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솔암에서 미황사로 다시 내려오니 오후 2시경..

점심을 먹을 겸해서 땅끝마을로 간다..

 

 

검색을 해보니 무슨 횟집이 나오길래..갔더니 대형 횟집이다..

차를 대고 들어가니 연휴로 엄청 많은 사람이 몰렸다..

애고..작은 회집을 찾아갈걸...

앞으로 사람 몰리는 큰 식당은 사양할란다..

 

 

차를 땅끝탑 주차장으로 이동시키고..걸어간다..

전망대에 모노레일에 완전 관광지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사람이 몰리면 그뿐이고, 감당을 못하는 게 우리의 현실..

그저 바가지 상혼에 빠지고 관광마인드는 뒷전이니 모두 외국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땅끝탑으로 가는 길은 잘 단장된 길이다..

 

 

 

 

 

삼남길 표지를 만난다..

삼남길 1코스는 갈두항에서 시작하여 땅끝탑을 거쳐 송호해수욕장을 지나간다..

삼남길을 걸으면서 1코스를 걷지 못했으니 오늘 일부 땜빵을 하는 셈이다..

 

 

 

 

 

 

뒤집어 놓으면 새로운 것이 보인다..

여기가 끝이 아니라 시작점이라고 외친다..

 

 

땅끝탑에 노을이 진다..

삼남길을 걸었던 지난 몇년의 추억이 스쳐가는 저녁이다..

 

 

 

 

 

그러나, 오늘은 여기까지.. 여기서 이어지는 삼남길 1코스는 생략한다..

삼남길은 그 동안 충분히 즐겻으니 더 이상 미련은 없다..

 

 

 

첫날 걷기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일찍 잠들었다..

밤새 천둥 번개가 치며 비가 내리는듯했다..

새벽에 날씨앱을 틀어보니..응??

비 구름이 지나갔다..역쉬 날씨복이 ..

 

 

하여..예정대로 달마산 미황사로 간다..

비는 지나갔으나  달마산은 번뇌 속에 있다..

사실은 이번 여행의 주목적이 도솔암 숲길을 걷기 위하여 계획한 것이기에 그나마 비가 그쳤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미황사 입구에 차를 세우고 걸어간다..

언듯 생각하기에 작은 절이라 여겼는데, 막상 와보니 큰 절터이다..

 

 

 

자하루(紫霞樓)..저녁 놀 보기 좋은 누각인가 보다..

 

 

 

달마산의 주인공 달마선사가 계신다..

수많은 사람이 물었다...

"달마조사께서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뜰 앞의 잣나무"라고 답하였고,

어떤 사람은 "서강의 강물을 모두 마시면 말해주겟다"고 미루었고

또 어떤 사람은 "저 쪽 가서 가만히 서있어라"고 달랬다던데..

 

나에게 묻는다면??

"도솔암에 가서 말해 주겠노라"

 

 

 

대웅전을 지나 도솔암 가는 길로 접어 들었다...

여기서는 4.5km 라더니 조금 더가니 5.3Km가 되었다..

음...이것이 무엇이고?

땅끝 천년옛길이 초입부터 화두를 던지는구나??

 

 

 

 

함초롬히 젖은 감들이 등불처럼 연무가득한 길을 밝혀준다..

 

 

 

너덜 길이 나타났다..

수억겁을 지나야 산이 되고 다시 기만년을 지나야 쪼개져 바위가 된다는 이치를 몸소 보여주고 있구나..

 

 

저아래 억겁의 풍화로 갈고 닦아 이루어진 옥토를 보여주니 그 불심이 얼마니 깊으신지..

 

 

 

저 산 달마산은 운무로 얼굴을 반쯤 가리고 양구(良久)..

 

 

길을 가는 중생들에게 한 줄기 바른 길만 있으면 족할터..

그외 무수한 바위에게 무슨 시비를 하랴..

 

 

 

이제부터 길은 옛길을 닮았다..

고인들이 걷던 그 길 말이다..

이길은 유아독존의 길이다..밀포드와 산티아고와 비교해도 또 다른 개성이 잇는 길이다..

 

 

그 길에 옛사람의 풍모를 가진 사람과 옛개의 흔적을 지닌 개가 나타난다..

