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림사를 나와 향한 곳은 경천대였다.

입구에서 정기룡장군은 여전히 건강한 모습으로 반겨준다.

 

경천대 주변에 낙동강 강바람길을 조성해 놓았다.

그 길을 걷는다.

우선 전망대로 향한다.

 

전당대에서 유장하게 턴을 하는 낙동강 물굽이가 보인다.

예천 회령포에서 내려온 물이 구미, 칠곡, 달성을 거쳐 고령, 밀양으로 내려간다.

 

전망대에서 옥주봉으로 가는 길은 참 편한 길이다. 

 

옥주봉 전망대에서 보면 경천대와 상도 촬영지가 보인다.

 

돌아나와 경천대로 가는 길도 정겨운 강길이다.

 

경천대..

하늘을 떠받드는 곳..

 

인조 시절 우담 채득기가 쓴 글씨가 있다.

대명천지 숭정일월

명나라 천지에 일월같은 숭정황제..

 

명나라에대한 의리와 보은정신이 이리도 투철했던 사람들..

명나라 참전이 없었다면 나라가 망했다는 생각이 뼈에 사무친 사람들..

원래 이름은 자천대인데, 저 글씨를 새기고 경천대로 이름을 바꾸었을 정도..

그렇다면 떠받드는 하늘은 대명 숭정이라는 것인가??

 

지금은 정반대로 미국에 대한 의리를 헌신짝처럼 버리려는 사람들..

몇백년을 사이에 두고 사람들의 생각은 극과 극을 달린다.

그때가 맞고 지금이 틀리는지, 그때가 틀리고 지금이 맞는지..

 

무우정(舞雩亭)

춤을 추며 비를 비는 정자..

 

원래 이터가 사벌국 시절부터 기우제를 지내는 신령한 땅 우담(雩潭)이었기에 

우담 채득기 선생이 무우정을 짓고 은거했단다.

한편, 그는 성리학자이니 공자의 논어에 나오는  '제자 증점(曾點)이 기수에 목욕하고 무우에 바람 쐬이고 시를 읊조리며 돌아오겠다(浴乎沂,風乎舞雩,詠而歸)'
귀절에서 따서 무우정이라고 이름 지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병자호란시 척화론자였고, 두 왕자가 심양에 볼모로 갈때 호종하여 보필한 인물이다.

 

**

기도터인지 모르고 방자하게 누워 눈을 붙이려고 한 죄과로 돌아오는 내내 목과 어깨가 아프다.

이글을 쓰는 다음 날도 그렇다. 참회 그리고 참회..

 

목교를 지나면 상도 촬영지가 잇으나 볼거는 없다.

 

시끄러운 소리로 기도터의 분위기를 망치는 수상오토바이가 내 죄보다 더 큰거 같다..

 

 

코로나 정국에도 영업하는 매점에서 잔치국수를 시켜 배부르게 먹는다.

코로나로 뒤틀린 이 정국은 언제 정상화 될 것인가??

인간극장에서 어느 절 이야기를 보다가 문득 상주 도림사를 떠올렸다.

어느 해인가 인간극장에 등장했는데, 절 형편때문에 상주박물관에 보관 중인 석불을 보고

눈물 짓는 장면에 마음이 뭉클하여 약소하게 보시한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그 부처님은 절로 돌아오셨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그래서 갑자기 그 절에 가고 싶었다.

검색해보니 절 인근에 한양옛길이 있다고 하니 금상첨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상주 ic를 지나 도림사에 도착했다.

 

우선 한양옛길을 걷고 와서 절을 탐방하기로 한다.

 

절 옆길로 올라간다. 

한눈을 팔다 돌아서는데, 눈앞에 큰 뱀의 꼬리가 휘돌아 나간다.

기겁을 한다..ㅎ

 

포장 임도를 걸으면서 배우이 고개까지 이렇게 포장되었을까 걱정했는데, 기우..ㅎ

 

오히려 길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묵었다.

산길은 우정같아서 왕래가 끊기면 잡초만 무성하다네..

 

허탈하게 돌아 나올 수 밖에..

 

 

 

도림사는 오랜 절터에서 고려시대 청동유물이 많이 발견되었단다.

 

앱이 알려주는 이름은 닥풀꽃??

