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성 장락문

당나라의 수도 장안..지금은 그당시의 1/6 정도로 축소하여 명나라때 건축되었다지만, 그래도 위풍이 당당하다..

두보가 읊었던 그 장안..

  

春望 /두보

 

國破山河在 (국파산하재)  나라는깨어져도 산하는 그대로인데
城春草木深 (성춘초목심)  장안성에 봄이 오니 초목만이 무성하구나.
感時花천淚 (감시화천루)  시국을 생각하노라니 꽃을 보아도 눈물이 흐르고
恨別鳥驚心 (한별조경심)   이별을 한탄하노라니 새소리에도 심장이 멎는듯,
烽火連三月 (봉화연삼월)   전쟁을 아리는 봉화가 석달동안 이어지고
家書抵萬金 (가서저만금)   집안소식 전해줄 편지 만금보다 귀하다.
白頭搔更短 (백두소갱단)    흰 머리 긁을수록 또 짧아지고

渾欲不勝簪 (혼욕불승잠)    이젠 비녀조차 꽂지 못하겠구나.

 

장락문(남문)

성벽위 - 만리장성의 폭보다 더 넓다고 한다..

 

장락문에서 바라본 성의 해자..

이성을 어찌 공격할 것인가..

 

이 신문에 따르면 홀어머니(72)와 단둘이 살고 있던 이 남성은 15년 전 도쿄에서 다니던 회사가 부도나자 고향으로 돌아온 뒤 2층에 있는 자신의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지난 11일 땅을 뒤흔드는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자 홀어머니는 그에게 몇번이나 "피해야 돼"라며 사정했지만 남성은 "도망가기 귀찮다"며 말을 듣지 않았다.

체념한 어머니가 홀로 피난한 후 '쿵'하는 소리와 함께 집이 통채로 어디론가 휩쓸려가기 시작했다. 방 벽이 무너지고 천장이 내려왔다.
....

천신만고 끝에 기적적으로 살아돌아온 그는 대피소에서 홀어머니와 재회하고 "운이 좋았다"며 기뻐했다고 신문은 전했다.

 

 

****

 

부지런한 사람이라고 반드시 살지 않고 귀차니스트라고 반드시 죽지 않는다..

생은 무엇이고...사는 무엇일까?

신문을 보다가 과연 생사는 하늘에 달린 것인가 생각하면서도 입가에는 미소가 번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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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리 밖에서도 나비는 날아온다."

오늘 집결장소로 가다 정비업체 간판에 씌인 글귀가 진한 향기로  다가왔다..

 

 

이번 둘레길은 두계천을 걸어 사계고택에 들렀다가 세동을 지나 성북동 잣디마을까지 가는 길..

삿갓집 식당에서 개울둔덕길을  걸어 공사중인 두계천 제방을 걸어 계용시 두마면 두계리로 간다..

 

 

말이 한가로운 날..구제역이 극성이래도 말에게는 영향이 없나보다..

 

 

 

두계천을 건너면 대전시에서 계룡시로 들어간다...

 

 

두계리에서 "팥거리" 지명을 만난다..

두(豆)자가 콩을 의미하고 팥은 소두, 홍두라고 한다는데..

콩쥐같은 두계리에 팥쥐 같은 팥거리인가?

 

 

두마면사무소 부근에 사계고택이 잇다..

사계 김장생..조선 성리학, 예학의 대가..아들 신독재 김집과 함께 조선 유학 18현으로 선정된 분..

 

 

사계고택의 대문을 들어사면 사랑채 "은농재"가 보인다..

사계고택((沙溪古宅 )은 사계 김장생 선생이 계축옥사(癸丑獄事)(1613) 무렵 이곳에 낙향하여 우암 송시열, 송준길 등 많은 후진을 양성하며 말년을 보낸 곳..당초에는 초가였다던데..

