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마모토 관광을 마치고 아소산록  아소골프클럽이 잇는 아소고원호텔에서 묵었다..

그 호텔에는 골프코스 옆에 야간에 운영하는 노천탕에 있어, 벌거벗고 탕속에 앉아 숲을 바라보면서 거풍의 기분을 느껴본다..저녁에 축구 한일전을 일본에서 보나 기대했는데, 방송이 나오지 않는다..

 

다음날 아침 산보를 나왔다가 인근에 있는 적수(赤水) 사석(蛇石) 신사에 들렀다..

말로만 들었지, 시골에 잇는 평범한 신사는 어떤지 궁금하던차였다..

입구는 신사특유의 일주문이 있고, 안쪽에 신사 본채건물이 잇는데,건물뒤로 머리에 산내끼를 두른 바위가 여럿있다.

흡사 우리의 서낭당분위기와 비슷하다..

적수신사는 아소화산 분화시에 흰뱀이 나타나 영험을 주었다는 사연을 담고 잇어 흰뱀을 모시는 신사 같았다..

 

(신사 본채 뒷면의 풍경)

 

일본은 모든 문화가 고이는 곳이다..다신교인 신불(神佛)을 믿는다..

사람이 나면 신사에 빌고, 결혼은 기독교식으로, 장례는 화장을 하여 절에 납골묘형태로 모신단다..

신사의 신앙형태는 애니미즘과 샤머니즘 형태가 진화한 모습이랄까?불교는 대처승이 주류이고..

기독교인구는 인구의 1% 정도..

가이드가 말하는 이유가 재미있다..

일본 사람은 날 때부터 "남에게 폐 끼치지마라!"는 교육을 받으며 또한 "충"을 강조하는 교육을  많이 받다보니,

의식의 근저에 "나는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하라는대로 살아왔다.."는 의식이 강하단다..

그래서 기독교의 "원죄사상"이 파고 들기 어렵다고 한다..

믿거나말거나..

하지만, 기독교 문화는 즐긴단다..크리스마스 등등..

 

 

(신사앞 납골묘 중 하나)

위 납골묘는 "대정"집안의 납골묘인데, 그 형식이 다른 묘와 달리 풍류가 잇어 보여 찍었다..

망자들이 평소 음풍농월하던 문인풍의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나도 멋진 풍류적인 묘비를 마련할까보다..

 

 

 

(다자이후 천만궁 입구)
(천만궁의 본전)

숙소를 떠나 후쿠오카 인근의 다자이후에 잇는 천만궁(덴만구)을 찾았다..

이 신사는 스가와라 미치자네라는 고대 학자를 학문의 신으로 모시는 신사인데,

전국적으로 같은 신을 모시는 1000여개의 신사 중 본산격으로 도리(烏居-일주문)이 4개나 있는 일급 신궁이다..

스가와라는 중앙의 높은 관직에 있다가 좌천되어 이곳에 내려와서 많은 제자를 가르쳤다고 한다..

우리나라로 치면 정약용선생 쯤 된다고 할까?

이 신사에서는 학문성취나 시험합격을 비는 사람이 많이 와서 패를 사서 자기의 소원을 써서 쭉 걸어놓는 곳이 있다..

 

본전 옆에 서잇는 나무는 도비우메(비매,飛梅)라고 불리는 매화나무란다..

스가와라가 좌천되어가자 뒤따라 날라와서 자랐다고한다..

좌간 이곳 부근에는 수천 그루의 매화나무를 심고 매화꽃이 필 때는 장관을 이룬다고 하고..

우메가에모찌(매화가지떡)는 이곳의 명물인데, 먹을 만하다..

 

 

 

절의 대웅전에는 부처님이 모셔져 잇는데, 신사 본전 중앙에는 무엇이 모셔져 잇을까?

의외로 거울이다..

신사에서는 거울, 곡옥, 검을 3대 신물로 치는데..우리나라 고대의 신물과 같다..

 

(본전 후면의 나무)

 

신도의 에니미즘적 성격을 보여주는 것이 각종 산천초목 만물을 섬기는 대목이다..

본전 뒤의 고목은 남녀의 인연을 잘 맺어주는 신목으로 여겨지고..

부억의 칼도 포정총이라하여 비석을 세워 기리고 있다..

예전에 바늘이 부러지자 "조침문"을 지어 애도하였다는 조선 여인보다 한술 더뜨는 대목이다..

 일본에는 우리의 과거의 흔적..우리가 버린 것들이 보존되고 손질되어 한몫 단단히 하고 있는 느낌이다..   

 

(포정총)

돌아오는 쾌속선은 순풍운항..

배안에서 "미녀는 괴로워"를 보며 웃고 잇는데,

배가 흔들려 밖을 보니

우리나라 해역엔 먹구름이 가득하고 번개,천둥이 치고 파도가 흉흉하다..

다행이 남은 거리 얼마 되지않아 무사히 안착..

부산역에서 시간을 메우려고 인터넷 신문을보니

그사이 북한산, 수락산에서 벼락으로 5명이 사상했다는 소식..

세상엔 편안하고 안락한 곳이 어디있으랴!

귀가하는 우리 집 외엔...

<2008.7.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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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뿌를 출발하여 인근 유노하나 (湯の花)에 도착..

