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리 밖에서도 나비는 날아온다."
오늘 집결장소로 가다 정비업체 간판에 씌인 글귀가 진한 향기로 다가왔다..
이번 둘레길은 두계천을 걸어 사계고택에 들렀다가 세동을 지나 성북동 잣디마을까지 가는 길..
삿갓집 식당에서 개울둔덕길을 걸어 공사중인 두계천 제방을 걸어 계용시 두마면 두계리로 간다..
말이 한가로운 날..구제역이 극성이래도 말에게는 영향이 없나보다..
두계천을 건너면 대전시에서 계룡시로 들어간다...
두계리에서 "팥거리" 지명을 만난다..
두(豆)자가 콩을 의미하고 팥은 소두, 홍두라고 한다는데..
콩쥐같은 두계리에 팥쥐 같은 팥거리인가?
두마면사무소 부근에 사계고택이 잇다..
사계 김장생..조선 성리학, 예학의 대가..아들 신독재 김집과 함께 조선 유학 18현으로 선정된 분..
사계고택의 대문을 들어사면 사랑채 "은농재"가 보인다..
사계고택((沙溪古宅 )은 사계 김장생 선생이 계축옥사(癸丑獄事)(1613) 무렵 이곳에 낙향하여 우암 송시열, 송준길 등 많은 후진을 양성하며 말년을 보낸 곳..당초에는 초가였다던데..
이 고택은 사계선생의 여덟째 아들 두계(豆溪)공 김규(1606~1677)과 그 장자로 이어져 사계 16세 손까지 이어왓다..
사계선생 시절부터 사랑채 이름이 은농재(隱農齋)인지 모르나, "은농(隱農)"은 사계 선생 7세손의 호(號)란다..
고택 주련중 만변수작 의리일관(萬變酬酌 義理一貫)에 눈이 간다..
만가지로 변하고 수작을 부려도 의리로 일관하겟다..
안방 마님 거처는 잠소실..정말 잠이 잘오겠다..
영당에서 사계선생을 알현하니..이 집안 자손인 김대표님 용모와 정말 닮앗다..광산 김문의 유전적 특징은 풍성한 수염이 아닐까?
슬쩍 김대표님에게 물엇다.." 200년전에 태어나셨으면 흰수염에 도포 입은 훌륭한 풍채와 덕망으로 높은 자리 오르셨을텐데.."
"뭐, 할아버지처럼 6부인을 거느릴 수는 있었겟지요..껄껄.."
고택에서 갈 때마다 탐나는 곳은 풍성한 장독대다..
집안의 장맛이 뼈대를 굵게 해주나 보다..
여기는 김대표께서 태어나신 곳..
자료에 의하면 원래는 새로 시집온 며느리 적응훈련 주거라던데..
고택 옆 양옥에 종손이 살고 계시고 김대표께서 인사드리는 사이
우리는 집앞 정자, 구로정(九老亭)에 올랏다..
구로정.. 내 생각에 구로는 사계선생의 아들 9형제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계선생의 부인 창녕 조씨는 김은, 김집, 김반 3형제를 두셨고, 후실부인은 순천 김씨로 김영, 김경, 김고, 김구, 김규, 김비의 6형제를 두었다한다..(이거 남의 족보를 너무 조사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이제 역사가 되었으니..잘못 쓴 것이 잇으면 지적바랍니다..)
큰 아드님은 임진왜란 때 전가족이 돌아가셨고.. 2째가 신독재 김집선생..
셋째는 김반..이분은 병자호란 때 둘째 아들 김익희와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모시고 항전을 하셧고,
이분의 부인 서씨과 셋째 아들 김익겸은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강화도 함락시에서 순절..
이 때 같이 강화도에 간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강화도를 탈출하는데. 이것이 후일 우암과 제자 윤증 간의 감정대립의 한 요소가 되었다는 사실..
한편, 김익겸의 부인은 어린아들 김만기와 태중의 아이 서포 김만중을 임신한 채로 강화도 탈출선에 몸을 실고 가다가 배위에서 유복자 김만중을 낳는다..
순절한 김익겸의 묘는 전민동 체육공원가기 전 왼편 산에 아버지 김반과 같이 묻혀있고, 그 골목에는 아들 서포 김만중의 소설비가 서잇다..
김익희는 광산 김문의 자랑인 9대제학 중의 한 분으로 연구단지 매봉산에 묻혀잇다..
한 집안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역사이고..충청도 양반이 그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양반으로 중추세력임을 보여준다..
그러니 지금도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고..대전에서 선비축제도 열리는 이유이다..
한가족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구로정 물고기는 그저 창공에 노닌다..
무쇠소는 사자후에 놀라지 않는다는데
철붕어가 용트림에 놀라겟는가?
사계고택을 나와 다시 두계천을 건너 세동으로 간다..
세동으로 가는 길은 세동천을 따라간다..세동 상추마을이라 써잇다..
중세동에서 점심식사를 한다..매실주,백일주로 반주를 하고..
진고개를 넘어 성북동으로 간다..고개 넘기 힘들어 푸닥거리도 하고..
금곡천이 흐르는 성북동에 도착하엿다..
계룡산에서 이어지는 백운봉, 금수봉, 빈계산이 감싸주는 참 아득한 터전이다.. 서쪽으로는 백운봉에서 남동쪽의 약사봉까지 산의 능선지대가 이어지는가 하면 동쪽으로는 빈계산에서 남쪽으로 성북동의 동쪽에 길게 늘어진 산장산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로 금곡천은 남동쪽으로 흐른다..
이동네 이름이 잣뒤마을이다..산성 뒤쪽에 위치해 있어 잣뒤 또는 성북이라 부른다.
무슨 산성이 었을까? 아마도 백제시대 부여를 방어하는 산성이 아니엇을까?
이 마을에는 수령이 150-200년하는 느티나무가 7구루가 늘어서있다..
동행 은잠님의 설명으로는 성재고개로 진잠으로 이어지는 길로 옛사람들이 통행하엿다니..
동춘당과 우암이 사계고택으로 선생께 학문을 배울적에 이길을 다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잣디마을에서 봉덕사로 고려 석조보살입상을 보러 간다..
보살입상을 보러 왔는데, 정작 마주 대하니 할말을 잊고 그저 바라볼뿐..
범소유상은 개시허망이라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니라..
무릇 모든 형상이 있는 것들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즉시 여래를 보리라..
오늘 삿갓집-두계교-팥거리-사계고택-하세동-중세동-진고개-성북동-잣디마을 12km을 걸엇다..
사람의 향, 물길의 향, 노거수의 향, 보살의 향을 좇아 백리라도 따라갈 심산으로 나비처럼 즐겁게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