 

 

이 고택은 사계선생의 여덟째 아들 두계(豆溪)공 김규(1606~1677)과 그 장자로 이어져 사계 16세 손까지 이어왓다..

 

 

사계선생 시절부터 사랑채 이름이 은농재(隱農齋)인지 모르나, "은농(隱農)"은 사계 선생 7세손의 호(號)란다..

 

 

고택 주련중 만변수작 의리일관(萬變酬酌 義理一貫)에 눈이 간다..

만가지로 변하고 수작을 부려도 의리로 일관하겟다..
 

 

안방 마님 거처는 잠소실..정말 잠이 잘오겠다..

 

 

영당에서 사계선생을 알현하니..이 집안 자손인 김대표님 용모와 정말 닮앗다..광산 김문의 유전적 특징은 풍성한 수염이 아닐까?

슬쩍 김대표님에게 물엇다.." 200년전에 태어나셨으면 흰수염에 도포 입은 훌륭한 풍채와 덕망으로 높은 자리 오르셨을텐데.."

"뭐, 할아버지처럼 6부인을 거느릴 수는 있었겟지요..껄껄.."

 

 

 

 

 

고택에서 갈 때마다 탐나는 곳은 풍성한 장독대다..

집안의 장맛이 뼈대를 굵게 해주나 보다..

 

 

여기는 김대표께서 태어나신 곳..

자료에 의하면 원래는 새로 시집온 며느리 적응훈련 주거라던데..

 

 

 

고택 옆 양옥에 종손이 살고 계시고 김대표께서 인사드리는 사이

우리는 집앞 정자, 구로정(九老亭)에 올랏다..

구로정.. 내 생각에 구로는 사계선생의 아들 9형제를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사계선생의 부인 창녕 조씨는 김은, 김집, 김반 3형제를 두셨고, 후실부인은 순천 김씨로 김영, 김경, 김고, 김구, 김규, 김비의 6형제를 두었다한다..(이거 남의 족보를 너무 조사하는 것 같아 죄송..하지만, 이제 역사가 되었으니..잘못 쓴 것이 잇으면 지적바랍니다..)

 

큰 아드님은 임진왜란 때 전가족이 돌아가셨고.. 2째가 신독재 김집선생..

셋째는 김반..이분은 병자호란 때 둘째 아들 김익희와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모시고 항전을 하셧고,

이분의 부인 서씨과 셋째 아들 김익겸은 강화도로 피난 갔다가 강화도 함락시에서 순절..

이 때 같이 강화도에 간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는 강화도를 탈출하는데. 이것이 후일 우암과 제자 윤증 간의 감정대립의 한 요소가 되었다는 사실..

한편,  김익겸의 부인은 어린아들 김만기와 태중의 아이 서포 김만중을 임신한 채로 강화도 탈출선에 몸을 실고 가다가 배위에서 유복자 김만중을 낳는다..

순절한 김익겸의 묘는 전민동 체육공원가기 전 왼편 산에 아버지 김반과 같이 묻혀있고, 그 골목에는 아들 서포 김만중의 소설비가 서잇다..

김익희는 광산 김문의 자랑인 9대제학 중의 한 분으로 연구단지 매봉산에 묻혀잇다..

 

한 집안의 역사가 우리나라의 역사이고..충청도 양반이 그 당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양반으로 중추세력임을 보여준다..

그러니 지금도 충청도 양반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고..대전에서 선비축제도 열리는 이유이다..  

 

 

한가족의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구로정 물고기는 그저 창공에 노닌다..

 

무쇠소는 사자후에 놀라지 않는다는데

철붕어가 용트림에 놀라겟는가?

 

 

 

사계고택을 나와 다시 두계천을 건너 세동으로 간다..

 

 

 

세동으로 가는 길은 세동천을 따라간다..세동 상추마을이라 써잇다..

 

 

중세동에서 점심식사를 한다..매실주,백일주로 반주를 하고..

진고개를 넘어 성북동으로 간다..고개 넘기 힘들어 푸닥거리도 하고..