 

법당안에 박물관 부처님은 아니 계시고..

솔거풍 그림과 천진한 강쥐만 만났다.

 

소원탑과 와불산을 한참 바라본다.

 

와불전은 와불산을 모시고 있나보다.

 

절뒤곁에 웬 골프연습장??

 

이 절 스님들은 여전히 된장불사를 열심히 하나보다..

 

계곡을 흐르는 물과 썸타는  물봉선..

 

이절의 출발점인 도림원..

 

스님은 법당에서 기도중이라 뒷마당의 처사에게 박물관 부처님에 대해 물었더니, 그는 모르더라..

궁금증만 품고 돌아선다.

 

코로나가 걷기에도 영향을 주기 시작한다.

장수 덕산계곡을 찾아 구비 구비 달려갔는데, 장안산 군립공원 주차장에 입구를 전면통제한다.

출입금지란다.

산과 계곡에도 출입을 막으면 어쩌란 말인가?

하루 출입인원을 제한하던지, 일정한 간격으로 걷기만을 허락해도 좋을텐데, 일방적으로 전면 막는 것은 졸렬한 조치이다.

 

돌아나오는 길에 사과농원 곁에 내렸다.

지난 5월 장수 봉화산 철쭉보러 왔을 때  이정도로 통제가 심하지 않았다.  

잘 걷고 돌아가면서 사과꽃을 한참 들여다 보았는데, 몇개월이 지나 사과는 붉게 익엇다.

하지만, 코로나는 다시 기세를 올리고 있다.

 

문득 대타로 떠오른 곳, 번암면 죽림정사, 물빛공원, 동화저수지 일대였다.

 

언젠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처럼 사과 벤취는 여전하고 소풍카페도 생겼다.

하지만, 뭔가 허술해진 느낌은 뭘까?

전에 맞아주던 분수가 작동하지 않아서 일까?

그런 내마음을 눈치챘는지, 하늘이 비를 뿌려준다.

 

죽림정사로 간다.

독립선언문 33인의 1인 용성선사의 생가지를 절로 조성했다.

 

용성선사의 법맥은 용성 - 동헌 -도문 - 법륜으로 이어진다.

법륜 스님은 요즘 즉문즉설로 유명하다.

 

코로나 여파인지 생가도 문이 잠겼다.

자세한 이야기는 blog.daum.net/servan/6348847

전에 다시 오면 걸어보겠다던 둘레길을 올라간다.

전에는 소로 오솔길이었는데, 이제는 넓게 포장이 되었다.

 

길이 넓어진게 아니라 호박도 넉넉해졌다.

 

동화저수지 감싸도는 임도도 포장이 되었다.

누군가 벌통을 벌려놓앗다.

 

계곡길을 걸을려던 것이 저수지 수변길 걷기로 바뀌었다.

전에 걸어보겟다던 마음 한조각이 이런 인연을 만든걸까?

아니야, 아닐거야..

만약 그렇다면, 내가 앞으로 감당할 일은 엄청날 것이다. ㅎㅎ

단지 그런 마음 한조각이 오늘의 변수를 만나 수면위로 떠올라 선택을 받은 것 뿐이다.

 

 

자세히 보니 수변길의 나무들이 벚꽃이다.

벚꽃 필 때 오면 좋겠다고 운을 뗐더니 동행이 쐐기를 박는다.

"벚꽃 좋은 곳이 얼마나 많은데.."

 

그저 푸른 인연을 따라 갔다가 노란 인연을 만났다고 생각하자.

법륜의 말씀대로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다"

뜻대로 안된 것을 불평한들 무엇하랴..

 

항상 새롭고 신비한 것을 찾는 것도 욕심이고 집착이다.

그런 마음을 내려놓아야 항상 새롭고 신비한 것이 보인다.

 

2020년 여름을 이곳에서 송별한다.

날파리처럼 혼란스럽게 만드는 코로나로 부터 나를 지키며 여름을 보내기 힘든 시절이다.

 

오늘은 대둔산 수락계곡에서 세족이나 하고 올 생각이었다.

전에 보아둔 월성봉 올라가는 길로 슬슬 올라가다 돌아와 계곡에서 노닥거릴 생각이었다.

