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윈더미어 호수와 워즈워드 생가

버밍엄에서 영국 북서부에 위치한 호수를 향해 달린다.

영국의 호수 15-16 중 아름답다는 평을 듣는다는 호수..

버밍엄을 출발하여 4-5시간을 달려 호수에 도착하였다.

하지만, 기사와 가이드가 숙소인 Low wood hotel을 찾지 못한고 헤멘다.

네비게이션을 달았다는데, 그 기능이 시원치 않단다.

우리나라 네비게이션은 너무 정밀해 군사기밀까지 누설될까봐 걱정이라던데..

영국에서는 남의 정보를 구하여 입력하기가 쉽지 않은가 보다..

하여간, 숙소에 도착하니 별4개의 호텔로 시설도 좋고 바로 호수 앞에 위치하여 경관도 마음에 든다.


저녁식사는 연어와 오리가슴팍살을 골랐는데, 육질 부드럽고 맛도 좋았다.

여기에 2003년산 쎙떼밀리용 레드와인과 메독 레드와인을 곁들여 우아한  디너가 되었다.

아쉬운 점은 추가한 후식이 엄청 양이 많아 모두 태반을 남겼다는 것..

영국사람 기준으로 주문한 음식은 양이 많더라..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주문한 햄버거도 엄청크더만..중년의 사내들이 배에 커다란 햄보따리를 달구 다니는 것이 이해된다.^^

 

 

다음날 호수 주변2-3km를 산보하였다.

주변 농장과 숲속에서 뭇 생명들과 수인사를 나눈다.

 

 

다람쥐, 토끼, 사슴, 양..

사는 사람 닮아 모두 우리나라 것 보다 덩치들이 크다.

 

아침 식사후 숙소를 떠나 그래스미어에 도착..

영국 시인 워즈워드가 살았다는 생가..도브 코티지를 방문하였다.

 

(도브 코티지)

예전에 보았던 나탈리 우드, 워렌 비티 주연의 “초원의 빛”이란 영화에서

여주인공이 마지막 장면에서 읊었던 바로 동명의 시의 쓴 사람..

생가에서 그 시를 감상해본다. 

 

Splendor in the Grass

   from Ode: Intimations of Immortality from Recollections of Early Childhood

 

                       William Wordsworth

 

         

What though the radiance which was once so bright

Be now for ever taken from my sight,

Though nothing can bring back the hour

Of splendor in the grass, of glory in the flower

We will grieve not, rather find

Strength in what remains behind;

In the primal sympathy

Which having been must ever be;

In the soothing thoughts that spring

Out of human suffering;

In the faith that looks through death,

In years that bring the philosophic mind.

 

          

초원의 빛

   <어린 시절을 회상하면서 영생불멸을 깨닫는 노래>에서

 

                윌리엄 워즈워드

 

  

 

한때 그처럼 찬란했던 광채가

이제 내 눈에서 영원히 사라졌다 한들 어떠랴

초원의 빛, 꽃의 영광 어린 시간을

그 어떤 것도 되불러올 수 없다 한들 어떠랴

우리는 슬퍼하지 않으리,

오히려 뒤에 남은 것에서 힘을 찾으리라

지금까지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이 있을

본원적인 공감에서

인간의 고통으로부터 솟아나

마음을 달래주는 생각에서

죽음 너머를 보는 신앙에서

그리고 지혜로운 정신을 가져다 주는 세월에서

   

 

선착장으로 가 유람선을 탔다.

바람이 불고 비가 뿌려 추워 오돌오돌 떨며 2층의 뱃전에서 호수의 풍광을 감상한다.

내 눈에 소양강호의 풍광과 별반 차이가 없는 것 같다.

 

6. 하워쓰와 브론테

 

요크를 향하던 버스가 일정을 바꿔 브론테 자매가 살았던 하워쓰를 향해 달렸다.

“폭풍의 언덕”을 쓴 에밀리 브론테, “제인 에어”를 쓴 샤롯 브론테 등 3자매와 남동생이 아버지와 함께 살았다는 생가에 들렀다.

 

(브론테 박물관)

 

 중학교 시절 제인 에어를 재미있게 읽은 기억 때문에 호기심이 잔득 발동하였는데,

생가로 올라가는 언덕길에 옛 건물과 도로가 그대로 보전되어 고풍스러움을 느낄 수 있었다.   