 

 

저 아래 어디 쯤 땅끝 마을이 있을터..

 

 

 

안개 가득한 숲속에서 '나는 어디로 가는가?"하고 의심이 가득 찰 때

문득 도솔암으로 가라는 손짓이 보인다..

 

 

겨우 200미터??

산 모퉁이 바로 돌아 송학사있거늘

무얼 그리 갈래 갈래 깊은 산속 헤매나?

 

 

하지만, 200미터가 200미터가 아니다..

그동안 걸어온 노고 만큼의 거리가 남아잇다..

땀방울인지..이슬인지, 빗물인지 방울 방울 맺히고 흐른다..

 

 

 

 

그때 허공에 홀연히 무언가 나타난다..

'이리로 오라"하며 외길을 밧줄처럼 던진다..

 

 

 

 

도솔암..

도솔천은 부처님이 어머니를 위해 설법을 베풀었다는 하늘 세상아니던가?

나도 이곳에서 어머니, 아버지를 위해 큰 절 올리고 가자..

 

 

도솔천의 땅마당은 분통만하지만, 그 안개 마당은 온 누리를 덮고 있다..

운해바다를 독판 차지한 물고기 한마리.. 

유유히 노니는 것만은 아니네..ㅎ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이 무엇입니까?

"도솔천에도 안개가 가득하고 꽃은 젖어 있더라"

 

 

 

 

 

도솔암 날망에 앉아

하얀 안개 친구 삼아

하얀 배를 깍아 먹으며

하얀 세상을 바라본다..

 

 

 

 돌아오는 길에 감에게 넌지시 알려준다..

"엄마가 생각나거든 도솔암에 가거라.."

 

 

 

<오늘 걷기> 미황사 주차장 - 부도전 - 숲길 - 도솔암  왕복 약 12km

 

 

일지암에서 내려온 뒤에 비는 다시 굵어진다..

녹우당으로 향한다..

푸른 비가 내리는 집..녹우당을 방문하기 제격이라고 위로하면서...

 

 

정문앞에 커다란 은행나무..

행단..원래 행단은 공자가 제자를 가르치던 곳을 상징하기에 사대부들은 자신의 집에 은행나무를 즐겨 심는다..

대표적인 것이 맹사성의 집안의 맹씨행단이다..

그런데, 사실은 공자의 행단은 은행나무가 아니라 살구나무였다고 한다..

 

 

 

문이 닫혀 관람을 못한 녹우당 내부..

고산 윤선도은 효종이 봉림대군시절 사부였다..효종이 등극하자 윤선도를 불러 등용한다..

그가 낙향할 때 효종이 하사한 집을 해체하여 배에 실고 내려와 이곳에 지은 것이 녹우당이란다..

 

 

유적전시관에서 찍은 녹우당 현판..

동국진체의 대가 옥동 이서가 쓴 글씨..

옥동 이서는 남인출신이라 자연히 같은 남인인 고산 윤선도의 손자 윤두서와 가까이 지낸다..

이서는 성호 이익의 형이다..그의 글씨는 동국진체라 불렸는데, 공재 윤두서, 윤순, 대흥사 대웅보전을 쓴 원사 이광사 등이 그의 필체를 추종하였다고 한다..

 

 

집안을 보지 못하는 대신 담장을 끼고 돈다..

 

 

 

10월의 막바지 푸름의 공간에 푸른 비를 맞으며 걷는 기분도 남다르다..

 

 

 

녹우당 뒷편 비자림으로 이어지는 울창한 숲속 내리는 비는 녹우당의 이름과 명실상부하다..

 

 

유물전시관에서 만나는 고산 집안의 예술..

전시관에 새겨진 미인도는 누가 그린 것인가?

집안 사람들은 공재 윤두서가 아니라 그의 손자인 청고 윤용이 그린 것으로 추측한단다..

 

 

이 집안의 토대를 구축한 분은 고산의 고조부..어초은 윤효정이다..

그가 해남 정씨 집안에 장가들면서 경제적 토대를 구축하였다..

그 바탕위에 자손들이 번창한다..

 

 

고산 윤선도의 영정..

 

 

그의 과거 급제 답안지도 전시되어 잇다..

