 악화되어 사망하였다는 주장도 있다..

또 다른 견해는 이곳을 거쳐 공주 갑사 청련암으로 돌아가 부상악화로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

중암사에는 영규대사의 갑옷이 보존되어 오다가 1932년 화재로 소실되었단다..



천비산 등산로는 절 입구에 잇다..

천비산(天庇山)..하늘을 덮는 산??

지명 유래에 관하여는 설명된 자료가 없다..

그러나, 둘레길 걷기를 마칠 즈음 스스로 자득한바가 있다..

중암사를 감싸안은 산세가 서북풍을 막아주고 남동향으로 따스하니 마치 온실 안에 들어잇는 형국이라..

그러니 하늘을 덮은 산이라하겠다..




능선에 이르는 오솔길은 낙엽으로 만들어진 양탄자 길이다..

끊어질듯 이어지는 길이 섬세한 그림같다..

`




능선에서 정상까지 700미터..




정상 옆 벤취에 햇볕이 봄볕이다..

몽골 보드카를 반주로 점심 따스하게 챙겨 먹고 나서니, 쓸데없이 집에서 날씨 추운거 걱정했다는 생각..




나무사이로 언듯 보이는 것이 다랭이 논인가?? 묘원인가??



보문산, 계족산, 식장산을 한꺼번에 보기는 처음이다..



정상에서 안산쪽으로 평탄한 능선이 일순 응달 눈길을 가파르게 내려간다..

얼릉 아이젠을 찬다..

거기서 반가운 이름을 만난다..

한 때 그를 따라 울릉도 일주와 지리산 둘레길을 걸엇는데..

그는 지금 어느 길위에 잇는지.. 

그의 불러그에 가면 2015년 해파랑길 이후에는 행적이 묘연하다..




이어 계단을 내려오면 길은 안정궤도를 가는듯..





그러다가 드디어 정생동 표지판을 만난다..

사거리인데, 반대편은 안내가 없다..참고지도를 보면 반대편 길로 가면 미륵사로 이어지는 것 같다..




정생동으로 내려가는 길은 희미한다..

네이버 지도상으로는 중암사가는 임도와 만나게되었는데..



중간 묘지부근에서 길이 자취를 감추고 이 바위 앞에서 헤매다가 네이버 지도의 현위치 기능을 이용하여

마음을 비우고 바라보며 길인듯 아닌 듯한 길을 발에 맡기고 내려갈 밖에..



과연, 문중묘지 옆으로 임도와 만난다..

이곳이 지도상으로 서당골이다..




다시 임도를 걸어 중암사로 간다..




중암사 가까이와서 네이버 지도를 확인하니

뒤로 조금 되돌아가면 임도를 굽이돌지 않고 더덜이골을 통해 다이렉트로 내려가는 오솔길이 잇다..

망설이다가, 새로운 경험을 선택햇다..



과연 절묘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낙엽속에 다듬어진 계단의 흔적도 잇고..

무협지에 이런 오솔길을 헤메다가 문득 길이 끊어진 곳이 동굴이 있고, 거기에 비급이 숨겨져있던데..ㅎㅎ



신비한 호기심을 안고 내려가는 길..계곡옆을 지나다보니 길을 막아놓았다..

어찌하나 되돌아가기엔 길이 너무 가파르고., 네이버 지도는 길이 잇다고 주장하고..

얼어붙은 계곡 바위에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며 겨우 겨우 계곡을 건너고 보니 실가닥같은 길이 나타난다.. 



그리곤 또다시 잘 다듬은 계단길이 나타나니

마치 얼르고 달래는 형국의 길이다..



심심산골에 갇힌 거 아닌가 하는 순간 아래에서 개짖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면서 내려다 보니 신비암의 개와 주인장이 보인다..

안심이 되는 순간..백구가 자꾸 접근하면서 짖는다..이번에는 개에게 물릴까 걱정..ㅎㅎ




내려오니 임도 오르다 만난 갈림길 표지판 옆이다..

생각컨대, 임도를 새로 개설하기 전에 중암사에 오르던 옛길인가 본데, 좀 정비하면 좋은 걷기 코스가 되련만,

지금은 너무 황폐하고 중간에 끊겨 위험하기도 하다..

도에 비유하면, 임도를 굽이 도는 것은 돈오점수요, 오솔길로 바로 오르는 것이 돈오돈수라 할까?





