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에서 누군가 외친다.

신의 소명에 따른 이교도의 살해는 정당하다고.


주인공은 말한다.

여기가 하늘의 왕국이라면 신이 알아서 하실거라고.

 


그런데, 신은 알아서 직접 하지 않으시고,

왜 인간을 통해서만 하시는지.


기독교도와 이슬람교도가 서로 “신의 이름으로”나 “신의 뜻대로”외치면서 싸우는 영화- 그것이 “Kingdom of Heaven"의 실상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현재 진행중인가 묻는다.

 

  

누군가 주인공에게 말한다.

"신이 돌보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었겠느냐"고.

 

하지만, 왜 신은 여전히 누군가를 통해서만  거시기 하시는가?


***

영화를 보고난 후 무엇이 역사적 사실인지 궁금한 분들은

http://dromania.com/tt/index.php?ct1=4 보시라.


역사에 관심이 있다면 미리 보고가도 좋겠지요.  

***

더 시간이 있다면 아래 책을 읽어보면 더욱 좋을 것 같군요.

 

 

프랑스에서 살아 있는 소크라테스로 추앙받는,
알베르 자카르 교수가 던지는 질문…… 사도신경? 神?
이 책의 저자인 알베르 자카르는 세계적인 유전공학자로 프랑스의 대표적인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건 소수가 모였건, 빈민 구제 운동 등의 인도주의적 시위가 벌어지는 현장이면 가장 앞장서서 달려간다.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 괴리가 생기지 않도록 끊임없이 노력하는 저자가, 삶에 대해 그리고 저 너머에 있는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는 사색을 하던 중 『神?』이라는 책은 탄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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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춘당 대문)

 

대전시 대덕구 송촌동에 자리한 동춘당은  송준길이 살던 집이다..송준길은  인조와 효종 현종 3대를 걸친 사부(師傅)의 역할을 하여 ‘삼조의 빈우’라고 불린다..그의 어머니는 광산 김씨로 김은휘(金殷輝)의 따님인데, 그는 황강 김계휘의 아우다. 황강의 아들이 사계 김장생인 점을 고려하면 동춘당은 외손으로 그 학통을 이었다. 동춘당의 사승관계는 사계와 신독재 외에도 청음 김상헌이 있다.그는 퇴계의 제자인 우복 정경세의 사위가 되어 충청과 영남의 예론을 교류 소통시키는 사람이 된다..

****

사계는 영남학파의 예학자인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1563~1633)와 교류가 깊었다. 사계는 영남에서 자신과 더불어 예학을 논할 만한 인물은 오직 우복뿐이라고 여겼다.
이런 관계에서 우복이 사계에게 사윗감을 천거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우복에게 딸이 한 명 있었는데, 그 신랑감을 영남에서 구하지 않고 기호학파의 사계에게 부탁하였던 것이다. 이 부탁을 받은 사계는 “자네가 직접 충청도 연산에 와서 내 제자들 가운데 한 명을 고르면 어떻겠느냐?” 하는 제의를 했다. 사계 문하에는 장래가 촉망되는 청년들이 득실거리고 있던 상황이었다.
우복이 연산에 와서 청년들이 공부하고 있는 학당의 문을 열었다. 이때 방 안에는 세 명의 청년들이 있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초려(草廬) 이유태(李惟泰) 세 청년이 편한 자세로 쉬고 있던 참이었다. 예고도 없이 나이 많은 사람이 불쑥 찾아와 방문을 들여다보니까 세 청년이 취한 태도는 각기 달랐다고 전해진다.
이유태는 바닥에 누워 있다가 벌떡 일어나 문 밖에까지 쫓아 나와 우복에게 큰절을 올렸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일단 나이든 어른이니까 큰절부터 올리고 본 것이다. 송준길은 일어나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방바닥에 그대로 누워 있었다고 한다. 이 3인의 각기 다른 대응을 목격한 우복은 사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유태는 너무 급하다. 송시열은 너무 과하다. 어른이 왔으면 일단 일어나기라도 해야 할 것 아닌가. 송준길은 중용지도가 있다.”
결국 사윗감으로 송준길을 택하였다. 그렇지만 송시열과 이유태도 후일 ‘충청오현’에 포함될 만큼 뛰어난 인물이었음은 물론이다. ‘중용지도’가 있다고 해서 영남학파 정경세의 사위가 된 송준길은 스승과 장인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면서 기호의 예학과 영남의 예학을 소통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송시열과 이유태 같은 노선도 있어야 하지만, 요즘에는 송준길의 노선이 더 필요하지 않은가 싶다. (조용헌 살롱에서)
***위 일화에서 동춘당과 우암의 성격도 드러난다..