 

 

 

금곡천이 흐르는 성북동에 도착하엿다..

 

계룡산에서 이어지는  백운봉,  금수봉, 빈계산이 감싸주는 참 아득한 터전이다.. 서쪽으로는 백운봉에서 남동쪽의 약사봉까지 산의 능선지대가 이어지는가 하면 동쪽으로는 빈계산에서 남쪽으로 성북동의 동쪽에 길게 늘어진 산장산으로 이어진다. 그 사이로 금곡천은 남동쪽으로 흐른다..

 

 

이동네 이름이 잣뒤마을이다..산성 뒤쪽에 위치해 있어 잣뒤 또는 성북이라 부른다.

무슨 산성이 었을까? 아마도 백제시대 부여를 방어하는 산성이 아니엇을까?

 

이 마을에는 수령이 150-200년하는 느티나무가 7구루가 늘어서있다..

동행 은잠님의 설명으로는 성재고개로 진잠으로 이어지는 길로 옛사람들이 통행하엿다니..

동춘당과 우암이 사계고택으로 선생께 학문을 배울적에 이길을 다니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잣디마을에서 봉덕사로 고려 석조보살입상을 보러 간다..

 

 

보살입상을 보러 왔는데, 정작 마주 대하니 할말을 잊고 그저 바라볼뿐..

범소유상은 개시허망이라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즉견여래니라..

무릇 모든 형상이 있는 것들은 모두 허망한 것이니 모든 형상을 형상 아닌 것으로 본다면 즉시 여래를 보리라..

 

 

오늘 삿갓집-두계교-팥거리-사계고택-하세동-중세동-진고개-성북동-잣디마을 12km을 걸엇다..

 

사람의 향, 물길의 향, 노거수의 향, 보살의 향을 좇아 백리라도 따라갈 심산으로 나비처럼 즐겁게 걸었다..

 

  

 

전주천을 따라 걷는다..

한벽당 부근 에 전주의 특미 오모가리 매운탕식당들이 즐비하다..잠벗이 싫다하여 이번엔 패스..

 

 

한벽당..월당 최담 선생이 태조 8년(1404)에 별장으로 세운 건물..

한벽’이란 옥처럼 항상 맑은 물이 흘러 바윗돌에 부딪쳐 흩어지는 광경이 마치 벽옥한류(碧玉寒流)같다하여 붙인 것이다.

 

 

 

 

 

정자 삼면에 걸린 편액에는 행서..해서..예서체로 다양하게 써있다..강암 송석용이 썼다..

 

 

정자에서 전주천을 바라본다..이 강물은 흘러내려 만경강이 되어 흐른다..

 

 

한벽당에 오르니 정자 안에 후손들이 선조의 운을 따 지은 시들이 가득하다..

조손이 시심을 나누는 모습이 아름답다..

 

 

 

한벽당 옆 요월대(邀月臺)..달을 맞이하는 누각..석전 황욱의 글씨다..

 

 

한벽당 절벽에 이어지는 산을 발산이라하는데..일제시대 터널을 뚫고 기차길을 부설햇다..지금은 차길로 바뀌었지만.. 

 

 

 

 

한벽당 주변은 개발로 인해 이제는 "지나친 성형의 부작용에 시달리는 선풍기 아줌마"처럼 되엇지만

절벽아래를 흐르는 물빛에는 옛시절의 흔적이 묻어난다..

 

 

길을 가다 동행이 "저기 미륵부처님이 잇네!"하며 승암산을 가리킨다..

몇시간전 점심 식당을 찾다가 토속음식점이라는 간판을 보고 메뉴를 묻다가 계장백반을 개장백반으로 듣고 보신탕을 생각한 나로서는 쓴 웃음이 난다..

개눈에는 개가 보이고, 부처 눈에는 부처가 보인다더니..ㅎㅎ

 

 

승암산아래 전주천을 따라 걷는 길.. 승암산에 후백제 견훤의 왕궁인 동고산성도 잇고 천주교 치명자산 성지가 있다..