유노하나는 온천의 유황증기에서 얻어지는 노란결정체로 입욕제로 쓰인다.

그곳에서 온천에 쌂은 계란과 구슬 사이다(라무네)를 먹었다..그 사이다는 예전의 동네 사이다를 연상시킨다..

재벌 사이다에 제패되기전 동네 마다 잇었던 금관사이다..말표사이다..

 

다시 2시간을 달려 아소화산에 다다랗다..

아소화산은  지금도 가스와 수증기를 뿜고있는 활화산으로 가스의 농도와 풍향에 따라 등정관광이 허용된단다.

마침 우리 일행이 산아래에서 점심을 들고 초원에서 승마등으로 휴식을 취하는 사이  등정허가가 났다고 한다.

운이 좋다..케이블카를 타고 산을 오른다..

 

 

분화구는 긴쪽의 직경 1KM의 타원형이고 깊이는 수백미터라 한다..

들여다 보니 저 밑으로 파란 물이 끊고 있고 수증기가 치솟는다..그리고 유황냄새와 독한 썩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기묘한 풍경에 약간은 오싹한 느낌이랄까?

 

 

활화산이 있고, 수시로 지진이 강타하는 일본에서는 언제 죽을 지 모른다는 의식이 있는지 모른다. 

늙거나 병들어서야 죽음을 인식하는 우리와는 다른..

하산은 걸어서 했다..시원한 풍광..상쾌한 바람..가벼운 걸음..

 

 

하산후 다시 1시간 30분을 달려 구마모토에 도착했다.

일본 3대 성 중이 하나인 구마모토성을 관람한다..

임진왜란후 귀국한 가토 기요마사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히데요시 아들편에 서지 않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편에 서서 세키가하라전투에 참여한다.

이 싸움의 승리로 이에야스가 정권을 잡고, 카토는 쿠슈의 지배자가 되어 이 성을 신축하였다 한다.

울산 도산성에서 조명연합군에게 포위되어 물부족에 시달리며 죽다가 살아 도망친 그의 경험에 따라 구마모토성을 지을 때 우물을 200여개 팠다고 한다..

그러나, 위 성에서 가토의 자손은 2대밖에 가지못하고,호소가와 집안이 200년간 지배해왔다..

명치유신 과정에서 1877년 일어난 서남전쟁시 위 성은 50여일 버티다 함락당하고 불타버렸다..

톰 크루주 주연의 "라스트 사무라이"가  서남전쟁을 배경으로 한 영화란다..

1960년대에 들어와 천수각을 콘크리트로 복원..

 

천수각은 지금은 박물관 역할 한다..

일본도 1960년대는 콘크리트 건물로 복원하였다하니, 유홍준씨가 알면 혼날 일이다..

 

(천수각안에 있는 가토 기요마사의 그림)

박물관에서 호랑이 가죽위에 앉은 가토의 그림을 보자, 이승만 대통령 일화가 생각나 사진부터 찍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 수상과 면담시 일 수상이 한국의 호랑이에 대해 묻자,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가토 기요마사)이 모두 잡아가서 이제는 없다"고 하였다는..

그런데, 실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당시 주인장(명령서)에 따르면, 도요토미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1592년 12월 14일 조선에 파견된 장수들에게 "조선의 범을 잡아 보내라"고 명령했다.

이에 따라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등 다수의 장수들이 경쟁적으로 야생 호랑이를 잡아 도요토미에게 바쳤으며 도요토미는 이를 약으로 썼다고 메이지시대 일본 문서들이 전하고 있다.

이런 일화도 있다..

사명대사와 가토가 평화회담을 한 적이 있었다.가토가  물었다. " 조선의 보배는 무엇이오 ? "

" 우리 나라의 보배는 바로 당신의 목이오. "

" 조선에서는 이 땅을 짓밟고 있는 당신의 목에 엄청난 상금이 걸려 있소. 당신의 목을 갖게 되면상금도 상금이려니와 이 전쟁도 끝날 터이니 그 아니 보배요 ? " 

 

(천수각에서 본 우토망루)

 


 

구마모토 성 건물중 유일하게 신축당시부터 그대로인 건물이 우토망루이다..

5층의 망루에 올랏다..목조건물이라 신발을 벗어 들고 오르게한다..

5층 망루에 사방의 문이 열린 곳에 앉으니 시원하기 그지없다.잠시 눈을 감고 묵상에 잠긴다..

망루의 마루 촉감과 시원한 바람이 나를 문득 진주성 촉석루를 떠올리게 한다..

그 옛날 촉석루 옆 남강에서 논개가 죽인 적장은 가토의 부장인 케야무라 로쿠스케였다..

가토의 또다른 부하였던 사야가..그는 조선에 투항하여 김충선이란 이름으로 조선을 위해 싸웠다..

이렇게 구마모토는 우리의 역사와도 이어져 잇다..

(우토 망루에서 본 천수각)

사무라이들은 생사에 초탈했을까, 아니면 짐짓 외면했을까?