<오늘 걷기> 정생지 - 임도 - 중암사- 천비산 정상 - 안산 쪽 능선 - 정생동 표지판 하산 - 임도 - 중암사 직전 오솔길 더덜이골 하산 - 정생지 약 11km






오후에 한탄강으로 갔다..

직탕폭포에서 걷기 시작한다..





눈속에서 보는 직탕폭포..

화장실 벽화보다는 위용이 떨어지는 느낌은 물이 흐르지 않아서일까?





다리를 건너 반대편에서 보니 입체감이 더 살아나고 당당한 폭포로 등장한다..





저멀리 태봉대교 아래 빙판에 사람들이 보인다..


지난 주 엄청 추운 날씨가 계속되었다가 그뒤 1주일이 봄날씨여서 다 녹았나 했는데..

"살아있네~~"




천진스런 장난을 발동시키는 마력을 지닌 빙판길...



일부 녹은 곳은 부교를 이용해서 걷는다..





몇년전 소한과 대한 사이 엄청 추운 날 꽁꽁언 대청호 빙판을 횡단한 이후

한탄강 얼음트레킹을 은근히 기다려왔다..








주상절리의 바위들을 가까이서 보면서 걷는다는 것..

강흐르기 이전의 협곡을 체험하는 기분이란 태초로 돌아간 느낌이다..




얼음의 선물을 받고 저마다의 방법으로 겨울을 즐긴다..



여기가 하일라이트..]

송대소는 응달인지 넓게 얼어 가슴을 열어준다..







가끔 쩡하는 굉음이 들린다..처음엔 어디서 사격훈련하나 했다..

곧 얼음에서 나는 소리인 줄 알고..

소리가 날 때 외친다...

"흩어져! 흩어지면 살고 뭉치면 죽는다.." ㅎㅎ



아름답지 아니한가?

겨울이 무엇을 구속하던가?

겨울도 알고보면 보여주고 싶은 내밀한 속마음을 가진 연약한 존재다..






한탄강에서 겨울의 속마음을 이해하고 서로 하나가 되엇다..

Hantan river, connected..




마당바위에 앉아 몽고산 보트카로 오늘의 걷기를 자축한다.. 









이번 걷기 특집으로 음악을 수집했더니, 한탄강 노래도 있더라..

눈물의 한탄강(송춘희), 말없는 한탄강(이미자), 한많은 한탄강(이미자)


노래는 다 한탄(恨歎)이다..하지만, 이 강은 한탄(漢灘)`..큰 강이라는 의미다..

추가령 구조곡에 흐르는 강물은 136km를 흘러 임진강과 합류한다..





저멀리 한탄강 얼음트레킹 축제장이 보인다..



썰매를 타는 사람들 입에서 미소가 가시지 않는다..



핵미사일을 얼려 놓았나?



축제로 대박난 곳은 진주의 유등축제, 함평의 나비축제, 보령의 머드축제를 꼽을 수 있다..

겨울 축제로는 화천의 산천어 축제가 잘나간다..

축제 전부터 매일 고기를 방류하는데, 꿂겨서 방류하기 때문에 잘 잡힌다는 소문이 있다..

반대로 유료낚시터에서는 베부르게 하고 방류하여 쉽게 잡히지 않다나??

이곳 한탄강 얼음트레킹도 매력있는 축제다..

축제가 성공하려면 개성이 있어야 하고, 지역민도 이득이 잇어야한다..

나비축제의 경우, 지역농촌 작목반에서 꽃을 키우고, 나비를 키워 납품하니 일거양득이고,

산천어 축제도 산천어를 양식하니 농외소득이 생길터..

이곳 축제는 주변 상인연합회에서 코스 중간지점에 알뜰식당을 운영하여 점심을 해결하고 계속 트레킹할 수 있도록하면 좋겠다..





웬 스님?

서유기에`나오는 삼장법사인가 햇더니, 애꾸눈이네..

아? 궁예로구나..ㅎ

그의 도성은 휴전선에 잠들어잇지만, 그는 이곳에서 다시 깨어난듯하다..



이 분은? 임꺽정이겠지? ㅎ



승일교 다리를 지나간다..

콘크리트 구조물도 멋지게 지을 수 잇다..

승일교의 유래에 대해 이승만, 김일성을 땄다는 말도 잇지만, 공식 견해는 박승일대령을 추모하기위하여 승일교로 명명햇단다..