그는 효종, 현종 시절 서인 송시열, 송준길 등과 대결하는 남인의 정치인으로 활약하다..

그뒤 낙향하여 보길도 등지에서 생활한다..

 

그를 이름 나게한 오우가..

수,석,송,죽,월,

 

 

고산의 가훈..

수신, 근검, 적선...

 

그의 가훈을 보면, 경주 최씨나 구례의 운조루 집안 처럼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몸에 밴 사람임을 알겠다..

그의 가르침이 이어져 오랫동안 명문으로 존재하였던 것 아닐까?

 

 

고산의 증손자..공재 윤두서는 그림에 뛰어났다..

그의 예술성은 그의 자손에게 이어지고, 그들이 소장한 명화는 후일 소치 허련을 키우는데 일조한다..

공재의 피는 외증손인 다산 정약용에게 이어진다..

 

 

 

너무나 긴 추석 연휴..어디를 걸을까? 궁리하다 해남에 필이 꽂혔다..

지난 번 고흥 걷기 여행 휴유증인지 남도의 길이  자꾸 잡아 끈다..

그러나, 너무 기대 했던지, 가는 날이 장날인지, 노처녀 시집가는 날 등창나는 격인지

비가 내린다...

하지만, 나의 날씨복을 믿기로 했다..

 

 

일단 대흥사 부터 들러 일지암으로 가기로 했다..

입구 주차장에 차를 대니 비가 그치지 않는다..우비와 우산을 챙기고 걷는다..

 

 

차도와 별도로 산책길을 개설했는데,  걷기 좋다..

참 좋은 시도요 변화다..

이 길은 땅끝 천년숲길(대흥사 - 미황사 - 도솔암 - 땅끝)의 거창한 타이틀도 달고 있다..

 

 

빗소리 들으며 숲길을 걷는 기분은 걷기 마니아는 알겠지..

마니아만이 아니다..많은 사람이 빗속에 걷고 잇다..

비란 우리 주변 여건 중 매우 작은 번뇌요 소품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동나무 숲길이 좋다..

동백 기름으로 윤이 나는 까만 머리의 가르마 같은 길을 빗속에 걷는다..

 

 

유선관이다..유선여관이다..

20년전 가족여행와서 묵었던 곳..

그때는 아이들이 어려 일지암 가는 길은 미루었지...

언젠가 다시와서 걸으마 하던 다짐..오늘 현실이 되었네..

내려오는 길에 다시 들르마..수인사하고 길을 재촉한다..

 

 

멀리 일주문이 보인다..

입구로부터 1.5km

 

 

 

 

절안 대웅보전 입구 침계루..글씨도 여전하다..

 

 

침계루의 글씨와 대웅보전의 글씨는 모두 원사 이광사가 썼다..

외국물 먹지 않고 서첩으로 배운 토종의 글씨..나름 일가를 이루었는데, 외국물 먹고 최첨단 패션을 익히고 돌아온 추사의 눈에는 촌스럽게 보였나 보다..

대웅보전 옆 백설당에 추사의 글씨 "무량수각"이 있다..

 

 

 

 

 

귀양가기 전에 원교 이광사의 대웅보전의 현판을 떼어내라고 호통치던 추사..

9년의 귀양살이..추운 세한의 시절을 겪고 난후 다시 현판을 달라고 했다던가??

 

내가 20년의 세월동안 그들의 글씨, 서책, 일화을 보고 듣고, 세상경험을 보태보니

글씨건 음악이건 종교건 정통은 없다..

그들의 행동과 취향으로 바라 볼 뿐이다..

그러니 시비 분별이 무슨 소용이랴..

 

 

부도전 옆에 비맞고 앉아 있는 초의선사는 알았을 것이다..

다산에게 배우고 추사를 사귀고 소치를 가르쳤던 초의는 알았을 것이다..

재능과 덕은 꽃과 같은 것이라고..

그리고 그는 차꽃을 키우며 수행하면서 번뇌 속 중생에게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차나 한잔 마시게"

 

 

 

 

 

 

부도전에서 1.5km 거리..

초의 당시에는 사람이 찾아 오는 것을 꺼려 일부러 길의 흔적이 보이지 않게 했다던데..