그들이 다도와 사꾸라의 낙화를 즐기면서 선적인 풍취를 누리려했다는 것은

생사의 절박함에서 오는 한방울의 여유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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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주하는 코비호)

 

 배타고 일본가기

 

배를 타고 일본 갔다 온다는 말을 여러번 듣다가 얼마전 "여몽연합군의 일본원정"이라는 책을 읽고 부쩍 호기심이 생겼다..그전부터 왜구..임진왜란..윤심덕..등등의 주제로 한일 사이의 현해탄에 관심이 있던터다..한 일 사이에 가로 놓인 바다가 보고 싶엇다..

 

배는 "코비호"라는 쾌속선..바다위에 2미터 정도 부상하여 시속 80킬로미터로 달린단다..

부산을 떠난 작은 배가 나는 듯이 달려 30여분에 대마도 인근을 지나더니  3시간만에 하카다(후쿠오카)에 도착하였다.

 

장마와 태풍기간임에도 택일이 좋았던게지..그야말로 순풍..잔잔한 바다..

 여몽연합군의 쿠슈상륙 2일 째 몰아닥친 태풍으로 반토막 나고 퇴각한 사건이래 그 바람을 일본은 신풍(가미가제)라 한단다.. 

 

(하카다항)

멀리 하카다항이 보인다.구슈의 제일의 도시 하카다(후쿠오카)..

옛지명이 하카다이고 그뒤 개칭된 이름이 후쿠오카라한다..

과거와 관련된 지명엔 하카다..새로이 개설된 것엔 후쿠오카가 붙는단다.

멀리 바라보이는 인상이 창과 방패라면 나만의 착각일까?

 

너무나 가까운 거리의 저 바다를 우리는 건너지 못하고, 건너오는 저들에게 당하기만 했을까?

 

(금린호)

 

하카타항에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온천도시 배뿌로 달린다..

온종일 철도와 배 그리고 버스로 7시간을 달려 배뿌시 조금 못미친 유후인의 금린호에 도착하였다.

온천물과 민물이 교차하며 물안개로 유명하다는 호수는 평범한 연못이고, 유후인은 민예품상가가 밀집된 시골 마을이다..하지만, 배뿌로 가는 길목엔 들릴 수 밖에 없는 지리적 이점을 최대로 살려 관광으로 수익을 창출하는 곳..

이정도 관광자원은 우리도 충분하다..영광, 담양과 비교해도 우리가 훨씬 개발가치기 크다..

 

(부엉이 조각)

유후인의 상가의 다양한 물건 중에 딸래미는 개구리 인형과 장식품에 홀딱 반했다..

난 유난히 부엉이 조각과 장식이 많이 눈에 띄어 가이드에게 물었더니,부엉이 우는 소리가 "푸, 푸"하는데, 그 발음이 복(福)자 발음과 비슷하여 복을 비는 장식으로 쓰인다고 한다.

일본 사람은 고양이도 복의 상징으로 여겨 고양이 장식품도 많았다..

학생들이 시험 전에 돈까스를 많이 먹는데, 승(勝)의 발음이 "가쓰"라 시험에서의 승리를 기원하는 뜻이란다.  

 

7시간의 원정을 마무리하는 숙소가 구슈의 동쪽 끝..배뿌(別府) 시 그 중에서도 동쪽 해변에 있는 세이부(淸風)호텔..

방에 들어서니 망망대해가 벽화처럼 펼쳐진다..경치가 맘에 쏙드는 방..

 

 호텔 저녁도 일본 정식으로 여자종업원이 일일히 서비스해주는 것이 여행중 제일 좋았던 저녁식사였다..

 

(베푸시 청풍호텔 인근의 공산 명월)

식사후 마침 배뿌 시내 여름 축제의 열기를 잠시 구경하고..해변으로 나서자..

 아!!  공산 명월(空山 明月)..

 

"좋구나!"

 

온천물에 몸을 담구고 아사히 맥주 한잔에 다다미에 누워 잠이  들었다.. 

 

 

(호텔방에서 보는 일출)

호텔방에서 눈을 떠서 밖을 보니 마침 동이 트기 시작한다..

어릴적 "동명일기"라는 수필에서 본 것 같은 장엄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자못 감동적이다..

 

하나의 해..하나의 배..하나의 새..

 

그대로 조화로운 선(禪)적 평화..

 

아마.. 저 바다는 태평양으로 주욱 이어졌으리라는 생각이 들고, 대양의 기운을 더 간직한 태양인듯 느껴지는 것은 사람의 간사한 마음 때문이겠지..

 

호텔을 떠나면서 엘레베이터 입구에 붙어있는 "일출을 바라보며 즐기는 노천탕" 사진을 보곤 아뿔사 하고 무릎을 쳤다..

바로 저것을 해봐야하는데..

배뿌에서 본 것은 달과 해..그리고 뜨거운 물 뿐이었는데..비워지는 한편 채워지는 이 느낌은 과연 무엇인가?

(백제불교도래지 부용루 - 설산고행도)

 

영광(靈光)군에 다녀왔다..

1년전부터 갈 일이 있어 벼르다가 결국 모든 것이 맞아떨어지는 어제 다녀왔다.

영광이란 말이 신령스런 빛이란 뜻이다..

그곳엔 백제불교의 도래지, 원불교 교주의 탄생지, 기독교도의 순교지가 있어 영적인 빛이 감돈다는 지명으로 알았는데..