이 다리는 6.25 전에 러시아식 공법으로 아치교각이 완성된 상태에서 전쟁으로 공사가 중단되었다가 전쟁후 나머지를 완공하여 1958년 개통하엿단다..





순담계곡 까지 가려면 열심히 걸어야 한다..

서두르는데, 해는 넘어가려한다..




고석정이다..

한탄강의 대표적 경관..

그럼 경관관리 좀하지, 저 뒤에 태봉도성이라는 건물이 영 거슬린다..





이 멋진 경관은 예로부터 왕후장상이 즐겼으나, 조선 명종 때 의적 임꺽정도 이곳을 방문하였다니..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는 그의 기개가 저 바위처럼 우뚝하게 보인다..








2km 정도 더 가야 순담계곡인데, 일모도원에 여기서 멈춘다..



고석정 후손인 세멘트 고석정에 앉아 남은 몽골 보드카를 들며 임꺽정 패의 기분를 탐색해본다..




사계절이 아름다운 고석정의 풍광사진을 감상하며 자주 오지 못할 정도의 거리에 잇음을 아쉬워 한다..

여름에 와서 레프팅으로도 즐겼으면 좋겟다..






복을 쌓듯이 추억도 쌓아가라..

인간이 AI로 진화한다 할지라도

추억이야말로 동질성과 공동체를 확인하여 주는 밑천이 될테니까.

만일 당신이 추억거리를 컬렉션한다면,  이즈음 이곳을 걸어라..

대청호 빙판길 걷기에 못지 않은 한탄강 얼음트레킹은

훗날 우리의 추억 속에서 너와 나를 확인하는 소중한 순간이 되리라..




<오후  걷기> 직탕폭포 - 태봉대교 - 송대소 - 마당바위 - 축제장 - 승일교 - 고석정,약 6.5km



철원으로 간다..2018 한탄강 얼음트레킹을 위해..

신 새벽에 출발해 서울 톨게이트를 어렴풋이 본 거 같은데, 차가 정차한 곳은 노동당사 앞이다..




예전엔 이곳이 철원 중심지였고, 인근에 법원, 검찰청도 있엇고 인구 3만명이 살던 동네 였는데, 전쟁통에 빈들이 되었다..

하긴, 여기서 백마고지가 4km 거리다..





매점 앞 고양이만은 정신무장이 잘 되어있다..

화장실에서 만난 한탄강 직탕폭포..기대가 된다..




민통선이 저긴가 보다..



소이산 뭐시냐 그냥 둘레길을 휘 돌고 점심을 먹고, 한탄강으로 가기로 했다..




경원선을 언제 복원하기로 했나?

2016년에 기공식을 가졋는데, 지금은 중단된 모양이다..



우리는 내일을 건설하는 것입니다..

말은 당당하지만,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지..



이길도 투잡을 가지고 사는구나..

길도 이렇게 일하지 않으면 나태지옥에 가나 보다..ㅎ









철조망 갤러리에서 좋은 시 감사하며 걷는다..



응달에서는 지뢰보다 무서운 낙상이 기다리고 잇어 얼릉 아이젠을 하고 간다..



그래. 한탄강아..조금만 기다려라..지척에 와있으니..





얼릉 정상으로 가자고 잔머리 굴려 올라간 길이 교통호네..공연히 힘만 뺐다..




휴게실도 분위기에 어울리게 도라무깡일세..ㅎㅎ







백마고지..김일성고지..철원평야가 펼쳐진다..

그날의 격전...함성이 지금은 장벽이 되어 침묵 속에 늘어서 있다..



백마고지 전투

1952년 10월 6일 ~ 10월 15일까지  10일동안 12회의 뺏기고 뺏는 공방을 거쳐 지켜낸 고지..
그 덕에 이 들판이 우리 땅이 되었다..







전망대에 오르니 비박하는 젊은 남녀들이 짐을 싸는 중이다..

잠이 잘 오더냐 물었더니, 추웠단다..ㅎ

백마고지를 바라보며 별빛아래 잠을 자는 것..한번 해보고 싶은 걸..



저 우측 들판 너머 철원평화전망대 지난 비무장 지대에 궁예의 도성이 갇혀있단다..

아니, 역설적으로 잘 보존되고 있겠지?




전망대에서 바라본 오늘의 세상..

한 사람만 변하면 온 세상이 평화와 번영으로 갈 수있다는 사실을 절실히 느낍니다..

여기는 시사전망대 봉두완입니다..