 분위기에 끌려 가게에 들어가 목각 오리 인형을 구입하였다.

 

이 자매들은 자라면서 뒷말 잇기 처럼 이야기를 한귀절씩 이어가기 놀이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작가의 꿈을 수련하여갔다고 한다. 

 

 

생가에서 가이드에게 폭풍의 언덕의 실제 모델은 어디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하는 말이

“ 영국의 언덕은 어디서나 바람이 불면 ”폭풍의 언덕“이 되고, 바람이 잠잠하면 ”텔레토비의 동산“이 된답니다”

 

 

 

(햄튼 코트 후면)


3. 햄튼 코트 궁전

 

영화 “천일의 앤”의 주인공 헨리 8세와 앤 볼린..

그  헨리8세의 아들 낳기 프로젝트에 적극 가담했던 울시 추기경..

그러나, 결국 울시는 헨리 8세에게 팽 당하고 그의 저택이었던 햄튼 코트는 몰수되어 헨리 8세의 궁전이 되었다 한다.

그 후 베르사이유 궁전을 본떠 정원을 조성하였다.

 

(장미정원)


궁전에 있는 헨리 8세의 초상화는 정말 절대군주의 자만심을 적나나하게 보여준다.

햄튼 코트 궁전엔 영국 아니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실내 테니스 코트가 있다.

지금도 그 코트에서 테니스를 즐기고 있었다.

 


후면의 호수 끝에서 바라본 궁전

- 좌측으로는 골프장과 목초지가 끊없이 펼쳐진다. 헴튼 코트 골프장엔 한국교민 회원이 엄청 많단다

 

왜 코트가 많은가?

 

런던 시내에 다녀보니, 주택에는 2층 이내의 양옥이 주류를 이룬다.

우리나라 같은 아파트는 서민의 임대용이란다.

그런데, 주택에 이름이 00하우스, 00코트라고 되어있다.

 

코트(court)는 흔히 테니스 코트(경기장) 또는 법원으로 알고 있는데, 일반 주택에도 코트라고 써 있어 궁금하여 물어 보니, 집 구조가 口 자 모양으로 건축되어 사각의 앞마당이 있는 구조를 코트(court)라고 부른다 한다.  

 

***

 

햄튼코트궁전에서 윈저성으로 가는 길에 마그나카르타(대헌장)의 현장을 보았다.

로빈훗이 살던 시절의 영국의 섭정 존왕..

결국 귀족들에게 밀려 대헌장에 서명하였는데, 그곳이 템즈 강가 어디쯤 한적한 곳이었다.

존왕을 으슥한 곳에 유인하여 서명하게 만들었는지 모르겟다.

대헌장은 영국 민주주의의 단초로 자주 인용된다.

대표적인 내용으로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부과할 수 없다”을 꼽는다.

성서시절에도 세리의 폭정이 등장하거니와 미국의 독립도 과다한 세금부과에서 시작되었으니 과도한 세금은 고래로 원성의 대상이었다.


이동 중 점심을 작은 휴게소에서 터키와 비프, 요크셔 푸딩을 곁들여 먹었다. 요크셔 푸딩은 바가지 과자처럼 생겨 특이하거니와 앞으로 가볼 요크지방의 음식이라 호기심을 자극하였다.

 

4. 윈저성


윈저성은 1070년 “노르만 정복”으로 영국왕이 된 윌리엄 1세(William the Conqueror)가 런던의 서쪽 지역을 방어하기 위해 템즈강 언덕에 목조의 성채를 구축한 터에 계속 개, 증축이 이루어져서 현재와 같은 규모의 거대한 성이 건축되었다. 

한때는 보불전쟁 패배 후 프랑스에서 망명한 나폴레옹 3세가 거주할 공간을 중축하여 주고 머물게 하였다.  

현재는 여왕의 여름 별장으로 사용된다 한다.

 

여왕의 산책길(long walk) , 성의 정문 맞은편

 나라의 덩치는 우리와 비슷한데 땅 씀씀이는 대국이다. 우리는 산이라도 개발해 넓게 써야..

 

영국왕은 한 핏줄로 계속 이어지는가?

가이드에게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답하였다.

그러나,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정복왕 윌리암 1세 이후 모든 영국왕은 부계로든,  모계로든 모두 월리엄 1세의 자손이란다.