이제는 이리 넓어져 어서들 오라 하네..

 

마지막 가파른 길을 올라서면 차밭이 마중한다..

추사가 걸명차의 편지를 보내게 했던 차밭이다..

 

"초의 안녕하신가? 초의선사 보고 싶으니 간밤엔 눈꼽이 다 끼었나니 그 청량하고 고고한 모습 한번 보기 원하나니. 그러나 불사에 바쁜 몸 어찌 욕심 내겠는가

원컨대 초의가 만든 차(茶)라도 보내주시면 초의 대하듯 ‘초의차’ 만지고 어르고 혀끝으로 음미하리니

이보시게, ‘초의차’ 떨어져 ‘초의차’ 못 마시니 혓바늘이 돋고 정신이 멍해지느니

그러니 ‘초의차’ 보내지 않으시면 내 당장 말을 몰아 일지암으로 향하여 차밭을 모두 밟아버릴 터.

그러나 원망하지 말아야 할 것은 ‘초의차’에 중독시킨 죗값 응당 그대의 몫이려니.”

 

 

 

일지암에서 수행하면서 제주로 몇번이고 건너가 귀양살이 추사를 위로했던 초의..

세한도의 주인공 못지않은 의리..

 

 

일지암 글씨는 전주 명필 강암선생이 쓰셨네..

 

 

일지암 툇마루에 앉아 비를 피하며 주련을 본다..

 

故射仙子粉肌潔 閻浮檀金芳心結

고사선자분기결 염부단금방심결

 

沆瀣嗽淸碧玉條 朝霞含潤翠禽舌

항해수청벽옥조 조하함윤취금설

 

고사선자의 분바른 뽀얀 살결처럼 깨끗하고

염부단금처럼 아름다운 꽃술 맺혔네.

이슬에 맑게 씻기어 벽옥같이 푸른 가지

아침안개 흠뻑 머금은 푸른 새의 혀라네.

 

초의가 쓴 동다송의 한 귀절을 주련으로 달았다..

 

 

스스로 읊기를..

 

못을 파서 허공 달빛 해맑게 깃들이고,
대통이어 구름 샘을 저멀리서 끌어왔네

 

시야 막는 꽃가지를 잘라내어 없애니
석양의 멋진 산이 또렷이 눈에 드네


제자인 소치가 방문햇을 때 방안 풍경은

시렁에 불경이 가득하고 상자에는 두루말이 법서과 명화가 가득했다..

 

 

 

일지암 옆에는 자우홍련사가 있다..

자주빛 토란과 붉은 연꽃의 집..

 

 

홍련사 누정에 찻잔이 진열되엇네

그대로 주저앉아 한잔 하면 되겠네..ㅎ

 

 

 

 

추사가 구걸하던 차의 밭이 이렇게 작은데..

나오는 차의 양은 오죽하겠는가?

 

 

 

차밭 옆에 숲속 도서관 건물에서 먼산을 바라본다..

이곳에서 차마시고 책을 보며 사는 인생...

그리고 가끔 다산, 추사, 소치와 만나 차와 시..그리고 에술을 토론하는 인생...

멋진 인생 디자이너다..

 

 

 

 

 

내려오는 길에 유선관에 다시 들럿다..

 

 

관산청천..

산을 바라보고 물소리를 듣고..

 

 

월색 다색 불여 우리가족 화안색

달빛 찻빛 좋다 해도 우리 가족 환안 얼굴색만 못하다..

 

 

다시 20년 후에 들러 파전과 도토리묵으로 옛추억을 불러본다..

 

 

 

<오늘 걷기> 대흥사 입구 - 산책로 - 부도전 - 일지암  왕복 약 6km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다..

19코스와 21코스 일부 구간을 걷는데, 방광마을 - 당동마을 - 난동마을 - 온동마을 - 광의면사무소에 이르는 13Km 구간,,


 

 

1개월만에 보니 누런 벼가 고개를 팍 숙인 모습이다..

익어가는 것은 성숙해지는 것이고, 성숙해지면 겸손해지나 보다..


 

석류는 아직도 요염하다..

석류같은 입술이라고 하지 않던가?