기쁨, 사랑, 희망, 평화, 신념..이 써있는데..

맨 아래 FREEDOM을 썻으면 더 좋을 것 같다..

우리가 이북과 다른 가장 중요한 가치는 "자유와 선택"이기 때문이다..




철원 막걸리는 없나 보다..주시 락자 막걸리를 반주로 만주 칼국수로 점심을 먹고...

오후 한탄강 트레킹에 대비한다...

<이번 걷기> 소이산 둘레길 약 4KM



대전 무수동에 갔다..

유회당둘레길을 개척해보려는 생각이다..



무수동..무수(無愁)..근심이 없는 마을이다..

원래 무쇠골..수철리(水鐵里)라 불렀는데, 숙종 때 유회당 권이진의 백부인 권기가 정착하면서

그의 호인 무수옹을 따라 무수동이 되엇단다..



250년 된 은행나무와 느티나무 옆에

원두막인줄 알앗더니 이름 많은 정자네..

남향으로는 인풍루(引風樓)..바람을 불러오는 누각..

북향으로는 광영정(光影亭),연못의 햇빛과 구름을 보는 정자..

서향은 관난헌(觀欄軒), 외양간 바라보는 집..

동향은 수월난(受月欄), 달맞이하는 난간..



광영정 좌측 길로 오른다..


멀리 유회당이 보인다..

유회당은 조선 영조때 호조판서를 지낸 권이진(1668년∼1734년)이 1714년(숙종 40)에 지은 건물이다..

권이진은 우암 송시열의 외손자이고 명재 윤증은 그의 고모부가 된다...그는 22세까지 송시열에게 사사하고, 명재 윤증(尹拯)과도 사승(師承)관계를 맺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는 윤증과 송시열이 반목하여 노론, 소론이 갈릴 때 어찌 처신하였는지 궁금하다..

그러고 보니 이곳 무수동은 연산의 명재(윤증)고택과 우암의 난간정사와 중간쯤 위치하고 있다..ㅎㅎ



지도상으로는 마을 좌측 끝에도 산길이 있는 것 같은데, 가보니 길이 보이지 않고 개소리만 요란하다..

부득히 유회당 옆 여경암 가는 길로 올라간다..



유회당의 근원이 된 권이진 부모의 묘소




당근 좌측 산길로 가야겠지??




호젓한 길 끝에 쌍갈래 길이 나온다..

좌측은 보문산 시루봉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고, 우측은 여경암으로 간다..

일단 여경암에 들른다..




여경..이라는 이름에서 과거 합격을 위해서 공부하던 곳 같다..

조선시대는 최소 4대에 1명의 과거 합격자가 나와야 양반가문을 유지할 수 있으니, 과거공부에 매진할 밖에..



아마, 과거공부가 의미가 없어진 후로 불당으로 사용되나 보다..



유회당 권이진의 친구 주암 박순의 글씨란다..



산신각..

항주대성산왕신..보문산신의 이름인가??




여경암을 지나서 올라가는 등산로는 표식도 희미하고 길도 가파르다..

땀 깨나 흘리며 올라간다..





이 특이 나무 지점이 삼거리.. 우측이 보문산으로 이어지는 주 등산로인데 표지판이 없어, 모르는 상태에서 좌측 길로 간다..





길이 희미하다..

중간에 멀리 보문산둘레길이 보인다..

길은 계속 내리막인데, 어디로 이어지는지 자신이 없어 돌아가기로 한다..

나중에 지도로 보니, 계속 내려가면 좌측으로 유회당 마을로 이어지는 길이 있는 듯하고, 직진하면 버들골로 이어지는 길과 만나는 것으로 되어잇다..





산에서 내려와 유회당을 구경한다..





조선 시대는 왜 그리 충효를 중시해는가?

민족성이 원래 효성스러워서??

민족성이 원래 그런 것이라면, 지금은 왜 달라졌는가?


내 생각엔 이렇다..

유학이 공자시대는 인(仁)을 중시하였는데, 증자 시대에는 효를 점차 강조하기 시작한다..

한나라 이후 유학자들은 나라를 다스리는데 필수인 충효의 개념을 강조하여 결국 송나라 이후에는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올라간다..

그리고 정책적으로 충효자를 표창하고, 벼슬을 주기 시작한다..

그러니 벼슬이 집안의 성세를 좌우하는 시대에 사대부들은 충효..그중에서도 우리나라에서는 효를 강조하게 된다..