부계가 단절이 되면 왕조의 이름이 바뀌어 튜더, 스튜어트, 하노버(윈저) 왕조로 호칭될 뿐이다.

그러니 왕실의 태동당시의 터에 석조의 성을 구축하고 현재 왕가의 이름을 윈저라고 하는가 싶다.

 

( 윈저성과 이튼스쿨 사이의 다리에서 바라본 템즈강)

 

윈저성 아래 기차역을 지나 이튼스쿨 가는 길에 위치한 템즈강..

영국의 강, 개천엔 항상 물이 가득하고, 배들이 즐비하다.


이곳엔 백조와 거위, 오리도 가득하다. 

관광객의 먹이에 길들여져 백조의 우아함은 없다.

먹이가 동료의 몸에 떨어져도 사정없이 쪼며 먹는다.

 

요즘도 이튼스쿨 학생은 검은색 연미복 교복을 입고 다니고 기숙사 생활을 한다.

아바의 노래에도 나오는 “워털루”

그 곳에서 나폴레옹의 재기를 꺽은 웰링턴 장군은 영국의 영웅이다,

그가 “나의 승리는 이튼학교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여 유명한 그 학교..

우리나라의 평준화 교육을 생각해본다.


 

 

영국으로의 짧은 여행, 긴 생각

 

1. 첫날

 

5.6.  1시 15분 인천공항을 이륙하였다.

11시간의 비행 중에 영화를 3편을 보았다.

그중 윌 스미스 주연의 “행복을 찾아서”라는 영화가 재미있었다.

가난 속에서 일은 꼬이고 마누라는 이혼을 선언하는데, 아들을 지키려는 노력과 자신의 팔자를 바꾸려는 치열한 노력..

그 과정에서도 인간미와 유머를 잃지 않는다.

집세를 밀려 대신 집안 페인트 칠을 해주기로 하고 작업 중에 벌금 미납자로 경찰에 연행되어 유치되었다가 다음날 돈을 내고 풀려나자 주식중개인 인턴 면접을 보려고 죽으라고 뛰어간다. 페인트 묻은 작업복을 입은 사내를 바라보던 면접관(오너)이 묻는다.

“페인트 묻은 잠바 차림의 남자를 채용한다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겠소?”

“그 사람이 바지는 멋지게 입었겠지요..”

면접관을 한바탕 웃기고 인턴 200명중 하나로 뽑힌다.

우여곡절 끝에 200명 중 단 1명만 뽑는 정식직원으로 채용되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그 영화의 주인공은 나중에 화사를 차려 아메리칸 드림을 이루었다 한다.

 

그래도 시간은 많이 남았지만 잠이 해결해주고 아픈 엉덩이를 달래 주었다.

 

비행기에서 잠을 자다가 먹다가 다시 자다가 먹다가 내려서 중국식당에 가서 식사를 마치고 호텔에 투숙하여 술한잔을 하곤 또 6-7시간을 실컷 잤다.

 

나에겐 시차란 없다.

 

착륙 직전에 비행기에서 바라본 런던은 주변에 산이 없는 평야에 천만에 가까운 도회지가 펼쳐진 모습이 장관이었다.  

 

(켄싱턴 가든)

(공원 내 동상)



(켄싱턴궁)

 

2. 둘째날

 

 6시 30분 기상하여 켄싱턴 가든을 산책하였다.

다이애나 비가 이혼 위자료로 받았다는 켄싱턴궁이 있는 공원이다.

유명한 하이드 파크 공원에 인접한 곳으로 산책하기 좋았다.

도심에 그렇게 넓은 공원이 있다는 것이 부럽다.

 

(내셔널 겔러리 부근의 트라팔카 광장)

오전에 비가 오락 가락한다.

영국의 전형적인 날씨란다.

우리나라 기상청은 1년에 한두번 틀리는데, 영국 기상청은 정확하여 한번도 틀린적이 없단다.

일기예보는 이렇단다.

“일시 흐리고 비가 내린 뒤 개었다가 다시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하겠습니다,”

그래서 오전에 주로 실내를 찾아 다녔다.

대영박물관, 내셔널 갤러리 등

 

(웨스트민스터, 빅벤이 보이는 템즈강)

 

 


 오후엔 타워브리지를 보고 인근 영국 PUB에서 맥주 한잔을 마셨다.