어느 분 말씀은 현대적으로 해석하여 그 지명이 원자력발전소가 들어서는 것을 예견한 것이라고 한다.

모두 멋진 해석인 것 같다.

 

먼저 백제 불교 도래지를 들렀다.

이유는 단순히 법성포에 가서 우선 점심을 먹기위한 것이었다.

하지만, 백제불교도래지는 예상외로 잘 정비되는 중이었다.

법성포(法聖浦)라는 의미가  佛法이 들어온 성스러운 포구라는 뜻이다.

그는 마라난타..백제 침류왕 때 도착하였다.

그는 인도승려로 서북 인도 간다라 지방 - 실크로드 - 남중국 - 영광 법성포에 다다랐다.

대단한 원력의 소유자이고, 백제로서도 대단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원조 불교를 직수입한 셈이니..

흔히 교과서적으로 남방불교의 전래인 것 처럼 알고 잇었는데, 여행경로를 보니 북방 대승불교의 전래로 보아야 할 것이다. 

 

 


(도래지 안 연못의 백련)

(탑원)

 

1만 4000천 평 부지에 조성된 테마 공원엔  기념탑, 부용루, 간다라 유물관, 탑원 등이 자리잡고 잇다..

 

관람후 계획대로 법성포 식당에 갔다.

다랑가지 식당인데.. 영광굴비의 맛과 꽃게의 맛을 같이 즐길 수 있는 곳이었다.

특히 비데가 설치된 화장실이 식당의 정결함을 대변하는 것 같다.


(백수 해안도로 - 칠산정에서)

 

백수면 해안도로가 20여킬로미터 펼쳐진다.

소문대로 경치도 좋고 한적하여 드리이브 코스로 제격이다.

날만 쾌청하였다면 금상첨화였겠는데, 연무가  가득하여 아쉬웠다.

 

칠산정이 있는 이곳 칠산 바다는 조기들이 회유하며 산란을 하던 곳이란다..

예전에 이 바다에서 잡은 조기를 법성포에서 말린 것이 유명한 원조 영광굴비다..  

지금은 조기들이 산란을 하지 않고 조기가 잡히지 않으니 이제 영광굴비는 다른 곳의 조기를 들여와 말려서 파는 것이다..

 


(마파도 촬영지 인근의 풍광)

 

 

백수해안도로를 타고 가다보면 마파도 촬영지라는 표지가 보인다.

이곳 동백마을에서 촬영하였다니 섬인양 눈속임도 간단할 듯하다.

위 사진으로 봐도 외국의 해안 풍광 못지 않다..

 


(불갑사 대웅전)

 

 

마라난타가 세웠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절터..

물론 현재의 대웅전은 조선 중기에 세워진 것이다.

목조건물 중 천년 이상된 건물이 우리에겐 없다..

가장 오랜 것이 수덕사의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모두 고려때 건물이다..

대웅전 꽃살무늬 문이 유명하다는데, 어째 제대로 보질 못하고 왔다.

온 가족이 법당으로 들어가 처음으로 같이 3배를 하였다.

아들이 묻는다. "신도도 아닌데 왜 절을 합니까?"

"남의 집에 가면  윗어른께 인사도 하는데 , 절에 가면 부처님께 인사하고. 교회에 가면 예수님께 인사하면 되는 것이지, 무엇이 문제되겠느냐?"

 

문제는 공경하는 마음이다.

서로 공경하는 마음이 있다면 종교분쟁과 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불갑사 사천왕문 앞  천연기념물 참식나무 군락지 그늘)

 

이 절은 최근 단장이 한창이다..군에서 적극 지원하는 탓인지 일주문도 멀찍이 근사하게 지었다..하지만 입구부분은 아직 심은 나무가 작아 그늘이 없어 땡볕이다.여름 철엔 절까지 걸어가기가 힘들다..

 

최근 우리나라 문화재, 자연개발현황을 보면 관광 마인드나 자연보호 마인드 없이 전시적 목적으로 개발만 한창이다..

예컨대 큰 수목은 없이 관상용 나무에 아스팔트 포장으로 대표되는 현상..관광 교통 표지판도 그렇고..

 

마인드 가진 사람이 최종 소비자의 시각에서 바라보고 , 모르면 최종소비자의 의견을 수렴하고 계획을 세우고 수정하고 다시 정비하는 정성이 필요하다..

 

굴뚝산업이 없어진 마당에 외국처럼 관광산업을 진흥시켜 일자리를 창출한다는 비장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한류가 뜨고 있는 요즘 관광 마인드가 차세대 우리나라의 활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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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방 안의 하회탈 장식)

 

아! 빠진 것이 있었네요.

저녁을 들고 토방에 20여명이 죽 둘러앉았다. 좌장은 60에 가깝고, 5살 어린이를 대동한 젊은 부부 등 남녀노소가 덕담과 술을 나누다 술이 얼큰하자 한 양반이 돌아가면서 노래를 시키니 어색한 기분에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그때 좌장이 한마디 하신다.

낮에 차를 타고 오다가 들은 농담 좀 하겠다.

“복상사의 주지스님 이름 아는 사람?.......절정스님

 그럼, 그 옆에 있는 허탈사의 주지스님은? ......조루스님“

 그러자, 킥킥거리더니 누가 이어 받는다.