 

온종일 계곡에서 지낼사람은 모기장 텐트가 필수템이다.

 

아침 부터 정다운 고스톱부부는 승부로 의상하지는 않겠지?? 

 

수락재 가는 길의 계곡은 어제 십이폭포보다 물도 많고 맑기도 하다..

 

 

원래 계획이라면 우측 월성봉으로 가야겟지만, 좌측으로 계곡이 이어져 계곡 끝까지만 가보자 하고 방향을 튼다.

 

 

버섯이 왜 눈에 들어왓을까?

우연일까? 데자뷰일까?

 

수락재에 올라서니 부부가 점심을 먹고 잇다.

좌, 우의 길 샅애를 물어보니, 우측 바랑산 쪽은 험하단다.

좌측이 좀 낫은 것 같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좌측으로 향하고, 

거리표시가 짧은 짜개봉이 이유도 없이 목적지로 선정되엇다.

 

이길의 장점은 그늘길이고 흙길이고 계단이 없다.

단점은 조망은 없다. 

 

잠시 쉬다가 사진장비 무겁게 지고 올라오는 사람과 만났다.

사진찍기 40년, 야생화를 찍다가 버섯사진을 주종목으로 한단다.

산으로 들로 사진 찍으러 다니면 체력이 좋겠다고 덕담을 던지니,

의외로 안타까운 사연이 있다.

2년전 부인이 뇌졸증으로 쓰러져 회복은 했으나 반신불수..

부인 수발하느라 지친 마음을 달래보려고 사진기를 들고 나온 모양이다.

 

그가 손짓하면 알려준 사철난..

평소 그냥 지나칠 야생화인데, 자세히 들여다 보면 이름과 사연이 있다.

사람도 그렇다.

그가 짜개봉 가는 길이 무난히 가다가 나중 막바지 정상부만 조금 힘들다고 설명해준다.

 

그 말에 동행이 신이나 짜개봉 완주의 의지를 다지는데, 

나는 은근슬쩍 회군하려다 주춤 주춤 궁시렁거리며 따라가는 형국이 되었다.

 

그 사람때문인지 길가의 버섯이 눈이 들어 오기 시작한다.

그에게 혈관건강에는 양파즙이 좋다고 송가인 집에서 만난 할머니 이야기를 건냈더니

산야초나 민간요법이 좋다면 그 많은 병원이 왜 있겠느냐고 반문한다.

 

그러보면, 약이던, 민간요법이던 믿음을 가지고 먹을 때 플라시보 효과까지 보태질 것이고, 

씨니컬한 사람에겐 있을 약효도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한다.

 

 

하여간, 짜개봉 가는 길에 지칠만 하면 그가 산신령처럼 나타나 조금만 가면 된다고 하는 통에 회군하지 못하고 완주하게 되었다.

정상으로 가는 구간은 협소하고 미끄럽고 조심해야 한다.

 

등산 안내도에도 등장하지 않는 짜개봉 정상에 서니, 마천대가 건너편이다.

짜개봉 북봉옆으로 오산리 마을이 펼쳐진다.

 

저 아래 보이는 절이 안심사인 모양이다.

 

정상 비로 밑에서 옥수수로 점심을 먹다가 짙어지는 먹구름을 보고, 서두른다,

어제처럼 소나기 내리면 하산길이 미끄러워 곤란해질 것 같아서..

 

 

 

다행히 소나기는 오지 않았지만, 수락재 벤취에 누워 "내 가슴에 내리는 비"를 들으며 잠을 청해본다.

잠은 오지 않고 모기에게 보시하다가 수락계곡으로 내려와 발을 씻는다.

수락계곡에서의 세족 미션을 힘들게 완수햇다.

 

 

<오늘 걷기> 수락계곡 주차장 - 수락재 - 짜개봉 왕복 약 8KM

오랜만에 금산 십이폭포를 찾아갔다.

사상유래 없는 강우량 소식에 큰 물을 기대하고 갔는데, 첫 대면부터 환상을 깬다.

우선 개천을 건너던 정다운 보가 철거되고, 큰 다리를 놓았다.

 

개천 주변이 공사로 어수선한 것은 아마 큰 비가 내리면서 모래, 바위가 사태처럼  내려온 탓일까??