저녁엔 시내에 나가 뮤지컬을 감상하였다.

레미제라블

뮤지컬 내용이 그저 그렇고 술기운이 겹쳐 반쯤 졸면서 보는데, 2층 극장이 가파로와 굴러 떨러질까 겁나서 난간를 끌어안고 졸았다.     

나중에 누구 말이 런던에서 “메리 포핀스”나 “마마미아”가 인기가 좋구 “레미제라블”은 이해가 어려워 인기가 별루라는 평을 듣고,

초심자가 너무 어려운 것을 골랐다고 자책하였다. 

 

(다비드의 작품 '테르모필레의 레오니다스')
 

6) 스파르타식 대화법

 

영화에서 한 병사가 보고한다.
"페르시아 군이 쏜 화살이 해를 가릴 지경이다."
그러자, 다른 이가 답한다.
"오늘은 그늘 아래에서 싸우겠구나!"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레오니디스왕이 말한다.
"병사들이여! 아침을 든든히 먹어둬라! 저녁은 저승에서 먹을 것이다."

 

플루타크 영웅전에 의하면, 스파르타를 개혁한 리쿠루고스는 쓸데없이 장황한 대화를 싫어하여 짧은 말 속에 함축적인 의미를 담도록 가르치게 했다 한다.
어릴 적부터 침묵을 지키는 버릇을 들였고, 심사숙고하여 옳고 합당한 대답을 하도록 하였다.

 

아테네인이 스파르타군의 단검을 보고 비웃었다.
그 대답은 간결했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엔 적을 찌르기에 충분하오"
스파르타의 칼처럼 그들은 요점을 정확하게 찔러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리쿠르고스의 답변이다.

 

문: 스파르타에 왜 민주주의를 세우지 않는가?
답 : 당신 집안에서나 민주주의를 세우시구려!

 

문: 왜 값싸고 보잘 것 없는 재물만 신에게 바치는가?
답: 언제나 항상 아무것이라도 바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요.

 

문: 적의 침략을 막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이요
답 : 청빈하게 살며 잘난 체 않는 것이요.

 

문 : 법령이 왜 적은가
답: 말이 적은 사람은 많은 법이 필요없다.

 

이런 교육을 받은 스파르타인 들의 대화는 간결하고 함축적이며, 때론 개그적이고, 때론 시적이고, 때론 선(禪)적 이다.

 

문 : (거만하게) 스파르타에선 가장 훌륭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답 : 당신과 닮지 않은 사람이 바로 가장 훌륭한 사람입니다.

 

문 : (멸시하듯) 스파르타의 인구가 얼마요?
답 : 사악한 사람을 몰아내기에 충분한 숫자요

 

한 젊은이가 자리에 앉있는 것을 본 노인이 이렇게 외쳤단다.
"신이여! 저로 하여금 선배에게 인사하기 위하여 일어날 수도 없는 그런 자리에는 앉지도 말게 하소
서!"

 

이런 식의 대화의 전통은 서구 사회에 확산되어 서양 영화에서는 종종 볼 수 있다.


7) 연상되는 장면들
 
레오나다스왕이 해를 가릴 정도로 쏟아지는 화살을 맞고 죽는 장면을 보다 보면 키아누 리브스 주연
의 "리틀부다"가 생각난다.

석가모니의 해탈을 막기 위하여 마왕의 군대가 화살을 비오듯 쏘는데 모두 꽃잎으로 변하여 떨어지는 모습이 겹쳐진다.
그리고 죽은 레오니나스 왕의 모습이 마치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를 연상시킨다고 하면 과장일까?

영화 속에서 크세르크세스왕은 배신자를 매수하기 위하여 돈과 여자로 유혹한다.
레오니다스왕에게는 전 그리스의 통치권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어디서 많이 본 유혹이 아닌가?

 

레오니다스의 최후에 대하여  마왕이나 사탄의 유혹에 굴하지 않은 구도자로서의 묘사를 차용하였다고도 볼 수있다.

 

그런데, 서양인의 눈에는 레오니다스는 순교자로 비춰지고, 반사적으로 페르시아로 상징되는 아시아(특히 중동)은 악마적인 모습으로 각인되는 편견을 줄 수 있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과거 서부영화의 시각이 그러하듯..