 

왜 치명자산이라 하나 했더니..위주치명..주님을 위해 목숨을 받친사람이라는 뜻인게다..

일반 지명인 승암산은 "중바위"산이라는 뜻이니 천주교 입장에서 치명자산으로 부르는 것 같다..  

치명자산 성지에는 전동성당터에에서 처형당하여 순교한 분들의 묘소가 안치되어있다..

 

 

전주천 상류를 향해간다..봄바람이 제법 불 때도 잇지만 무척 화창한 날씨다..

 

 

잠시 각시바위에 앉아 숨을 돌린다..

사랑한 총각이 호랑이에 물려 죽자 각시가 이 바위에서 뛰어내려 죽었다는 전설인데..

지금보니 무척 얉다..

 

동네 사람 말이 예전에 이곳에서 다이빙을 할 정도로 깊었단다..

역사다큐에서, 견훤의 왕궁 동고산성에서 가까운 이 부근 전주천에 배를 타면 뱃길로 만경강을 통해 서해로 연결되었으리라고 하는 내용을 들은 적이 있다..

 

 

 

애절한 각시바위 길을 서방 죽었다고 따라 죽지는 않을 헌 각시를 데리고 걷는 사람들이 많다..

 

 

서방바위를 지척에 주고 회군하는 길..이길이 전에는 한벽당 뒤 터널과 이어지는 전라선 철로를 걷어내고 이제는 자전거와 보행자의 길이 되었다..

 

 

 

 

승암산 승암사에 들럿다..호남의 선승 진묵대사의 유적지라는 팻말을 보앗기에..

진묵대사는 조선 중기 선승..임진왜란 무렵에는 서산, 사명당 등의병활동에는 관여하지 않은 듯..그는 도력높은 선승으로 많은 일화가 전해진다.. 

 

 

절집의 장독대..장독을 덮은 유리뚜껑이 인상적이다..

 

 

다시 한벽당 터널을 지나 이목대로 간다..

이목대(梨木臺)..

이 태조의 5대조 이안사 등 선대가 살앗던 터전에 세운 비각..

그러나 정작 안내판 등이 부실해 이 목 저 목 개들에게 홀대당하며 돌아다니다가 찾지못하고 나중에 검색해보니 우리가 지나친 비각이었더라는 얘기..

 

 

한옥마을-오목대-한벽당-치명자산성지-각시바위-반환점-철로복원길-승암사-한벽터널-이목대-한옥마을로 이어지는

9km 한목마을 둘레길을 걷고 다시 돌아왔다..

공예전시관에 들러 구경하고..

 

 

경기전 부근 찻집에 들러 홍차를 마신다..

봄날..조선의 시초의 역사와 마주하였다...

흐르는 것은 강물만이 아니더라..

소리없이 흐르 것은 세월이고 역사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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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유거( 仙嶠幽居)..

 

강릉 선교장에는 조선 말기의 서예가 소남 小南 이희수 선생이 쓴 ‘선교유거 仙嶠幽居’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데, 이는 ‘신선이 기거하는 그윽한 집’이라는 뜻이다.


소남(少南) 이희수(李喜秀)..

1836년생으로 1909년 별세했다. 향년 73세.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에 살면서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에게서 글씨를 배웠다. 강원도 생활은 강릉에서 시작했으나 그 후 송정, 북평, 삼척으로 옮겨 후학들을 지도했다.
소남(少南)이라는 이희수의 아호는 스승인 눌인 조광진이 붙여준 것으로 서성으로 일컬어지는 진나라 왕희지의 자인 일소(逸少)에서 소(少)를, 당나라의 대표적인 서화가인 우세남(虞世南)에게서 남(南)을 취한 것이라고 한다.