 

어수선한 초입부를 지나는 마음은

고향에이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이 아니라고 읊조리던 정지용의 시를 생각나게 한다.

 

전과 달라진 것은 친절한 폭포 해설 안내판이 잇다는 거..

여기가 제일폭포다..

폭포라고 하니 폭포지..ㅎ

 

일주문 폭포..

열심히 폭포라고 변명해주는 것 같다.

 

 

이쯤에서 케녀링하던 기억을 살려 물길로 걸어간다..

 

http://blog.daum.net/servan/6348636

항상 물많던 시절과 비교된다.

 

 

물탓이지 계곡탓은 아니지만, 같이 늙어가는 것처럼 안스러운 풍경이다.

 

한 줄기 미소로 나름대로 멋을 부린 마담처럼 도라지 위스키를 권하는 느낌이다.

집에 돌아와 맥라이언 주연의 '유브 갓 메일"을 본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그녀도 리즈시절의 모습만 기억하려는 팬들과 목하 분투중이다..ㅎ

 

12폭포중 1위 송가인급인 이 폭포의 이름이 죽포동천인 줄 이제사 알았다..ㅎ

 

구지소유천(九池小有天) 폭포 암반에 쓰인 시

안내판에 해설하기를

 

눈을 뿜어 숲나무 끝과 벽에 푸른 안개 피어 오르고
층층이 열두 개의 신령스런 발이 걸려 있으니
석문은 겨우 들어갈 수 있는 곳이라네
이것이 구지봉과 소유천이라는 것을 알겠네'

 

그런데, 이 구지소유천(九池小有天)이라는 귀절의 해석이 어색하다..

내 소견으로는 지명이 아니라, "아홉 연못마다 작은 하늘이 들어있네"라고 해석하는게 맞지 않을까?

 

풍패(風佩)..

바람을 차고 잇는 폭포..

 

참 시원하게 여름을 보낸다..

나처럼 리즈시절과 비교하면서 불평하지 않고, 형편대로 즐기며 사는 것이 행복의 길이라고 몸으로 역설하신다.

 

눈 내리는 소리 같다는 명설폭포..

 

운옥, 금룡 폭포를 지난 12폭포의 마지막 산학폭포까지 와서는 벌렁 누웠다.

더운 날 잠못잔 불평을 이 폭포에 해대고 싶은데..

조근 조근 속삭이는 물소리에 코고는 소리로 응대하고 말았네..

 

눈을 뜨니 먹구름이 몰려온다.

비방울도 날리고..

시원한 소나기를 맞으며 하산한다..

비줄기가 흘러내리는 차안 에어콘 속에서  먹는 컵라면의 맛이란..ㅎ

 

하의도 웅곡선착장에서 목포로 가는 뱃시간이 넉넉하다.

김대중 생가 옆 소금창고와 염전을 구경한다.

 

와서 보니 소금이 귀한 이유는 하늘을 담아 결정체가 되기 때문인 것 같다.

 

나름 과학적 마인드로 바닷물을 요리조리 교통정리하고, 비가 올땐 고농도 소금물을 창고에 저장하기도 한다.

 

염전의 불래앤 화이트 사이에 모든 것이 그림이 된다.

 

이번에 큰바위 얼굴 표지를 보고 달려간다.

내비가 이상하게 좁은 길로 안내해 고생한다.

관광후 하의면사무소쪽 나가는 길은 넓고 좋던데..

 

자세히 보니 큰바위 얼굴은 처용이 웃는 모습니다.

전체적으로는 처용얼굴을 한 스핑크스라 할까?

 

말년의 DJ도 고향을 돌아보면서 이곳을 들렀나 보다.

 

다음 행선지는 모래구미 해수욕장이다.

그런데 해수욕장이라고 하기에는 모래사장이 손바닥만 하다.

 

당초 계획엔 캠핑첫날 이곳 데크에 캠핑하려고 한 것인데,

이제 와 보니, 안하길 천만 다행이다. 

데크도 3개뿐이고 다 노후하고, 공간이 너무 좁다.

 

돌밭의 해수욕장이다..

그러고 보면, 이번 캠핑여행은 이리 저리 잘풀린 케이스다..

 

천사의 섬을 떠날 때는 비너스급 천사가 환송을 한다.