“으악새가 새라고 우기는 사람이 있다.

또, 복상사가 절이라고 우기는 사람도 있다“하니

웃음소리가 더 커진다.

이때 누가 또 거든다.

“복상사는 애인 위에서 돌아가시는 거고..

 본부인 위에서 돌아가시는 것은 뭔지 아시나요?

...

순직이요!!”

모두 뒤집어진다.. 이후는 분위기 풀업..

(부용대에서 바라본 하회마을 서편; 멀리 하얀 건물 왼편이 서애라고 불리고, 그 뒷산이 원지산이다.)

 

하여간, 뜻뜻한 토방에 잠을 푹 자고 평소처럼 새벽에 일어났다.

화천의 백사장를 거닐다 서애(西厓) 앞까지 다다랐다. 고목나무 옆 벤취에 앉아 서애를 바라보는데 귓가에 모래시계의 테마음악 “백학”이 흐른다.

문득 시상이 떠오른다.


서애(西厓)를 바라보며


화산(花山)을 등지고

부용대(扶蓉臺) 옆에 끼고

하얀 백사장을 강 따라 걸었네


새날이 뒤따라와 같이 걸어서

물 감도는 꼭지에 다다라

세 그루 고목 곁에 앉아

서애(西厓)를 바라보며

늙은 신하의 한스런 눈물을 생각하네


귓가에는 모래시계의 백학이 흐르고

왜병에 도륙당하고 명군에 시달리던

백성의 아픔 위로하듯 들리니


삼동의 이른 아침

추운 줄도 모르겠네.  

 

서애 류성룡은 21세 때 형과 함께 이황 선생을 찾아가 공부를 배웠으며,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을 하다가 31세 일시 고향에 내려와 하회마을 서쪽에 서당을 짓고 자신에 호를 서애(서쪽 언덕)라고 지었다 한다.

이순신을 전라좌수영 수군절도사로 천거하였으며, 벼슬이 영의정까지 올랐고 임진왜란 때 도체찰사(전군지휘관)가 되어 승전으로 이끌었으나 관직에서 물러난 뒤 하회 마을에 기거하며 옥연정에서 “징비록”을 집필하여 자신의 반성과 후세의 불망(不忘, 잊지 않음)을 바라는 심정을 남기고 있다.

 

아침은 “안동 간고등어”를 반찬으로 들었다.

그리곤 하회마을을 돌았다.

동네를 돌다보니 겸암파(형 류은룡의 후손) 후손인 탈랜트 류시원의 문패도 보인다.

동네의 구조는 삼신할미를 모시는 삼신당을 기준으로 대종가인 겸암 류운룡의 종택인 양진당이 남향으로 감투봉(문필봉)을 바라보고 있고, 그 옆으로 서애 류성룡의 종택인 충효당이 서향으로 서애와 원지산을 바라보며 자리 잡고 있으며, 또한 서애파의 후손 중에 남촌댁과 북촌댁이라는 소종택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겸암의 서재인 빈연정사, 서애의 서재인 원지정사 등이 주요 관람지이다..

(삼신당 신목 : 소원을 비는 쪽지가 가득 걸렸다. 나도 아이들 성취를 기원하는 글을 써서 줄에 묶었다) 

삼신당의 신목 옆에 선 남근..불끈.. 이런 정기와 삼신할미의 정성이 결합하여  잘난 후손들이 계속 이어지나 보다..)


사람마다 보는 눈이 있고 마음 가는데가 다른 것 처럼 나는 주로 옛시나 현판의 글씨 등에 주로 관심이 쏠리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병이다.

(남촌댁 벽에 붙은 계오덕도) 

 

머리에 쓰고잇는 큰 관은 文이요

발에 난 날카로운 며느리발톱은 武요
적을 맞아 용감히 싸우는 것은 勇이요

농사를 위해  새벽에 때를 알리는 것은 信이요

 먹이를 보면 동료들을 불러 함께 먹는 것은 義라!!

 

(북촌댁에 걸린 현판 : 화경당 - 한석봉의 글씨를 모아 판각한것 같다)


(북촌댁에 걸린 현판 : 북촌유거)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의 글씨다.

고종 때의 문관으로 서예에 뛰어났으며 필체는 미남궁체(米南宮體)였다.

<미남궁체란?>

북송(北宋)의 서예가·화가인 미불의 글씨체를 말한다.

미불은 자 원장(元章). 호 남궁(南宮)·해악(海岳).

후베이성[湖北省] 샹양[襄陽] 출신. 관직은 예부원외랑(禮部員外郞)에 이르렀고 궁정의 서화박사(書畵博士)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수묵화뿐만 아니라 문장·서(書)·시(詩)·고미술 일반에 대하여도 조예가 깊었고, 소동파(蘇東坡)·황정견(黃庭堅) 등과 친교가 있었다.

글씨에 있어서는 채양(蔡襄)·소동파·황정견 등과 더불어 송4대가로 불리며, 왕희지(王羲之)의 서풍을 이었다.