 

 

 동춘(同春)이란 “살아 움직이는 봄과 같아라.”는 뜻으로 선생은 이곳에서 독서와 교육을 하면서 인재를 양성하고, 회덕향약(懷德鄕約)을 만들었다. “동춘당(同春堂)” 현판은 우암의 글씨다..그 당시 우암은 괴산 화양동계곡에 살아던듯 "화양동주"이란 명칭을 사용하고잇다.. 동춘당은 우암과 평생을 함께 공부하고 행동한 사이다. 그가 9살 때 우암이 송촌으로 와서 기거하며 함께 글을 읽었고 25세 때도 함께 공부했다. 우암이 송촌으로 와 공부한 것은 우암의 부친 수옹 송갑조가 아들을 데리고 와 동춘당의 부친인 청좌와 송이창에게 배우게 한 때문이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한다면 두 사람은 일찍부터 ‘도학지교(道學之交)’를 맺어 평생을 함께 했음을 알 수 있다.비문을 세울 때에도 우암 글, 동춘당 글씨의 구도인데, 화순에 있는 정암 조광조 유허비와 남해에 있는 이순신장군의 사당인 충렬사 비가 대표적인 예이다. ‘양송’이란 찬사가 공연히 나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동춘당의 필적)

 

그의 학문은 송시열과 경향을 같이 하여 주자서와 심경, 근사록 등에 치력하였으나, 그의 가장 득의처는 예학이었다. 그는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여서 곳곳에 많은 글씨를 남기고 있는데, 돈암서원 묘정비·숭현서원비·박팽년 유허비 등  많은 유품을 남겼다.. 

 




(송용억 가)

 

이곳 송촌동에는 동춘당과 종가, 송병억 가옥 주변에 동춘당 공원을 조성하였으며, 그 인근의 땅은 아파트 단지(위 사진 뒷편)로 개발되었다..그 아파트 이름이 "선비마을"이다..

 

송용억 가는 동춘당 송준길의 둘째 손자 송병하가 분가하면서 살기 시작하여 현재 11대손 까지 살아오고 있는 집이다.

 

(오숙재 현판)

 

송용억가는 안채와 큰사랑채·작은사랑채, 가묘로 구성되어 있다.대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큰사랑채인 소대헌이 있고 오른쪽에 작은사랑채인 오숙재가 있다. 큰사랑채에는 넓은 대청과 온돌방을 배치하였고 방 사이에는 미닫이문을 달았다. 안채 앞에 위치한 작은사랑채는 오른쪽 끝에 툇마루를 한단 높게 두어 운치를 살렸다.안채는 작은사랑채의 왼쪽에 나있는 중문을 지나서 출입할 수 있다

 

(호연재 김씨 시비)

 

송용억 가는 17세기에서 18세기로 넘어가는 여류문학사의 공백을 메꾸어 줄만한 여류 문인인 호연재 김씨가 살았던 곳이기도 하다. 송병하의 며느리(즉 동춘당의 증손부)인 호연재 김씨는 여성 특유의 감성을 담은 많은 시를 남겼다. 호연재 김씨는  안동 김씨로 군수를 지낸 김성달의 딸이다. 19세에 동춘의 증손인 소대헌 송요화와 결혼하여 28세에 아들 송익흠(보은현감,  : 오숙재)를 낳고, 딸을 낳았으며, 42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니, 호연재는 그녀가 살던 안채의 당호, 소대헌은 남편이 머물던 큰사랑채의 당호, 오숙재는 아들이 머물던 작은 사랑채의 당호이다..문인 가족다운 명칭이다..이들 부부의 인생이야기는 "소대헌 . 호연재 부부의 사대부 한평생 "(김성철 저)의 제목으로 책으로도 나왔다..그녀의 또다른 시 한편..