봄에는 앵두처럼, 가을에는 석류처럼..ㅎ


 


방광마을은 신라때 천은사가 설때부터 있던 마을이라니 골목의 바위로 예사롭지 않다.. 



 

 

 

사람을 얼르고 달래는 길..

엄나무가 가시로 얼르고

초롱꽃이 환한 얼굴로 달래니..

죄진 것 있으면 얼릉 자백하고 말겠네..ㅎ



 

 

 

감이 익어가는 길에 돌부처님이 서계시네..

신라적 풍모란다..


 

 

 

한번만 독송해도 팔만대장경 독송한 공덕과 같단다.. 


 

 

잠자리..이젠 헤프다..

아무데나 아무에게나 붙잡고 늘어진다..자고가라고..ㅎ


 

 

 

잘 가꾸어진 예술인 마을을 지난다..

시간 여유를 가지고 차나 한잔 하고 갔으면 좋았을텐데..

 

 

 

 

 

 

 

음양이 맞아 떨어지는 추분 무렵

백곡을 익히는 뜨거운 양기가 고생하는 계절

딸에게 쪼이게 한다는 귀한 가을 볕을

무진장 맞으며 걷고 걸었다

이제 땀을 식혀줄 금풍이 불어오겠지..

 

 

 


나팔꽃을 예전에는 견우화라고 불렀단다..

7월 칠석날에 가득 피어 직녀의 눈물이 꽃이 되었다고 하기도 하고..

오작교에서 짧은 만남으로 혜어지는 견우와 직녀..

그래서 꽃말도 "짧은 사랑"인가 보다..

 

 

 

 

 

 

 

코스모스와 푸른 하늘 그리고 아련한 능선..오래된 풍경처럼 다가온다..

 

 

 

 

마을마다 정자나무 고목이 서있는 것은 오랜 터라는 증거..

 

 

 

 

 

 

 

며칠 상관으로 밤송이는 퇴물취급을 받는다..

 

 

 

백일간 붉다는 백일홍에 흰꽃도 있나??

백일백으로 분가 시켜야 되는거 아닌가??

 

 

 

서신천를 끼고 억새가 피는 길을 걸어간다..

 

 

 

 

강가 세심정 정자에 시귀가 주련으로 걸렸다...


龍遊潭上洗心亭 (용유담상세심정)

一國溪山集大成 (일국계산집대성)

一凉一溫眞稱意 (일양일온진칭의)

四威儀處樂如情 (사위의처화여정)


용유담(龍遊潭)의 세심정(洗心亭)

온 나라 개울과 산을 모아 놓은듯하고
서늘하고 따스함을 실로 뜻에 따라 누릴 수 있으니

사위의(四威儀 수행) 행하는 즐거움도 정(情)답다 하리.

 

 

 

 

봄에는 꽃비가 내렸을 벚나무길을 잎의 무성함을 고마워하며 걷는다..

가을이라도 오후 햇살은 여전히 뜨겁다..

 

 

 

그렇게 서신천변을 걸어 광의면사무소에 도착한다..

더운 열기를 시원한 맥주와 께끼로 식혀본다..

 

 

<오늘 걷기>  구례 방광마을 - 참새미골 - 예술인 마을 - 난동마을 - 온동마을 - 서신천변길 - 광의면사무소  약 13Km

 

 

안성 걷기에 나섰다..

매산리 미륵불- 죽주산성 - 비봉산을 걷는 구간..

차를 안성군 매산리 미륵당 마을 경로당 앞에 세운다..

 

 

 


 

 

중생들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시무외인을 하고 있다는데..

미륵불 상호가 무섭다..


 

 

 

이길은 죽주산성으로 이어진다..


 


선정비가 즐비하니 이곳 사람들도 많이 뜯겼으리라..


 

영남길 8구간 ; 죽산시외버스터미널에서 황새울마을에 이르는 구간 중  죽주산성 둘레길만 걷는다..


 

 

 

 

추석을 앞두고 밤도 익고..버섯도 많이 채취하는 계절이다..


 

무궁화 꽃도 제철이다...

몽고와의 숨박히는 대결에서 이겨낸 이곳에 핀 무궁화라서 그런지 느낌이 남다른 것 같다..


 

 

죽주??