효를 조기에 세뇌하고 체득하게 만든다..그리고 모든 것에 우선하게 시켰다..


그러나, 이제 효로 얻어지는게 없는 시대가 되었다..

돈이 중요가치로 상승한다..돈과 외모로 평가받는 시대에 효는 고객이 찾지 않는 재고상품이 된 것이다..




충효문 안으로 들어서면 활수담과 석교가 잇다..

활수담(活水潭)..

성리학자들은 작명도 다 어디 책이나 글귀에서 따온다..

주자의 시 " 관서유감(觀書有感)" 에 나오는 귀절..

 爲有源頭活水來 (위유원두활수래)

 근원에서 신선한 물이 흘러 들어오기 때문이라네


위 귀절의 활수에서 따와 작명하였다..


관서유감의 시 원문은 이렇다..


半畝方塘一鑒開(반무방당일감개)
天光雲影共徘徊(천광운영공배회)
問渠那得淸如許(문거나득청여허)
爲有源頭活水來(위유원두활수래)


 반이랑 네모난 못이 거울과 같아서,
 햇빛과 구름이 그대로 잠겨서 배회를 하네.
 어떻게 그처럼 맑을 수 있느냐 물으니,
 근원에서 끊임없이 활수가 나오기 때문이라네.


이 시에서 광영정, 활수담이라는 작명하게된 것이다..

성리학자들이 거주하는 곳에 광영, 활수 등의 이름을 붙이는 이유는 성리학의 개조인 주자의 위 시가 그의 철학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자의 철학에 따라 살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마치 오래된 절 주변의 산봉우리 이름이 비로봉, 관음봉, 반야봉이 많은 이유와 같다..




유회(有懷).. 중국 명나라 때 학자인 전목제의 ‘명발불매 유회이인(明發不寐 有懷二人)’이라는 시에서 따온 말이다.

"날이 밝을 때까지 잠 못 이루며 두분(부모)을 그리워하네.."

부모를 간절히 생각하는 효성스러운 마음을 나타내는 의미다..

이것도 주암 박순의 글씨란다..







이 집안 안동 권씨의 자랑이 광고문안보다 더 세련되었다..

1. 조선 최초의 기로소에 들어간 동고 권중화..

  기로소.. 퇴임한 나이많은 원로 대신을 예우하는 기구에 권중화가 처음으로 들어갔다는 말이다..

   그는 태종때 영의정부사(즉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고,  향약간이방이라는 한의약 관련 서적을 저술하기고 하였다..


2. 조선 최초 문형 권근..

  문형이란 대제학을 말하는데, 홍문관 대제학,예문관 대제학과 성균관 대사성 삼관을 겸직하여 문관 최고의 명예직이었다..

 

3. 최초 호당에 들어간 권채..

 湖堂(호당)..조선조 세종-숙종 간에 인재양성제도의 하나로 글재주와 덕이 있고 장래가 유망한 젊은 초급관리 중에서 대제학이 엄히 선발하여

장기 휴가를 주어서 공부 즉 독서에 전념하도록 하는 제도였다.

이를  독서당(讀書堂) 또는 사가독서(賜暇讀書)라고도 불렀다.

호당에 선발된 사람은 조선조 관리 중의 엘리트로 인정 받는 것이기 때문에 호당에 선발된 사실은 당연히 족보에 기록된다.

 

호당은 ‘호수가의 집’인데 두모포 즉 지금의 옥수동 한강 가(동호대교 부근)에 독서당을 지어놓고 호당이라 한 것이다.



유화당 마루에 앉아 먼산을 바라본다...

고인도 이런 풍광을 바라보았겟지..



유회당 마루에서 보니 좌측은 배롱나무가 있다..

배롱나무는 양반집이나 절에서 키우는 나무다..

배롱나무는 어느 정도 자라면 껍질이 없어진단다..그래서 겉과 속이 같다고 여겨 일편단심을 상징하는 나무로 삼는다.

또 여름 백일동안 계속 붉은 꽃을 피우니 그와 같이 수양하려는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고 할까? 



그런데 우측엔 탱자나무가 있다..가시로 가득한..

보통 탱자나무는 귀양간 중죄인들 집을 탱자 가시나무로 막는 위리안치에 쓰는데, 왜 이곳 정원에 심었을까?