 

醉後乾坤潤  취하고 나니 천지가 넓고
開心萬事平  마음을 여니 만사가 그만일세
情然臥席上  고요히 자리에 누웠노라니
唯樂暫忘情   즐겁기만 해 잠시 정을 잊었네

 

(서포 김만중의 소설비)

 

동춘당이 위치한 송촌동은 계족산을 등지고 남쪽 산록에 위치하고 갑천이 우측으로 흐르는 평안한 자리에 위치하고 잇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 갑천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들판이 아주 넓고 사방 산이 맑고 화려하다.
세가닥 큰 냇물이 들 복판에서 합류하여 관개할 수가 있다.
땅은 모두 1묘에 소출이 1종이나 되며, 목화를 가꾸기에도 알맞다.
또한 강경이 멀지 않고, 앞에 큰 시장이 있어 해협의 이로운 점이 잇으니 영원히 대를 이어 살만한 곳이다."

 

이런 좋은 자리에 회덕 송씨만 거주할리가 없다..회덕에서 갑천을 거슬러 건너 대전 엑스포 개최지 뒷편(연구단지 중앙부)  우성이산 서쪽 기슭(유성구 도룡동)에 여흥 민씨의 세거지가 있고..하긴..유성(儒城)이란 말 자체가 "선비의 고장"이란 의미이고 더구나 연구단지 등이 있으니 명실싱부한 선비 마을이다..

 

그 우성이산 북동 쪽 기슭의 갑천변(회덕 쪽에서 갑천 건너편) 즉 유성구 전민동에는 사계 김장생의 아들 김반의 묘역이 있고, 그런 연고로 그 후손들이 이곳에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신독재 김집(金集)의 아우다.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하고 10여 년 간 은거하며 학문에만 매달렸다. 인조반정후, 이괄의 난이 일어나서 인조가 공주로 피난오자 호종하엿고, 왕이 공주에 있을 때 정시문과에 급제하였다.

 

  이곳 묘소에는 아들인 김익겸의 묘가, 아버지 김반의 묘보다 위에 조성되어 소위 역장(逆葬)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 예학의 잡안에서 어찌 그런가 의아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아들 김익겸이병자호란 때  23세의 어린 나이로 강화에서 장렬하게 순직하자, 아들의 공을 기리기 위하여, 김반 자신이 아들의 묘를 위로 쓰도록 배려한 연유이다. 서포 김만중은 김익겸의 유복자로 태어낫다..이런 연고로 전민동에 서포의 소설비가 서잇다..시비는 흔히 보았어도 소설비는 처음 보았다..

 


 

(김익겸의 정려문 일부)

 

(심산 김태원의 시비)

 

이런 터전에 후학들도 보고 배우는 것이 남다른 모양이다..송촌동에는 심산 김태원의 시비가 서잇다..

그는 1918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황보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였고, 1922년에 평안북도 삭주에 잠입하여 일본 경찰주재소를 습격해 일본 경찰 4명을 사살하였다. 그해 8월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신임 아래 양승우 등과 ‘벽창의용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과 일본 경찰 및 밀정의 사살 등 많은 일을 하였다. 1926년 국내에 잠입하여 군자금을 모금하다가 일본경찰에 잡혀 사형언도를 받았으나, 복역 중 평양감옥에서 탈옥하여 상해임시정부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시의 내용은 이렇다..

 

피는 죽음을 낳고죽음은 의기를 낳고의기는 충정을 낳는다..충정은 절의를 낳고 절의는 대나무로 살아나머금은 피 천년세월 일관되니대나무 빛 언제나 봄빛처럼 푸르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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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간정사)

 

논산, 부여를 다녀온 다음날 대전 가양동의 우암사적공원에 갔다..

논산의 돈암서원에서 이어진 인연을 마무리할 참이다..