신라 진성여왕 시절 천하 대란때 이곳에서 기훤이 장군행세를 하며 세력을 키웠다..

그때 궁예가 부하로 들어왔다가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신훤과 원회 등을 데리고 북원의 양길에게 의탁하게 된다..

 

 

 

성은 삼중성의 형태를 띠고 잇는데, 임진왜란 후에 보강된듯하다..


 

영남길의 길목에 선 요새지..

몽고 3차칩입 때 송문주 장군이 15일 동안 항전하여 승리를 거둔 곳이다.

그러자 몽고군은 죽주성을 피해 남하한다..

이 3차 칩입은 5년간 이어지는데 그 와중에 경주의 황룡사 9층탑도 불에 타 소실되었다..


 

버들강아지들이 성벽을 지키는 고려의 군사처럼 당당하게 푸른 하늘에 섰다..


 

 

 

 

밑에서는 별거 아닌 것 처럼 보이는데, 막상 올라와 보니 사방을 제압하는 요새의 면모가 보인다..


 

몽고의 군마가 진을 친듯한 동녁의 구름은 태풍 탈림의 잔당 쯤 되겟지..


 

 

임진왜란때에는 행주대첩이후 이성을 둘러싸고 변이중 장군의 분전이 벌어졌고, 그뒤 황진장군이 기습으로 이 산성을 탈환하였다..

 

 

 

이 지점에서 비봉산 방향으로 향한다..


 

길은 오솔길로 이어져 내리막을 간다..장광고개까지..


 

 

잠자리도 갈 때가 되니 각종 써비스를 제공하네.

있을 때 잘하는 것..

살아 있을 때 잘 사는 것..

그것이 정답이다..


 

 

 

갑자기 당랑거사가 툭 떨어져 대결을 신청한다..

슬쩍 피해준다..


 

 

고목도 인사를 하고 가란다..

뻣뻣한 허리 숙이느라 힘든다..


 

 

참 이길은 그늘이 좋다..

아직 한낮의 땡볕은 여름같은데..시원하게 걷기 좋다..



 

봉황이 날아드는 정상에서 날개 활짝피고 점심을 먹고는 낮잠을 청해본다..


 

 

 

만리청천운기우래

공산무인수류화개


만리의 푸른 하늘 구름 일고 비가 오네

빈산에 사람없어도 물 흐르고 꽃이 피네..


 

흥래매독왕 승사공자지

행도수궁처 좌간운기시


흥이 나서 홀로 길을 걷다가

좋은 일을 스스로 즐기네

물길이 시작되는 곳 까지 걸어가서

구름이 이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네


 

황새울까지 가려다가 차량편이 마땅치 않아 원점회귀한다..

 

 

 

이번에 반대편 남쪽 성벽을 따라 내려간다..


 

 

멀리 비봉산 능선이 늘씬하다..

남문을 돌아 성중심으로 간다..


 

 

도토리, 상수리 가득 떨어지는 계절..

다람쥐, 청설모 바쁘겠구나...


 

송문주 장군 사당 충의사에 들럿으나 문이 잠겨있네.

영정은 위 설명문과 같은 모습..


 

 

예전엔 여기에 연못이 있었겟지..

몽고군이 죽주산성을 둘러싸고 물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전술을 쓰자 송문주 장군은 “멀리서 왔으니 어찌 배고프지 않겠는가! 삼가 이 생선으로 군량을 삼으라” 하며 연못의 잉어를 잡아 적에게 보냈고, 이에 크게 놀라 적이 물러가니 뒤쫓아 무찔렀다

 

자세한 죽주산성의 전투이야기는 아래 싸이트를 참고하시라..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8&pn=1&num=4952

 

http://bemil.chosun.com/nbrd/bbs/view.html?b_bbs_id=10158&pn=1&num=4953

 

 

 

 



<오늘 걷기> 안성군 매석리 미륵불 - 죽주산성 - 비봉산, 원점회귀  약 8km


 

 

충주 걷기를 끝내고 숙소는 제천 리솜 포레스트에 정했다..

리솜에서 뒤풀이 후 아침에 일어나 숙소 부근을 산보하는데..서리맞은 붉은 잎이 눈이 띈다..