 이에서도 알 수 있듯이 소남의 필맥은 백하(白下) 윤순(尹淳)으로 시작해 원교(圓喬) 이광사(李匡師)를 거쳐 눌인(訥人) 조광진(曺匡振)을 이어받았으며 여기에 격조 높은 왕희지체와 우세남의 글씨를 섭렵함으로써 사발체(四八體)라는 특유의 독창적인 서법을 개발 구사하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하면 사발체란 무엇일까. 이는 다섯 손가락이나 필봉에 전혀 힘을 주지 않고 팔이 어깨에서 탈골된 것처럼 운필을 함으로써 아무런 제약이나 막힌 곳 없이 그야말로 물 흐르듯이 시원스러운 느낌을 주는 필법이라고 한다. 따라서 서예를 모르는 일반인들의 눈에는 언뜻 치졸해 보일 수도 있지만 안목이 있는 사람의 눈에는 기운생동의 기풍을 느끼게 된다고 한다.

소남의 작품은 무낙관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이는 그의 성격과 무관치 않아 보이는데 남에게 그림이나 글씨를 주는데 인색치는 않았으나 도장 찍기를 무척 싫어했다고 한다. 그래도 그림을 받아가며 상대방이 굳이 도장 찍어줄 것을 간청하면 "이 사람아 원래 낙관이라는 것은 그림 그리고 빈자리가 허술해서 찍는거야. 그림에 무슨 도장이 필요해" 하며 물리쳤다고 한다.

 

 

광풍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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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선교장(船橋莊)... 대략 120여 칸에 달하는 저택이다.

보통 99칸까지가 민간주택의 한계라고 하지만, 선교장은 99칸을 넘어선 집이다.

손님들이 묵는 행랑채의 길이만 해도 60m가 넘고, 23개의 방이 있었다.


 조선 최고의 저택인 이 집의 큰 사랑채 이름은 열화당(悅話堂)이다.

  ‘기쁘게 이야기하는 집’이라는 뜻이다.

 

선교장을 건축한 무경 이내번의 손자 오은(1773-1832)이 순조 15년(1815)에 건립하였는데,

건물 이름은 중국 진나라 때의 도연명 시인의 시「귀거래사(歸去來辭)」중에서 따왔다한다.

".... 세상과 더불어 나를 잊자

 다시 벼슬을 어찌 구할 것인가

 친척들의 정다운 이야기를 즐겨 듣고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우수(憂愁)를 쓸어 버리리라.....

(.... 世興我而相遺復駕言兮焉求 悅親戚之情話 樂琴書以消憂....)...."라고 하는 구절 가운데 "친척들의 이야기를 즐겨 듣고 (悅親戚之情話)"에서 '悅'자와 '話'자를 따서 '열화당(悅話堂)'이라 이름지었다.

 

수만 석을 하는 부잣집이었던 이 집 사람들이 생각하는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일은 사람들이 둘러앉아 기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일이었다.

 

‘열화(悅話)’야말로 인생 최고의 행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인간에게 삶의 의미를 주는 일은다름 아닌 인간들끼리의 이야기에 있었다.

‘열화당’이라는 편액(扁額)에는 이러한 삶의 철학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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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걷기에 나섯다..

이번엔 전주한옥마을에서 시작한다..경기전에 도착하여 주차하고..하루 주차요금을 물어보니 6천원이란다..

경기전 옆 대나무가 아름다운 사고건물로 들어간다..

조선실록 보관지 4대사고 중 임진왜란 때도 유일하게 살아남아 우리나라의 역사를 지켜온 내력..

 

 

 

어느 분이 나에게 홍매화가 피었다고 귀뜸해준다..

정말..남녁 선암사에 가야 봄직한 홈매화를 여기서 보니 더욱 반갑다..

 

 

 

 

경기전 중심에 자리잡은 태조 이성계의 영정..

북로남왜의 정벌과 새 왕조를 연 용안치곤 어찌 넘 단정하다..범생이같은 용모라 꼭 정몽주와 같이 고려조에 계속 충성을 다할 것 같은 인상인데...