(대종가인 양진당)

(충효당내 현판)

미수 허목이 전서로 쓴 "충효당"

허목은 이원익()의 손녀사위이다. 경기도 연천의 향리이고 서울에서 성장하였지만 이황의 학통을 이은 남인의 거두 정구()에게 학문을 배웠다. 남인의 거두로 노론의 송시열과 정적관계였다.

전서()에 독보적 경지를 이루었다.

그러니, 남인의 뿌리격인 류성룡의 후손의 거택에 그의 글씨가 붙어있는 내력을 알겠다.

 

(원지정사 안에 있는 연좌루의 현판)

 

연좌루(燕坐樓)의 연(燕)은 예기에서 '기쁘다, 편안하다'라는 뜻의 안(安), 혹은 희(喜)의 뜻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연좌는 '편안하게 앉아있다. 고요히 앉아 마음을 존하다'라는 뜻으로 풀이되며 예기 등에서 비롯된 것이다.

기문에 따르면 서애가 이곳에 머무를 당시 이 연좌루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제연좌루(題燕坐樓)라는 시도 남아있다. 현재의 기록에는 정조 5년(1781)에 중건한 것으로 되어 있다. 현판의 글씨는 일성(一聲) 권응룡(權應龍)이 썼다.

(원지정사의 현판)

 

서애가 지은 원지정(遠志亭)  시는 이러하다.


門掩蒼苔竹映堂  문에는 푸른 이끼 덮였고 대나무 그림자 마루에 비치는데 

栗花香動午風凉  밤꽃 향기 한낮의 서늘한 바람에 움직이네,

人間至樂無他事  인간의 지극한 즐거움 별 것 없으니

靜坐看書一味長  고요히 앉아 책 읽는 재미 가장 유장하네.


서애가 직접 남긴 원지정사 기문에 나오는 작명의 내력은 이렇다.

"정사를 북림(北林)에 지으니 무릇 오칸 집이다. 동쪽은 당(堂)이라 하고 서쪽은 재(齋)라고 하였으며 재로 말미암아 북으로 나가다가 한번 꺾어 서쪽 높은 곳에 누(樓)를 지어 강물을 굽어볼 수 있게 하였다.

 편액의 이름을 원지(遠志)라 하니 객들이 내게 그 뜻을 물었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원지는 본래 약초이름으로 일명 소초(小草)라고도 한다. 옛날 진나라 사람이 사안(謝安)에게 묻기를 '원지와 소초는 하나의 물건인데 어찌 두 가지 이름인가' 하니, 어떤 이가 답하기를 '산중에 처해 있을 땐(은거하여 벼슬을 하지 않고 학문을 닦을 때) 원지라고 하고 세상에 나오면(벼슬을 할 때) 소초라고 한다' 고 하니 (대답을 못한) 사안은 부끄러운 빛을 나타냈다.

 나는 산중에 있을 때도 진실로 원대한 뜻(遠志)이 없었고 세상에 나와서는 소초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와 서로 닮은꼴이다.……이러한 것을 유추하여 그 뜻을 당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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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용대에서 보는 하회마을)

(하회마을 빈연정사에서 바라본 부용대)


구비 구비 길을 따라 오후에 하회마을 어귀에 도착하여 화천(花川, 안동 하회지역을 흐르는 낙동강 중류 부분) 건너 부용대 절벽 위에 서서 눈발을 맞으며 하회마을을 조망한다.

강변에 늘리리 기와집과 초가가 빼곡하고 주변 산이 연꽃처럼 둘러싸고 강물이 감도는 형상이 이른바 “연화부수형” 즉 연꽃이 물위에 떠있는 것 같은 형상의 명당이라는 호칭과 딱 맞아 떨어지는 것 같고, 마치 김홍도가 그린 한 폭의 실경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류성룡 시비)

부용대 양 옆에 자리 잡은 류성룡, 류운룡 형제의 공부방 겸암정(형)와 옥연정(동생)을 둘러보았는데, 형제의 우애를 기리는 시비(詩碑)를 읽다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우리 형님 정자지어

겸암이라 이름 붙였네


대나무 그림자

섬돌을 쓸어내리고

매화는 뜰 가득 피어있구나


발끝에 향그런 풀냄새 모이고

호젓한 길에는 흰 안개 피어나네


그리움 눈물 되어 소리 없이 내리고

강물도 소리 내어 밤새 흐르네.

 

(류운룡의 서당인 겸암정 앞에 있는 시비, 선생의 시와 글씨)

(시비의 해설이 옆에 판각되어 있었다..좋은 아이디어..

이황선생을 모시고 청량산에 갔다가 이황선생이 운을 떼자 시를 지었다는 내력)

***

(경암정 현판 : 이황선생의 친필)

겸암은 성품이 지나칠 정도로 깨끗하며, 좋고 싫음의 구분이 너무 분명했다. 감정을 드러냄에도 항상 솔직하여 동지 간들이 공경하면서도 멀리할 만큼 모난 데가 있었다. 그러나 겸암은 퇴계선생에게 겸암이란 이름을 받고 이 정자에서 5년여 각고의 수행 끝에 모나고 별난 성품을 다스려 너그럽고 원만한 덕성을 길러, 도량이 너그럽고 혼후(渾厚)한 인품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이러한 인품은 훗날 퇴계학파와 남명학파 모두에게 존중받았다. 택당(澤堂) 이식이 지은 겸암묘갈명에는 '겸손하고 겸손한 군자여(謙謙君子), 내면의 본체는 굳세고 외면의 마음 씀은 온유하셨도다(體剛用柔)'라고 적고 있다.