 

 

아침 식사후 걷기는 박달재- 배론 성지 구간을 걷기로한다..

일행에게 내비에 박달재 휴게소를 입력하라고 햇더니 3개나 있단다..

그래서 검토 끝에 "박달재 서원휴게소"를 입력하라고 정정..


 

서원휴게소에 도착하니 입구가 감감..

인근 식당에 주론산 등산로 입구를 물으니, 길따라 우측으로 가다보면 바로 길건너에 표지판이 있다고 답한다.. 


 

 

이 표지판이다..

여기서는 파랑재로 가는 등산로 표지만 있다...

그런대, 내가 미리 검토한 자료에는 여기서 200미터 올라가면 휴양림 임도로 이어지는 길이 잇었는데,

설핏 보는 바람에 정확히 머리에 입력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어찌되었을까?


 

 

초입에서 200미터 정도는 웃으며 갈 수 있는 길이다..ㅎ 


 

200미터 지점에서 이 표지판을 보았다..

하지만, 직진하면 휴양림으로 내려가리라고 오판했다..

여기서 우측 주론산 방향으로 길을 잡았다..


 


만약, 저 표지판에서 직진하였다면 임도를 만나고 그 임도를 따라 20-30분 가면 박달재 자연휴양림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합류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걸으면 아래와 같은 코스 6. 6 km 2시간 30분에 갈 수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영문도 모른채 우측 등산로를 따라 오르는데, 어지간히 숨이 찬다..


 



 

 

 

샌달 신고 온 일행도 있는 상황에서 불만이 터져나올 즈음 다행히 산불감시 초소에 도착헸다

해발 750m

박달재는 해발 400m 정도이니 고도를 300이상 올린 것이다..


 

힘든거 생각 말고 멋진 풍광을 보라고 달래본다..

다행히 이후에는 완만한 내리막 길..

거기다..환상의 숲길이다..

우연득작..득템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이 숲길은 근래 만난 길 중에서 아주 맘에 든다..

 

 

 

 

이 환상의 숲길은 파랑재에서 끝난다..

이어지는 그린 카펫의 길..

레드 카펫의 길과 달리 누구나 환영받는 길..


 

 

 

친구들이 서울 가는 길 때문에 보채지 않았다면 이 환상의 공간에서 놀멍 쉬멍 즐기면서 갔을 터인데...

 

 

 

길이 끝나갈 무렵 배론 성지 표지가 나온다..얼마나 남았는지 표시도 없이..

누구는 이 길을 배론성지 순례길이라 부르던데..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저 이 길의 끝에 배론 성지가 있을 뿐이다..

 

 

 

좋은 길이 끝나 가듯이 잠자리의 호시절도 끝나간다..

 

 

 

임도 차단기를 다시 지나면 길은 시골길로 변하고 그 길 끝에 배론 성지가 있다..

 

 

 

 

정약용의 형..정약종은 천주교 신봉자..

그의 처남이 이벽..

황사영은 정약종의 사위였다..

 

정조 사후 정순왕후 수렴청정 기간 중에 신유박해(1801년, 순조 1년)가 벌어진다..

정약종이 사형당하자, 황사영은 제천 배론으로 숨어 신앙생활을 하고 지낸다..

 중국의 주교에게 명주 편지를 쓴다..

그것이 황사영 백서이다..

 

그 내용은 천주교 박해상황을 알리고 해결방안을 건의하는데..

 

1. 청 황제가 칙명을 보내 포교를 허락하게 해달라.
2.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만들어 청의 풍속을 따르게 해달라.
3. 청의 친왕(親王)을 조선에 보내 다스려 달라.
4. 3의 방안이 안 된다면 조선의 왕을 청 황제의 부마로 삼아 대대손손 충성을 다하게 하라.
5. 이상의 모든 방안이 불가할 경우, 프랑스 황제가 직접 군대를 보내 조선을 정복해 달라

 

이런 내용을 중국에 전달하려다 발각된다..

외세를 끌어들이려는 내용때문에 여론은 악화되고, 천주교 박해는 더 강해진다..

 

그는 거열형에 처해지고, 어머니는 관노가 된다.. 그의 처 정난주(마리아)는 제주의 관노로 끌려가면서 어린 아들과 추자도에서 이별한다..