선실에서 한참을 뒹굴거리니 목포에 도착한다.

 

유달산이 환영해준다.

그사이 목포에도 해상케이블카가 생겼다.

한번 유행이 부니 바닷가는 케이블카요, 산과 저수지는 출렁다리로다..

 

유달산 정상은 이등바위에서 막걸리 한잔에 목포의 눈물을 부르던 시절과 별 변함이 없구나!! 

 

고하도 용오름 길도 여전하구나.

이제 해변 데크도 자식처럼 낳아 키우고 있네..ㅎ

 

 

해상 케이블카 타고 가자는 일행도 잇엇는데, 이 시간에 이거 타고 가면 대전엔 오밤중에 도착해서 곤란하다고 달랜다.

여기도서도 밤중 무서운 변소처럼 빨간 것과 하얀 것이 있다.

여기서는 하얀 것이 더 무섭다.

밑창이 유리니까..ㅎㅎ

 

 

목포의 맛집을 찾아 저녁을 먹는다.

1만원짜리이상 메뉴는 못하고 7000원짜리 메뉴만 한단다..

어찌되었건 한상 차려놓고 가인이 선전하는 잎새주를 시켜 한잔하면서 

가인이 부르는 "목포의 눈물"을 들으며 이번 여행을 마무리 한다.

 

 

youtu.be/AC0UzW_rO9Y

신도에서 배를 타고 하의도 당두선착장에 도착했다.

이곳까지는 3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다.

배에서 내리자 마자 김대중 생가로 향한다.

이 곳에 캠핑을 하게 된 이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길가에 천사들이 늘어서 있다??

신안군이 1004개의 섬이 있다고 광고하더니, 상징을 천사(엔젤)로 슬적 치환한다.

더구나 김대중 생가 앞에 집중 배치하니, 마치 천당으로 가는 길을 연출하는 모양새다..

 

생가 앞에 그는 비둘기를 들고 있다.

비둘기??

노아가 대홍수 끝에 육지를 찾으려고 날려 보냈던 새..

그래서 비둘기는 평화의 상징이 되었고, 한편으로는 성령을 상징하기도 한다.

복원된 생가는 생각보다 크다. (구미의 박정희 생가보다..ㅎ)

실제 집터는 작은 것을 보면 실제와는 좀 다른 것 같기도 한다.

 

그는 이곳에서 1924년에 태어나 1936년 목포로 이사갈 때까지 살았다.

그의 아버지는 무엇하는 사람일까?

안내문에는 일본인 땅의 소작인이었다고 한다.

단순한 농민이 아니고, 이장을 지내고, 소작쟁의 때에는 앞장서는 말빨이 있는 사람이었단다.

 

그는 하의도에 소학교가 들어서기 전에 서당에서 공부를 했다.

그래선지 그는 서예휘호를 많이 남겼다.

하의도에 소학교가 생기자 10살 쯤 하의 보통학교에 입학한다.

4학년 때 목포로 전학간다.

중고등학교 때는 은행원을 목표로 공부했단다.

그 당시 식민지 학생들의 안정된 직업은 은행원, 교사였다.

박정희는 사범학교에 진학한 것처럼..

 

그는 고등학교 2학년때 창시개명을 해 도요타 다이쥬(豊田 大中 풍전 대중)로 창씨개명했다.

박정희의 창씨명이 다까끼 마사오이듯, 그 시대를 살던 사람이 벗어나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는 목포공립상업학교를 1944년 졸업하고, 만주 건국대학을 진학하려다가 징집문제 때문에 포기한다.

그 직전 박정희는 1938년 만주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만주국은 일본의 위성국이어서 조선인이 바라는 장학금제도가  많았다.

그는 고졸후 일본인이 운영하는 목포상선회사에 경리직원으로 취직한다.

해방이 되고 일본인이 떠나자 적산회사의 관리인이 되어, 졸지에 청년사업가로 변신한다.

그는 해방후 여운형이 주도하는 건국준비위원회에 선전부원으로 활동하였고, 공산주의 계열인 조선신민당의 조직부장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6.25. 당시 목포해운공사 사장으로 선박 여러척을 보유한 자산가라는 죄목으로 인민군에게 잡혀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가 역전되는 바람에 겨우 살아났다고 한다.