사계의 제자 우암과 동춘당..조선 후기 성리학의 핵심 코드를 형성한 인물들..


우암 송시열은 소제(동구 소제동)에 살면서 흥농촌(興農村)에 서재를 세워 능인암(能仁庵)이라 하였고, 그 아래에 남간정사를 지었다.
우암이 노년(1683)에 세운 강학당이다.


샘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의 양쪽 축대 위에 방을 들이고 그 사이로 대청마루를 연결하여 공중에 뜬 누각처럼 만들었다.
집 앞에는 고봉산 계곡의 물길을 막아 연못을 만들었는데 가운데에 둥근 섬을 만들고 왕버들을 심어 운치를 더했다.

역시 직접 심었다는 배롱나무의 붉은 꽃이 여기서도 빛난다..


 

남간정사의 현판은 곡운  김수증(金壽增)의 글씨다..

그는 3학사 김상헌의 손자로 김수항의 형이다..그 형제는 우암과 같은 노론으로 정치적 부침을 같이한 사람이다.  

그는 강원도 화천에 은거하면서 조세걸로 하여금 곡운구곡도를 그리게 한 것을 보면 풍류를 좋아하는 인물 같다..

 

김수항의 아들 김창집은 숙종시 영의정을 지냈고, 그의 5대손 김조순은 순조의 장인이 되면서 유명한 안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열었으니 과연 노론의 핵심들이다.. 

 

조세걸은 달마도로 유명한 김명국으로부터 그림을 배운사람이다..



(유물전시관-효종의 밀찰)


(효종이 하사한 초구)

 

효종이 즉위한후 재야세력인 사계 김장생의 문인들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을 기용하여 정국의 돌파를 시도한다..

중종이 조광조를 기용하듯..

효종은 대군시절 우암과 사제관계로 맺어져 잇어 그에게 큰 기대를 건다..

그리하여 그에게 자신의 북벌의사를 밝히는 밀찰을 보내고, 또 북벌시 만주벌판의 추운 날씨에 입으라고 담비 가죽옷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효종과 우암의 생각이 일치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우암이 효종만큼 북벌에 적극적이었느냐에 관하여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암이 명나라의 은혜에 대한 의리를 강조한 것은 분명하지만, 효종처럼 실질적으로 북벌을 단행하려는데에 대하여는 소극적이었다는 견해가 최근에 강력히 대두된다..

이러한 견해의 책들이 이덕일 저 "송시열, 그들만의 나라", 박성순 저 "선비의 배반"등이다.. 

  

 


(우암의 글씨)

 

 

그는 주자가 남송의 효종에게 말한 것 처럼 왕과 사대부들의 성리학에 터잡은 심성수양을 통한 내치를 완성하여야 북벌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효종의 실용적 경세 개혁을 통한 군비의 확충과 군사조련 등 우선정책을  천박하게 생각 하였다는 것이다..

효종 사후에 벌어진 예송논쟁이나 남인과의 투쟁에서 보여준 그의 역정은  그가 유비 사후 북벌의 대업을 짊어진 제갈량과는 다르다는 것이 분명하다..

(우암사적공원 내 정자)

 

우암은 대전의 보문산을 지날 때는 산을 바라보지 않으려고 부채로 가리고 지나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보문산은 그 모양이 다양하여 보는 시각에 따라 각기 산의 형태를 달리 해석하여 왔던 것이다. 즉 보문산은 젊은 여인이 머리를 풀고 통곡을 하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여인의 나체로 누워있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형태를 지니고 있어 이 산을 별로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설화에서도 우암의 성격이 드러나는듯하다.

즉 그는 학문적인 정통성,엄격성을 유지하는데는 철저하였으나, 정치적으로는 보수적이고 강경, 과격하게 발현되어 적이 많았고, 결국 당쟁의 표적이 되어 83세의 나이에 사약을 받고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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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진고속도로 단성 ic에서 나와 산청군 시천면으로 향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에 갔다..