그 아들은 추자도 사람 오씨 집안에서 오씨 성으로 살아남아 지금도 그 후손이 생존한다고 한다..

 

 

 

 

문제는 박달재 서원휴게소로 돌아가는 일이다..

다행히 차량 1대에 운전사들만 타고 가서 다시 차를 몰고 돌아오는 방식으로 해결..

 

 

 

예상 못한 코스로 가서 초반에 고생했으나 뜻밖에 멋진 길만났으니 우연득작이라..

일기일회(一機一會)의 좋은 인연이라고 하겠다..

 

 

 

 

<오늘 걷기> 박달재 서원휴계소 - 주론산 등산 표지판 - 200미터 삼거리 표지판 - 주론산 등산방향  - 감시초소 - 파랑재 - 조백석골 - 배론성지 약 7km

 

<참고 걷기>

 1. 박달재 자연휴양림 - 임도 - 파랑재 - 조백석골 - 배론성지  약 6-7 km

 2. 박달재 서원휴게소 - 주론산 등산표지판 - 200미터 삼거리표지판 -  휴양림방향 - 임도 - 휴양림 방향 임도 합류 - 파랑재 - 조백석골 - 배론성지 6-7km

 

 

 

 

충주 남산성 걷기에 나섰다..

충주 걷기우먼에게 문의하였더니 남산성 가는 임도길을 추천하엿다..

들머리 찾기 쉽지 않다,,

우선 내비에 "마즈막재" 를 치고 가서 주차장에 주차한다..

주차장 입구에서 맨 우측 차도를 따라 가서 카페를 지나 50미터 정도 가면 임도 진입 차단기가 보인다..

차단기는 차를 막기위한 시설이니 옆으로 걸어 올라가면 된다..


 

흔한 임도가 시작된다..

그늘도 있어 걷기 좋다..


 

 

 

이길에 남산역사테마길이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역사화를 몇장 붙여 놓았다..

김윤후의 대몽항전??

그 충주성이 이 곳 남산성인가?

학설은 이곳 남산성과 대림산성으로 갈린다..


김윤후는 충주성에서 70일을 항전하여 식량이 바닥에 이르자, 사졸을 독려하며 이르길, " 만일 능히 힘을 다한다면 귀천을 가리지 않고 모두 관작을 내리겠으니 그대들은 이를 믿으라." 하고 드디어 관노의 부적을 가져다가 불태워버리고 또 노획한 우마를 나누어주니 사람들이 모두 죽음을 무릅쓰고 대적하였다.

이에 몽고 장군 야굴이 병을 핑계로 철군한다..

그 공으로 조정에서는 김윤후를 상장군으로 봉하고, 충주를 국원경으로 승격시켰다..


 

 

 

임도 길은 완만하게 3.5km 정도 올라간다..


 

이 지점에서 산성으로 올라가는 게단과 만난다..

 

 

 

참 아름다운 산성이다..

충주호가 보이고 남산을 둘러싼 산성으로 곡선미도 은근하다..


 

 

 

 

 

 

가을 아침에 신문사 사진기자가 찍은 이 풍광을 보고 왔으나  계절과 시간의 차이로 푸른 연꽃 같은 산줄기는 찍지 못했다.. 


 

 

 

 

 

1km 둘레의 산성을 따라 걷는다..


 

강아지풀과 벌개비취가 가을을 부르고 있다..


 

 

깔딱고개를 지나 남산아파트 쪽으로 내려가다보면 사과 과수원을 지난다는데..오늘은 원점회귀라 아쉬울뿐..


 

 

 

 

 

충주는 요충지라 역사적 국면에 항상 전투가 벌어진다..

그래서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충주를 길지로 꼽지 않앗다..

대몽항전 시기에 9차례의 전투를 치루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탄금대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산성에 우물이 필수..그래야 70일을 버틸 수 잇다..


 

 

 

 

 

일행들이 기다리는 저 고목의 풍경..

오늘의 하일라이트..


 

 

 

 

 

 

 

<오늘 걷기> 마즈막재 주차장 - 남산 임도길 - 남산성 일주 - 원점회귀 약 9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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