 

 

그의 생가에 걸린 글씨 한 점

양춘포덕택  陽春布德澤

만물생광휘  萬物生光輝

 

따뜻한 봄볕이 은덕과 혜택을 베푸니

만물이 살아나 빛을 발한다.

 

그래서 그는 북한에 햇볕정책을 썻던가?

그러나 북한은 살아나 빛나는 폭탄(원폭)으로 보답하는가?? 

 

복원생가 옆 원래 집터..협소해 보인다.

그도 가난 속에서 성장했다..

박정희도 그렇다.

그 시대의 선각자들은 어떻게 가난을 벗어나느냐로 고민했다.

 

그의 마음 속에도 붉음이 잇었다.

 

문득 돌아본 그의 동상에 다시 필이 꽃혔다.

이 동상의 모습이 그의 인생을 시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그는 왼손을 뒤로 감추고 잇는 것처럼 보인다.

그의 왼손?? 

그는 항상 군부와 호남 밖 사람들의 의심을 받았다. 

 

80년대 3김을 평가한 말이 잇다

"JP는 때묻었고, YS는 어리고, DJ는 의심스럽다" 

 

 

그는 장인(첫 부인 차용애의 부친)의 권유로 한민당에 입당한다.

그 당시는 목포일보를 인수하여 사장으로서 사설도 썼단다.

이렇게 기른 필력으로 훗날 저서를 여러권 썻다.

그래서 "김영삼이 읽은 책보다 김대중이 쓴 책이 더 많다" 웃으개 소리도 잇었다. 

 

54년 선거에 목포에 출마하여 낙선한다.

장차 호남의 맹주가 될 사람의 출발은 이렇게 미약했다.

 

그리고 1956년 민주당 신파 (장면 파)에 가입하고, 장면을 대부로 하여 카톨릭 세례를 받는다.

그의 세례명은 토마스 모어..

이 세레명을 받자, 그가 탄식했다.

"왜 하필이면 목 잘린 사람의 이름을 주시는가?"

토마스 모어는 "유토피아"의 저자로서 신앙을 지키다 헨리8세에게 죽는다.

이 세례명이 그의 인생의 나침판 처럼 되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판 헨리8세 박정희의 핍박을 받으면 대항마로 성장하였고,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살아났다.

 

그는 민주당 신파의 추천으로 1961년 강원도 인제 보선에 출마하여 당선된다.

그러나 2일만에 5.16이 터지며 국회가 해산된다.

박정희와의 첫 악연이다.

 

1962년 이희호와 재혼한다.

첫부인은 그의 낙선시절 미용실을 운영하며 고생하다가 병사햇다. 김홍일, 김홍업은 첫부인의 소생이다.

 

1963년부터 그의 인생이 피기 시작한다.

목포에 출마해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한일조약 반대 투쟁당시 그는 실익을 따져 협상을 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지금의 반일프레임으로 걸었으면 그는 토착왜구로 몰렸을 것이다.

 

그의 사업경력과 신문사 사설집필 경력으로 그의 모토 하나가 탄생한다.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감각을 겸비해야 한다" 

 

 

그의 운명을 바꾼 사건이 터진다.

"40대 기수론"

박정희의 3선개헌이 통과되자, 김영삼이 야당의 쇄신책으로 40대기수론을 주장한다.

여기에 이철승, 김대중이 가담한다.

그리고 70년 야당 대선 후보 전당대회가 열린다.

대표이던 유진산은 같은 민주당 구파(윤보선 계) 출신 김영삼을 지지한다. 

1차 투표결과  1위 김영삼 2위 김대중 3위 이철승이 되었다.

다음날 결선 투표를 앞두고, 김영삼이 후보수락 연설문을 쓰는 동안, 김대중은 이철승과 접촉하여 차기 당대표로 이철승을 밀어주는 조건으로 지지를 얻어낸다.

그리고 결선투표결과 김대중이 역전하여 대선 후보가 된다.

이제 그와 박정희의 운명의 대결이 시작된다.

 

 

1968년 경부고속도로 착공당시 김대중, 김영삼이 반대했다는 것은 두고 두고 회자된다.

그러나, 그는 71년 대선에서 유명한 이야기를 한다.