空齋獨臥雨淋淋  빈 집 홀로 누웠는데 비가 내리니

窓外梅花太損心  창밖 매화에 너무 마음 쓰이네

不是天寒春意薄  날씨 추워 봄이 엷어질까 염려함이 아니라

却愁桃杏苦相侵  도리어 복숭아 살구꽃 괴로이 서로 침해할까 시름함이네.

(겸암 작시)

 

(옥연정 안에 판각 : 광풍제월)

<해설>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다..

송서()》〈주돈이전편()〉에, 북송()의 시인이자 서가()인 황정견()이 주돈이를 존경하여 쓴 글이 있다.

'정견칭 기인품신고 흉회쇄락 여광풍제월( ;정견이 일컫기를 그의 인품이 심히 고명하며 마음결이 시원하고 깨끗함이 마치 맑은 날의 바람과 비갠 날의 달과 같도다.)'

주돈이는 고인(:옛사람)의 풍모()가 있으며 정사()를 베풀음에는 도리를 다 밝힌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북송의 유학자로, 송학()의 개조()로 불리며, 태극()을 우주의 본체라 하고《태극도설()》과《통서()》를 저술하여, 종래의 인생관에 우주관을 통합하고 거기에 일관된 원리를 수립하였으며, 성리학()으로 발달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광풍제월이라는 말은 훌륭한 인품을 나타낼 때 쓰이기도 하지만, 세상이 잘 다스려진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또 '제월광풍()', 줄여서 '광제()'라고도 한다.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소나무를 심고서" 서애의 시비)

63세에 소나무 묘목를 심는 심정을 그리고 잇다..

비록 자신은 보지 못하더라도 천년이 지나 하늘높이 솟아 봉황의 보금자리가 되라는 축원을 담고 잇다..


(부용대 아래 옥연정에 서잇는 소나무.. 

서애가 소나무 심은지 400여년 지났는데..그 후손인듯한 저 소나무도 기상이 범상치 않다..)


(하회 마을 초입의 병산서원의 편액..철종때 사액서원이 되었으니  그때 내린 편액인지 모른다.. 철종은 나뭇꾼 출신이라 직접 쓰진 않았겠지..)

 

***

여행이란 그 고장의 경관을  보고, 그 곳에 살던 사람들의 설화를 듣고, 토속음식을 맛보고, 전래노래를 들어야 제격이라..

저녁엔 추위에 떨며 기다리다 “안동찜닭”을 맛있게 먹고,

밤새워 옛 단가 “사랑가”을 열심히 배우다 목이 쉰 채로 잠이 들었다.


 

사,사랑을 할려면

요,요렇게 한단다

요 내 사랑 변치 말~자

굳게 굳게 다진 사랑

어화 둥둥 내 사랑

둥당가아 둥당가~아

덩기 둥당기 내 사랑

꽃과 나비 너울너울 춤을 추고

우리네, 사,사랑은 아이가이가

두~둥실 좋을씨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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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문화답사 팀에 끼어 안동 하회마을을 1박 2일로 다녀왔다.
며칠전 부터 주말 대설주의보가 예고되어 마음이 심란하였는데, 정말 당일 아침부터 눈발이 심상치 않앗다.
그런데 차가 추풍령을 넘어 경상도로 들어가니 전혀 낯선 나라에 온 것처럼 날씨가 밝아지고 공연한 걱정을 한 꼴이 되었다.


(고려 문하주서 야은 길재선생지묘)

첫날은 구미 오태동에 있는 야은 길재 선생의 묘소 방문으로 시작되었다.
길재선생은 정몽주의 성리학풍을 이어 후세에 전해 김숙자→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으로 이어지고, 그뒤 이언적,이황으로 이어지는 영남학파의 출발점이 되는 분이다.
그는 고려의 충신으로 남기를 원하였고 조선에서 벼슬살기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자식의 출사는 막지 않았으니, 강경파는 아닌 것 같다.

 

유명한 그의 시..


오백년(五百年)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도라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 듸 업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하회마을의 대표적 인물인 류운룡, 류성룡 형제는 퇴계 이황의 제자이다.

그 중 형인 류운룡이 인동현에 현감으로 부임하자, 그 학맥인 뿌리인 길재선생을 기려 “지주중류”비를 세웠다.
그 비문에서 길재를 백이,숙제에 비견하였는데, 그 비문은 동생 류성룡이 형의 뜻을 받들어 썼다 한다.

(비문 앞쪽 "자주중류"라 쓰여 있다)

 

지주중류(砥柱中流)의 의미는 이렇다.
지주(砥柱)는 황허강 중류에 있는 산 이름이다.
《수경주(水經注)》에 따르면, 우(禹) 임금이 치수(治水)를 할 때 산언덕이 물을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산의 좌우를 파냈다. 이렇게 해서 강물은 산의 양쪽으로 갈려 흘러가게 되었는데, 그 산의 모습이 물 속에 기둥처럼 솟아 있었으므로 지주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춘추시대 제(齊)나라 경공(景公)의 수하에 공손접(公孫接)과 전개강(田開疆), 고야자(古冶子)라는 3명의 용사가 있었다. 이들은 경공의 충복이었으나 조정의 기강에 해를 끼칠 정도로 오만무례하게 행동하였다. 그래서 재상인 안영은 이들을 제거할 목적으로 2개의 복숭아를 놓고 3명 가운데 공을 더 많이 세운 사람에게 상으로 준다고 하였다.