 

어째거나, 실권이 별로 없던 레오니다스왕은 스파트타식 훈련으로 가슴에 임금 왕자를 새겼을 뿐 아니라 마음에는 강인한 정신력을 단련시켰고, 그의 뜻대로 죽어서 신탁을 실현하였고 명실상부한 왕이 되었다고나 할까?

 

 

8) 이어지는 역사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그리스군은 3일간 막았을 뿐이었다.


영화에서는 나오지 않지만, 이 전투 이후 아테네 시민들은 모두 섬으로 피난가고 아테네는 점령당하였으나, 이후 테미스토클레
스의 영도하에 살라미스해전에서 대승을 거둔다.


그 일년뒤 다시 육지에서 리턴매치가 벌어지는데, 이때 스파르타는 레오니다스의 희생을 기리며 1만명
의 병사를 출전 시킨다.
총 3만의 그리스 연합군과  5만의 페르시아 군(테베 등 일부 폴리스가 가담)의 격돌..

또다시 갑빠 쌈쌈한 인파이터 조 프레이저의 승리로 페르시아전쟁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終)



(스파르타 상상도)

(현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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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300"과 스파르타 (1)

 

원작이 만화이고 화면이 그래픽을 사용하여 좀 과장된 느낌이었다.
하지만 감상을 방해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영화는 왕비와의 사랑이나 크세르크세스왕에 대한 묘사 등을 제외하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영화의 전개방식은 그리스와 페르시아 간의 사실상 최후의 전투 플라타이아 전투를 앞두고 스파르타의 딜리오스 장군이 레오니다스 왕의 전투와 죽음을 회상하는 형식으로 시작하여 플라타이아 전투를 개시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딜리오스 장군이 회상하는 것은 기원전 4세기 경 고대 페르시아 제국의 왕 다리우스 1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왕이 그리스를 칩입한 제3차 페르시아 전쟁 이른바 테르모필레전투이다.

스파르타왕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여 총 7000명의 그리스 연합군을 지휘하여 페르시아군을 막다가 300명의 부하들과 함께 전사한다는 이야기다.

 

스토리의 구조는 스파르타인들의 교육방식, 스파르타왕이 300명의 병사만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러간 경위, 스파르타군의 장열한 전투(주된 장면), 스파르타왕 부부의 애틋한 사랑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1) 스파르타식 교육방식

 

흔히 가혹하게 훈련시키는 것을 가리켜 "스파르타식"이라고 한다.
영화에서 레오니다스왕은 성인식을 치르기 위하여 한 밤중에 늑대와 홀로 맞서 살아남는다.
요즘 광고에 나오는 아프리카 흑인이 성인식으로 사자의 털을 자르기 위해 가위를 들고 접근하는 장면이 생각나고, 박세리가 담력을 키우기 위하여 밤중에 공동묘지에 갔다는 말은 현대적 변용이 아닐까?

 

왕은 자신의 어린 아들에게 말한다.
"훈련으로 흘리는 땀방울이 많을수록 전쟁에서 흘리는 피는 적어진다."
 
이렇게 단련된 정신력이 없다면 이 영화는 성립될 수 없다. 

 

2) 애틋한 사랑

 

왕비가 왕에게 말한다. "꼭 돌아와야해요! 시체로라도.."
그러며 목걸이를 건네준다.
영화 후반부 홀로 돌아온 딜리오스는 그 목걸이만 다시 건네준다.
어느 부분에서 더 가슴이 찡할까?

 

3) 왜 그는 300명만 데리고 갔는가?

 

스파르타는 도리아인이 원주민을 정복하여 세운 국가로 피정복민(헬로트, 페리오코이)과 시민으로 구성되었다.

정치에는 시민이 참여하는데, 동시에 시민은 군인으로 복무해야 한다.
정치구조는 2명의 왕과  28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이 있지만 실권은 5명의 에포로이(감독관)가 담당하였다.

시민보다 훨씬 많은 피정복민들의 통치를 위하여 리쿠르고스의 법률에 따라 개혁을 단행하여 스파르타식 교육과 군국주의가 탄생한 것이다.