"이번에 정권 교체를 하지 못한다면, 이 나라는 박정희 씨의 영구집권의 총통시대가 오는 것입니다! "
이에 대한 박정희 대답은 이렇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다시는 국민에게 표를 달라고 하지 않겠다. "

 

그들의 말대로 역사는 흘러갔다.

10월 유신을 선포하자, 당시 일본 방문중이던 김대중은 일본에 망명하여 반정부운동을 전개한다.

그리고 중정에 의해 일본에서 납치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고 국내로 끌려들어와 가택연금된다.

 

 

10.26.후 서울의 봄에 5.18.광주항쟁으로 내란음모죄로 사형을 선고 받는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불사조처럼 살아나 대권의욕을 보여 4수만에 대통령에 당선된다.

 

 

IMF가 터졌다. 정권 교체의 기회를 잡았다.

그는 적과의 동침을 선택했다.

5.16 세력인 김종필과 DJP 연합을 구축하여 승리를 이끌었다.

그의 "상인적 현실감"을 극적으로 발휘한 사건이다..

 

 

"국민들에게 이득이 되는 올바른 방향과 정책이 어떤 것이냐"를 생각했다는 것에 방점을 두어야 한다.

 

대통령이 된후

1. 그는 정치보복을 하지 않았다.

2. 한일관계를 과거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난 미래의 공동발전으로 설정한 것이다.

   김대중-오부치 게이조 선언으로 일본 문화를 개방하고, 2002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치뤄냈다.

 

요즘 적폐청산에 집착하여 미래의 비전을 몰각하고, 반일 프레임으로 한일관계를 극단으로 몰고가는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이다.

 

3. 그러나 그의 햇볕정책은 논란의 여지가 잇다.

   너무 평화에만 집착하여 북한의 변화유도에는 성공하지 못하고, 핵개발의 숨통만 틔워주었다.

   그의 노벨상 수상은 현재까지 북한의 핵개발 가속화로 빛이 바랬다. 

 

4. 그가 남북정상회담을 자랑하였으나 국군포로와 납북자 귀환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내 생애 3대불가능 중

마이카 시대는 박정희가 열어주었고, 평화적 정권교체는 김대중이 완수했다.

이제 마지막 남북통일은 누가 이룩할 것인가?

 

통일은 구걸이나 평화집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정확한 처방과 진단 그리고 부드럽고 단호한 정책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그와 노무현을 비교한 말이 잇다.

"김대중은 생각의 과녁이 너무 멀어 맞추기가 어렵고,

노무현은 과녁은 가까우나 막 움직여서 맞추기가 어려웠다"

 

생가 뒷편에 청소년을 위한 유스호스텔도 있다.

 

생가 언덕 정자에 올라 바람을 맞는다.

변방의 섬에서 넓은 바다를 바라보며 바람을 맞던 소년들이 대통령이 되엇다.

동쪽 거제의 김영삼, 서쪽 하의도의 김대중

시대와 역사는 참으로 절묘한 포석을 하였다.

 

그가 꿈꾸던 마하아시아의 평화는 손바닥 위에 어리광처럼 인연과 조건을 맞추지 못하고

눈길에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기고 말앗다.

 

전환의 시대에 태어나 4번의 위기와 4번의 도전으로 정상에 오른 의지의 한국인이엇다.

 

 

그가 꿈꾸던 평화는 더 멀어진 듯이 보인다.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 것보다 조금이라도 노력하는 것이 낫다는 말로 위로해본다.

 

태극정원에는 서해5도까지 선명하다

누가 만든 태극인가?

태극이 무극이 되는 그날이 오면 우리나라는 7040의 부강국이 될 것인가?

 

지금도 어딘선가 변방의 땅에서 큰 포부 키우며 사는 소년들이 있으리라.

그들의 빛나는 인생과 업적을 미리 수기하고 축복하노라..

 

신도에는 해수욕장이 하나 있다.

넓은 해변은 잇으나 모래사장까지는 밀물이 들어와서 언덕쪽에 데크가 있는지 살펴보았다.

 

탐색결과, 데크는 7개, 식수대에 물이 나오고, 화장실, 샤워실이 있었다.