산천재 앞에서 서니 이름 그대로 산과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바로 곁에 덕천강이 흐르고 강건너엔 구곡산이 서잇다..그 북쪽 어께너머로 지리산 천왕봉이 고개를 내밀고 있다..

 

頭流山(두류산) 兩端水(양단수)를 예 듣고 이제 보니

桃花(도화) 뜬 맑은 물에 山影(산경)조차 잠겼어라 

아희야 武陵(무릉)이 어디뇨 나는 옌가 하노라

 

여기를 무릉도원으로 여겼던 남명 조식..

 

그는 평생 처사로서 벼슬을 마다하고 성리학을 닦으며 실천을 중시하는 교육을 강조하여 후일 임진왜란 때  그 제자들 중에서 정인홍, 곽재우와 같은 의병장을 제일 많이 배출하였다..

 

항상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과 경의검(敬義劍)이라는 패검을 차고 다녔다.  

성성자라는 방울이 울릴 때 마다 '경'의 마음 자세를 되새긴다는 것이다.  

경의검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내명자경 외단자의'(內明者敬 外斷者義, 안으로 마음을 밝히는 것은 경이요 밖으로 행동을 결단하는 것은 의다). 

 이 검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는 것은 의로운 행동이 필요할 때는 이를 단칼에 베듯 결행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명종 때 그에게 단성현감 벼슬을 내려자 사직 상소을 올려 조정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명종을 좌지우지 하는 문정왕후를 빗대어  "깊은 궁중의 한 과부에 지나지 않는다"고 표현하여 파문을 일으켰다.

 

그런 그도 명종이 승하하자 애도하는 시조를 지을 정도로 인간미가 잇었다..

그시조는 교과서에 실려잇다..

 

엄동에 베옷 입고 암혈에 눈비 맞아

구름 낀 별뉘도 쬔 적이 없건마는

서산에 해진다하니 눈물겨워 하노라.

 

(산천재에서 보는 천왕봉)

 

 

그의 배포를 보자..

 

천섬들어가는 큰종을 보소서

크게 치지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어떻게 해야 두류산 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까?

 

 

산천재의 기둥에 붙은 주련은

이곳에 들어올 때의 심경을 쓴 것이다..

 

 

봄 산 어느 곳엔들 향기로운 풀 없으리오마는

다만 천왕봉 하늘나라와 가까와 사랑한다네.

맨손으로 들어와 무얼 먹고 살겠나?

은하수 같은 맑은 물  십 리니  먹고도 남겠네. 


 -덕산에 살 곳을 잡으며-


 

德山卜居


春山底處无芳草
只愛天王近帝居
白手歸來何物食
銀河十里喫猶餘

산천재 길건너 남명 기념관에 들러 "남명의 한시선"을 샀다..
덕천가 지리산 언저리에서 천왕봉을 바라보며 살앗던 남명선생..

갑천가에서 계룡산 바라보며 사는 이 사람이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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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도 금산에서 가까운 벽련포구로 갓다..

노도가 보인다..

서포 김만중이 귀양을 살던 섬..

그곳에서 구운몽,사씨남정기 등 소설을 쓰다가 결국은 생을 마감한 섬..

 

 

1인당 15,000원원에 낚시배를 빌려타고 가는데..

늙은 선장이 말하기를, 선착장에서 걸어가면 시간이 오래 걸리리 갯바위에 상륙하여 기어오르면 바로 다다를 수 있다고 권유한다..

혹시나 갯바위에서 오도가도 못할까 걱정이 슬며시 드는데..잠벗이 선듯 수락하잔다..

하여 저 바위에 뱃머리를 대고 상륙하엿다..

 

 

선장은 즉시 배를 빼고 선착장에서 기다린다며 잠시 우리를 관망하더니

죽지는 않겠다 싶었는지 훌쩍 가버린다..

 

퍼즐을 풀듯이 제법 가파른 벼랑을 이리저리 헤메다가 어째든 기어올랐다..

 


 저 위로 서포의 귀양지 초옥이 눈에 들어온다.

섬중의 섬..

예전 한양의 높은 분은 어찌 이런곳을 알고 귀양처로 잡앗을까..