이런 구조하에서 헤라클레스의 후손이라 일컬어지는 스파르타 왕도 마음대로 정사를 좌우할 수 없었다.
플루타크 영웅전에는 이런 일화가 전한다.
스파르타는 원칙적으로 공동식사를 하여야 하고 개인취사는 몇가지 예외 외에는 금지되어 있었다.
한번은 아테네군과 싸워 이기고 돌아온 아기스왕이 왕비와 단둘이 식사를 하고 싶어서 공동식당으로 사람을 보내어 자기 몫을 보내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할 정도 였다. 이일로 크게 화가 난 왕이 다음날 승전을 고하는 제사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왕에게 벌금을 물렸다 한다.

왕의 위상이 이 정도다..

더구나 스파르타는 종교의식에도 철저하여 그 기간 중에는 일체의 대외활동은 물론 전쟁까지도 금하고 있었다.
영화에서는 여사제의 신탁이 전쟁을 금하는 것이었으나, 왕이 친위병 300명을 이끌고 개인적 여행을
핑계삼아 떠나는 것으로 설정하였다.

 

어떤 책에서는 " 왕이 죽지 않으면 스파르타는 멸망한다."는 신탁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이전에 페르시아와의 마라톤 전투 때에 스파르타가 종교행사를 이유로 참가하지 않았으며, 
 이번 전쟁에도 불참하여 폴리스들이 패배하면 피정복민이 많은 스파르타도 그 체제를 유지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레오니다스왕이 타협책으로 자원자 300명을 뽑아 출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레오니다스 동상)

 

4) 스파르타군의 전투방식

 

출전 도중에 테스피아이인(Thespians) 700명과 합류한다.
영화에서 테스피아인들이 묻는다. "어째 고작 300명이냐?"
왕은 답변에 앞서 먼저 그들의 직업을 물으니, 농부,대장장이 등 제각각이다.
이어 돌아서서 스파르타 병사에게 묻는다 " 직업이 무엇인가?"
그러자, 일제히 외친다! "워리어!!"
그들은 직업군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하지만 너무 적은 숫자를 감출 수는 없다.

스파르타군을 포함하여 그리스군은 방패와 장창으로 무장한 보병의 밀집대형으로 고슴도치처럼 싸운다.
고슴도치를 정면으로 받아치면 다친다. 집게로 살짝 집어 던져야한다.


페르시아 장점은 기병과 궁병을 사용하는 전법이다.
그러니 아웃복싱대 인파이터의 대결..다시 비유하면 알리와 조 프레이저의 대결인데, 알리가 인파이
터인 조 프레이저에게 말려든 꼴이 되었다.

 

5) 테르모필레 협곡


(현재의 테르모필레 벽해쌍전이랄까..바다가 육지로..)


숫자의 부족은 지리적 이점으로 보충하는 것은 방어자들의 특권이다.
중국의 역사에서 낙양을 점령하기 위하여는 관문인 동관을 돌파하여야 하는데, 천험의 요새라 난공불
락이다.
고구려는 요동성과 안시성이라는 천혜의 요새를 활용하였다.
임진왜란 때 문경새재라는 지리적 장점을 살리지 못하고, 충주 달천강에서 배수진을 쳤다가 전멸한
역사와도 비교된다.

 

하여간, 테르모필레는 군대의 숫적 우위를 살리기 어려운 협곡이다. 동쪽은 바다이고 서쪽은 벼랑이라 길은 겨우 전차 1대가 다닐 정도고 길이는 남북으로 3.2Km 정도 뻗어있으니, 대군이 있어도 소수의 병력으로 장사진을 형성하여 공격할 수 밖에 없다.
수수깡도 여러 개로 뭉치면 쉽게 꺽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씩 준다면 식은 죽 먹기다.
그리스군은 장점을 최대로 살리고 페르시아군의 단점은 더 크게 부각되는 장소에서 페르시아는 고전
한다.

(분홍색이 우회로)


하지만, 돈이 해결해주었다.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는데..
돈에 매수된 배신자 덕분에 우회길을 찾아서 300의 스파르타군(그전에 몇명 죽었겠지만..)을 포위하
고 페르시아의 장기인 "나비처럼 날아서 벌같이 쏘는" 활로 벌집를 만든 뒤에야 전투는 끝난다..

 

현대의 전투현장을 실감나게 체험하게 하는 영화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면, 고대의 전투현장을 실감나게 체험하게 해주는 영화가 이 영화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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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때 상업선생님..