유회당 권이진의 집안 내력을 보자

그의 증조부 권득기는 양명학자로 꼽히는 장유, 최명길 등과 학문적 교류가 가장 밀접한 조익과 친분이 두터웠다고 한다.

그의 할아버지는 탄옹 炭翁 권시(1604년~1672년)이다.

그는 차남 권유를 송시열의 맏딸에게 장가 보내고, 명재 윤증에게 딸을 시집보내 사위로 삼앗다..

1660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문제(예송논쟁)로 논쟁이 붙었을 때 서인임에도 남인(윤선도, 윤휴)의 주장이 맞는다고 했다.

그리하여 사돈인 송시열과 송준길과 대립하여 서인의 공격으로 파직되었다.

권시는 지금의 대전 서구 탄방동으로 낙향했다. 도산서원을 짓고 13년 동안 도학과 예학에 정진했다. 그의 호인 탄옹은 탄방동 지명에서 따온 것이다.

충청 오현이라고 할 때  김집, 송시열, 송준길, 이유태, 권시를 말한다.

(참조  http://www.goodmorningcc.com/news/articleView.html?idxno=12064 )


그의 백부는 무수옹 권기<1623(인조원년)~~1695(숙종21)>이다..

그는 동춘당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다..

1680년 3월 경신출척으로 서인 집권시 옥사가 크게 벌어지는 것을 보고, 벼슬을 그만둔 다음 본가 탄방동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수철리 산골인 이곳으로 들어와  은거하면서 마을이름을 무수동이라 이름을 바꾸고 스스로 무수옹이라 불렀다..

그는 딸을 백호 윤휴의 며느리로 시집보냇고, 윤휴가 송시열 등으로부터 사문난적으로 낙인찍힐 때에도 서로 의기상통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송시열은 윤휴를 사문난적으로 몰아 죽음에 이르게 한다..


그의 아버지 권유는 무수옹 권기의 동생이고, 송시열의 사위이다..

유회당 권이진이 이곳에 아버지와 어머니 송씨의 묘를 모시고..시묘사 삼근정사를 세우고, 유회당을 지었다..

어머니는 우암 송시열의 맏딸이다..

송시열은 시집가는 딸에게 계녀서(戒女書)라는 글을 써준다..

"일속에서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사람이 되지 마라."는 내용..


유회당 권이진은 우암 송시열의 외손자이고 명재 윤증은 그의 고모부가 된다...

그는 22세까지 송시열에게 사사하고, 그후에는 명재 윤증(尹拯)에게 수학 하엿다..

그는 양명학적 경향에 관대한 가학 전통에, 우암 송시열의 교조적 성리학, 명재 윤증의 무실성향을 섭렵한뒤 

현실적인 실학의 경세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의 집에 붙여논 현판을 보면 그가 성리학 주류를 벗어나려고 하지는 않은 것 같다..

그의 묘소는 인근 어남동에 있는데, 묘갈명은 약산 오광운이 찬하고 체제공이 쓴 것으로 봐서 그의 정치적 노선은 남인 탕평론자 청남쪽 사람과 가까운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그의 주변 환경, 특히 외가인 우암 송시열의 노론과 고모부인 명재 윤증의 소론의 당쟁 와중에 참으로 처신하기 어려었으리라..

그러한 그의 심정을 탱자나무의 가시가 대변해주고 잇지 않을까?

찔리지 않도록 조심 조심하며 살자하고...

마치 정양용이 양수리 마재 집에 여유당이란 당호를 쓰고 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하며 살려고 하였듯이..ㅎ




유회당 옆 재실인 기궁재의 대문에 붙은 입춘방..

화기자생군자댁.. 따스한 기운이 저절로 생기는 군자의 집..

춘광선도길인가..봄볕이 먼저 도달하는 재수좋은 집..



으르렁 거리는 거대한 두 소 사이에서 절묘한 삶을 살았던 인간극장의 현장이랄까?






<오늘 걷기> 무수동 무수천하마을 광영정 - 유회당 - 여경암 - 등산로 - 원점회귀 약 5km



동네 지인들에게 걷기도 전도에 나섰다..

겨울에  아이젠, 스패츠,스틱을 장만시키고 무주 향적봉에 오르기로 했다.. 



무주리조트에 10시반에 도착.. 매표소에 가니..

" 주말에는 사전예약한 사람에게만 표를 판매합니다."

애고~~

그 와중에 핸폰 놓고 내린 사람 찾느라 시간만 허비..