 

섬중의 섬에서 다시 위리안치까지 햇다..

즉 가시나무로 울타리를 쳐서 출입을 제한하엿다니 참으로 지독하다..

어차피 작은 섬에 갈 곳도 없는데..

 


귀양처 초옥의 툇마루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니

바다가 아니라 호수처럼 보인다..

이 외로운 섬에 귀양와서 할 것은

분노하다 미치든지..자기의 세계에 몰입해야 살 것 같다..

 

추사는 9년간의 제주도 귀양살이에서 추사체를 완성하였고

대흥사 대웅전 글씨를 쓴 원교 이광사는 23년간의 절해고도의 귀양살이에서 동국진체를 완성하엿고,

정약용은 강진에서 18년간 귀양살이하면서 수많은 저서를 저술하엿고

정약전은 흑산도의 귀양지에서 자산어보를 집필하고 결국은 그곳에서 죽었다..

 

그러니 서포도 이 귀양지에서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 소설을 쓰지 않을 수 없었으리.. 

 

 

초옥에서 나와 선착장으로 향하다가 돌아다 본다..

그는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익겸은 병자호란때 강화도에서 순국하였다..

그의 아버지와 할어버지 김반의 묘소는 내가 사는 동네에 잇다..

그 곳에 가면 김익겸의 정려비가 서잇고 그아래 서포 김만중의 소설비가 서잇다..

 

내가 그의 부자를 간접적으로 연결하는 안테나가 된듯하다..

 

청상과부로 어린 2아들을 키우신 서포의 어머니..

자식 덕을 볼만한 나이에 아들은 당쟁으로 귀양살이하게되자 얼마나 속상했을까?

그 어머니를 위로하기위하여 썼다는 구운몽..

그야말로 인생은 일장춘몽이요, 남가일몽이라..

그 소설을 쓰고 그는 이곳에서 초탈한 심정으로 귀천하였을까?

 

 


선착장으로 가는 길..

아주 아담하고 소담한 오솔길이다..

이런 길을 좋아한다..

서포의 오솔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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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4시30분부터 보리암으로 향했다..

이른 아침엔 절바로 밑 주차장까지 갈수 잇다..

어둠에 올라가 관음보살 알현하고 돌아서니 동녁하늘이 붉게 불들엇다..

그런데 관음상 앞은 시야가 넓지 않아 얼른 자리를 옮겨 보광전 앞 요사채에서 바라본다..

여름에 해가 바다에서 뜨지  않고 산위에서 뜬다..

 


붉은 노을을 즐기며 햇님 등장을 기다리는데..

나와 길이 어긋난 잠벗이 나를 찾아헤메다 정상에 간 모양이다..

정상으로 오라는 전화..

허덕이며 올랏더니 해는 이미 솟아 올랏다..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고..

 


다시 보리암으로 내려와 찬찬히 절을 구경한다..

금산 보리암은  양양의 낙산사, 강화 보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힌다..

 

어디서나 일출은 장관이지만 이곳에서 보는 일출도 한목하는 풍광이다..

 

(선은전에서 본 풍광)

 

보광전 밑으로  이성계의 기도터 선은전 가는 표지를 따라갔다..

선은전에서 바라본 풍광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름이 없으리라..

이곳에서 기도의 덕을 보앗다고 하여 이곳의 지명을 금산으로 바꾸엇다는 이야기는 이미 알려진터..

 

그 기도로 왕이 된후 불교국가가 아닌 유교국가로 간 것은 무슨 아이러니인지..

 


보리암에서 내려오는 길은 걷기에도 좋다..

문득 돌아보니 정상..망대가 보인다..

 

보리암에서 백일동안 바다를 바라보며 지내면 어떨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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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을 지나 남해대교를 건너다.

노량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

정유재란의 마지막을 장식한 노량 해전이 벌어진 곳..

 

남해섬 언덕에 충렬사가 있다..

충렬사 현판 글씨를 쓴 사람이 다소 생소한 일제 시대에 돌아가신 추당 박호병(秋堂 朴好秉.1878~1942)이다.