이때 고야자는 예전에 경공을 모시고 황허강을 건널 때 괴물 같은 자라가 나타나 수레를 끄는 말을 물고 지주산이 있는 중류로 도망친(以入砥柱之中流) 일을 거론하면서, 자신이 쫓아가 괴물을 죽이고 말을 되찾아 왔노라고 공을 내세웠다.

 이 고사는 《안자춘추》에 실려 있으며, 이도살삼사(二桃殺三士:2개의 복숭아로 3명의 용사를 죽이다)라는 고사성어의 전거(典據)가 된다.

여기서 유래하여 중류지주는 황허강의 격류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뚝 솟아 있는 지주산처럼 난세나 역경 속에서도 지조와 절개를 잃지 않는 의연한 인물 또는 그러한 행동을 비유하는 고사성어로 사용된다.

 우리나라 고려 말기의 충신인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비석을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라고 하는데, 이 고사성어에서 따온 명칭이다.(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비 후면, 류성룡이 지은 비문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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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크민스터 성당)

8. 요크

비오는 가운데 요크에 도착하였다.

빗속에서 요크 민스터 사원과 성벽 망루 그리고 시가지를 돌아보았다.

요크는 성벽보존운동이 일어나 영국에서 최초로 내셔널 트러스트(문화유산지키기운동쯤 될까?)가 결성되었다 한다.

 

(망루)

 

영국에서 공중화장실도 저녁 6시 반이후엔 문을 잠근다. 망루 앞에 호텔이 있어 급한 용무를 해결하길 망정이지.^^

 

성벽 자체는 중국의 서안성 등에 비할 바가 아니다. 

성벽 밖의 해자도 자고 요새라고 하기엔 규모가 적고, 다만 행정 통치의 거성이었던 것 같다.

 

요크는 유서 깊은 도시이다.

이곳의 요크가와 인근의 랭카스터가가 유명한 장미전쟁으로 왕위계승을 다투다가 양 집안이 결혼하였고, 

그 사이에서 출생한 왕이 헨리 8세다.

 

또한 뉴욕이라는 이름의 뿌리가 되는 곳이고, 요크셔 푸딩, 요크셔 티, 요크셔 테리아 등 지역의 이름을 딴 명물이 있는 개성 있는 도시 같다.  

 

저녁식사는 중국식당으로 갔는데, 웬 요크사람들이 가득차고, 또 왁짜지껄하게 식사를 하고,

홀 중앙 무대에 주로 여자들이 잔뜩 올라가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는 풍경이 너무 신기하기까지 하다.

이번에도 식사 주문을 제대로 못해, 4가지 요리를 먹었는데도 나중엔 5가지요리가 한꺼번에 나와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반납하는 지경.. 

 

요크의 숙소는 무서운 분위기가 난다.

아가사 크리스티 소설에 나올 법한 계단을 몇 개나 지나고 문을 서너개를 지나야 들어가는 방..

옆방과 통하는 문이 있어서 옆방에서 누가 튀어 나올 것 같기도 하고..

하여간 잠들기 전엔 제법 떨었는데, 잠은 푹 잘 잤다.

 

 

새벽에 동네 주변을 산보하는데, 풀포드 지역의 주택가에 공동묘지도 같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영국사람들은 버버리보다 멀버리를 선호한다고 하고, 또 영국의 기후에는 바보제품의 자켓이 좋다고 한다.

구수한 요크셔 티를 사겟다고 나선 일행을 한눈 팔다가 놓치고 30여분간 방황한 요크.. 

 

 

(하워드 캐슬 후면, 정면은 역광으로 사진 잘 나오지 않았다)

 

9. 하워드 캐슬

런던으로 향하기 전 귀족의 저택을 방문하기로 하였다.

장원으로 가는 길 들판엔 유채가 가득피어 아름답다.

들판과 호수를  경계로 대장원을 구성하고 있는 귀족의 저택은 멋이 있다.

 

(정면쪽에서 바라본 장원의 호수, 까페와 어린이 놀이기구 등이 설치됨)  

 

(중앙홀 쯤 되는 곳)
(천장의 돔 내부)

무심코 촬영을 하다가 제지를 당햇지만, 유일하게 실내 사진을 확보한곳..

영국에선 철저히 유적지의 실내 촬영을 금지 시키고 있다.

 



 

영국의 들판에는 항상 구름이 가득하다.

무심히 하늘의 구름을 보다가 천마가 솟아나는 환영에 빠진다.

산이 드믄 영국의 벌판에서 하늘은 거대한 캔버스이고 구름은 장대한 스토리라 할까?

영국에서 헤리포터, 반지의제왕, 나니아 연대기 등 환타지 소설이 등장한 것은 들판, 하늘과 구름 때문이 아닐까 자문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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