가슴의 용이 이빨을 깨물고 위엄을 가득 부리며 꿈틀거리듯 생동한다.. 

 

 

경기전 부속건물을 돌아 나오는데..학생들이 탈춤 배우는라 신명을 낸다..

아직 어설프지만, 반복하다보면 우아함이 배어나오리라..

 

 

1891년 프랑스인이 설계한 아름다운 성당..

조선후기 천주교도 박해때 풍남문 밖에서 처형당한 순교지에 세운 성당..참 아름다운 건물이다..

 

 

성당안에 스테인드그라스가 아름답다..그중에 한 귀절..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풍남문으로 갔더니..보수공사중이다..

하여 시장 골목을 걸어 가노라니 잊었던 옛추억과 만난다..양재기..구들장..바가지.. 

 

 

 

순례길 답게..좁은 지역안에 모든 신앙과 만난다..남문교회, 원불교교당..점집까지..

 

 

 

 

전주천을 지난다..

남천교 위에 청연루를 지었다..

한벽루 절벽에 부딪혀 소용돌이치며 하얀 포말을 이루는 장관을 한벽청연이라 한다..

여기서 바라보는 하얀 포말을 청연이라 하였나보다..

 

 

안내도를 보다 강암서예관이라는 제목을 보고..선뜻 방문지로 정햇다..

강암 송성용.. 전주지역 서예가..많은 글씨와 그림에 흠뻑 젖는 시간..

 

 

그중 한글씨..적덕종선(積德種善)..덕을 쌓고 선을 심는다..

목간의 필의로 일필휘지..

 

 

전에부터 익히들엇던 고택..학인당..

판소리공연할 정도의 넓은 대청이 있다는 곳..그곳을 보러갔더니 방문프로그램에 신청하여 오란다..

이곳에 살던 백낙중은 효자로 소문나서 고종으로부터 벼슬까지 받앗는데..

학인당(學忍堂)은 인내를 배우는 집..

그러니 아이러니를 발견한다..

백낙중(白樂中)이 학인당(學忍堂)이 사는 의미는 "온갓 줄거움 가운데 참음을 배우는 것 만한 것이 없다"는 뜻같기도 하다.. 

 

 

한옥마을을 휘둘러 밥집 찾아 가는 길..

솟대가 창공에 두둥실..

솟대만 보면 내 마음을 날아오른다..자유! 너..영원한 비상이여!!

 

 

 

솟대를 모티브로 한 어여쁜 게스트 하우스가 맘에 든다..

막걸리 3주전자에 무진장의 안주를 먹고 이곳에서 자면 꿈에는 새가되어 비상할 것 같다..

 

  

 

점심에 굴비 정식을 먹었다..전주다운 푸짐한 맛이 떨어져 별루..

한옥 마을 고샅을 요리조리 걷다보니 술도가 길도 나온다..전엔 양조장 도가집이 있었나 보다...

고두밥과 누룩냄새를 상상하면 오목대로 향한다.. 

 

 

오목대(梧木臺)..

이성계가 전라도 운봉 황산에서 왜구를 섬멸하고(금강 걷기 구불길에서 만난 진포대첩비는 그당시 최무선이 화포로 왜구의 배 수백척을 수장시킨 전적을 보여주고, 이에 내륙으로 달아난 왜구가 운봉에 집결하자 이성계 등 고려군이 황산에서 아기발도를 사살하고 적을 전멸시키는 대첩을 거두엇는데,,지리산 둘레길 운봉구간에서 황산대첩비를 볼 수잇다.. 걷기를 통해 역사를 서로 연결시켜보는 기능이 재미잇다..)

개성으로 개선하는 길에 전주에 들렀는데..전주는 이성계의 5대조 이안사 윗대가 살던 곳(이목대)으로  이성계는 오목대에서 친지를 불러보아 잔치를 베풀고 즐겼다는 곳..