6.25 때 난리는 난리도 아니여~~



하여, 구천동으로 식사하러가는데, 밀리는 차량이 엄청나다..

구천동으로 들어가려다 포기하고 얼릉 차를 돌려 입구 전주콩나물밥 집에서 모주를 곁들여 점심을 해결,,



꿩대신 닭을 찾다가..

덕유산 자연휴양림으로 향한다..

웬걸??  득템..

한적하고 눈이 20cm 수북히 쌓인 산길이 대기중..ㅎㅎ



걷기도  초자 신도들 아이젠 처음 차보고 좋아하네..ㅎ





일월오봉도에 등장하는 뽕나무 위상이 대단하네..

왕의 배경이었다니..







눈길을 가는데. 일행이 한마디한다..

자기는 눈길만 보면, 왕년에 본 영화가 생각난단다..

김희라와 문희가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내려서 눈길에서 김희라가 가죽점퍼 지퍼를 내리자 바로 떡벌어진 가슴이 쑥 나오고,

이어 문희와 하얀 눈위에서 사랑을 나눈다나...


일행들이 한마디 거든다..

"그려, 오늘 영화 한편 찍자..." ㅎ








설국을 걸었다...영화 같이..









덕유산 자연휴양림 산책로 도는데 3Km 정도 ,,

초보 신도들 전도용으로 딱 좋았다..



오리탕으로 저녁을 먹고 나오다..입구에 글씨에 끌렸다..

낙기속, 안기거??

풍습을 즐기고 안락하게 거처하라...


노자 도덕경의 결론이다..

노자가 꿈꾸는 이상세계...


작은 나라에 적은 백성.

AI 같이 편리한 도구있으나 사용하지 않고,

백성들이 죽음을 중히 여기고 멀리 이사 가지 않는다.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탈 일이 없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쓸 일이 없으니

사람들은 다시 새끼를 묶어 사용하게 한다.


음식을 달게 먹고

의복을 아름답게 걸치며

거처를 안락하게 여기고

풍속을 즐기나니


이웃나라와 서로 마주하여

닭과 개 짖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가까와도

백성은 늙어 죽을 때까지

서로 왕래하지 않는다.



使有什伯之器(사유십백지기)

而不用(이불용)

使民重死(사민중사)

而不遠徙(이불원사)

雖有舟輿(수유주여)

無所乘之(무소승지)

雖有甲兵(수유갑병)

無所陳之(무소진지)

使人復結繩(사인복결승)

而用之(이용지)

甘其食(감기식)

美其服(미기복)

安其居(안기거)

樂其俗(낙기속)

隣國相望(인국상망)

鷄犬之聲相聞(계견지성상문)

民至老死(민지노사)

不相往來(불상왕래)




 




여수 돌산도 아래 화태도로 간다..

멀긴 멀다..대전서 4시간..



이곳도 다리로 육지가 되었다..

우리나라 섬들 어지간하면 다 육지와 연결된듯하다..




다리 지나 길가에 화태도 갯가길 출발점 표시가 있다..

우리는 반대로 거꾸로 돌기로 한다..

반대편 산으로 오른다...꽃머리산..





정상에 이쁜 정자가  푸른 남해를 굽어 보고 있다..



산에서 내려와 해변을 따라 걷는다..





탱자가 노랗게 익었다..










우슬..

마디가 소의 무릎을 닮았다지..그래선지 관절염에 좋단다..



요기 담벼락에 붙어 앉아 바다를 바라보며 점심을 먹는다..

홍주 한잔에 세상이 훈훈해진다..





초록이 그대로 살아있는 숲..

남국의 정취가 숨쉰다..





섬길 걷기의 장점..언제나 푸른 바다를 끼고 가니 눈이 시원하고 속이 툭터진다.








여수 특산 개도막걸리..한잔한다..

어?

여기도 해녀가 있네..





오르락 내리락 제법 다리심이 든다..

멀리 종착지 화태대교가 보인다..





긴 다리를 빠져나오자 남국이었다..

녹수장춘(綠水長春)..

푸른 바다와 따스한 봄날을 맘껏 즐겼다..

이렇게 쉽게 봄날을 만날 수 있으니

어찌 극락이 따로 잇으랴..



다시 돌아온 원점..

여수시내로 이동..간장게장으로 뒷풀이..




<오늘 걷기> 시작점 - 4구간 -3구간 - 2구간 - 1구간 - 시작점  약 12km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