말썽피는 녀석만 보면"북망산 귀신 머 먹구 사나..이런 무녀리 조합장들 안잡아 먹구.."하시더니
일찍 북망산에 들어가셨다.

서안을 방문하여 가이드에게 북망산을 물으니 전혀 모르더라.. 

낙양에 갔더니 가이드가 "낙양성 십리허에 높고 낮은 저 무덤은, 영웅 호걸이 몇몇이며  절세가인이 그 누구냐? ''하는 성주풀이를 주어리면서 낙양시 북쪽 10여리에 북망산이 있다며 안내한다.

갔더니 고묘박물관이 둥그러니 있다..

한,당이후의 석묘를 10개 이상 옮겨 복원한 박물관..

예전에 북망산에 고관대작의 무덤이 많았던  것은 확실하다..

 

헌데, 산이 없어 물어보니, 가이드 왈  "멀리서 보면 야간 높은 지대가 아닐까요?"한다..
주변에 북위 성무제의 능외엔 밭들이 즐비하다..

 

낙양 고묘박물관 간판

 

박물관 내의 벽화

 

성무제의 능 주변이 북망산의 분위기를 풍긴다.

 

성무제의 능 입구

***

낙양의 백마사..

후한 명제 때 인도승려 4명이 백마에 42장경을 싣고 낙양에 도착했다.

이 때 백마사를 지었는데, 중국 최초의 절이다.

 

 

서안역에서 저녁에 출발하는 기차를 타고 화산을 스쳐 아침에 낙양역에 도착..

물론 침대칸에서 자면서 간다.

처음엔 이불이 더러워 가슴까지만 덮고 잤는데, 아침에 보니 얼굴까지 감싸고 있더라는..ㅎ

 

낙양역에서 버스로 소림사로 향한다.

달마를 만나로..

 

 

달마불식(達磨不識)

 

양무제가 달마에게 물었다. “짐이 황위에 오른 이후 수많은 절을 짓고, 경을 간행하고, 중을 기른 것이 셀 수가 없소, 그리하여 내게 어떠한 공덕이 있겠소” 달마는 “아무 공덕이 없습니다.” 답한다.
“무엇이 불교의 본질이 되는 가장 성스러운 진리요?”
“텅비어서 성스럽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짐과 마주한 당신은 누구요”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는 떠났다. 장강을 건너 숭산에서 9년간 면벽 수도를 했다.

 

(장강을 건너는 달마)서안 비림에서 구입한 달마탁본 족자..

 

(숭산  소실봉)

 

(소림사 뒷산 달마 면벽구도의 현장)

밖으로 경계에 끌려다니지 않고 (外 息 諸 緣)

안으로 애쓰거나 헐떡임이 없네 (內 心 無 喘)

 

우리나라 절에 가면 법당의 바깥벽에 그려진 그림을 볼 수 있는데, 대개 불교설화나 고승의 일화를 담고 있다. 그 중에 왼쪽 팔이 잘려진 채 피를 흘리고 서있는 사람의 그림이 있다.
한 팔을 잘라 구도의 의지를 밝힌 제2조 혜가(慧可)가 달마에게 가르침을 청하는 장면이다.

“제 마음이 불안합니다. 편안케 해주소서”
“그 마음을 가져 오라, 그러면 편안케 해주리라”
“마음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됐다, 이제 마음이 편안한가”

 

(입설당의 편액)  

 

입설당은 위 일화의 현장이다.."설인심주" 눈위에 찍은 붉은 마음의 구슬이라는 뜻일까?

***

신광(법명을 혜가로 받기 이전의 이름)이 달마를 찾아와 제자가 되기를 청하였더니

가타부타 말이 없더라.

눈이 내리는 가운데 3일이나 서있었더니(그래서 입설당인가보다)

그제서야 하는 말이

"하늘에서 붉은 눈이 내릴때야 가르침을 주겠다"는 식으로 짐짓 구법의지를 시험한다.

무인 출신인 신광이 잠시 생각하더니, 칼로 한팔을 베고 피를 흘리며 입설당 건물을 3번 돌았더니

자연히 붉은 눈이 내릴 형국이 되는지라.