 

오목대 정자는 최근에 지은 것인데..그 곳 기둥에 주련이 붙어 있다..

 

淸風明月用不竭  청풍명월용불갈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은 써도 다하지 않고

高山流水情相投  고산류수정상투    높은 산과 흐르는 물은 마음이 서로 투합한다.

長生不老神仙府  장생불로신선부    늙지 않고 오래 사니 신선의 저택이요,

如天同壽道人家  여천동수도인가    수명이 하늘과 같으니 도인의 집이로다.

山中人惟知自樂  산중인유지자락    산속 사람 오로지 스스로 즐거움을 알고

天下事不在多言  천하사부재다언    천하의 일이란 많은 말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날 이성계는 취흥이 도도하자 일어나 대풍가를 불럿다던가..

대풍가..한고조 유방이 항우를 패사시키고 고향 풍패에 들러 고향촌로들앞에서 불럿다는 노래..

당연히 불순분자로 볼만한 상황..

종사관으로 배석했던 정몽주가 자리를 박차고 나갓다던가..

 

 

오목대에서 바라보는 전주 한옥마을..

한옥이 즐비..원래 이곳은 양반의 터전이 아닌데..전주성안으로 일본인들이 땅과 집을 짓고 들어오자..뜻잇는 양반, 지주, 부자들이 이곳에 하나둘 한옥을 짓고 살면서 촌락을 이루고..70-80년대 개발시대에 낙후되는긋 여겼으나 이제는 문화의 아이콘으로 재탄생하였다..

그러니 사람이건 물건이건 함부로 버릴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할 일이다.. 

 

 

오목대 현판에서 호남의 대가를 만난다..

"금강산인 석전 황욱 91세에 쓰다"라고 싸인하였다..

석전 황욱..고창 분으로..70세에 수전증이 오자 악필법 즉 붓을 손바닥으로 감아쥐는 방식으로 글씨를 썼다..

 

  

 

오목대를 내려와서 한옥마을을 골목길을 이리 저리 기웃거리며 한옥마을 둘레길을 걷기 위해 전주천 청연루로 나간다.. 

 

 

도중에 담장 너머로 만난 송무백열..

소나무가 무성하면 전나무가 기뻐한다..술취하면 가끔 읊조리는 귀절의 뒷부분..반갑다..

앞부분은..혜분난비(蕙焚蘭悲)..

 

산속의 헤란이 불타면 내집의 난초가 슬퍼하고, 들판의 소나무가 무성하면 강가의 전나무가 기뻐하도다..

 

 

한옥마을 끝자락..죽림에 솟대가 섰다..

아침에 우는 새는 배가 고파 울고요, 저녁에 우는 새는 님이 그리워 운다는데..

죽림에 우는 새는 무엇 때문에 우는가?

 

 

황희정승의 글씨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황희정승의 호는 방촌(尨村)..삽살개 사는 동네라는 정도아닐까..

위 글씨의 내용은 이렇다..

 

靑山臨黃河(청산임황하)   푸른 산이 황하에 임하여

下有長安道(하유장안도)   산 아래로 장안 가는 길이 있네

世上名利人(세상명리인)   세상에서 명리만 쫓는 사람들은

相逢不知老(상봉부지노)   서로 만나도 어른 알아볼줄 모를텐데..


당나라 시인 맹교(孟郊)의 유순을 보내며<送柳淳>를 초서체로 쓴 것이다..

 

무엇이든지 국정에 관한 공사가 아니라면 '허허'하고 웃어넘겨 '허허정승'이라고도 불린 그였다.
서로 싸우는 하인들에게 이 말도 맞고 저 말도 맞고 심지어 타박하는 부인의 말도 맞다고 한 그..

그런 성품이기에 그의 글씨도 허허로운듯 자유스러우면서도 법도에 어그러지지 않는 절제가 배어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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