 박호병은 초명을 鎬秉(호병) 이라 하고 호는 彛堂(이당)이라고도 하였으며 후명은 好秉(호병).호는 秋堂(추당)이라고 하였다.

추당은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사군자로 입선을 연속 4회나 하면서 공모전에서 실력을 과시하면서 서화가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하였다. 서울과 전주를 오가며 작품 활동을 하면서 중앙 화단에서 여러 서화가들과 교류도 많이 하였고. 주로 전북지역에서는 후진을 지도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작품으로는 특히 대나무를 잘 그렸으며 山水畵와 行書에도 능하였다.

 

그런데..어찌 일제시대때 왜경의 시퍼런 사찰 분위기 속에서 충렬사 현판이 써졌을까 궁금했는데..

아마 유력한 설에 의하면, 충렬사 사당이 고종때 서원 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일제시대 때 개인이 사비로 새로 건립한 사당이 오늘에 이르고, 그때 박호병이라는 분이 현판을 쓴 것 같다..

 

관람료 1000원을 내고 들어간 거북선..

그 옛날 배안에서 바라보던 그 바다를 느낄수 있을까..

거북선 안에서 노량바다를 바라본다..

 


 남해도 서쪽 해안을 따라 내려가니 충무공이 순국한 관음포 바다가 나온다..

그 해변에 이락사라는 사당이 있고..기념관도 있다..

불멸의 바닷가를  석양을 따라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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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례에서 섬진강길을 달려 하동으로 향한다..

원래 계획이엇다면 화개장터에서 은어튀김과 제첩국으로 식사를 햇어야 하는데..

지리산에서 점심을 때워 아쉽게 지나쳤다..


 

악앙면 평사리 들판에 들어섯다..

소설 토지가 아니라도 탐이 나는 들판이다..

얼마나 좋으면 중국의 악양 지명을 벤치마킹하였을까만..

여기는 악양루는 없는갑다..


 

소설 토지의 유명세를 타고  촬영세트장과 픽션속의 최참판댁을  구현하였다..

맨위 최참판댁으로 오르는 길은 상품가게와 세트장을 거쳐 오르게 되어 잇는데 관람객으로 북새통이다..

높은 언덕에서 평사리의 천석 들판을 바라보는 참판댁 풍광은 과연 대지주 집다운 품새를 갖춘 것 같다..


 

참판댁 뒤 대나무 오솔길이 마음에 들었다..

이길이 좀 길었다면... 


 

참판댁 사랑채에 참판모델이 방안에 앉아 한문책을 열심히 보고 잇다..

기둥에 주련이 붙었는데...

 


                  一국歸心天盡頭(일국귀심천진두)  한가닥 돌아가고 싶은 마음 하늘에 닿았는데

                  岳陽無處不淸幽(악양무처불청유)  악양은 곳곳이 맑고 깊구나.

                  杜谷林塘春日遠(두곡임당춘일원)  두견새 우는 숲 언덕은 봄 기운에 멀고

                  輞川煙雨暮山浮(망천연우모산부)  섬진강 안개 속에 저문 산이 떴구나

                  雲泉歷歷編供興(운천역역편공흥)  구름은 뚜렷이 흥취를 돋우나

                  軒冕悠悠惹起愁(헌면유유야기수)  초헌의 사부(士夫)는 넌지시 수심이 이네.

                  經筵每被?三接(경연매피최삼접)  글 자리에서 자꾸만 재촉 받으니

                  睾負亭前月滿舟(고부정전월만주)  정자에 엎힌 달이 배에 가득하더라.

 

 

조선 성종때의 유호인(兪好仁)이 쓴  악양동천(岳陽洞天)이라는 시다..

이 시는 이지역의 풍광을 찬양하는 내용이니

없던 참판댁을 급조하면서도 주련의 시는 제대로 골랏다..


 

사랑채 대문밖으로  섬진강 줄기가 보인다..

아름다운 뒤태를 보이며 저멀리 사라지는 여인과 같이..


 

참판댁을 나오는 길가에 솟대형 가로등이 운치가 잇다..

멋진 아이디어..

 

디자인이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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