1박에 지장이 없는 것으로 판단, 우선 바닷물이 미치지지 않을 손바닥만한 모래사장에 쉘터부터 쳤다.

 

그리고 양쪽으로 4명씩 텐트를 친다.

이 해변에는 우리 일행이 1박2일 전세낸 모양이 되었다.

모래밭의 원주민 달랑게가 근심어린 모습으로 쳐다본다.

 

 

 

완성된 텐트에 들어가 보니 5성급 뷰가 나온다.ㅎ

 

일단 자리 잡으니 새우부터 꺼내 구워 와인과 함께 파티부터 연다.

 

바닷물에 들어가 몸을 띄워 보는게 몇해만이던고..ㅎ

 

 

그러다,  모래에 묻혀 찜질방 삼매도 즐겨보고..

 

물놀이도 할 만큼하고, 항도 탐사에 나선다.

썰물이면 육지가 되는 섬..

 

 

항도에서 바라본 신도해변의 풍경은 지중해 부럽지 않다.

이 좋은 곳을 독점하는 기분이란..ㅎ

거기서 볼 때는 끊임없이 다가오는 하얀 파도만 보이더니

여기서 보니 뜬금없이 일어났다 뜬금없이 사라지는 파도가 보인다.

왜 뜬금없이 파도가 일어나는가?

인연이, 조건이 맞으면 일어나고, 인연이, 조건이 다하면 사라지는 것이다.

 

잠시후 친척집을 방문한 일가족이 바다에 나와 바지락을 캔다..

호미로 몇번 쓱쓱 하면 바지락이 감자처럼 나온다..

 

달랑게는 부산하다..

"이게 머선 일이고. 마 쥑이네" 

길고 긴 여름날도 기운다.

 

그 여름 바닷가 행복했던 모래성 

파도에 실려가 버렸네..

 

의자에 앉아 황혼을 즐긴다.

붉은 노을을 노래하고

한편의 아름다운 추억이 되도록 그림으로 마음에 새긴다. 

 

 

이게 끝이 아니다.

어둠이 내린 바닷가의 하늘이 별들의 고향이었다.

마치 딸 수 있을 것처럼 초롱 초롱한 별빛은 어릴적에 보던 하늘과 같앗다.

흔한 북두칠성과 북극성을 찍느라 모두 바쁘다.

 

내 주제가 문리버를 부르기 안성마춤의 시공간을 만났다.

이런 기회를 어찌 지나치랴~

 

문리버~ 와이더 댄 어 마일

아임 크로씽 유인 스타일 썸데이~~

오 드림메이커, 유 핫브레이커 

웨어레버 유어 고잉, 아임 고잉 유어 웨이..

 

노래 부르다가 문득 옆사람에게 문리버가 어디에 있지? 하고 물엇다.

그러나 문리버(은하수)를 찾지 못했다는..ㅜ.ㅜ.

  

이유가 있었다..

여름밤에 은하수를 보기 어려운 이유는 은하수 자체가 매우 희미하기 때문이란다.
은하수를 보기 위한 조건이 있다. 
1. 우선 인공불빛이 없어야 한다.

 즉 6등성의 별까지 충분히 보일 정도로 아주 깜깜한 지역을 찾아야 한다.

2. 시야가 넓게 트여있는 곳이면 더욱 좋다.

 

밤새 밀물이 텐트 옆까지 밀려들어 온 것처럼 거세게 철썩 거리는 파도소리에 깊이 잠들지 못했다.

하지만, 모처럼 7시간을 연속으로 잤다.

 

다음 날 아침 달랑게 대표가 찾아왔다.

이제 좋은 말할 때 방을 빼달란다.

그 넘뒤로 험악한 표정의 달랑게들이 몰려든다..ㅎ

 

뱃시간도 되어 순순히 물러나기로 했다.

해변의 쓰레기도 다 치우고..

시간이 없어 등대 능선의 전설을 만들지는 못했다.

마치 자라들의 천지창조 설화가 깃든 것 같았는데..ㅎ

 

선착장으로 나왓으나 섬은 아직 홋이불을 감싸고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밤이 무더워 새벽녁에 겨우 잠들었나보다 

 

저멀리 연락선이 보인다.

신도여! 안녕..

별빛이 흐르던 해변을 잊지 못할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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