 

달마가 한쪽 가사자락을 찢어 팔을 싸메주고 제자로 맞이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소림사에서는 합장이 아니고 한 손만 들고 아미타불을 염송하고(무협영화 "소림사"),

가사도 한쪽은 찢어진 모습이라고 가이드는 설명하더이다..

 

 

탑림
역대 고승의 부도탑

 

***소림사에는 선승의 주된 치열한 구도정신은 사라져가고, 선승의 몸단련의 방편이었던  권법이 주인행세를 하는 현장이 되었다..

 

이어 용문석굴로 향한다.

이하 강변 용문 석굴 건너편이 향산사다..

향산사는 당나라 시인 백낙천이 말년을 보낸 곳이고, 그의 묘가 있는 곳이다.

백낙천은 양귀비와 당현종의 사랑를 그린 장한가를 지었다.

 

용문석굴은 북위 시대인 5c부터 당나라 9c 까지 조성되었다.

 

 

즉천무후는 당고종의 사후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하고 국호를 주(周)라고 칭하엿는데, 

이 봉선사의 비로자나불의 모습은 즉천무후를 모델로 햇다는 설이 있다.

 

용문을 떠나 관림으로 간다.

중국에 문으로 공림이 있다면, 무로는 관림이 있다.

우리로 친다면 문으로 세종, 무로는 이순신 장군을 친다고 하나?

 

관림 벽에 새겨진 관제시죽..

 

不謝東君意 불사동군의
丹靑獨立名 단청독립명
莫嫌孤葉淡 막혐고엽담
終久不凋零 종구불조령

 

동군(조조)의 호의에 감사하는 마음 없으니
선명하게 홀로 이름을 세우리라.
외로잎 초라하다고 싫어하지 말지라
끝끝내 시들어 떨어지지는 않을 것이니.

 

위양육합..

위세가 천하(육합)에 떨치네.

 

관우의 얼굴이 붉은 것은 충성심을 뜻하는 것이고,

손에 든 것은 공자가 쓴 역사책 춘추다..

그는 밤에는 춘추를 읽는 문무 겸전의 장수였다..

 

그가 한나라에서 받은 벼슬은 수정후이고, 유비에게 받은 벼슬은 전장군이었다.

그는 오군에게 잡혀 죽은뒤 목은 낙양의 조조에게 받쳐졌기에 그의 무덤이 낙양에 있는 것이다.

후대에 벼슬이 추증되어 현재는 신이 되었다..

 

 

 

서안 인근의 여산 기슭에 위치한 화청지..예로부터 온천이 나와 제왕들의 즐겨찾기 장소..
당 현종과 양귀비의 스캔들의 현장..
 
곽말약이 쓴 화청궁 현판

 

목욕하고 나오는 양귀비상당나라의 미인은 글래머라나..

 

양귀비의 욕조

 

화청궁 뒤 여산 봉우리 정상에 봉화대가 있는데..
주나라 유왕 시절  봉화대의 불이 올라 제후들이 구원차 몰려 들었다가 실수로 밝혀지자 황당한 표정을 짓는 바람에 웃지않던 애첩 포사가 웃게 되었고..

주 유왕이 애첩 포사을 웃기려고 여러번 봉화대 불을 올리는 장난을 하다가 결국 "늑대와 소년"처럼 견융족에 희생되었다는 설화를 지닌 현장..

  저 여산의 좌측 기슭 중턱에 암자가 있는데..

장개석이 공산군의 토벌 독려차 왔다가 장학량에서 체포되어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현장..

 

모택동이 쓴 장한가.."위대하신"이란 수식어도 없고, 그 흔한 "주석동지"라는 말도 없다..다만 "모택동이 쓴" 이라는 간결한 표현이 오늘의 중국이다..

화청지에 있는 백거이의 장한가  마지막 귀절..

 

七月七日長生殿  칠월칠일장생전  칠월 칠일 장생전에

 

夜半無人私語時  야반무인사어시  인적 없는 깊은 밤 속삭이던 말
在天願作比翼鳥  재천원작비익조  하늘을 나는 새가 되면 비익조가 되고
在地願爲連理枝  재지원위연리지  땅에 나무로 나면 연리지가 되자..
天長地久有時盡  천장지구유시진  천지 영원하다 해도 다할 때가 있겠지만

此恨綿綿無絶期  차한면면무절기  이 슬픈 사랑의 한 끊일 때가 없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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